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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Mar 01. 2021

죽어서 아름다운 것들

찰나를 향한 경배


영원:
1.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
2. 보편적인 진리처럼 그 의미나 타당성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
3. 신이나 진실성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기원전부터 인간들을 매료한 개념이 있다. ‘영원’. 시간이라는 개념을 수치화하기도 전에 인간은 영원부터 갈망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리며 영생을 꿈꿨고 영원히 죽지 않은 신들의 존재를 만들어내 영원을 상상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시작된 영원에 대한 집착과 환상은 신화의 모습으로 또는 종교의 모습으로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이다.

죽음의 무게

 무엇이 죽음을 두렵게 만드는가. 스스로 죽기 전까진 간접적으로 밖에 체험할 수 없는 죽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이 꺼려지는 건 죽음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브슨은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너무 나 급격하게 일으키고 몹시 무섭고 우울한 결과를 가져오므로, 인간 경험에서 이에 견줄 것이 없고 그 유사한 것도 지상에서 찾을 수 없다. 죽음은 맨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다른 사건을 모두 능가한다.” 또한 죽음 뒤에 오는 당연한 것들 역시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는다. 죽음이 남긴 흔적들 말이다.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에 견디기 힘든 냉소적이고 비극적인 흔적을 남긴다. 죽은 자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는 특수 청소 회사 ‘하드웍스’ 김완 대표의 책 [죽은 자의 집 청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은 이가 남긴 것과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는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죽음 현장에 드러난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이유를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죽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숨통을 조이는 죽은 자의 자기소개 같은 냄새, 박테리아가 증식하여 부풀어 오르다 터지는 장기, 몸의 구멍 밖으로 흘러나오는 온갖 액체. 생전의 모습이 어떻든, 방치된 죽음은 외면하고 싶은 형태로 우리의 육체를 잠식한다.


죽음의 유한성

 

물론 죽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와 미라로,  현대인들은 장의 행위를 통해 죽음의 흔적을 덮기 위해 노력한다.  나라마다 존재하는 장례 절차는 죽음이 할퀴고 남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일종의 치유 행위이자 죽음을 잊고 죽은 자를 마음속에 살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그러나  무엇도 죽음을 막거나 지울 수는 없다.  모든 일보다 선행되어야  일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시선을 바꾸는 일뿐이다.


 유형의 존재들은 영원하지 못한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생명을 잃고 생명이 없는 것들 역시 형체를 잃는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휘둘러지는 시간이라는 낫은 현재를 잘라 과감히 과거로 던져 우리의 형태를 조금씩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곱씹기보다 죽음을 인정하고 곁에 둘 수 있어야 한다. 임종의 순간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삶이 보이는 법이다. 죽음 그 자체는 두려움을 주지만 유한하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그러하고 한 순간 피었다 지는 꽃이 그러하다. 인위적인 빛보다 자연적인 빛을, 조화보다 생화를 사랑하는 건 죽음이 만들어낸 유한성 때문이다. 우리의 생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이 없다면 생도 빛을 잃는다. 죽음이 있기에 생이 아름다워지는 아이러니함이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찰나의 경이로움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에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삶을 “감각의 영속적 가능성”이라 정의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삶의 ‘항존’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생동감 넘치는 우연들과 짧지만 강렬한 감정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찾아오는 작은 찰나들. 죽음이라는 끝을 알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찰나들을 사랑하고 또 그 찰나들을 살아간다. 한 가지 중요한 건 우리가 꿈꾸는 영원 역시 이러한 찰나가 축적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영원을 꿈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찰나가 쌓여가는 순간들을 지켜보고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는 영원의 일부를 맛볼 수 있다. 당장에 잡기 어려운 덧없는 영원을 쫓기보다 언젠가 영원이 될 지금 이 순간들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일. 이 경이로운 찰나들을 놓치지 않는 행위가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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