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이들과 인사이드 아웃 1을 보고 바로 2편을 예매했다. 어제 아침 보러 극장에 갔는데, 큰애 친구를 세 명이나 마주쳤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보면서 '아이들에게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1편보다도 더 재미있다"는 호평을 남겼다. 나와 남편도 "오랜만에 1편만큼 좋은 2편을 만났다"며 공감했다. 우리 넷이 느낀 점이 같지는 않겠으나, 각자의 넓이만큼 이해하고 좋아하면 그만이다. 그걸 공유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고.
이 이야기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담을 담고 있다. 비교적 단순했던 감정이 복잡하게 분화되고, 미래라는 키워드가 현재만큼 커지고, 불안을 잘 다루기 어려워 고통받는 만 열세살. 기쁨이, 슬픔이, 까칠이, 소심이, 버럭이 외에 새로 등장한 불안이, 부럽이, 당황이, 따분이, 추억 할머니의 캐릭터와 새로운 관계성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며 아이들의 다가올 사춘기를 생각하기보다는, '불안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한때 나는 "불안은 나의 힘"이라 말할 정도로 불안을 동력 삼아 살았다. 미리 상상하고 계획하고 고민하고 준비하도록 만든 것은 언제나 불안이었다.
조종간을 잡은 불안이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시나리오를 쓴다. (내가 가장 좋아한 장면이었다)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저런 일이 터지면?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비할 방법을 찾는다. 혹은 미리 실망한다. 실제로 잘 되지 않더라도 크게 낙담하지 않기 위해서.
이 모든 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불안해하고 대비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부족해'라고 느끼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삶. 마흔 살을 목전에 두고 코로나가 찾아와 한치 앞도 대비할 수 없도록 만들 때까지, 불안이가 완전히 패닉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 조종간을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할 때까지- 나는 꽤 오래 이런 방식으로 살았다.
인간이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는 한 불안이를 완전히 내쫓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불안이에게 안락한 의자를 내어주고 대접해주는 편이 낫다. 불안을 가라앉히고 그가 하는 이야기 중 참고할만한 것에 귀기울여 행동으로 옮기기. 그를 위해 나는 명상하고 운동하고 글을 쓴다.
불안만큼 흥미로웠던 지점이 신념 체계였다. 인간의 자아가 그야말로 이야기 덩어리라는 걸 보여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부족해, 나는 이만하면 괜찮아, 나는 못 해, 나는 운이 나쁜 사람이야, 나는 늘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 믿음들은 여러 경험과 기억들을 취사선택하여 만든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는 나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야기에 기대어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과, 나는 최악이라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다를 것이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받아들인 감각을 해석하는 방식도.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그토록 불안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잘 살아왔을까를 생각해보면. 밑바닥의 밑바닥에는 "아무리 그래도 결국은 잘 될 거야"라는 이야기가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어릴 적부터 읽었던 이야기의 힘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렵고 외로워도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우리 아이들은 아주 쉽게 말한다. "나는 내가 좋아!" 하지만 살다 보면 내가 싫고 미운 순간도 분명 올 것이다. 한심하고 답답한 순간들도. 그래서 지금과는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의 밑바닥에는 환한 달빛 같은 이야기가 카펫처럼 깔려 있기를 바란다. 떨어져도 완전히 부러지고 터지지는 않도록.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나는 아이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선물하는 부모이고 싶다. 그 이야기가 훼손될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그리고 힘 있는 이야기를 쓰고도 싶다. 나에게, 아이들에게,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카펫 같은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