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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Jun 03. 2024

[불맞말 04] 신 대신 시인으로 살아보기

<쓰는 기분>, 박연준

저는 시를 읽을 때, 쉬운 외국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고 읽어요. 가령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문장 앞에서 막막해지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쉬운 어휘로 이루어진 동화책을 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르는 단어가 간혹 나올 수 있겠지만 무시하고 계속 읽다 보면 ‘조금은 알겠는데?’ 하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잘 읽히면! 새로운 언어 하나를 ‘서투르게 가지게’ 된 것 같아 기쁘지요.

<쓰는 기분>, 박연준 





큰아이가 쓴 글을 보면 ‘좋아한다’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다섯줄을 쓰는 동안 다섯 번이 나올 정도로. 다른 단어로 바꾸어 쓰도록 유도해봤는데, 아이는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난감해 했다. 오감을 활용해보거나 은유를 써보라 알려줘도 개운치 않은 표정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대체 어떤 말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이야?”


생각하기 귀찮아서나 어휘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정말로 좋을 뿐이었다. 점심이 맛있어서, 무지개를 봐서, 쪽지 시험을 100점 맞아서, 친구랑 신나게 놀아서....... 이래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설명이 필요 없는, 환하고 뜨겁게 행복한 마음 그 자체를 아이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정 반대의 어린이였다. 무언가를 ‘마냥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좋음에는 언제나 조건이나 반전이나 실망이나 불안이 따라붙었다. 좋긴 한데 부담스러워. 이건 좋지만 저거 때문에 별로라 전체적으로 좀 그래. 좋기도 하면서 불편해. 좋은데 곧 사라질까봐 겁나........ 


이건 좋아. 이건 싫어. 두 개의 짤막한 단어로 툭 포스트잇을 붙이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내게는 많은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좋다, 싫다’와 반대편에 있는 말.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그래서 온통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하나로 꿰어줄 말. 


그런 말을 찾다가 닿은 곳이 시였다. 내가 시를 찾아간 건지 시가 나를 찾아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네루다도 시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니,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대학교 내내 시를 읽었지만 취직하고 시를 잃는 데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고 아이를 키우는 오랜 시간 시를 읽지 않다가, 그림책 읽던 엄마들과 시 읽는 모임을 함께 한지 어느새 4년이다. 한 달에 한 권 시집을 읽고 만나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는 모임. 시를 좋아하고 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하여 ‘호시탐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방학을 제외하면 1년에 8권씩 읽으니, 벌써 서른 권 넘는 시집을 이들과 함께 읽어냈다. 


간간이 새 멤버가 들어온다. 감꽃처럼 수줍게 웃으며 첫 마디를 꺼낸다. “저는 시를 잘 모르는데요.” 그러면 우리도 웃으며 말한다. “저희도 시를 잘 몰라요.” 시를 잘 알아서 여기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잘 모르겠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읽는다. 잘 모르겠는데, 체기가 풀리는 것 같아서 읽는다. 잘 모르겠는데, 좀 알 것도 같아서 읽는다. 


세상은 뭐든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 관심분야가 아닌 것조차도 모르면 뒤처지는 것처럼 여긴다. 모호하지 않게 말해야 한다. 감정조차도 한 마디로 규정해야 한다. 기뻐, 짜증나, 서러워. 그런데 다들 어떻게 모든 걸 다 알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지. 아니, 정말 모두 다 알고 있고 자신만만한 건 맞을까?


확신과 확언의 시대에 베이고 데인 사람들이 시의 보건실로 찾아든다. 시는 몰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몰라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재미있고 상품이 뭔지 몰라서 재미있는 보물찾기처럼. 몰라서 즐거운 눈으로 시를 읽어내려 갈 때 덤불 밑에 떨어진 쪽지가 눈에 들어온다. 시의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비스듬하고 희끄무레한 획으로 쓰인 쪽지.


갸우뚱하며 읽다가 “아!” 하며 입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다. 내 얘기인듯도 하고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얘기인듯도 하고 우리 엄마 얘기인듯도 한, 그래서 지나치지 못하고 걸려든 단어가 있다. 확신하지는 말자. 1년 후에 똑같은 시를 읽으면 다른 곳에서 다른 이유로 “아!” 소리가 흘러나올 게 틀림없다. 그렇게 잠시잠깐만 알아차려도 괜찮다. 시의 보건실에 들를 때마다 우리에게 꼭 맞는 그날의 처방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 알아야 한다는 불안, 다 알고야 말겠다는 강박이 우리를 지치게 할 때 모르는 시인의 모르는 시집을 펴든다. 20년, 30년 살고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다. 심지어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흔 노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알면 신이게? 신 대신 시인으로, 시인이 안 되면 시 읽는 이로 살고 싶다. 모든 것을 아는 체 하는 사람보다, 모르는 채로 하나씩 알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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