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다이먼, <배우는 법을 배우기>를 읽고
올해 마지막 독서모임 책. 몇 달 전 발제 순서를 정할 때 나는 이 책의 발제를 맡기로 했었다. 어떤 책인지 잘 몰랐지만 아주 정직하게 굴림체로 적혀있는 책의 제목과 표지에 끌렸다. 어쨌든 나는 담백한 것을 좋아한다. 나에겐 느끼함 포비아가 있는 것이 분명... 이 책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배우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새로운 것을 배워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시도해 봤는데 사실 큰 성과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것을 접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느슨하게나마 계속 만나게 되면서 새로움과 기쁨을 주고 있다. 그러나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어떤 부분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계속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이 나의 외길 배움 생에 의미 있는 의미 있는 지표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책은 배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능숙해지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즐기는 수준에 이루지 못하고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또 우리가 배움에 자주 실패하는 것은 나의 실력이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 배움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학문이든 운동이든 음악이든 배움에는 정도(正道)가 있다고 배웠고, 빠른 반복으로 그 길에 오르는 것만 연습했다. 나도 그 올바른 길에 빠르게 도달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단기적인 목표만 있었을 뿐 이 배움이 내 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나만의 것을 어떻게 녹여볼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배울 때 효율과 올바름만 생각하며 빨리하고 싶어 한다. 배움의 의미가 단지 꼭대기에 빨리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린 시절 학교나 피아노 학원에 가는 게 조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저자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 좋았다.
대개 배움의 열쇠는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명료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 즉, 당신이 늘 하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배움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p.14)
하지만 어떤 기술을 배우는 비결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에 자신의 통찰과 이해, 지성을 적용하는 것이다.(p.18)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어떤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자기 수양의 길이기도 하다. 배움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과 제어력을 계발하는 과정이고, 몸과 마음에 대한 통찰을 얻는 수단이다. (p.18)
배움은 반복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려운 기술 습득을 위한 무조건적인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단계를 세분화해서 생각해 보는 것, 실험해 보는 것, 지성적으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 심리적 상태 이유를 파악해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빨리 가려는 것에만 몰두하여 대부분의 배움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냈던 것 같다. 나는 이해하여야 더 잘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도 항상 쫓기듯 배웠던 것 같다. 새로운 시도나 실패를 돌아본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늘 긴장했었다. 결국 배움은 기술의 완성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닿는 길이라는 것에 동감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술을 터득하려면 완벽한 동작으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p.35)
이때 학생은 과정(how)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암벽을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탈(What)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요한 건 학생이 암벽을 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배우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학생은 암벽 등반을 해냈다는 성취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더 큰 자기 이해와 기술 숙달이라는 보상을 얻은 것이다. (p.42)
우리는 어떤 성취를 이루면서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한 요소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무언가를 성취하긴 했지만 어떤 지혜나 이해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배움은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험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자각을 증진시키며 통찰을 얻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런 방식의 학습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온전함과 아름다움의 경험을 가져다준다. (p.44)
배움의 끝은 어려운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기술을 쉽게 해내는 것이라고 한다. 기술 완성의 증표는 묘기가 아니라 애씀 없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것. 애씀 없는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이 좋았다. 얼마나 정상인처럼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려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데 배울 때마저도 애쓰고 있는 나. 잘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내 몸과 마음에 산만해지지 않게 집중하는 것.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을 학생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법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학생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 동작을 제대로 하려고 애쓰느라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그 방향의 주의를 거두게 하는 것이다. (p.68)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어 움직임을 조절하고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는 이 내적인 감각 피드백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평범한 운동선수와 뛰어난 운동선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p.78)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목표는 단지 단기간에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 악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원리를 터득하는 데 있다고 한다. 머리를 띵 쳤던 부분이다. 피아노를 10년 가까이 배웠지만 지금 어떤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던 것도 아닌데 즐거움 중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더라면 달랐을까 싶다. 삶을 더 풍요롭게 사는 수단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 같다.
