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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Dec 21. 2024

기다림의 미학 같은 소리

No thanks

지인 중 답을 초고속으로 보내는 인물이 있다.


의사로써 하루에 백 명 넘게도 환자를 보면서

회진, 수술, 대학 강의, 학회 일정을 감당해도,

이메일이건 카톡이건 거의 즉시 답을 보낸다.


처음에는 너무 빨라 당황했다. 이메일 회신이

실시간 채팅급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바쁜지, 다른 직업군 보다, 게다가 그 병원은,

얼마나 환자가 많은지 나마저 잘 알고 있는데

모든 지인 중 항상 가장 빠른 회신을 해주었다.


물론 수술중이거나 진료 시에 답을 할 순 없다.

그러나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빠른 답을

한다는 신뢰가 수년 간 쌓이다 보니, 아주 만일

늦어진다면 이유를 몰라도 가장 납득이 되었다.


그로부터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성의'이다.


상대에 대한 성의, 예의, 최선.

제대로 된 답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일단 확인 후 어떤 답이라도 보내는 인물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빨리 대답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무 핑계댈 수 없게 만들며

상대가 나와의 관계나 대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 줄 척도까지

될 법한 태도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싶기도 했다.


물론 예외도 있고 몰아 짚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느 정도 비례한다.

당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혹은 상대

입장을 얼만큼 배려하고 있는가에 대한 결과물.


예컨대,

고3에게 수능 결과가 카톡으로 온다면 아마도

필시, 카톡이 안 와도 몇 번이고 확인할 것이고

카톡 답을 10초 안에 보낼 시 월급이 두 배라면,

그는 10초 안에 보내는 연습도 해 볼 것 아닌가.


- 어떻게 답을 그렇게 빨리 보내주세요?

 저 처음에 답멜 너무 빨리 와서 당황했어요.

- 성격이 급해서 그래~


- 엇, 바빠서 카톡 나중에 보실 줄 알았는데..

- 응, 워치로 먼저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나는 수면 시 폰을 끄거나 비행모드로 바꾼다.

작업 시 폰을 멀리 두고 컴퓨터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인물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꽤

빠른 확인과 답을 보내는 편에 속한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존중이라 여겼기 때문에.


시간이 안 되면 다시 연락한다는 말이라도 보내

상대를 쓸데없이 기다리거나 지치게 하지 않는

그것이 나의 일반적 행동인데, 생각해 보니 아마

나도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 '답이 신속한' 인물과의 소통은 가장

유쾌했고, 여러모로 인정과 존경이 점점 커지게

되었던 것 같다. 드물게, 본받고 싶은 인품이고.


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존재하기 마련.

완전히 오해해 놓고, 밤 늦게 읽은 후, 그때부터

시작하는 인물의 등장은 바쁘고 지친 내 연말에

겹악재와도 같았다. 나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상대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의 이익을 줄

수 있다 하여도 조용히 마무리를 지을 생각까지

들 정도로 하루가 상당히 어려웠다. 참고로 나는

'힘들다' 표현을 삶에서 열 번도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살 적에 나름 평온했던 나의 삶 가운데,

최근 조금은 과한 산만함이 들어온 건 분명했고

그 데미지를 최소화 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첫째가 '말을 줄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줄이면 말도 줄겠지만 나는 생각이 많다.

생각이 지나칠 때에는 주기도문을 하면 될 테고

입술은 아무래도 연말까지 닫아두기로 정했다.


글도 말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기는 어려울 테니

조금은, 자제하기로. 인스타 deactivate를 하니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솔직한 심정은,

남은 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고프지만 맡겨진 것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군말없이 해야겠다.


신이 보는 선과 악은 인간의 기준과 다를 때가 있고

오늘 나는 그것을 매우 명료하게 맛보게 된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선하거나 착하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장 경계한다. 합당한 이유를 다

적기에 아무래도 오늘 밤부터 말을, 아껴야 하겠다.

그나마 말보다 글이 역시 좋고, 글이 있어 다행이다.


오늘 견디어 내느라 수고했다. 고생했다. 잘 참았다.

이제부터는 잘 자, 라고 한 번은 내게 얘기해 주련다.



네 입을 경솔히 열지 말며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급하게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하게 할지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나니 그런즉 네 말 수를 적게 할지니라. Ecc.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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