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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Catkr Nov 29. 2020

사라진 튤립

May 2019, E100VS, Tempe


거의 10년 전쯤 노르웨이의 Bergen을 여행하던 나는 느즈막한 비 오는 오후에 시장 한가운데서 튤립을 팔고 있던 한 가게를 발견했다. 그 가게의 문 앞엔 튤립을 한 움큼 쥔 여자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게 꽤 특이하다 싶었다. 튤립 자체도 굉장히 큰 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한국엔 튤립이 대중적이지도 않아서, 튤립을 들고 행복해하는 그 여자의 모습이 나에겐 굉장히 서구적이면서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노르웨이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싶었다.


*

그러다 최근에 Bergen에 사는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다가 그 여자의 사진을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 Bergen 사람은 나에게 말하길 내가 방문한 그 해 가을, 가게의 주인이 죽으면서 그 가게는 사라졌다고 했다.


*

마지막으로 그 가게를 본 이후 Bergen을 방문한 적이 없다. Bergen에서 온 사람들과 만난 일도 몇 번 있었지만, 그것도 그 여행이 끝난 몇 년이 지나자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튤립 가게도, 내 기억도, 내가 가졌던 노르웨이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그 이후로 서서히 사라진 셈이었다.


*

요즘의 나는 애리조나의 사막에 산다. 튤립도, 비 오는 오후도, 정 붙일 것도 없는 사막에 산다. 매정한 장소에서 생명을 부지하며 사는 마른 풀이 듬성등성난, 그런 사막에 산다. 그리고 그런 마른 풀처럼 나도 학교에서 살아간다. 집에서 사막으로 나와 간신히 정이 깃들만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진 한 장을 찍어봤다. 언젠간 이곳을 어떤 식으로든 기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는 이런 풀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누구도 그런 풀이 전부 사라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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