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알러지라고요? 의사로부터 병명을 처음 들었을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급작스럽게 높아진 자외선량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햇빛 알러지라고 할 수 있겠죠. 아니, 그럼 산소 알러지도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의사는 의외로 흔한 알러지라며 대수롭지 않아했다. 나는 햇빛이 뜨거워지는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발진이 난다. 햇볕에 노출된 부위는 가렵고, 아프다. 그래서 그 시기엔 되도록 긴팔을 입는다. 신기하게 한여름엔 없어진다. 피부가 자외선에 적응한 것이었다. 햇살에 두들겨 맞아야만 얌전해지는 피부라니, 뭔가 씁쓸했다.
햇빛 알러지 외에도 이맘때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 알러지성 결막염이다. 미세먼지가 심하고 건조한 간절기면 약속처럼 찾아온다. 눈이 하루종일 따갑고, 근질근질하다. 각막 표면이 사막화 되는 느낌이다. 지구온난화가 눈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것 같다. 심하면 벌겋게 충혈되어 미친듯이 따가워서 눈을 크게 뜨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잤냐고 묻는다. 아, 젠장. 스테로이드 한 방울이면 되는데, 의사는 단호했다. 처방해주면 안되냐고 묻자, 의사는 ‘자꾸 쓰면 돌이킬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그렇게 무섭게 들릴 수가 없었다. 별수없이 비스테로이드성 치료제를 받아왔다. 효과는 역시, 미미했다.
나는 다양한 만성질환에 시달려왔다. 어렸을 때는 비염이 심했다. 자다가 호흡곤란이 오기도 했다. 온갖 약물 치료 끝에 의사는 수술 말곤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 몸에 칼 대는걸 싫어했다. 수소문 끝에 엄마는 나를 어떤 할아버지 앞으로 데려갔다. 피부가 하얗고 엄청나게 덩치가 큰, 70세쯤 되어보이는 백발의 한의사였었다. 할머니의 친구의 친구가 소개해줬다고 했다. 원장님은 맥을 짚더니, 비염은 체질문제이며 내 경우 체질을 개선하려면 고기를 많이 먹어야한다고 했다. 특히 날개 없는 짐승 고기를. 우리 애는 고기를 많이 먹긴 하는데요.. 엄마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희멀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양사람들은요, 하루에 먹는 고기 양 자체가 우리랑 틀려요. 서양인처럼 크고 건강해지려면 고기를 더 먹어야 합니다. 그런 체질이어야 탈이 안나요.
그 날 이후, 나는 한약과 고기를 매일 먹었다. 손주를 극진히도 아꼈던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수라면옥이라는 동네 소갈비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열한살이었다. 어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나이였다. 먹고 토할때 까지 먹었다. 수라면옥이 무서워졌다. 열두살이 되고 나는 몸무게가 10kg가 늘었다. 밉살스러운 고학년 뚱땡이가 되었다. 코로 숨쉬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비염이 말끔히 사라졌다. 엄마는 과연 명의라며 무척 좋아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체질을 바꿔야한다며 그때 그 한의사 얘기를 한다.
그러나 내 체질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한 부위가 나으면, 다른 부위에 문제가 생기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코의 염증은 목으로 내려갔고, 나는 한동안 만성 기침을 달고 살았다. 영지버섯이 좋다고 해서 겨우내 달여먹곤 했다. 다행히 천식으로 번지진 않았다. 몇년 후, 기침은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그 다음은 만성 위염에 걸려 1년 동안 10kg가 빠졌다. 중학교 때 일이었다. 졸업사진 속 나는 지금보면 못 알아볼 정도로 헬쓱했다. 위염이 좀 낫자 다음은 만성 장염, 그러니까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걸렸다. 조금만 춥거나 과식하거나 긴장하거나 불안하거나 하여튼 신경쓰이는 일이 생기면 배가 아프고 설사를 했다.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신기하게 수능이 끝나니까 사라졌다(물론 수능날 아침엔 성대한 페어웰 파티가 있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그때부터는 알러지성 결막염이 생겼다. 비염도 다시 생겼고, 기침도 돌아왔다. 위염이나 장염은 간헐적으로 안부를 전했다. 다들 기세가 예전만 못했지만, 은근히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었다.
