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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곶 May 02. 2020

바람이 불어도 배드민턴 공을 잘 날리려면

무너져가던 날 일으킨 아빠의 뜻밖의 한 마디


바람이 분다. 오늘 게임도 난 망했다. 모처럼 아빠와 시간을 맞춘 날이었다. 먼지 쌓인 배드민턴 라켓과 공을 챙겨 들고 공터에 나왔는데, 양볼을 스치는 강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게 조금의 언질도 주지 않은 기상청 일기예보가 못내 미웠다. 이번엔 꼭 아빠께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어보겠다는 다짐은 오늘도 무너질 게 뻔했다.



아빠와의 배드민턴 ‘TIME’



배드민턴은 아빠와 내가 단둘이 함께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릴 적 아빠는 나를 데리고 집 앞 공터에 나가 배드민턴을 가르쳐주셨다. 배드민턴보다는 비디오 게임이 좋았던 나는 아빠에게 질질 끌려가곤 했지만, 그렇게 틈틈이 배운 배드민턴은 나의 유일한 장기가 됐다. 난 권투 경기에서 기절 직전 ‘타임'을 외치듯,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아빠에게 배드민턴을 제안했다.


오늘 이토록 오랜만에 아빠에게 배드민턴 타임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젯밤 면접 탈락 문자를 받은 나는 소금에 푹 절인 배추와도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힘듦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만큼은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내겠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맏딸의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아빠는 무뚝뚝한 딸의 요청에 뜻밖이라며 주섬주섬 라켓을 챙기셨다.

늘 그랬듯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걸고 내기 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대학시절부터 배드민턴 동아리 회원이었다는 아빠의 '짬밥'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아빠를 이겨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하다못해 배드민턴 게임에서라도 작은 성취를 얻어보리라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나의 거창한 계획을 망쳐버린 것이다.



추락하는 공을 보며
나의 처지가 떠올랐다



게임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꽉 쥔 라켓에서 튕겨나간 노란 공은 거센 바람에 내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라켓을 더 꽉 쥐고 힘차게 휘둘러봐도 공은 바람에 부딪혀 힘없이 고꾸라질 뿐이었다. 라켓에 힘을 줄수록 공은 더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자꾸만 추락하는 공이 내 처지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의 공은 오히려 바람을 타고 순항했다. 10판 10패. 껄껄 웃으며 '올 때 메로나'를 외치는 아빠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게임이 모두 끝난 후 난 결국 아이스크림을 사와야겠다. 나는 아빠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바람이 불어도 공을 잘 날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했다. "바람을 등에 지고, 반대 방향의 하늘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공을 날리는 거야"



바람을 등에 지면 돼



그순간 난 머리가 띵 해졌다. 그토록 단순한 해법을 왜 난 그동안 깨닫지 못했는지. 그제야 바람을 이겨보겠다는 생각에 팔에 힘만 꽉 주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깃털 달린 공이 바람의 저항을 이겨낼 리 만무했다. 오히려 바람을 이용해 공을 날려보라는 아빠의 혜안은 그럴 듯했다. 그리고, 어쩐지 내게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위에 굴하지 말고 세상을 날아오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난 아빠의 조언을 위로 삼아 라켓을 휘둘렀다. 깃털달린 공은 가볍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내일의 나도 조금은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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