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품위
신념이 있다면 매번 다시 짓는 신념이고, 문체가 있다면 매번 탈바꿈하고 싶다.
내 안에만 갇히지 않는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녀가 멕시코시티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북쪽 하늘에 층층이 쌓인 먹구름 아래 품위 있게 상체를 펴고서 말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비스듬히 기운 모자의 끈이 턱 아래에 단단히 묶여 있고 검은 머릿결이 어깨 위로 이리저리 흩날리는데 뒤에서 번개가 검은 구름을 뚫고 조용히 내리쳤다.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후드득 떨어지는데도 태연히 말을 몰며 갈대가 무성한 희끄무레한 호수와 목초지를 지나는 그녀를 빗줄기가 야생의 여름 풍경 속에 완전히 감싸 안았다.
진짜 말, 진짜 사람, 진짜 땅, 진짜 하늘인데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꿈이었다. p.185
All the Pretty Horses
Cormac McCarthy
매카시는 사랑을 낭만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은 스스로 낭만으로 진화하였다. 이 이야기는 매카시 3부작의 시작일 뿐이다. 그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신학적이다. 신이 부재한 세계에 인간이 신의 자리를 잠시 차지한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은 금방 사라진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긴 어둠뿐이다. 그의 사랑은 욕망보다는 신념에 가깝다. 존 그레디 콜은 알레한드라를 사랑하고 동시에 순수함 자체를 사랑한다. 마치 말의 순수함을 사랑하듯이.
매카시의 <모두 다 예쁜 말들>은 서부극의 외피를 두른 철학적 명상문이다. 메마른 대지를 배경으로 카우보이 존 그레디 콜과 롤린스, 멕시코 소녀 알레한드라 사이의 사랑과 상실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의 문장은 고전적이면서 거의 시어에 가깝다. 그는 구두점을 생략하고, 접속사로 문장을 느리게 흘려보낸다. 쉼표를 거의 쓰지 않고, 문장부호를 절제한 채로 언어를 거의 물결처럼 다룬다. 모래바람처럼 거칠면서 신화처럼 고요하다.
문체는 설명이 아니라 현존을 만든다. 그는 광야의 풍경을 묘사할 때 단순히 뜨거움이라 하지 않는다. 먼지, 말의 숨결, 하늘의 무게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묘사된다. 읽고 있으면 풍경이 눈앞으로 밀려온다. 매카시의 언어는 단지 이야기의 수단이 아니다. 세계와 맞서는 도구이면서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말馬들은 인간보다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인간은 그들의 세계에 속할 수 없다. 말의 세계는 순수하고, 인간의 언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바로 그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말과 언어 사이의 단절을 품고 있다.
그의 세계에는 선과 악이 분리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세계의 잔혹함 속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은 비극의 여지를 품는다. 철저히 신 없는 세계를 그린다. 매카시의 무신론은 인간이 신의 부재 속에서도 어떻게 품위를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다. 존 그레디 콜은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사랑은 무너질 것이고, 정의는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자신만의 윤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신이 부재하는 곳에서 존의 품위는 그렇게 피어난다. 존 그레디 콜은 신의 침묵 속에서도 말을 하고, 약속을 지키고 사랑을 한다.
매카시의 스타일을 닮고 싶었다. 존 그레디 콜이 말을 몰던 막막한 대지는 항상 내 안에 있다. 그곳은 길이 아니라 마음의 뼈대 같은 것이었다. 서른이었던 나는 사막이라는 고독과 품위의 공간에서 고요한 폐허 같은 상태였다. 말은 순수함의 상징이면서 내가 믿었던 어떤 생의 질서였다. 사랑은 실패를 통해 증명된 감정이었으며, 구원은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무신론의 세계에 침묵은 마지막 언어였다. 상대의 말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침묵 덕이었다.
그가 긋는 축약과 건조함은 본질적 폭력과 허무를 그려내는 굵은 획이다. 폭력과 묵시록적 세계관은 인간의 원초적 형체를 드러내는 조각칼이었다. 작가는 인간을 묘사하지 않았다. 깎아냈다. 피와 모래와 태양 아래 남은 것은 오직 행위였다. 매카시의 문장은 말라붙은 강바닥 같다. 물은 다 흘러가고 자리에 남은 것은 여전히 반짝거리는 금빛 조각들. 단어는 남지 않고, 여운만 남는다. 그의 세계에서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지층의 일부로, 바람과 돌멩이와 함께 서사 속에 매몰된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고개를 드는 것은 구원의 다른 형식이다.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문장 같은 것.
그 절제와 광활함에 끌렸다. 말이 비워질수록 세계는 명료해졌다. 견고함은 무감각이 아니라, 감정의 극단까지 밀어붙인 끝의 냉정이었다. 세계를 설명하는 대신 응시하고, 의미를 덧입히는 대신 의미가 스스로 부패하도록 두었다. 매카시의 문장은 부패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어가 부서질 때 진실이 드러나도록.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언어가 사라진다. 윤곽이 희미해지고, 모래가 부서지는 소리, 철이 부식되는 냄새, 인간의 숨결이 바람에 흩어지는 감각. 부패한 의미는 오감을 통해 선명해지고, 무감정의 리듬 속에서 오히려 감정의 본질은 선명해진다. 매카시의 건조함은 냉혹이 아니라 정직이다. 꾸밈이 사라진 자리에서 세계는 낯설게 반짝인다.
