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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Jun 07. 2024

[불맞말 05] 아기들은 모두 다르게 걸음마를 배운다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불안에 맞서는 말들 05 



아돌프는 기어 다니기를 비롯한 영유아 발달 분야와 관련해서 펼쳤던 선구적 연구에 보행 반사와 같은 관점을 적용시켰다. 아돌프와 동료들은 연구 중의 한 조사에서 28명의 영유아를 대상으로 기어 다니기 전부터 걸음마를 떼는 날까지의 발달 과정을 추적 관찰한 뒤 ‘분석 후 종합’ 방식을 활용해 자료를 검토했다. 그 결과, 기어 다니기에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아기들은 무려 25가지의 다양한 경로를 따랐는데 각 경로마다 독자적 동작 패턴을 띠었고 모든 경로가 걷기로 발전했다. 
(.....) “모든 아기는 몸 움직이기 문제를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큰아이가 6개월 되었을 즈음부터 집 앞에 있던 문화센터에 갔다. 다 같이 아기 사자 자세로 있던 아가들이 한두 달이 지나면 하나둘씩 바닥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 딸만 빼고. 9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는 앉을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앉은 자세를 취해놔도 균형을 못 잡고 기우뚱하더니 이내 아기 사자 자세로 돌아왔다. 


무릎이 새카매지도록 기어다니는데. 잡고 일어서는 것도 되는데. 왜 앉지만 못하는 거지? 처음에는 의아하다가 조금 지나니 불안해졌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아기의 성장단계 책을 찾아보니 보통 7개월이면 혼자 앉는 게 정상이란다. 7개월에는 배밀이를 한다. 8개월에는 도와주면 선다. 9개월에는 가구를 짚고 일어선다. 그런데 큰아이는 혼자 앉고 배밀이를 하는 7개월 발달 과정이 없었다. 불안해서 맘카페 등에 검색을 해봐도, 못 걷는 애는 있어도 못 앉는 애는 없었다. 


11개월에 들어선 어느 날, 아이는 언제 못 앉았냐는 듯 턱하니 혼자 앉았다. 그게 뭐라고, 햇빛이 드는 거실에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잘 크고 있었구나. 14개월에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아이는 지금도 튼튼한 다리로 어디든 걷고 뛰어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서 앉는 자세가 불편했던 것 같다.(미쉐린 타이어 같은 올록볼록 허벅지였다........) 


평균적인 아이의 발달 과정은 엄마에게 자녀 발달을 가늠하는 유익한 도구이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는 아니다. 아기들의 성장 속도는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각양각색으로 다를 줄은 몰랐다. 때로는 발달 과정을 뛰어넘기도 하고 다른 순서를 따르기도 한다는 것까지는, 첫 아이를 키우는 초보 엄마가 알 방도가 없었다. 


걷기까지의 발달 경로가 5가지도 아니고 25가지나 된다는 걸 조금 일찍 알았다면, 그렇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맘카페를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평균이라는 단어가 조장하는 불필요한 불안이 그제야 보였다. 왜 이 때가 되었는데 이걸 못 하지? 이건 하면서 저건 왜 안 되지? 다른 애들보다 우리 아이가 너무 늦되나? 



하버드 교육대학원 교수인 토드 로즈는 『평균의 종말』에서 평균적 인간이란 개념은 허상임을 단언한다. 과학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평균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까지 도입되었을 뿐, 인간은 모두 고유하고 개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1840년대 과학자 케틀레는 병사 5738명의 가슴둘레 측정 자료를 활용, 측정값을 합산해 총 병사 수로 나눈 평균 가슴둘레를 냈다. 인체의 평균값을 낸 최초의 사례였다. 개개인의 특정한 수치는 오류에 해당되고, 평균적 인간이 참 인간에 해당한다는 개념이 이때부터 출발한다.

프랜시스 골턴은 평균 개념에 우월성 개념을 더한 사람이다. 평균적 인간이 참된 인간이라는 케틀러와 달리, 골턴은 평균을 기준으로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나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나며, 인간을 유형화하고 계층화하며 개개인성을 묵살하는 평균주의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사고 체계로 고착화되었다. 지능지수, 키, 몸무게, 연봉, 결혼 연령, 가계 자산- 모든 지표가 평균으로 환산되어 우열을 가린다. 

23년 12월 결혼 정보회사 듀오에서 25-39세 미혼남녀의 결혼 인식을 조사해 ‘2023년 이상적 배우자상’을 발표했다. 이상적인 남편은 178.8cm, 연 소득 6067만 원, 자산 3억 3천만원, 2세 연상인 남성이었고 이상적인 아내는 164.2cm, 연소득 4377만원, 자산 2억 1천만원, 2-3세 연하인 여성이었다. 이상형이니까 실제 평균보다는 훨씬 높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보통 어려운 조건이 아니다. 

평균에 의거한 조사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건과 평균을 비교한다. 모든 항목에서 평균값에 수렴하는 것을 넘어 그보다 우월한 남성과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비교에 비교를 거듭하며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울 인간이 남아 있을까? 모든 면에서 우월한 단 몇 사람을 목표 삼아 살아야 하는 걸까? 

평균주의자 덕분에 인간은 모든 측면에서 우월한, 최소한 평균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 분투한다. 실제로 부모들이 자녀에게 공부시키며 “누가 1등까지 하래?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할 거 아냐?”라고 다그친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하고, 남들 사는 만큼은 살아야 하고, 남들이 하는 때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나 대신 ‘남들’에 맞춰진다. 불안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왜 태어났는지를 물을 수는 없다. 삶은 그저 주어진 조건이다. 다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물을 수 있다. 평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나를 깎고 맞추며 살아갈 것인가? 혹은 나 자신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 모양이 조금 뾰족하거나 뭉뚝하거나 휘어져 평균값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나 자신에서 멀어지지 않는다면, 평균값보다 못할까 불안해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되기 위한 지향점과 방법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작가가, 누군가는 요리사가, 누군가는 과학자가 되어 스스로를 실현한다. 똑같이 작가가 된다고 해도 그곳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경우, 등단하지 않고 독립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 직장인이 취미로 브런치에 연재하다가 출판사 눈에 띄는 경우, 독립출판물로 입소문을 타는 경우 등등. 평균에 연연하지 않아도 길은 많다. 

갈 곳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어느 길로든 갈 수 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무릎이 몇 번 깨지더라도, 중간에 길을 잃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아이가 걸을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그 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 남들과 다르다고 불안해질 때마다, 나는 25가지의 경로로 기고 배밀이하는 아기들을 떠올릴 것이다. 기어코 일어나 한 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무수히 달랐을 별똥별의 경로들을, 궤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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