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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쮸 Nov 09. 2024

언니가 살해당했다ᆢ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살인사건 유가족의 샛노란 복수ᆢ권여선 '레몬'


권여선 작가는 대학시절 단편소설집을 통해 알게 됐는데,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생의 잔인함과 그로인해 끔찍하게 뒤틀려버린 인물의 심리를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더럽고 추악하며 화가 날 정도로 엽기적인 묘사들,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고, 현실적이었기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눈앞에 억지로 들이밀어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을 때처럼.

그때의 단편소설들은 각각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애벌레처럼 찌르면 톡 터져버릴것 같이 투명하고 도톰한, 물집같은 입술을 가진 여자'나 '정말 맛있어서 더욱  끔찍한 가을배춧국'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선명할 만큼 충격적이다.(단편집의 이름은 '분홍리본의 시절'일 것이다)

이후 그녀의 소설을 더봐야겠다 결심했지만, 자꾸 망설여지다가 최근 도서관에 신청하여 읽은 것이 장편소설인 '레몬'이다. 2019년 출판했을 때부터 읽으려던 것을 5년이 흐른 뒤에야 읽은 것이다.


가뜩이나 소재는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이다. 권여선 작가 특유의 작법을 생각하면 해부학 시체를 눈앞에서 들여다 보고있는 것처럼 얼마나 절절하고 끔찍하게 표현했을까, 또 그만큼 얼마나 진실을 이야기를 할까 기대와 각오를 다졌는데, 생각보다는 노멀했다.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은 세밀하거나 촘촘하지 않았고, 인물의 심리 묘사도 단편집때만큼 적나라하지않았다.(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의외였다는 것이지..)

 다만, 권여선 작가 특유의 묘사는 한토막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뭐랄까ᆢ 똑같이 생리하는 여성으로서 대리 수치심이 느껴질 정도의 현실적인 묘사인데 그래서 아무도 안보는 화장실에서만 저러고 있지만, 그꼴이 혹시나 거울에라도 비친다면 너무 싫을 것 같고,  내가 배출한 피의 빛깔도 냄새도 다싫은데 그걸 어쩌다보니 바라봤고, 하필이면  그때가 언니의 살인 소식이 막 들려왔을 때라는 배경과 또 기막히게 어울린다ㆍᆢㆍ

지극히 현실적인데 지극히 외면하고 싶고,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ᆢ

분명 축복인데 인간 존엄성이 사라지는 출산의 순간이나, 첫 월경을 축하하는 날의 생리통이나, 누구나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걸 알지만 그 비보를 진짜로 들었을 때의 비현실성처럼ㆍᆢ


이후에는 이런 권작가 특유의 표현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쩌다 사건에 휘말린 한만우에 대한 표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시 뇌리에 강력히 남았다.



목발을 짚고도 너무나 능숙하고 정확하게 일하여, 마치 '생활의 달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감탄을 자아내는 한만우의 모습.  그는 아래의 글에서 다언이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만우와 같은 인물들의 생애가 메스컴에 방영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고, 알 수 없는 미안함과 죄악감이 솟아오르면서, 이러고도 신이 있다고 말할 수있느냐고 하늘을 향해 쏘아대고 싶어지는데, 다언 역시 그런 감정을 말한다.

​하지만 멀리서 봤을 때 비극인 한만우의 삶은 가까이서 봤을 때 그렇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그가 몰입하는 순간들은 얼마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는가. 처절하지도, 비참하지도 않다. 그냥 그순간 그자체로ᆢ빛다.


 이것이 바로 권여선 작가가 '레몬'에서 말하는 주제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다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복수 방식에 대해서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죽은 해언을 아무데서나 속옷도 안입고 '무릎세워 다리 벌리고 앉는 여자'로 그려낸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긴 했지만, 꼭 그래야만 했나?

다언이 그 사실을 알고 죽은 언니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던 것처럼 많은 독자들도 '저러니 흑심품은 남자한테 죽임을 당하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모든 강간살인 피해자들은 남자를 암묵적으로 유혹하는 헤픈 여자처럼 보이게끔 한다. 그녀의 죽음이 자업자득의 결과로 보여져서 애도하고 싶은 마음 조차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2차 가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꼭 그렇게 묘사해야 했다면, 납득할 만한 배경이라도 설명해줘야 했다. 대체 고3이 되도록 수치심도 없이, 성에 대한 상식도 없이 그렇게 팬티도 안입고  앉아있는 머저리가 몇이나 될까?한참 예민할 나이의 사춘기 소녀가ㆍᆢ( 그 엄마가 때려가며 교육했는데도..)

 정말 지능이 한참 떨어지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않고서는 비현실적인 부분이다. 단지 강간살인피해자에게 오래 전부터 씌어온 '헤픈 여자'라는 클리쎄일 뿐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ᆢ


(분노에 가까운) 아쉬움은 깊게 남지만,

긴 여운을 남긴 레몬..


보길 잘했다고,

잘 짜여진 작품이라고,

시작과 끝이 한만우인 것도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싶은 소설이다.


복수의 빛깔이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이라는 것까지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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