사랑, 특이점이 되는 순간
:프롤로그
로맨스를 즐겨 찾지 않게 된 지 오백 년도 더 된 것 같아요. 언제 읽은 것이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일단 닭살이 돋고요. 정신적으로 피로하고요. 재미가 없어졌어요. 그러면서 이 부르팅팅한 낭만타령은 뭐냐! 왜 찌그러진 양은 냄비는 땅땅 치고 앉았어?라고 물으신다면, 거진 반백 년을 살았어도 우리는 사랑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아름다움과 사랑 빼면 인간은 존재 이유가 희박해집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에서 파생된 것이 낭만임을 치기 어린 시절을 지나오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결정적 계기는 <도시의 마지막 여름>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무드보드에 담을까 고민하다가 저만의 분류체계가 빽빽거려 부득이 연재를 하나 더 열게 되었습니다. 쓸데없어도 언젠가 입이 떡 벌어지는 로맨스를 위해 공간 하나쯤 더 만든다 하여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실 로맨스를 쓸 때는 대놓고 유치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요. 되려는지 잘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안되면 다시 <무드보드>로 이동시켜도 되겠죠?
추석 동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정신이 팔려서 손이 책에서 떨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하는 것이던가요.
드러내 놓고 낭만을 만끽하지 못하는 저는 그런 이들을 보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합니다. 체면 때문에 넋을 놓지 못할 뿐 하루 종일이라도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요.
낭만을 바라보는 일은 그저 미소 짓게 되는 일. 아이가 낭만을 말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낭만을 얻고 내 곁을 떠나 바라볼 세상은 낭만뿐이지 않을 텐데, 그것을 온전히 겪어낼 그 가느다란 발목과 선한 눈매, 해맑은 웃음이 가슴 시려 바라볼 용기는 차마 나질 않습니다.
제겐 애증 하는 두 명의 소설 속 인물이 있습니다. '호밀밭의 그 녀석'과 '개츠비 그놈'입니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의 레오는 앞의 두 분과는 다르게 묘하게 동정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긴 하나 상황을 자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베베 꼬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술을 쫌. 뭘 좀 먹어라. 허세 쫌. 아니 거기서 그 말을 왜? 이러면서 봤어요. 애들한테도 안 하는 잔소리를 소설 속 인물에게 하면서, 아주 그냥 푹 빠졌네 빠졌어. 한탄을 늘어놓았죠. 애증 하는 분이 한 사람 더 늘었습니다.
L'ULTIMA EXTATE IN CITTA
by Gianfranco Calligarich
문학의 낭만적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무너지는 테두리를 손으로 부여잡는 일이다. 잔잔한 파도에도, 선선한 바람에도 그 테두리는 형태를 잃을 수 있다. 모래로 쌓은 성곽처럼, 작은 둔덕처럼, 결국 서서히 쓸려나가 버린다.
시내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겪은 이별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를 떠올렸고, 산텔리아 사장님과 이별할 때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봤다. 늘 그렇듯 우리는 만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다.
배를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배고픔을 위해 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의 출발선은 언제나 다르고,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바라본다. 그가 도착한 곳은 늘 비어 있고, 남은 음식만이 그의 차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굶으려 도착한 자가, 비어 있음에 무슨 원망을 품겠는가.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통행료는 사랑,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소설은 레오와 아리아나 그리고 고물 알파 로메오와 책이 가득 든 두 개의 여행 가방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계속 미친 듯 엇갈렸던 이유는 건강한 삶과 상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얼핏 읽으면 로맨스에 대한 냉정한 분석처럼 읽힐 수 있다. 소설을 보며 이런 것을 떠올리는 내가 싫지만 집착과 무기력을 오가는, 광기와 허무를 붙잡는 그들의 시선은 낭만의 바이블인 '제시와 셀린느'처럼, 낭만의 치트키인 '올리버와 엘리오'처럼 결코 서로를 향하지 못한다.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위안을 얻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늘 착각한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날 내리던 비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잊고 있던 깜짝 선물처럼 도시에 갑자기 내린 봄비는 그 어떤 향수보다 더 향긋한 냄새로 도시를 채우고 있었고, 내 인생에서 내 이야기가 시작된 날만큼 향기 가득한 날은 다시없을 것이다.
레오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한다. 아리아나는 그에게 도시에 급히 내린 봄비이자 그 어떤 향수보다 감미로운 향기였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오의 무심한 척은 힘이 없었다. 작가는 툭 치면 무너질 훅 불면 사라질 낭만을 그리기 위해 고전적인 요소들을 변주한다. 고전테마가 흐르는 동안 독자는 그 편안한 이끌림에 마음을 놓는다. 의외성은 온통 레오의 허세 가득한 대사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
"그런데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죠?"
"레오 가짜라, 여전히 그 이름이죠."
"그런데 그쪽은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면 혼자?"
"아니면 혼자."
"말을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 봐요?"
아리아나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콘래드요.로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음악에 집중한 척하는 아리아나의 무관심한 태도는 힘을 잃는다.
"독서해요."
"뭘 읽는데요?"
"뭐든지 읽죠."
"뭐든지 읽는다고요? 전차 탑승권도 읽고 생수 라벨도 읽고 로마 시장의 제설 규정 같은 것도 읽는다고요?"
"물론이죠. 그런데 러브스토리를 좋아하기는 해요."
"재밌는 사람이네요. 비올라네 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굉장히 비참해 보였는데."
"배가 고팠을 뿐이에요."
"배가 고프다니요?"
"네, 배고프다는 말 처음 들어요?"
