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에게

by 요인영


낡은 틴케이스는 뜻밖에 맑은 열린 음을 냈다.

명함에는 묘비명이 적혀 있었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소설의 첫 문장이자 보르헤스의 유언이었다. 연말을 맞아 묘비명을 하나 생각해 본다. 알고 있겠지만, 사고의 흐름이 그리 일반적이진 않으니 이해해 주십사, 연말을 핑계 삼아 본다. 고장 난 겨울처럼 요망한 것이 내리고, 사고의 타래는 자꾸 엉킨다. 뭐가 되었든 하기 싫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가진 한강의 책들은 대부분 황변이 진행 중이다. 종이의 테두리부터 안쪽으로 갈수록 조금 더 밝아지는데, 그 변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스미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읽히는 동안 손이 닿고 빛과 산소를 경험한 책이 되어간다.


<희랍어 시간>은 주도면밀하다. 단어 하나도 허투루 놓이지 않았다.

말을 잃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언어의 질감 같은 것. 보지 못하게 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의 흔적.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 원래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색. <희랍어시간>은 그런 시간의 침식을 보여주는 소설처럼 읽혔다.


실명과 실어를 같은 단위로 묶어 묘비명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실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맺어온 두 개의 통로를 닫는 방식에 가깝다. 한강은 거리를 이해하는 작가다.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대신, 서슬을 숨긴 채 감각을 세운다. 그 거리 위에 놓인 것이 ‘너와 나 사이의 칼’이었다. 보르헤스의 칼은 그런 쓰임이다.


한강의 소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지나치게 난폭하기 때문이다. 감수성 없이 열린 감각은 여과되지 않은 채 밀려드는 세계 앞에서 스스로를 방치한다. 그래서 더 이상 함부로 들이닥치지 못하도록 여자의 말을 닫고, 남자의 눈을 닫았다. 그 닫힘은 결핍이 아니라, 감각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작가의 글은 무지한 감각,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감각을 향한 조용한 초대이다.


차례는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호명이 끝난 줄도 모르는 순번 없는 기다림. 여자에게 상실은 늘 그런 식이다. 남자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다만 사라진 것은 시야가 아니라,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남자에게 상실은 늘 그렇게 공간을 잃는 일이 된다.


여자의 말과 남자의 눈이 닫히는 순간은, 미명과 박명 사이 그 어디쯤. 소리 없이 다가와 어깨를 미는 선득한 손처럼, 감각은 남아있는 채로 대체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언제나 차선의 감각으로 세계를 견딘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p.105


읽다가 쓰다가 알게 된다. 오래전 읽었던 이 소설의 문장들이 이미 내 안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강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지만, 그 말은 힘이 없었다.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배덕함. 나의 문장을 쓰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0.3%의 차이만이 나와 너를 구분 짓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고유함이나 차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미세한 차이를 감당할 용기를 요구한다. 말과 눈이 닫힌 자리에서, 여전히 파괴되지 않을 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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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실어는 사건도 사고도 아니다. 그것은 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치명적으로 오독되는 상태일 뿐.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오류처럼, 그녀는 그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회복을 약속하지 않고, 정상으로 되돌아갈 경로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성립 불가능한 오류(43)’와 ‘치명적 오류가 난 인간’인 채로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 p.21


열일곱의 겨울, 언어는 갑자기 사라졌다.

여자에게 언어는 표현이 아니라 지친 과거에 대한 폭로였다. 말을 내뱉는 순간마다 세계는 지나치게 분명해졌고, 그 분명함이 그녀를 수치스럽게 했다. 듣는 것은 가능했지만, 의미로 가는 길은 막혔다. 그 이후 그녀는 말없이 움직이고, 말없이 이해했다. 그녀의 세계에서 말은 의미를 잃었다. 감정은 더 이상 몸에 붙지 않았고, 말들은 혼령처럼 가까이 떠돌다 떨어져 나갔다. 여자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꺼리던 사람이었다. 침묵은 비극이라기보다 오래된 성향이 도달한 한 형태에 가까웠다. 여자의 실어는 말의 상실이 아니라, 말이 너무 정확했던 사람의 자기 보호였다.


