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에 가 닿는 공식이란
“분임장님, 자주 가시는 ‘주민상회’에서 맥주 한잔 사드릴게요”
쌍꺼풀이 짙고 속눈썹이 길어 우수가 깃들인 인상에 말수도 적은 후배 ‘K’의 메시지였다. 학습공동체 분임을 대표해서 협의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2019년 10월 초입의 오후.
매달 두 번 있는 공식 모임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딱 자기 몫만 하는 무뚝뚝한 그녀의 제안은 느닷없었지만 반가운 마음으로 주민상회로 갔다. 근처에 사는 같은 학습공동체 ‘주민’ 두 명도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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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공동체명은 ‘같이&가치 스꼴라’였다.
‘왜 항상 공론의 장에서는 입 다물고 뒷담화만 무성한 거지?
‘왜 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정당한 문제제기를 못하는 걸까?’
학습공동체를 시작하며 떠올린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었다.
‘괸당문화’로 불리며 한 다리 걸치면 서로 다 아는 친족 사회인 좁은 섬 지역, 제주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니 좋게 좋게 넘어가자 한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다로 눈감아서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완전 동의하는 터라 우리를 멈춰서게 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싶었다.
‘노안이라 글자가 안 보인다’는 분임원들의 한탄을 모르쇠 하며 ‘같은 책 함께 읽기’를 강행했다. 매일 질문하나! 대답하나! 를 통한 입 트임도 시도했다. 문제제기를 주저하는 습성을 ‘이용’함과 동시에 ‘타파’하고자 하는 영악한 제안이었다. 책이 주는 배움에 함께하는 시간과 신뢰가 늘어가며 질문과 대답이 쌓여가는 우리의 여정은 긍정적이라 자평했건만,
부딪치는 맥주잔 너머로 추억과 담론이 오가던 그때, K의 투명한 솔직함이 대화의 온도를 바꿨다.
“와 닿지 않아요”
서늘한 첫마디 뒤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업무에 짓눌려 헉헉대고, 집에 가면 녹초가 되는데 업무와 무관한 책을 읽고, 매일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건 민망하고 뜬구름 잡는 것 같다고요. 구성원 간에 갈등이 큰 업무에 대해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잖아요.”
기껏 애쓴다고 응원한다며 만나자더니, 빠른 성과를 좇는 그녀의 조급증, 성급한 실용주의가 섭섭하게 다가왔다.
그날 밤, 마음 한편은 발끈했지만 반면엔 대견함도 있었다
‘말 수 적던 그녀의 솔직함 역시 일종의 진전 아닌가.
어떻게 하면 내 의도가 그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녀는 10여 년 전 급작스런 발병으로 장기간 병휴직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업무 고충 외에도, 원거리 근무지를 오가는 불만, 공무원 동기들과의 승진격차에 대한 부담은 다른 분임원들과 농도가 달랐을 것이다. 학습공동체에도 자발적이 아닌 강제 권유에 의해 참여한 것임에 말해 무엇하랴...
드러냄이 없다면 대화도 다가섬도 없다. 그녀가 본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내보였듯이 나 역시 ‘같이 & 가치’의 의미를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책 읽기도 질문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동행하는 시간의 힘에 기대는 다가섬이다.
느린 보폭이었지만 우리는 꾸준히 서로에게로 향했다.
함께 읽기를 통해 정작은 세상을 읽는 다양한 해석을 배웠고, 매일의 수행과제였던 질문하나! 대답하나! 는 서로를 선명하게 이어주는 특별한 스토리로 남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직의 목적과 상충하는 갈등이 준 실망과 좌절도 있었다. 하지만 발표회 준비과정의 의견조율에서 사무관 선배에게 ‘절대 반대!’라며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용기는 함께하며 숙성되어온 동행의 성과였다. 우리는 해가 지나서도 서로에게 좋은 삶의 경험과 배경이 되어주는 벗으로 연결되어 있다.
김윤나는 책 ‘말 그릇’을 통해
‘타인의 말을 담는 그릇이 넉넉하려면 한 가지 공식에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공식의 차이가 결국 ‘인간성과 우열’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과 공식’의 차이라는 것을 알면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라고 전한다.
상대의 의도를 내 공식으로만 해석하며 응답하는 방식은 갈등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말과 나아가는 걸음에 사람을 담고 싶다면 소신을 솔직하게 유지하되 시선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가 경험한 삶의 배경에 관심을 두고 그가 말하는 공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갈등은 부드럽게 완화되며 서로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잘 지내?‘
오늘은 유난히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랜만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잘 지내요. 지금 퇴근길 넘 힘드네요..’
빠른 기척, 간단한 답문이 그녀의 환대임을 이제는 안다.
나와 다른 그녀만의 쿨한 ‘공식’을 이해하니 짧은 안부인사가 편안하게 와 닿는다. 질퍽한 눈길에 차들이 뒤엉키는 퇴근길, 그녀의 짙은 눈웃음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