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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Apr 26. 2022

퇴사 이야기 - 돈과 퇴사의 상관관계

"재용 과장님 집에 돈이 엄청 많데."

"철호 부장님 재테크로 돈을 엄청 벌어서 회사를 취미로 다닌데."


회사를 다니다 보면 종종 '돈 많은 회사원'들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20대 후반까지는 그런 소문을 진위 여부 상관없이 믿었다. 같은 회사를 다니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느껴져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너무 부러운 나머지 소문의 당사자들을 보면 괜히 '있어' 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30대 즈음되니 많지는 않지만 '정말 돈 많은 사람'을 접할 기회가 생기면서 소위 '돈 많은 회사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안 믿기 시작했다. 내가 접한 '정말 돈 많은 사람'들 중에 회사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사원은 돈을 버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아니라 출처가 어찌 됐든 간에 돈이 많으면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취미로라도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 돈만 있으면 할 게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하루에 노동시간, 출퇴근 시간, 야근/회식 시간까지 하면 거의 12시간에 달하는 귀한 시간을 '남 회사'에서 허비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회사에서 돈 많기로 소문난 사람들은 소문만큼 돈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밌는 건 나도 한 번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 회사에서 몇 천만 원의 목돈이 나왔다. 가만히 두면 내가 그 돈을 이상한데(?) 써버릴 거라는 우리 부모님의 권유로 대출을 받아 전세를 끼고 부동산을 샀다. 지금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나 올랐고, 부동산 정책도 그때와 많이 달라서 몇 천만 원 갖고는 부동산을 살 수 없지만 2010년대 초반에는 가능하고도 남았다.   


그 후 내가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부동산을 사라고 권유했다. '전세와 대출을 끼면 당장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아. 주식하지 말고 부동산을 사. 꼭 투자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결혼하고 들어가서 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 등등. 자연스럽게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부동산 투자자'로 통하게 됐다. 실제로 당시에는 관심이 꽤 있었던 터라 서울에 한해 누군가가 부동산 문의를 해오면 바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정도의 지식도 있었다. 


첫 번째 육아휴직을 한다고 했을 때 회사에 내가 '부동산 재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길래 남자가 감히 육아휴직을 한데?'라는 의문이 나를 따라다녔고 '평소에 부동산 부동산 노래를 하더니 부동산 대박 난 거 아냐?'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말들이 몇 다리를 건너면 '부동산 재벌'이라는 소문이 만들어진다. 무려 '부동산 재벌'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나니 모든 소문이 그렇진 않겠지만 많은 소문들은 그냥 개소리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마지막으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돈은 '자산', 그중에서도 '부동산'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 상가, 아파트, 땅. 이런 것들이 부동산이다. 누군가는 소문처럼 그런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을 살 때 자기 자본이 얼마인지, 빚을 얼마나 냈는지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현금부자라면 100% 현금으로 부동산을 살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부자는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을 내서 부동산을 구입하기 때문에 매월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여기서 돈은 '현금'을 말한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자산과는 별개로 매월 수입이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쟨 돈이 많아서 회사는 취미로 다녀' 할 때 돈은 너무나 막연하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실제로 자산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소유한 자산에서 나오는 수입이 매월 갚아야 할 빚(을 포함한 모든 지출) 보다 적다면 추가 현금 수입을 창출해야 한다. '부동산 많은 회사원'이 빚을 갚기 위해 월급이 아쉬워 회사를 다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런 경우를 한 마디로 하우스푸어라고 한다).  


회사를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말 돈이 많은데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회사 오너 일가가 아닌데도 말이다. 12년 회사를 다니면서 실제로 딱 한 명 봤지만 분명히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그 많은 돈을 활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는 커녕 펑펑 쓰면서 놀고먹을 줄도 모르는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라며 불쌍히 여기던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애써 정신 승리를 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저 각자 사정이 있는 거겠지 생각하고 만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돈 많은 사람 걱정해 줄 힘도 없고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편하고 어떤 면에서는 씁쓸하기도 하다.


내가 퇴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를 물어본다. 하나는 앞으로의 계획. 다른 하나는 믿는 구석. 가령 배우자의 벌이라거나 부모님의 지원, 그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재테크를 통해 돈을 벌어놨는지 등등.


처음 육아휴직을 할 때 '부동산 재벌' 소문과 함께 '아내가 돈을 잘 번다'라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그때는 아내에 대한 소문이 약간 기분이 나빴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내린 결정을 아무 속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평가절하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가장 부족한 걸 이야기한다는 걸 안다. '네 용기가 부럽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용기 없음을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일 것이고, '퇴사해도 된다는 게 부럽다' 말하는 사람은 그저 자신이 어깨에 얹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에 대해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을 뿐이리라.


