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헛수고를 하지 않기 위한 이 책의 감상법

by 요인영




몇 해 전, 눈을 얼른 맞이하고 싶어 동쪽으로 달렸다. 태곳적 산맥을 굽이굽이 간직한 그곳은 늘 다른 지역보다 눈을 먼저 맞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쌓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럴 때 읽는 소설이다. 커피 문화의 밀도가 유난히 높은 이곳은 반대로 여백이 많아 커피 향은 공간의 기억으로 남는다. 취향에 맞는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가 있는 곳을 찾는 즐거운 수고를 들이면, 그 자체로 눈을 찾아 떠난 여행의 묘미는 배가 된다. 그의 커피는 감각의 윤리 안에 내려진다. “손의 감각이 변하는 순간, 맛도 변한다"는 그의 생각은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그는 어쩌면 풍경을 추출하여 맛으로 보여주는 바리스타이다.


그리곤 눈이 내리면, 천천히, 감각적으로, 그러면서 능동적으로 책을 펼쳐 읽는다.





서사가 헐거운 이 책의 감상법은 따로 있다.

나는 이것을 ‘헛수고를 하지 않기 위한 설국 감상법’이라 부른다. 어렵지 않다. 가와바타의 감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배경 묘사를 내 안에 쌓인 수많은 눈의 날들로 읽는다. 자연묘사가 나올 때 그것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다. 작가의 색을 그대로 감각하고 질감을 그대로 느껴보는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 유명한 문장의 단절과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마코와 시마무라의 생략된 감정을 추측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빛나는 고마코를 시마무라는 처음부터 사랑했다. 그만 몰랐다. 그는 가족을 데려와 여자에게 춤을 배울 생각을 했고, 우정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가 바보 같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현실을 비현실적으로만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여자가 부르는 이름은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그 부름에 혼비백산한 것은 시마무라의 비현실적인 영혼이었다. 남자는 허둥지둥 현실로 도피한다.


고마코는 말을 많이 한다. 술에 취해 말하고, 시마무라를 놀리고, 자기 처지를 스스로 해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는 시마무라의 시선 속에서 소리 없는 풍경으로 번역된다. 시마무라는 그녀를 들어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눈 덮인 설국에서 고마코의 말은 생생하게 들리는데, 독자는 그 말의 울림보다는 시마무라가 감각하는 눈의 빛, 온기, 침묵을 더 강하게 느낀다.


고마코는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서 언어의 소멸을 경험하는 여성이다. 시마무라의 시선은 일종의 문학적 냉기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삶에는 닿지 못한다. 고마코는 인간임에도 그의 인식 속에서 점점 자연 풍경의 일부로 변한다.


귀가 들리지만 듣지 않는 구조,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맥락과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고마코는 준비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말한다. 시마무라의 감각은 예리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공감도 없다. 그는 아름다움을 포착하지만 사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작가의 문체는 얼음처럼 차갑고 그 위에 슬픔이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내린다.


그의 세계는 열려있지만, 의미론적으로 닫혀 있다. 이 무감각이 그를 ‘헛수고’라는 말로 매번 이끄는 것이다.


감각이 아무리 정교해도 타인과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 말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인간의 체온이 없다. 그 온도의 부재. 그것이 시마무라의 헛수고의 본질이다.


이 사유는

‘거울 속에서 저녁 풍경이 흘렀다.(p12)’ 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것이 시마무라가 살아있는 삶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그가 보는 것은 고마코가 아닌 요코이다. 다른 작품을 감상하는 시마무라의 시선을 잠시 따라가 본다.

이중노출의 심상. 시마무라는 이 비현실적이고 덧없는 아름다움에 매혹되는데, 그에게는 현실의 고마코보다 이 찰나의 환영인 요코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비치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p.12


세상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자가 감각의 완벽함으로 도달한 공허의 정점.


그는 고마코의 목소리, 세계의 온기, 인간의 고통을 인식할 모든 조건을 갖췄지만, 단 하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와바타의 문체는 시마무라의 내면 구조와 닮아 있다. 섬세하고 차갑고, 공감 대신 형식의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문장은 눈 결정처럼 정교하지만 쉽게 녹지 않는다. 이 차가움이야말로 헛수고의 결정체이다. 감정이 스며들기 전에 언어가 얼어붙는 세계.


시마무라의 시선은 곧 작가의 시선.

세계를 해석하려 하기보단 그저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내 묻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모든 감상은, 한 편의 완성된 풍경화처럼 닫힌 사유로 남는다.


설국에서 눈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인간의 욕망, 감정, 언어가 번잡하게 얽혀 있을 때마다 눈은 내리고, 그 순간 세계는 마치 신의 손이 닿은 듯한 정적에 잠긴다. 그건 작위적인 신의 등장 대신, 자연이라는 형식의 신성한 개입으로 보인다.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대부분 눈을 통해 표현된다.

감정의 봉인. 모든 것을 덮어 사라지게 만든다. 이 덮임의 순간이 이 작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세계가 스스로를 정리해 버리는 방식의 구원이다. 눈은 설국에서 신의 언어가 침묵으로 번역된 형태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잠시 아름답게 만든다.


나는 괴롭지만, 다시 시마무라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시마무라는 극장에서 벌어진 소동 속에서 불길을 향해 달려가는 고마코를 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요코의 몸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외침이 뒤섞인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시마무라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이 기묘한 광경. 시마무라는 모든 혼돈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아름답다고 느낄 뿐. 요코의 죽음이나 고마코의 절규 따위 안중에 없다. 그건 그가 끝까지 듣지 못하는 인간으로 남는다는 증거다. 그의 마지막 감탄은 시마무라의 최종적 헛수고다. 그는 차창에 비친 요코의 삶을 감상하듯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아래에서 요코의 죽음을 감상한다.


마침 바깥으로 눈이 흩날리고, 설국이 완성된다. 눈이 오지 않는 고장에서 이 책이 결말을 낼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저 나의 해석, 나의 즐거움일 뿐일지라도

당신에게는 헛수고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지: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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