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디카페인 삶

정신 차려야 하는 미래의 나 대신 지금 행복하고 싶은 현재의 나를 위해

by 안개향

한의원에서 제일 먼저 금지한 건 카페인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커피, 초콜릿, 녹차, 콜라 등등. 다른 건 다 어찌어찌 참을 수 있는데 커피를 마시지 말라니 난감했다. 대학생 때 이후(그때는 자판기 믹스 커피가 대부분이었지만) 커피는 늘 옆에 있던 짝꿍이었다. 임신 기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 임신 기간 동안 커피....... 마시면 안 돼요?”

“현대인이 커피 안 마시고 어떻게 살아요. 나도 애 셋인데 다 마셨어요. 하루 한 잔은 괜찮아.”


괜찮다는 의사 선생님 말을 믿고 하루 반 잔씩 커피를 마셨다. 입덧과 임신성 당뇨로 마음껏 먹을 수 없던 그때, 커피 반 잔은 유일한 기쁨이었다. 커다란 몸을 끌고 지옥철에 올라 사람들 사이 부대끼며 회사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후우 한숨을 돌리며 커피 한 모금 마실 때. 이미 반쯤 줄어든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하루를 시작할 시동을 걸었다. 회사 다니는 동안 간간히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을 앓아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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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할 때는 또 어떻고. 엄마들끼리 카페에서 만나면 “커피 안 마시면 육아를 할 수가 없다.”며 쓰게 웃었다. 등원 준비에 정신없는 아침에 한 잔, 노곤해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오후에 한 잔, 아침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에너지를 내기 위해 커피를 수혈했다. 많은 날은 하루 4잔까지도 들이부었다. 8월 삼복더위에만 아이스 음료를 마시던 나는, 둘째를 낳고 6살이 될 때까지 한겨울에도 아이스 라떼만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속에서 늘 불이 치밀어 올랐으니까.


20대에는 예쁜 카페 가는 게 낙이었는데. 30대에는 커피가 하루의 유일무이한 에너지원이었는데. 그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그러면 하루를 도대체 어떻게 견디라는 거지? 잘 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오늘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무엇으로 연료를 보충하란 말이지?


그래도 해야 했다. 망가진 위를 고치고 고장난 뇌를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첫 두 달은 카페에서 마실 게 없어 난감했다. 커피 안 돼, 새콤한 음료 안 돼, 녹차와 핫초코 안 돼. 그러면 남는 게 카모마일이나 루이보스 같은 티 종류뿐이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음료를 5천원이나 내고 마셔야하다니. 커피의 진한 맛에 길들여져 있는 나는, 슴슴하고 밍밍한 차 맛이 도통 입에 차질 않는다. 사람이 담백하질 못해서 그런가....... 집에도 차 좋아하는 분들께 선물 받은 차가 잔뜩 쌓여 있다가, 손님이 오면 내어드리곤 한다.


한의원에 다녀온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단골 카페 메뉴에 ‘디카페인 가능합니다’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십년 전 임신 기간에 디카페인 커피를 먹어본 적이 있었다. 산미가 너무 강하고 다른 향과 맛은 거의 느낄 수가 없어서 다시는 먹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런 맛없는 커피의 향과 맛의 끄트머리라도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첫 모금. 응? 10년 전에 먹어본, 그리고 최근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먹어본 커피와는 확연히 달랐다. 디카페인이라는 말을 안 했으면 일반 카페 라떼인 줄 알고 마셨을 거다. 꼬소하고(고소한 게 아니다, 꼬소한 거다!) 묵직하고 진하고 향긋하고. 몇 달 만에 먹어보는 커피는 얼마나 황홀하던지! 채 식기도 전에 홀랑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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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수요가 없어 저렴한 로부스타 원두를 사용하고 물로 불려 씻어내며 오랜 시간에 걸쳐 카페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디카페인 원두의 맛과 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라비카 품종을 사용하면서 초임계 이산화탄소 공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카페인을 제거하기 때문에 커피의 향미를 거의 그대로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대신 공정이 하나 더 들어가니 500원 내외 추가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 500원은 얼마든 더 낼 수 있었다, 커피를 다시 마실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나의 ‘디카페인 커피 찾아 삼만리’가 시작되었다. 비록 정신이 번쩍 들도록 도와주는 건 아니지만, 맛과 향만으로 아침을 가득 채워주는 커피를 찾아.



