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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an 22. 2021

정선생님의 질문

고립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코로나 확산세가 다시 심해지며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된 지 이제 6일째다. 4학년 아들의 책상은 수업을 위한 노트북, 학교에서 나눠준 학습지, 마시고 난 물컵들이 뒤엉켜 어지럽다. 아이의 물건 사이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생뚱맞은 행정봉투 하나가 섞여 있다. 봉투 안에는 깊게 눌러쓴 정선생님의 손글씨가 적힌  연푸른색 얇은 책이 담겨있었다.


‘낮은 기대 속에 성장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모두가 격차를 이야기할 때, 고립을 걱정합니다.  정 00 드림     


 정 선생님은 제주를 잠시 떠나 서울교육청 파견근무를 했던 2017년,  내가 속했던 정책연구 TF팀의 일원이었다.

그 겨울 회의마다 진초록의 구식 패딩점퍼에 회색 백팩을 메고 나타난 그는 평상시에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했지만, 회의 시에는 시종일관 문제의식과 예리한 논리가 돋보였다.

  

‘여전히 그 시선은 아픈 곳을 향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메시지가 담긴 책을 펼쳐본다.    

  

책의 제목은 '능력주의와 불평등'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는  책에서  현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는 '배움이 느린 학생'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뀐 학습부진아, 빈곤이 인위적으로 집중된 동네에서 사는 아이, 물건을 모으는 습관이 있는 장애가 있는 엄마, 이런저런 물건이 가득 차 있어 사적 공간이란 없는 집, 바퀴벌레가 나오는 아이의 가방.      


겨울이라서 그런지, 더욱 아득하고 시리게 다가오는 현수의 이야기에 더해 정선생님이 묻는다.


‘현수는 개인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저기 거실에서 애플 탭을 들고 뒹굴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랩 가사를 연신 흥얼거리는 아들과 외진 동네 놀이터 칠 벗겨진 그네에 앉아 있을 현수의 모습이 교차되며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타고나거나 우연적인 요인들을 생각해본다.  돌봄이 부재되고 학습에서도 소외된 현수의 이야기가 우연이 아닌 듯 아프게 다가온다.


 그동안 교육학에서 강조해 온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담론은 이제 비현실적 환상이 된 지 오래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사회성 발달에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이제 진부할 만큼 익숙하다. 부모의 장애와 빈곤, 학습부진을 동반하고 있는 현수가 지금의 동네를 벗어나기는 요원해 보인다.     


일상이 허물어지고 예측불가한 재난의 시대, 갈수록 가장자리로 몰리는 수많은 현수들. 내 아이와 같은 세대, 이웃이 되어 살아갈 이 아이들의 삶이 건강하지 않다면 그 사회의 안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선생님은 이미 자신의 전작 ‘교육학의 가장자리’에서 “지금 우리가 교육문제라며 고민하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많은 문제들이 개인이 고통과 불안을 모두 혼자 감수해야 하는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고, 주거가 불안정하고, 노후 대책을 세우기가 어렵고, 의료 보육비 정규직 문제가 상존하는 상태에서 좋은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며 좋은 교육에 대한 상상력은 좋은 사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결국 그는 내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교육현장에 있는 동료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는 어때야 할까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와 격차가 더욱 가속화되는 미래는 모든 교육이 대학입시로 귀결되며 끊임없이 서열화하는 경쟁구조로는 대응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함께 나누는 상생의 구조로 만들어 가야 한다. 무엇보다 이웃에 대한 공감과 자발적인 지원으로 엮인 따뜻한 공동체의 연결과 촘촘한 복지 안전망이 우선순위.


모서리에 있는 현수와  현수 가족에게 능력에 의한 차별이 아닌 '필요에 의한 분배'로 사려 깊은 돌봄을 실행해야 한다. 삶의 중심부에 함께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수의 삶이 건강해야 맞물려있는 내 아이의 삶도  함께 튼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함께하는 삶이 현실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공감과 지원에 아울러 사회구조를  고민하고 더불어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이 자리의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고립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연대의 힘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내 아이가 추워질 때면, 곳곳의 정선생님들이 돌보아 주리라는 신뢰를 담아 질문에 대한 답을 힘주어 적어 내려간다.


서울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아이를 보듬는 시선, 그 신념을 보내온 정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연결되어 그 삶을 빚지고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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