최근까지, 그리고 가장 오래 나를 괴롭혀온 놈은 알러지성 결막염이다. 사실 지금도 눈이 따갑고 가려워 미치겠다. 알러지는 사실 병이 아니었다. 과민성 면역반응이었다.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 어떤 외부 요인에 필요이상으로 저항한다는 것이었다. 면역체계가 활발하다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의사는 알러지 원인을 파악하고 피하는 것 외에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알러지성 결막염 같은 경우는, 검사하려면 미국을 가야한단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고, 무엇보다 안다고 해서 치료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했다. 만약 각막 햇빛 알러지면? 의사는 그냥 증상이 심할 때면 주기적으로 와서 약을 처방받으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러지성 안약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는 일은 무척 귀찮다. 내원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진료는 필요없고요, 혹시 모르니 안압 검사만 할게요. 플루메토론 0.1%랑 알러콘 2통 처방해주세요.” 물론 씨알도 안 먹힌다. 요식행위처럼 느껴지는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만성 환자 입장에선 솔직히 그렇다) 시력검사와 안압검사를 끝내고 의사를 만나면, 알러지는 답이 없으니 약 넣고 잘 관리하라는 말 밖에 못 듣는다. 1년 내내 심하면 매주, 혹은 달마다 나는 그 일을 한다. 알러지 환자들의 가장 큰 어려움들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완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주기적으로 할애해야한다는 것.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 잘 알면서도 접수를 하고, 대기를 하고, 의사의 서명이 들어간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 휴일에 도질땐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는 것. 그러면서도 혹시 다른 합병증으로 발전하거나, 심각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라도 의사 앞에 서게 된다는 것. 꼰대 의사를 만나면 빻은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것. 그런 고충을 주위에 얘기하면, ‘그러니까 평소에 건강 좀 챙기지’, ‘운동을 하라니까’, ‘체질을 바꿔야해’ - 같은 말을 들을 때가 있다. 하기사 그런 분들의 걱정이 있기에 나는 근 몇 년간 술도 먹지 않고 충분한 수면을 지키고 물을 하루에 2L씩 마시고 담배도, 최근에 끊게 된 걸지도 모른다.
내 생활습관이 남들보다 좋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실제로 운동도 많이 안하고, 그렇게 건강에 신경쓰진 않는다. 나는 그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 질환에 대해 (설령 좋은 의도라한들) 남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꽤 불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령 내가 한심하게 살았고 그 댓가로 질환들을 얻었다고 한들, 그것들은 내가 감내할 것들이며 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당신들보다, 그들이 나랑 더 오래 사귀었다는 얘기다. 나는 가끔 내 질환에 대해 훈계조로 타박하는 의사들을 만나는데, 정말이지 그 잘난 코를 한 대 때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런 말에 상처받지도, 크게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런 숙련된 환자의 태도가 느껴지는지, 의사들도 예전처럼 함부로 얘기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처음 생소한 내 질환들을 마주하게 되었을때, 나는 심각한 표정을 한 의사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X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X될 것 같다는 감각(미안하지만, 이 저속한 표현 외에는 그 감정을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은 지식의 비대칭성에 의해 강화된다. 감기나 복통같이 내게 익숙한 질병이면, 아무리 의사가 겁을 줘도 대수롭지 않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내가 가게 되리라고 예상치 못한 병원- 예컨대, 비뇨기, 신경정신, 항외과 등 - 을 가면 입장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무지라는 새하얀 셀에 갇혀,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초조하게 기다린다. 의사의 표정을 뜯어보기 시작한다. 그가 마른 입술을 깨물거나, ‘흐음..’ 따위의 소리를 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면, 흐르던 비지땀이 순식간에 식는다. 귀를 기울일수록 현기증과 이명이 나기 시작한다. 진료실을 나오며, 방금 들은 병명을 검색해본다. 선배 환우님들이 올리신 글이 주르륵 펼쳐진다. 진정한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따금 너무 억울해서, 의사에게 원인을 물으면 마음 착한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운이 나쁜 것 뿐이에요. 그러면 화도 나지도 않고, 그냥 맥이 탁 풀려버린다. 그래, 운이 없었다는데 뭐 어쩌겠어. 그러면서 훌훌 털고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운이 나쁜 것은 죄였다. 그것도 아주 큰 죄였다.