서툰 연인은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위태롭게 빚은 작은 공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렇듯이 한 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의 허약해진 상태를 눈치조차 챌 수 없다. 아리아나는 돌처럼 굳은 레오에게 입을 맞춘다. 그 순간 마법이라도 풀린 듯 어지간하면 끝나지 않는 솔리테르 게임은 끝이 나고 아리아나는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지만 레오는 그녀의 손을 쥘 수 없었다.
어릴 때 읽었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 '정신의 균열'이 보였다. 사랑이라는 열띤 감정의 껍질을 걷어내고 그 아래에서 작동하는 병든 욕망의 구조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시도되는 비이성적 집착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기이한 습성을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슬몃 건드리고 있었다. 사랑을 한다는 일은 종종 균형을 잃는 일이기에 건강한 삶과 상식을 잃은 상태에서는 더더욱 온전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의 사랑은 어떤 구원도 결말도 있을 수 없다. 둘의 끊임없는 엇갈림은 비정상적인 관계의 정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사랑의 변주를 클래식의 변주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 어떤 멜로디가 지닌 핵심의 해체를 진행하면서,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는. 작은 리듬의 변화, 조성의 이동, 악기의 교체. 사소한 변형 속에서 원래의 주제는 형태를 잃고,-그래야만 하지.- 그러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존재감 가득하게-.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잊으려 애쓰는 사람의 마음과도 닮아 있다. 사람은 사랑을 반복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한 번 주어진 멜로디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 보는 일. 미세한 차이, 흔들림 그런 것들이 새로움을 만든다.
변주는 그 작품에 나를 편입시키기 위한 지독한 사랑으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변주를 소비하는 까닭은 안주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 닮은 듯 다른 것에서 너와 내가 닮았음을 안도하는 때문이다.
사랑의 낭만적 특이점은 그런 순간에 온다.
작가들이 놓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천착은 사랑의 특이점을 만든다. 사랑에 빠질 때, 감정의 중력은 기존의 논리와 윤리, 심지어 자아의 경계마저 휘게 만든다. 사랑 이전에는 견고했던 나라는 개념이 그 무게에 빨려 들어가고, 시간 감각이 뒤틀린다.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그 사람, 그와 있으면 시간이 사라지는 느낌. 이것은 특이점의 증후이다. 감정의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블랙홀의 생성과도 같다. 사랑의 특이점은 관계가 무너지거나 완성되는 지점이 아니라, 자기 인식이 한계에 부딪는 순간이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속도와 방향을 경험하게 된다.
레오와 아리아나는 그 특이점을 숨죽인 채 맴돈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코 닿지 못하는, 닿는 순간 자기가 사라질 것을 아는 자의 발걸음으로.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정점이 아니라 인식과 존재가 붕괴되는 한계점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두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로 합쳐지는 대신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라지아노의 죽음과 레오의 자살은 바로 그 '없어짐'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레오의 곁에 재채기처럼 등장한다. 레오는 이 모든 상황과 사람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마도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한 손에는 맥주를, 다른 한 손에는 스카치 잔을 들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마시지 좀 마. 알코올이 천천히 사람 죽인다는 거 몰라?"
"상관없어.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고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도 사라지고 없었다.
"애인이 누구죠?" 그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때 누군가 웃었고, 그는 짜증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우습다는 거지? 물어보지도 못합니까?"
"먹다 남은 거겠지. 이 근처에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건 먹다 남은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절대 앉으면 안 돼.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사람이 아무도 안 올 수 있어."
그라지아노는 이미 사랑의 특이점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아리아나를 향한 욕망과 집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소모했고, '자신의 경계'를 유지할 힘을 잃어버린다. 그의 죽음은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에 가깝다. 그는 '떨어짐' 앞에서 그 어떤 방어도 취하지 않던 사람이다. 사랑 앞에 방어는 불가능하다. 사랑을 통해 완전히 자신을 잃은 인간의 필연적인 결말.
레오는 그 죽음을 목격하면서 특이점의 진짜 형태를 이해하게 된다. 아리아나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소멸의 충동'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특이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책으로 가득한 두 개의 여행가방을 관성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다.
"있잖아. 내가 묵는 호텔로 가서 함께 손목을 긋자."
이 둘의 죽음이 작가가 고민한 최고이자 최악의 선택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이점의 내적 논리의 완성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
그렇다면 '남은 아리아나'는 어떤가? 이 책의 핵심 주제인 '남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잔재'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리아나의 '살아남음'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남겨짐' 그 자체의 형상화이다. 레오가 사랑의 특이점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면 아리아나는 그 특이점의 바깥, 경계 위에 남은 존재이다. 그녀는 완전히 붕괴하지도 완전히 합일하지도 않은 채 '결여된 상태로 존재하는 자'다. 그 결여가 '남겨진 것들'의 본질이다. 그녀는 특이점의 중심에서 파생된 잔여물, 의미의 잔류이다. 이 잔류의 색은 레오의 눈동자를 닮은 잿빛을 품고 있었다.
"우린 그런 거 감당 못해." 내가 말했다. 그녀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 지금,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정말 내 여자인 것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참 운도 없다. 나의 불운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여자일 때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남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잔재일 때만 내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덧붙이는 말.
기일이 조금 지난 블루마운틴. 향이 다 날아가고 남은 것은 그 지나치게 모두를 아우르려는 느낌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호에 맞춘 부드러움이라 하던데, 내겐 모든 것이 끝난 후의 ‘남은 것들’이 뒤늦은 맛이 느껴질 뿐이었다. 보통 소설은 과거를 소환하지만 내가 음미한 것은 그 유명한
달콤 쌉싸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