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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May 24. 2023

아들말고 남편말고 아빠말고 나는 누구인가

밀리에디터클럽 네번째 미션

내 삶은 교과서였다. 아니, 이건 너무 건방지니까 ‘비교적 교과서적’이었다. 초등학교 때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수영 선수를 했다. 국제학교 때 배운 영어는 중학교때 받은 토익 985점, 외고진학, 대학생 때 캐나다 교환학생으로 선발에 필요했던 토플 점수, 그리고 훗날 받은 토익 만점까지 내 삶의 필요할 때 마다 크나큰 자양분이 되었다. 고등학교는 외국어고등학교를 갔고 대학교는 서울대학교를, 그리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오면서 한 학년을 꿇었지만 그로 인해 받은 이득은 내가 납득할만큼 기대 이상이었으며, 그 외에 진학과 취업에서 재수는 없었다.


 

순전히 부모님의 ‘강력한’ 인도와 주변 지인들의 조언으로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는 비교적 큰 투자를 했고, 그 투자가 지금 부자는 아니더라도 금전적으로 떳떳할 수 있는 아빠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서른 갓 넘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만나 결혼해 딸 둘을 낳았고 어느 덧 첫째는 초등학교를 둘째는 유치원을 갈 나이가 됐다.


 

그 과정과 이면에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고통과 번뇌, 후회들로 점절되어 있지만(아주 살짝만 말해주면, 스무살 때부터 불면증, 평화로울 땐 변비 그러면 안될 땐 과민성대장(=급똥),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악관절 통증, 강박증, 우울증, 불안증, 안구건조증, 녹내장, 만성 위염 등등.. 젠장..)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에는 관심 없다. 예전에는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내 고통을 말하곤 했는데 아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런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쟤는 (내가 위에서 말한) 비교적 교과서적인 인간’으로만 생각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의 좋은 점만 기억해주는 데에 감사하고, 그렇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이 부럽다.


 

그런데.. 요새 난 떠나고 싶다.



 

누가 인간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안 변하는데 나만 그런건가? 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좋은 쪽이 아니라 안 좋은 쪽으로. 순화해서 말하면 인생에서 길을 잃었고, 직접적으로 말하면 망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원했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교과서적인 삶을 살고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되려 살면서 처음으로 내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내가 정말 원하는건 뭐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태어난 가족과 탄생시킨 가족들과 함께 쌓아온 것들을 부정하거나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난 항상 지금 가진 것들에 감사하고 내 능력에 비해 많은 걸 받아온 인생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왜 떠나고 싶을까. 왜 지금까지 살아온 거와는 다르게 살고 싶을까.


 

나에겐 없고 다른 사람이 가진 걸 원하는 느낌은 아니다.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감정을 미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엄밀히 말하면 처음에는 나에게는 없는 것들에 눈이 돌아가는 듯 했지만 사실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미련이 마음 속에 자리잡더니, 그 미련이 점점 커지면서 지금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는 지경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굳게 믿어왔던 내가 바라던 인생, 그리고 내가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내 가정을 위해 살며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왔다. 만족도 했지만 육아에 정신이 없기도 했다. 아이들이 적당히 크니 비교적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의 틈으로 공허함이 스며들어왔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가능성 또는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 공허함을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지지 못 한 것, 특히 가질 수 있었는데 가지려고 하지 않은 것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것들은 가지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내가 가진 장점은 잘 웃는거랑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라졌다(다행이 웃는건 아직 잘 웃는다. 웃음이 헤픈 내가 너무 좋다). 비교를 하다보니 자존감도 낮아지고 자괴감도 심해고, 후회도 많이 하게 되고 그런게 반복되다 보니 강박증이 생겼고 그 뒤로 불안증과 우울증이 뒤따라 날 덮쳤다.


 

가끔은 나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술도 마시고 취미생활도 가져봤다. 경영대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 마음 속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럴수록 내 자신을 잃는 것 같고 신념들을 스스로 무너뜨리며 점점 더 길을 잃는 느낌이 든다. 인생은 권태와 불안 사이 그 어느 즈음이고, 나는 권태보다는 불안이 더 낫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불안하기까지 하다. 과연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밀리에디터 클럽 네번째 미션은 밀리의 서재에 있는 밀리로드의 글을 읽고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을 선정하고 포지안을 제안하는 미션이다. 솔직히 처음부터 어떤 글을 읽더라도 표지안은 못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난 디자인에 재능이 없는데다 포기도 빠른 사람이니까. 그래도 밀리로드에 올라온 글들을 시간이 날 때 마다 읽었다. 재밌는 글도, 잘 쓴 글도 많았다. 읽으면서 이런 걸 재능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되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정한 글은 “쓰리잡 아빠의 꿈 도전기”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글을 읽자마자 글을 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0


 

예전에 브런치에는 퇴사나 육아 등 너무 똑 같은 이야기 밖에 없어서 질린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난 브런치에 그런 글들이 많아서 좋았다. 아마추어적이어서, 나랑 생각이 비슷해서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읽을 때는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써보려면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수준의 글들. 그리고 나는 ‘아무나’가 아니라 ‘누구나’ 중 한 명이 되고 싶다는 자극.


 

“쓰리잡 아빠의 꿈 도전기’는 아빠로서의 꿈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꿈 이야기여서 좋았다. 나도, 조금 더 방황하겠지만 언젠가는, 거창하지 않더라도, 꿈이라고 부르기 민망할지라도, 아니 그게 꿈이 아니더라도 다시 온전한 나의 길로 돌아오고 싶다.


#밀리의서재 #밀리에더터클럽 #밀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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