얼마 전 쓴 글을 돌아보며, 읽는 사람의 피로감을 생각했다. 진지함의 밀도가 높으면 누구든 지친다.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응축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정신적 긴장감을 위해서였다. 문체가 거창한 것은 꾸미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결과였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쉽지 않다. 관조하고, 거리를 두다 보니 스스로 정제되었다. 언어보다는 시선의 문제였다. 지나치게 오래 머물며 응시했다.
다만, 읽는 사람의 숨이 길어질 수 있음은 늘 염두에 두었다. 명상멘트를 다듬고, 요가의 시퀀스를 설계하듯이 문장의 호흡을 생각한다. 한 단락 안에서 한 두 문장은 내 감정이 아주 얇은 막처럼 읽힐 수 있도록. 이 한 줄로 숨을 돌리기를 바라며.
건조한 대지 같은 내게 글은 비와 같다. 대지 위에 비가 내릴 때 감각을 그대로 느끼기보다는 스며드는 과정을 골똘히 생각한다. 감각을 개념으로 전환하고, 그것을 메타포로 활용하여 철학으로 체화하고 싶은 바람이다. 몸의 언어와 마음의 언어는 그런 식으로 만난다. 글을 계속 쓰다 보면 문체가 스스로 진화하리라 믿고 있다.
어떤 단어는 입에 닿는 순간 피로를 남겨, 나는 그것을 내려놓고 잠시 응시한다. 단어의 끝을 메만지고, 관련성을 떼어 다른 단어에 붙여보고, 발음을 굴려 소리와 뜻 사이에서 새로움이 만져지는지 이리저리 다듬는다. 거울 속 얼굴의 작은 주름을 손끝으로 더듬듯, 단어의 모서리들도 하나씩 짚어본다. 문장을 적은 뒤에는, 문장과 나의 톤이 빈틈없이 포개져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맞닿을 때 말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고 내 피부가 되어 있음을.
타인을 위해 쓰는 글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편지가 아닌 바에야, 내가 쓰는 글은 이미 대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상은 언제나 나의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나는 그 거리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는 순간 어제의 타인은 더 이상 그날과 같은 타인이 아니다. 목적지가 있는 글은 방향성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길을 잃는 일은 흔하다. ‘닿지 않음’을 윤리로 보는 이유는 타자가 결코 내 언어 안에 포획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곧 관계의 본질이며, 편지는 이미 맺어진 관계적 장르인 반면 그 외의 글은 부재한 대상을 향한 독백이 된다.
나 자신에게 닿기 위해 써야 한다. 그러나 이 ‘나’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고 흩어진다. 오늘 쓴 문장이 내일의 나에게 낯선 이유는 글이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게 하기 때문이다. 쓰는 일은 언제나 나와 세계의 경계를 새로 그리는 일이다.
무슨 일이건 결과를 손에 쥔 후에 허무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목적만 있고 과정을 새기지 않은 탓이다. 과정이 멈추면 그 순간의 소멸만큼 나는 사라진다. 그것이 허무의 맥락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과를 향한 질주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흔적을 더듬으며 아직 닿지 않은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다. 쉽게 닿지 않아야 홀로 설 수 있고, 차별화될 수 있다. 차별성은 우리를 살게 하는 리듬이지만, 동일성은 우리를 서서히 시들게 한다.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거리를 통해 자신에게 닿으려는 노력, 이 긴장감이 글쓰기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허무가 사라진다.
단단할수록 더 깊이 부서질 수 있다. 그 파편 속에서 내가 쓴 문장의 본질이 드러나 반짝일 수 있도록. 이건 매번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다짐처럼 언제나 부서질 준비가 되어있음을 점검하는 일이다.
왜냐고 묻는 사람이 간혹 있다. 한 번도 답한 적이 없다. 나는 정답 앞에서도 고민한다. 언어의 마모를 견딜 수 없어서, 진실을 찾기 위한 의도 혹은 단순한 미학적 쾌락 때문이라고 말하다면 그건 모두 거짓일 테니까. 그것은 정해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과 내가 서로를 향해 맞닿는 그 순간, 맞닿을 때의 감각과 닿지 않았을 때의 불편함을 나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이것조차 답은 아니다.
계속 보고 싶은 것을 예쁘다 말하고, 눈을 뗄 수 없는 것에 사랑한다 말한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대상이 사라지지도 않고, 언제나 소비되며 세계와 내 마음이 온전히 맞닿는다. 이런 표현은 희소하다. 자체로 차별성을 갖는 것에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든 문장이 희소성을 갖고 있지는 않아. 그래서 그래."라고 오늘치 답을 말해본다.
꺼지지 않는 불씨 같은 문장은 어디든 있다. 단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아직 발화하지 못했을 뿐.
존 그래디에게 모두 다 예쁜 말들이듯,
내게도 모두 다 예쁜 말들.
이미지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