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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Oct 01. 2022

(2-3) 나의 나무, 나의 하리

나무처럼 걷는 사람 

걸어서 5분 거리에 단골 꽃집이 있다. 드나든지 5년쯤 되었다. 꽃이 금세 시드는 여름에는 쉬어가지만, 한 달에 두세 번쯤 꽃집에서 꽃을 고른다. 오늘은 어떤 꽃을 사야지 생각하고 갔다가도 막상 그날의 꽃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오렌지 거베라 너무 예쁘다, 노랑과 하늘색 조합이 화창한 봄날에 딱이네. 


꽃을 살 때는 내 마음에게 조용히 묻는다. 어떤 꽃이 눈에 쏙 들어오니? 무슨 색이 필요하니? 그 색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드니? 매일 바뀌는 마음 정원에 오늘의 꽃을 심어주는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꽃다발의 끈을 풀고 투명한 화병에 나누어 꽂으면, 살림살이로 너저분한 식탁도 잠깐 연초록의 잔디밭이 되어주었다. 

꽃 대신 식물을 키우는 게 낫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꽃은 매번 돈이 드는 데다 시들면 처치 곤란하니까. 시든 꽃은 일반 쓰레기에 넣기도 음식물 쓰레기에 넣기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 식물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꽃을 사서 꽂기 시작한 건, 내가 식물 보는 건 좋아하지만 키우지는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집 앞에 오는 식물 트럭에 설레 화분을 들이곤 했다. 카랑코에, 호주매화, 미니철쭉, 수국........ 하지만 한 철이 다 지나가기도 전 예외 없이 모두 죽어나갔다. 약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대부분 내게 문제가 있었다. 물 주는 걸 잊기도 하고 바람이 잘 안 들기도 하고 직사광선을 오래 쬐기도 하고....... 식물 애호가들이 발로도 키운다고 하던 다육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호들갑 떨지만 금세 무관심하고 매정해지는 사람, 나. 몇 번이나 비슷한 죄책감을 경험하고는, 다시는 식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집에 데려온 꽃다발은 매일 물을 갈아줘야 한다. 플라워 푸드(줄기로 물을 흡수하는 꽃을 위해, 도관 막힘을 방지하고 세균 번식을 억제하며 당분을 공급해주는 역할)가 없으면 설탕을 녹여 부어도 좋다. 물을 갈 때마다 줄기 끝은 비스듬하게 살짝 잘라준다. 별 거 없다. 물 버리고 줄기 자르고 시원한 물 채워서 제자리에 갖다 두는, 기껏 1분의 움직임이 해야 할 일의 전부다. 


그런데 젖은 목화솜 이불처럼 늘어져버렸던 그 해 여름에는, 그 짧은 1분을 내어주기가 이불 속에서 나오기만큼이나 힘겨웠다. 시들어가는 꽃이 눈에 안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물을 갈아줘야지, 생각도 했다. 문제는 입력값은 있는데 몸으로 출력이 되질 않았다. 남편이 “꽃 이제 치워야 하지 않아?”라고 말해야 마지못해 손을 움직였다. 꽃을 사러 밖에 나가는 일은 용케 하면서 왜 물은 못 갈아줄까. 무기력의 첫 신호는 언제나 시든 꽃으로 찾아왔다

무기력이 찾아오면 커다란 걸 못하는 게 아니다. 폐를 끼칠까 두려워 일이나 큰 약속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낸다. 그렇기에 밖에서는 내가 우울이나 무기력을 겪고 있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서서히 말라붙거나 굳어가거나 얼어붙는다. 꽃에 물 갈아주기, 화장솜 버리기, 빨래 개기, 음식물 쓰레기 치우기....... 일상의 톱니바퀴가 느려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멈춰 선다.     


모든 것이 원래의 속도로 흘러가는데 나만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 흘러가는 느낌. 어긋난 속도를 도저히 다시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에 손바닥에 땀이 났다. 그럴 때는 좋은 것, 예쁜 것들은 피하게 된다. 나같이 시들고 마르고 얼어붙을까봐. 더위에 금세 고개가 꺾이고 줄기가 무른 꽃을 바라보며, 한동안 꽃은 사지 말아야지 결심하던 무더운 여름이었다.      




식물이 되어 보는 기분     



오사다 히로시의 <심호흡의 필요>에는 작가가 어릴 때 생일 선물로 받았던 여름귤나무 한 그루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멋진 나무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나무라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벅찬 기분이 들었다. 잎이 무성한 여름귤나무를 보면, 마음이 돌아왔다. 
(,....) 지금은, 산도 강도 없는 마을에서 살며, 직사각형의 방에서 지낸다. 영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옳은지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잘못을 저지른다면, 자신의 잘못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방에는 한 그루 작은 귤나무 화분이 있다. 그것은, 생일날 나이를 세지 않게 된 뒤로 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준 선물이다.

