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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18. 2022

육신의 즐거움

몸과 언어

내가 내 몸을 자각한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나는 걷고 있었고, 무언가를 잡았으며, 그러다가 뛰었고, 먹었으며, 무언갈 만지다가 넘어지고 일어났다. 내 몸은 의식하기 이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나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우리는 모두 불멸하며 떠도는 영혼들이며, 지금의 ‘나’는 한 영혼이 깃든 ‘몸’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내 안에 잠시 깃든 영혼은 다시 다른 ‘몸’을 찾아 들어갈 것이며, 그 순간 우리는 의식을 갖고 그 시점부터의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된 순간의 짜릿함이란. 나는 내가 깨우친 그 생의 본질을 친구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한참 이해하지 못하던 친구에게 나는 여러번 설명을 했고, 마침내 이해한 친구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천주교 신자의 모태신앙이었다. 우리는 성당 유치원을 다니던 친구 사이였고, 어린이 주일엔 다 같이 모여 차례대로 기도를 했다. 나는 수녀님이 나눠주던 새끼손가락 맨치 작은 성체성사용 빵을 먹을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신부님은 그걸 영성체라고 했다.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걸 먹으면 예수님의 영혼이 내 몸에 깃드는 걸까요? 나는 그렇게 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설명이 나로 하여금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영혼이 빵을 통해 전승된다는 ‘영성체’의 개념이 나로 하여금 ‘이동하는 영혼’의 작동을 납득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가톨릭 집안이지만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말미에 우리는 성가를 하나씩 골라 불렀다. 영 시원찮으면 하나 더 불렀다. 그건 할아버지가 결정했다. 그래서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성가가 많았다.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꽤 많은 성가를 알고, 또 부를 줄 안다. 대부분 번안곡의 형태라 서구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성가는 아니지만, 제례문의 몇몇 구절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쉽게 뇌리에 박혔다. 어떤 건 언젠가 글을 쓰면 써먹고 싶다 하는 것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라는 구절이었다. 이런 식이다.


● 저를 씻어주소서 / 눈에서 더 희어지리이다.

○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시어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 저의 죄에서 당신 얼굴 돌이키시고 /저의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검정 표시된 부분은 제주(祭主)가 선창하면, 나머지 인원들이 흰 표시된 부분을 읽었다. 나는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라는 부분을, 내가 의식을 갖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러니까 약 22년 정도를 읽었다. 처음엔 저 구절이 너무 무서웠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생각날것 같았달까. 그러다가 판타지 문학과 게임을 하며 ‘흑마법사-네크로맨서’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나는 그 문장이 꽤 멋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에서 기쁨을 읽어 내다니, 그보다 쿨한게 있을까? 하여간에 그 당시에 나는 그 문장을 읽을 때면 누구보다 낭창하게 읽었다. 그러면 모두 해골처럼 느껴졌다. 육신을 잃은 해골을 애도하는 해골들, 표정을 가진, 춤추는 해골들. 아직 육신이 있어 행복한, 해골들.


 춤을 추는 것, 나는 그 일이 우리가 육신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몸치이고, 춤을 전혀 잘 추지 못한다. 그렇지만 흥에 겨워 몸을 흔드는 일은 꽤 좋아한다. 해골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아니, 오히려 몸이 없으니 더 추고 싶을지도 모른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는 ‘우리 몸 안에 춤이 있다’고 말했다. (춤에 대해 이보다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말이 있을까?) 춤은 내 기분을, 생각을, 어떤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관중이 존재한다. 관중은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춤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언어이고, 마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우는 상어처럼 지금까지 살아 남은 언어인 셈이다. 육신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통의 수단, 그러니까 바디 랭귀지도 사실은 우리 의식 저변에 남아있는 작은 춤들의 모음집과 같다고. 같은 이유로 나는 수화통역사들의 섬세한 손짓이 춤사위와 같다고 느끼곤 했고, 그건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는 춤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비단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는 동물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는 걸 우린 경험적으로 안다. 부정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엔 그걸 알고 소통하려는 노력하면 사람과,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린 모두 작은 육신을 안고 태어났고, 그 안에서 울고 웃는다. 그리고 결코 온전히 이해되지 않을 서로의 감정을 전달하려 춤을 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족에게, 정치인들과 아티스트들은 대중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흥겨운 이 세계를 바라보면 이윽고 우리가 서로 엇비슷한 춤을, 별로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비슷한 리듬만이, 정형화된 포즈만이 있다. 그리고 그걸 따르지 않거나 물리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들은, 무대에서 내려가길 엄숙히 권고 받는다. 그럼 스테이지에는 무엇이 남을까?


 육신의 즐거움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문제들이 많다. 그러나 그만큼, 다수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는 육신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이 많다. 사실 해답은 명쾌한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육식을 끊자, 그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건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나는 비릿한 환멸을 느끼며, 신선한 고기를 씹는 걸까?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는 것이 보인다. 그 해골들에는 표정이 없다. 나는 그것들이 어떤 얼굴로 춤을 추는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생각을 천천히, 조금 늦었지만 처음으로 적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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