신체적인 문제는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이나 삶 전반에서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잠재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기술이든 온전한 배움은 전문 기술의 숙달뿐만 아니라 그 도구를 다루는 자신의 습관에 대한 앎과 자각의 증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p.108)
새로운 것을 배울 땐 처음이라 어색하고 못하는 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두려웠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을 오랫동안 나의 문제로 삼았는데 이 책에서는 개인의 문제로 말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낳지 않는 학습 환경을 먼저 만들어주는 게 먼저라고 이야기한다. 또 두렵지 않고 긴장하지 않으려면 결과에는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충분한 연습과 경험으로 대처 능력을 키우되 과정에 집중하고 결과에 초연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정이 좋으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뒤따라 온다. 항상 끝을 생각하며 달리는 달리기는 괴롭다.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한 발작 한 발작에 집중하며 뛸 수 있는 감사함과 즐거움을 누리며 달릴 때, 내가 생각했던 한계보다 더 멀리 와있게 된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삶에서든 배움에서든 중요한 부분이다.
배우려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계발하며 압박감 속에서도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문제는 배움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저 올바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만 가중시키는 학교의 교육 방식에 있다.(p.115)
결과에 신경 쓰는 것은 우리가 그릇된 대상에 집착하고 있고, 행동을 조율하는 요소들을 제어할 능력이 없음을 암시한다. 반면 결과를 걱정하지 않고, 기술을 수행하는 데 자기 자신이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기술에 대한 더 큰 제어력을 갖게 된다. 시간을 들여 이런 원리를 배우는 학생은 분별없는 애씀과 습관에 의존해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능숙함과 이해에 이르게 된다. (p.219)
그저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고 애만 쓰는 방식으로 배우는 것은 결코 교육적인 경험이 아니며 스스로를 기계적이고 우둔하게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p.219)
마지막 옮긴이의 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배움과 교육에 한국 사회만큼이나 관심이 있는 집단이 있을까. 하지만 그 배움은 어딘가 공허하다고 느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인지, 어디로 향하는 교육인지 알 수 없다. 단기속성에 최적화된 교육 시스템 안에서 나처럼 느린 아이는 대체로 불행했던 것 같다. 배움은 끝을 향하는 게 아니라 과정 자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과 나도 모르게 욕심이 튀어나오겠지만 그것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이 곧 배움이자 능력일 것이다.
공부와 노동은 다르다.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무언가를 하는 과정을 숙달해 가는 것은 공부다.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애쓰는 것, 이건 공부라는 이름의 노동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이 좋은 성적을 얻거나 어떤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릴 때, 우리는 공부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우리는 공부를 재미없는 일로 여기게 되고,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배움과는 인연을 끊게 된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p.234)
나는 배운다는 것과 결과물을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결과에만 집착하면서 무언가를 할 때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에 처한다. 그래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그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배움에 꼭 필요한 자세라는 걸 배웠다. (p.238)
배우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을 배움의 현장이자 과정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배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 배움이 고통과 좌절, 괴로움을 견디는 과정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는 즐거운 과정이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p.239)
회사 독서모임이니만큼 자연스럽게 회사에서의 배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 때 회사에서 아직 잘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가 회사는 학교가 아니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이해는 했지만 누구나 처음은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갸우뚱했지만, 한편으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지면 안 되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연차가 쌓이는 게 무서웠던 적도 있고, 업무를 제법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나서는 누군가 나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을 싫어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배움의 정의가 달랐고 원초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지금은 배울 게 없는 환경과 배우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게 더 무섭다고 느낀다. 어느 글에 썼던 것처럼 나는 나이가 들더라도 배우는 선배가 되고 싶다.
어쨌든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고, 일터는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환경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자주 일을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일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일터에 있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또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안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연차나 경력에 상관없이) 잘 배우는 사람이 성장하고 잘 적응하게 되고 회사도 잘 끌어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는 어떻게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또 자신의 하는 일과 말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일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아주 좁은 시야의 것만 생각하며 단기적 목표 완수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배움에는 본인의 자각과 지성이 연결되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배움에 기반한 일도 자각과 지성이 있을 때 더 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태도로 일을 배우고 알아가면 좋을까?
위 두 물음을 발제문으로 남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