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Catkr Feb 20. 2019

기록이 없는 과거에 대하여


오래전 학부 시절의 일이다. 

한겨울, 일출을 보겠다고 동해안에 여행을 간 진우와 나는 

너무도 도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강원도의 시내버스가 9시경에 끊길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고, 

목적지로 삼았던 강원도 최북단까지는 예닐곱 시간을 걸어도 모자랄 거리가 남아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기엔 남은 거리가 너무 길었고, 

겨울에 강하다고 자부한 건지, 아니면 젊음의 패기인지 

우리는 무작정 최종 목적지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농담 따먹기나 하며 계속 차도를 따라 걷다 보니 자정을 지나 새벽 내내 걸음을 내달렸다. 


그러다 그대로 계속 걷다간 해변에서 일출을 못 볼 거라는 계산을 하게 된 어느 새벽 즈음에 

결국 택시를 탔고 얼마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수 시간을 계속 걸었다. 

그 수 시간 동안 너무 추워서 내 입술이 다 터졌고, 

피곤했는지 심지어 일출마저 놓친 채 잠을 계속 자버렸다. 

그게 10년이 넘은 이야기가 되었고,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강원도의 겨울밤 내내 걸었는지 지금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심지어 하도 어두워 사진 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그 여행은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여행이었다. 


적어도 그런 기억은 남겨져 있다. 


Oct. 2018, E100VS, Tempe


기억하는 과거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늘어가는 걸 서서히 느낀다. 

그나마 성실하게 삶을 기록하는 편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많은 기억들은 증발했고, 

좋거나 나쁘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때에 대한 흐리멍덩한 인상만 남는다. 

기록이 없는 과거란 그렇게 단편적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과거란 본인이 망각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할 뿐, 

그런 기록이 없는 과거들로 거의 이뤄져 있다. 


누군가는 망각이 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럼 왜 신은 내 행복한 기억도 왜 잊게 할까. 

분명 선물이라고 들었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캔따개와 진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