‘고대 희랍어에는 능동도 수동도 아닌 제3의 태가 있다(18)’. 중간태라 불리는 이 태에서 행위는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말하는 주어에게 다시 돌아온다. 여자의 실어는 바로 이 형태를 닮아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서 빼앗긴 상실도, 스스로 택한 침묵도 아니었다. 말함이라는 행위가 끝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그녀의 존재 방식을 바꿔버린 변화였다.


여자가 꾸었던 악몽 속에서 ‘언어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20)’된다. ‘모든 말이 밀도와 중력을 얻어 단단히 응축된 채, 누군가의 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20)’한다. 이 언어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전달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말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해 폭발하지 않도록 멈춘 상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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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남자의 첫사랑은 열병을 앓고 청력을 잃은 안과의사의 딸이었다. 창고에서 목가구를 제작하는 그녀는 가끔 벤치에 앉아 네거티브 필름 조각을 통해 해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그늘진 오후, 열일곱의 남자는 그녀와 어떤 남자와의 입맞춤을 목격한다.


그는 처음부터 여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몰래 훔쳐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는 늘 네거티브 필름처럼 뒤집어진 상으로만 남았다. 그렇게 현상되지 않은 채 저장된 이미지는 진실이 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굳어진다. 필터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던 그녀처럼, 남자 역시 필터를 통해서만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금기가 깨지는 순간, 첫사랑도 끝이 난다. 네거티브 필름을 통해 해를 올려다보던 때처럼, 그는 첫사랑을 끝내 정방향으로 보지 못한 채 뒤집힌 이미지로 마음속에 남긴다. 남자의 첫사랑은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끝내 현상되지 못한 사랑이었다.


'넌 철학을 하기엔 너무 문학적(116)'이라 말하던 ‘너’는 자신의 고통을 근거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상실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명이라는 미래를 점자와 흰 지팡이, 훈련된 개의 목록으로 정리하며,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명랑함은 상대를 눈을 향하지 않고 그가 살아남아온 자신의 서사를 다시 확인하려는 말투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너라면’이라는 말로 나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아직 오지 않은 상실을 이미 통과한 경험의 일부로 흡수한다. 이때 타인의 불행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연료가 된다. 고통은 치유되지 않은 채 자산처럼 사용되고, 그 자산은 타인의 불안을 관리하는 권한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그 숱한 말들은 나를 위로하지 못하고 은밀히 다치게 한다.


상실을 준비의 문제로 환원하는 순간, 공포는 사라지는 대신 부끄러움으로 바뀐다. 아직 겪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 무력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 앞에서 질문할 자격을 잃는다. ‘왜 나는 묻지 못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120)’.


그 새벽, 내가 던지지 못한 질문은 그의 말보다 더 정확했다. 그것은 공감의 실패가 아니라 고통이 권력이 되는 순간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미래를 말하며 자신의 과거를 지키고 있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떤 불행은 말해질수록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에 따라 더 깊이 왜곡된다는 것을.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p.127


소설을 압축한 이 시는 더 이상 능동과 수동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 엎드려 있고, 누군가는 멈춰 서 있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만이 남아 있다. 이때 작가의 시는 서사의 각축을 떠나, 중간태가 된다.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p.71


이 관념적인 문장은 중얼거림으로 끝나야 했다. 세계가 환일지도 모르지만, 고통은 환이 아니다. 관념은 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고통이 사라질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는 피와 눈물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작가는 철학의 한계 앞에서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남긴다. 이 책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형태의 질문을 낳는다. 그 질문들 사이에서 사유는 고정되지 않고 넘실거린다. 아마도 이 지속되는 열림 속에서, 이 책은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이미지 모두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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