- “선물”, <심호흡의 필요>, 오사다 히로시 

생일에 나이를 세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더라. 아이들이 없었다면 케이크 촛불에 불 붙이는 일조차도 없이 넘어갈 정도로 생일에 무감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반은 아직 어리고 반은 폭삭 늙어버린 기분으로 버티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글을 만났다. 이런 갈팡질팡한 나이에 내 나무 하나 키우면 중심이 좀 잡힐까. 부푼 마음으로 검색창을 열었다가 이내 화면을 닫았다. 여름귤나무는 노지에서 키우는 과실수라 초심자가 키우기 수월한 나무는 아니란다. 나무는 무슨 나무야. 남들 다 키우는 다육이도 죽이고 마는 똥손이. 


그래도 이 글을 읽은 후, 언젠가는 나에게 나무 선물을 주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같이 자라고 같이 나이 드는 친구를 만들어야지. 지금은 아니고 아이들이 크면, 손이 덜 가게 되면,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선물은 계속 미뤄졌다.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참으라는 소리도 커졌다. 베란다에서 말라 죽었던 수많은 식물들의 얼굴과 손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뻗었던 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하지만 4년만에 꽃에 물조차 갈지 못하는 허수아비 인간이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한 그루의 귤나무였다. 겨울날 이불 속에 들어가 까먹는, 입 안에서 톡톡 터지던 귤 맛처럼 또렷한 나무의 몸이. 영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그때야말로 귤나무가 필요했다. 꽃은 물론 자신마저도 망가뜨리기만 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살릴 수도 있기를 바랐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지 석 달쯤 지난 초봄이었다.  


하귤나무는 식목일에 선물처럼 우리 집으로 왔다. 짙은 초록색의 아기 손바닥만한 둥근 잎들. 옆구리 늘려 기지개 켜듯 한쪽으로 쭉 뻗은 가지, 남편 주먹보다도 큰 주황색 하귤 하나. 여름 夏자를 써 나무의 이름은 하리로 지었다. 나는 하리를 위해 겨울 내내 꽁꽁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마다 1분도 안 걸리는 작은 움직임. 작고 말없는 존재가 나를 위해 창문을 열어주었다. 그건 집 안으로 온 세상을 들이는 수평선 같은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즉각 반응해줘야 하는 아이들 돌봄에 지칠 때, 식물은 보채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고요한 부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채는 것은 내 몫이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주고 잠들기 전에는 바람 틈만 남기고 창문을 닫아준다. 겉흙을 만져보고 물과 영양제를 주고 뿌리파리 약을 뿌려준다.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햇볕을 쬐면 연두색 잎이 올라오고 물을 주면 뽀글뽀글 뿌리가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여야만 들리는 조그만 소리가 귀여워, 잊지 않고 물을 챙겨준다.


한 마디도 없는 식물의 요구와 돌봄이 조금은 낯설다. 꼼짝 않고 선 저 안에서 물과 영양분이 오가고 광합성을 하고 꽃을 피울까 말까 가늠하고 뿌리를 더 크게 뻗고 있겠지. 하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가 없어 나는 자주 눈을 감고 상상한다. 비가 와도 구름이 많아도 햇빛이 강해도 투덜대지 않고 움직이는 하리의 몸속을. 꽃 피고 열매 익지 않는 계절이 길어도, 살아 있는 자체로 하리는 푸르고 아름답다.   


꽃집에서 아름다움만 골라 즐기는 일과, 아름다운 존재를 돌보며 같이 사는 일은 전혀 달랐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진짜 몸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하리를 가꾸는 일은 나를 가꾸는 일과 닮아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공급해주고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일. 매일 지치지 않고 열심히 햇빛과 바람을 먹는 하리와 잘 살고 싶어, 밖으로 나가 바람과 햇볕을 쬐었다. 돌아오면 하리에게 물을 주면서 나도 깨끗한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럼 내 몸에서도 뽀글뽀글 물 마시는 귀여운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온통 하리의 친구들이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나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도 사랑스럽지만, 하리를 만난 이후 철마다 천천히 또 빠르게 변해가는 나무 친구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꽃이 피면 꽃이 펴서, 꽃이 지면 꽃이 져서, 잎이 푸르러지면 푸르러져서, 붉은 잎이 떨어지면 또 붉은 잎이 떨어져서- 어느 계절에고 바람 맞고 햇볕 쬐고 물마시며 씩씩하게 서 있는 녀석들이 매번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자리에 뿌리내린 게 아니라 분명 두 다리를 움직여 걷고 있는데, 인간이나 동물이 아니라 식물의 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의 속도와 상관없이 오직 나에게 꼭 맞는 걸음 속도로 바람의 온도를 재고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꼭 내 키만한 나무. 딱 나만한 나무라고 생각하면 나무의 세계에서는 분명 어릴 테니까, 어린 아이처럼 열심히 먹고 크게 숨쉬며 팔을 휘저어도 된다는 씩씩한 응원가가 들려오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와 물 한 잔을 마신 후 하리의 동그란 잎사귀 위에 맥박을 재듯 두 손가락을 대었다. 쿵쿵 뛰지는 않아도, 물기 머금은 도톰한 두께와 매끈한 잎면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걸. 살아 있는 것에게 살아 있는 것이 줄 수 있는 말 없는 위로도. 그렇게 나는 매일 문을 열고 걷는 사람이 되었다. 생일은 씩 웃고 지나가는 게 끝이더라도, 하리와 만난 식목일만큼은 기념하고 싶은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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