나는 후천석면역결핍증 환자나, 그에 준하는 중증 만성질환자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경미한 질환으로도 이렇게 압박을 느끼는데, 그들이 받는 압력은 대체 어느정도일까. 사람들은 타인의 병을 비웃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려한다. 환자와 자신을 명확히 구별지을수록 안전해지리라는 환각을 겪는다. 그러나 불안은 결핍된 욕망의 동의어로, 욕망이 그러하듯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그저 구분짓기라는 가해의 규모와 범주를 확장시킬 뿐이다. 에이즈에 걸린 건 문란하고 위생관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코로나가 창궐한건 미개한 중국인들이 박쥐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그 조악한 논리는, 설산 꼭대기에서 툭 하고 떨어뜨린 돌멩이처럼 함부로 굴러 떨어지면서 예상치 못한 크기와 경도를 갖춘다. 그리고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칼 포퍼의 반증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 어떤 주장이 ‘이론’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증 가능해야한다는 것이다. 언제든 다른 이론으로 뒤집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물에 물을 주고 진심어린 노래를 불러주면 꽃이 핀다고 해보자. 피었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피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고 회피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런 도피성 반복이 무제한으로 가능한 경우를 반증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과학적이지 않다고, 그러므로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증 불가능성만큼 자유주의적이고 과학적인 개념이 있을까. 칼 포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살인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거대담론, 그러니까 이데올로기 비판에 충실했다. 타인의 고통을 도외시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정도의 자유지상주의자라면, 포퍼의 반증 불가능성은 왜 도외시하는가. 타인에 고통에 공감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침묵이라도 해야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또 그래서 침묵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이런 얘기를 처음 했을때, 누군가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한다고. 우리의 연약한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기 보단 상처를 주는데 더 적합하다고. 그러나 상처주기 두려워 타인을 피한다는건 펜스룰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그런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러나 나는 겁쟁이가 되지 않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몇 년 전 우울증을 앓던 친구에게 조언이나 위로랍시고 하잘한 훈계를 늘어놓았다. 그때 내가 내뱉은 말들은 반증 불가했고, 그래서 회수 불가였다. 뒤늦게 사과를 하자 친구는 괜찮다고,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고 했다. 나는 스스로 너절한 환멸을 느꼈다. 그 감정은 뭇내 잊혀지지 않은채 내 마음 속의 한 마리 노새가 되었다.
나는 내 고통이 즉시 사라지길 바라왔다. 그러나 고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스테로이드성 안약은 효과가 즉발적이지 않았다.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고통의 추이를 관찰하고 장기적으로 관리하는데는 이 방식이 나을 것임을 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고통도 이해하고 싶다. 즉시 위로하는 스테로이드성 말은 못해도, 당신의 고통을 천천히 가늠하고 따라가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가닿을 단어를 찾고 싶다. 과민하고 날선 반응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이 당신의 진심이 아님을 안다. 나는 고통하는 당신이 편안함을 느낄 표현을 고심하고, 당신 또한 그러하길 깊이 소망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번번이 실패할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끊임없는 실패가, 살아있음을 보증하는 어떤 가만한 면역반응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