며칠 전 친한 지인이 나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네 경제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니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네 아내가 우리와 같은 회사원이 아니라 사업을 하잖아.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벌이가 일반 회사원들보다는 더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할 필요 없어. 나도 스스로 그런 질문을 많이 해봤어. 솔직히 내가 서른 중반에, 아내와 두 딸이 있는 가장임에도 큰 대책 없이 퇴사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근데 내 재산이 얼마고 아내 월급이 얼마고 그런 건 결국 그게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거 같더라. 경제적으로 나보다 여유가 있는데 회사를 계속 다니는 사람이 있고, 나보다 여유가 없는데 회사를 나가는 사람도 있어. 누군가는 우리가 백 살까지 살 거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회사에 남아서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백 살까지 살 거기 때문에 당장 회사에서 주는 월급에 얽매이지 말고 더 오래 잘 살 수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어. 똑같은 상황이지만 사람마다 다 살아온 과거도, 성향도 다르니까 결론이 달라지는 거지. 사실 똑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인류가 처한 일반적인 상황이랑 각자가 처한 실제 상황은 다른 거니까.  

아무튼 나는 내가 퇴사하고 당장 지금 우리 가족의 생활에 엄청난 지장이 생긴다거나 가장으로서의 결격한 사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어. 내가 외벌이라거나 절대 회사를 관두면 안 될 만큼 현재의 월급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퇴사를 안 하겠지. 

퇴사 생각조차 안 했을 거야. '할까 말까 할 땐 하고 해도 되나 싶을 때는 하지 말라'라는 말 알아? '할까 말까' 고민은 해도 된다는 전제에 하는 고민이고 '해도 되나?' 하는 고민은 해도 된다는 확신이 없을 때 하는 고민 이래. 내가 퇴사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애초에 어느 정도 해도 되는 상황이니까 한 고민이라는 거지. 맞는 말 같아. 당장 집에 쌀이 없고 애들 기저귀가 떨어지고 유치원비가 없는데 퇴사하면 미친놈이지. 

당연히 내가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을 때만큼 먹고 싶은 걸 먹고 사고 싶은 걸 살 순 없겠지. 하지만 우리 가족이 사치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아내 둘 다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해서 둘이 합쳐 25년 넘게 고생하면서 쌓아온 것들도 있으니 지금보다 조금은 더 아끼면서 앞으로 어떻게 더 오래 건강하고 재밌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있을 것 같다고 '선택'을 한 거야. 

우리 와이프가 똑같이 생각하는지는 모르겠고, 내 상황에서 남들도 똑같이 그렇게 판단할까 하면 나도 모르겠어. 대신 고민만 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뭐든 해서 돈을 벌어야겠지."


우리네 인생은 너무나 입체적이어서 돈이 많고 적음도 상대적이지만 돈이 많든 적든 사람마다 하는 선택도 상대적이다. 자산이 많더라도 월급을 제외한 현금 창출을 못 하면 회사를 다녀야 하고, 자산이 없더라도 현금 흐름이 좋아 월급이 크게 의미가 없다면 회사를 관둘 수 있다. 아니,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어느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사실 한 가지 더 있어. 내가 5년 전에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육아휴직 두 번 하면서 지금까지 버텼잖아. 육아휴직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이제 이 회사에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이 회사에서 주는 월급만이 내가 이 회사를 다니는 유일한 이유다. 나는 승진도 바라지 않고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인정도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최대한 일을 하지 않고 월급을 받아 가는 것뿐.'

실제로 그렇게 회사를 다녔어. 연차도 높아지고 아랫사람도 많이 생기니까 적절히 일을 분배하고 의사결정만 잘 내려주면 크게 할 일이 없더라고. 욕심이 있으면 일이란 건 끝도 없지만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할 일이 없는 회사야. 다른 능력 있는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하거든. 

언제부턴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재미도 보람도 없이 내 소중한 인생을 회사를 다니면서 허비해야 하는 거지? 내가 정말 그 월급이 아쉬워서 회사를 다니는 건가? 나는 정말 이 회사를 나가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두려워서 이렇게까지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자존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냥 '월 500만 원짜리 인간'이 되어버린 느낌. 고작 그런 가치의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

내가 받는 그 월급이 절대 적은 돈이 아니라는 건 알아. 내가 회사를 나가면 내가 자신이 있든 없든 당장 또는 영영 그 정도 돈을 벌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내가 '월 500만 원짜리 인간'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이 회사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


12년 전, 250만 원의 월급으로 시작해 어느덧 한 달에 500만 원을 받고 한 가정의 가장의 되었지만 나는 회사를 떠나려고 한다. 500만 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적게 벌더라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자는 희망 섞인 다짐과 함께. 


그런데, 지난주에 통장에 찍힌 월급을 보니 퇴사를 한, 두 달 정도 늦출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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