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한국경제신문사에 수습6기로 입사, 2000년 현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 간 기자로 재직하면서 쓴 기사는 거의 1만여 건에 이른다. 그 가운데 중요한 기사는 스크랩해서 보관하고 있는데 책장을 가득 메운다.
특종기사와 인터뷰 기사, 탕방기사, 각종 기획기사를 들추어 볼때마다 감회가 이만저만 아니다. 기자 사회의 관용어인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닌 결과물이다.
'79년대 재벌 浮沈史' '對日 무역역조의 원흉' '유럽의 철강산업 현장' '신조선 수주 세계1위' '중소기업 육성정책 강화 시급' '공산품 표준화와 품질관리 운동' '산업현장의 독버섯 파업투쟁' 등 굵직한 기사들이 눈에 띈다.
‘재벌그룹 부침사’ 등 인기리에 연재
물가조사, 시장 취재 등 밑바닥 경제를 섭렵한 뒤 중화학공업, 삼성 현대 대우 등 재벌 그룹의 경영과 생산공장 확인까지 총괄하여 산업분야에서 제법 고참 전문기자로 행세할 때 쯤, 회사에서 모든 출입처를 회수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곤 당시 초년기자 몫이었던 중소기업 분야를 맡으라는 하달이었다. 기자사회에선 이를 '물을 먹었다'고 표현한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 불똥이 튄 것이었다(언론통폐합에 얽힌 내용은 차후 기술).
어쩌겠는가. 출입처 배정은 간부의 전횡물이었다. 사직하면 모를까 수긍해야 한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YMCA 뒷편에 있는 중소기업중앙회 홍보실을 터벅터벅 찾아갔다. 한씨 성을 가진 실장이 회장실로 안내했다. 당시 정치인 출신 柳琦諪씨가 회장이었다. 전주에서 삼화출판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국회상공분과위윈장을 역임한 정계 거물이다.
그분의 자제가 필자의 고교 동창이어서 잘 아는 분이었다. 연배차이가 있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잘 맞았다. 시쳇말로 죽이 맞았다. 더구나 필자는 수백 개 분야의 중소기업을 다년 간 현장 취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터여서 말이 잘 통했다. 자연스럽게 경험부족인 전두환 신생정부의 경제정책에 무언가 빌미를 제공해 박차를 가하도록 후원해야 하지 않느냐는 쪽으로 의기가 투합했다.
다음 날 한국경제신문의 1면에는 '중소기업, 국민경제의 안정대'라는 제하에 ‘중소기업의 중요성, 중소기업의 역할, 중소기업의 현주소, 시급한 육성대책’ 등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며칠 뒤 정부는 '중소기업은 국민경제의 안정대'라며 강력하고도 폭넓은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펴 경제발전을 이룩하겠다고 발표했다. 5공 정부가 물가안정 및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첫걸음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종합상사인 대기업이 수출을 도맡아 하고 그 수출품을 생산하는 역할은 중소기업이 맡았는데 수출물량이 늘어나도 무역수지는 항상 적자수준에 머물렀다. 선진외국과의 품질경쟁에서 뒤질뿐만 아니라 원자재와 제조기술을 외국에 의존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작 인건비를 얻어먹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의 고유상품은 합판 목재가공품 가발 면직물 정도가 고작이었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의 무역규모는 170억 달러 정도였는데 항상 적자였다. 필자가 발로 뛰며 그 원인을 조사한 바, 대 일본 적자가 70%를 차지했고 그 가운데 기계설비의 수입이 80%를 차지했다. 일본산 기계설비의 수입이 무역적자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기계설비의 수입을 줄이지 않고서는 무역수지 개선은 하대망년이었던 것이다.
교묘한 일본의 상술
現代는자동차를 조립해 수출하지만 그 자동차에 들어가는 3만여개의 각종 부품은 중소 기계공업체(현장에서는 ‘마치코바’라 한다)에서 생산한다. 그 정밀한 부품을 생산하려면 망치와 톱만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쇳덩이라는 소재를 달구어서 성형하고 다듬어내고 열처리하고 도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기술자들은 눈썰미가 좋고 손놀림이 재발라 대강의 모습을 뚝닥뚝닥 만들어냈지만 고가장비를 만들어 내려면 정밀도 높은 공작기계와 정확한 공정과 검사체제가 갖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기계설비를 일본으로부터 들여온다. 거리가 가까워 주문하면 금방 들어오기 때문이다. 장비의 품질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제품이 훨씬 상급이자만 가격도 낮고 AS가 좋은 일본제품을 선호했다. 무엇보다 큰 요인은 말이 쉽게 통해 장비를 다루고 고장을 고치는데 편하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바로 이점을 노리고 장사를 하고 농간을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