고요한 커피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로 떠난 세 사람은 마흔 살 동갑내기들이었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이다.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자 처음 달에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이다. 특히 마이클 콜린스는 셋 중 유일하게 달에 착륙해보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두 사람이 달에 착륙해 돌아다니는 동안 누군가는 달 궤도를 돌아 동료들을 다시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달의 뒷면을 도는 48시간 동안, 지구와 무선 통신마저 끊겨 '오직 신과 나만이 아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을까. 콜린스 이후 달의 뒷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우리는 그의 머릿속을 짐작할 약간의 힌트도 얻기 어렵다.


정작 콜린스는 달에 착륙하지 못한 데 대해 그렇게까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3년 후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을 맡아 1순위로 착륙할 기회가 있었지만, 관심도 훈련도 더는 싫다며 나사를 그만 두었다. 나였다면? 입방아가 싫어서라도, 부추김에 움직여서라도 갔을 것 같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일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론의 동정까지 받던 그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다른 두 비행사와 비교해서도 가장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다.


달의 뒷면을 지날 때 어떤 기분이었냐는 인터뷰에서 콜린스는 “기분이 참 좋았고 커피도 한 잔 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당당히 수행했고, 오직 신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그 공간에 충실하게 머물렀다. 동료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과 달에 내리지 못한 아쉬움, 교신이 끊어졌을 때의 두려움과 달의 뒷면을 처음으로 본 인류라는 흥분 사이에서도, 그는 담담히 커피를 마셨다.

달.jpg 아폴로 11호 사령선에서 찍은 달 착륙선과 지구


힘찬 에너지를 얻기 위한 커피도, 분한 마음을 삭이기 위해 마신 커피도 아니었으리라. 오직 달과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은 새까만 달의 뒷면 그 자체였을 것이다. 별 하나 없이 어둑해서 거기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던, 이제껏 지구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 온, 앞으로도 누구와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달.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지만, 오직 이곳에서 나만 마실 수 있는 고요한 커피.


나는 저런 마음으로 커피를 마셔본 적이 몇 번이나 되나. 늘 일에 쫓기고 아이에 쫓기고 더위에 허덕이며, 입 속에 털어 넣듯 후루룩 커피를 마셨다. 잘 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어야 하는 순간마다 습관처럼 커피를 찾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카피도 있지만, 그건 진짜 여유라기보다 그 다음 일을 해내기 위한 숨돌림에 가까웠다.


나를 그 순간에 앉혀 두기 위해 마셔본 커피가 언제였더라. 마치 이 세상에 커피와 나 둘만 있는 것처럼.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세상에서 책임질 일이 많아질수록 현대인들은 카페인에 의존한다. 시험 기간에 잠을 쫓기 위해 커피,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중고등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각성효과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잠시, 카페인 과다 섭취는 불면증, 가슴 두근거림, 신경과민을 불러와 자살 충동까지 높일 수 있다. 내가 우울증을 겪은 데에는 질 나쁜 식사와 높은 카페인 의존도도 한 몫 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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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페인 커피를 먹게 된 요즘은 커피의 맛과 향이 제일 큰 관심사이다.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더 좋다. 어차피 각성 효과는 없으니, 그저 운동 후 아침을 활짝 여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을 줄이면서 새벽마다 심장이 두근대던 일도, 밤에 잠 못 이루는 일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얼굴 가득하던 붉은 염증이 줄었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커피 맛은 계속 즐길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왜 나만 안 되나 안달복달하지 않고, 무언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는 삶. 마흔 살의 나는 이제 디카페인 삶을 꿈꾼다. 달에 못 내려도 좌절치 않고, 달의 뒷면만 봐야 하는 날이 오더라도 절망치 않고.


그래서 이제는 '동네 디카페인 지도'를 열심히 만드는 중이다. 기분 따라 날씨 따라 골라 가는 즐거움을 힘껏 누릴 수 있도록. 나같이 디카페인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도 아마 많을 것이다. 기운을 내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미래의 내가 아니라, 다만 고소하고 쌉사레한 맛에 빙긋 웃을 수 있는 현재의 나를 위하여 매일 아침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다. 카페인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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