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 D+303 2019. 6. 6. (목)
<리나와의 재회>
ㆍ 확실히 애인이 없는 삶은 심심하고 무료했다. 한국에 있지만 굳이 누구를 만나고 싶지는 않고, 컴퓨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잠시 시간이 남아 일본행을 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화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가려고 하니 오전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공항으로 마중을 못 나온다고 했다. 엄청나게 서운했다. 앞으로 얼마 만나지 못할 남자친구이고, 또 한국에서 일본까지 날아가는데 친구와 미리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공항으로 나와 주지 않는다니. 불만을 토로했지만, 본인에게 나는 1번이 아니란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오후에 도착하니 리나는 공항에 마중을 나와 준단다. 공항에서 만나 짧은 키스를 나누었다. 역시, 만나면 다 풀리는구나. 리나에게 주려고 한국에서 구매한 선물을 건넸고 우리는 浅草(Asakusa)로 향했다. 확실히 거리낌이 많이 없어진 듯 보였다. 처음에는 스킨십을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이제는 도로나 대중교통에서도 크게 마다하지 않는 듯했다.
'Asakusa'로 향하는 길, 현지인과 함께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어로 쓰여있는 간판만 보아도 신기하고 설렜는데, 어느덧 일본어로 대화도 술술 하고 이제는 애인도 생겨 그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새삼 새롭고 신기했다.
저녁을 튀김으로 끼니를 때우고 Tokyo Sky tree로 향했다. 전망대로 올라가기엔 가격도 가격이지만, 시간도 부족했고 사람들 줄도 많이 서 있어서 전망대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어느덧 밤이 늦어 Tokyo Sky tree 주변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했고 하룻밤을 보냈다.
ㆍ 다음 날은 お台場(Odaiba)에 위치한 TEAM LAB의 프로젝트 전시장에 가기도 했다.
Odaiba에서는 그녀가 가고 싶어 했던 전시장으로 향했다. EPSON TEAM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너무 참신하고 좋았다. 은하가 쏘이는 트램펄린에서 뛰기도 하고, 우리가 그린 그림이 스캔되어 바닥과 벽면에서 뛰놀기도 하고. 생식하고 죽기도 하는 작은 생태계를 보며 즐기기도 했다.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여럿 있었고,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세련된 공간이라 생각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개중에 차를 마시는 공간이 있었는데, 차를 받는 순간 차 위로 빔프로젝터 빛을 쏘아 영상으로 꽃이 피기도, 지기도 했다.
너무 신기해서 찻잔의 위치를 바꾸어 보아도 똑같았다. 너무 신기했다. 만약 카페를 연다면 이런 아이디어에서 모티브를 얻어 접근해도 괜찮을 듯 보인다. 반딧불이처럼 천장에서 초록빛을 계속 쏘아도 되고. 어쨌든 너무 예쁜 공간도 많았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도 많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참 만족스러웠다.
ㆍ 나와서는 일본 관서식 식사로 저녁을 해결하고 Yurikamome 전철을 탄 뒤 豊州(Toyosu)로 향했다. 이미 알아본 주변 호텔에 들어갔지만 이미 만실이라 다른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ㆍ 다음 날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일본식 아침밥을 먹었다. 계란밥을 처음 먹어 보았는데, 너무너무 비렸다. 그다음엔 六本木 (Roppongi)로 가 같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대구로, 그리고 집으로. 고맙게도 리나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고, 왜일까 리나는 헤어지는 길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ㆍ 헤어지는 길은 언제나 아쉽다. 리나가 스리랑카로 돌아온다면 정말 끈끈하게 다시 만나봐야지, 서로 많은 감정을 나누어야지, 생각했다. 조금 더 진득하게 사람을 만나야지, 리나가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올 날을 기다려야지, 생각했다.
ㆍ 그런데 다음 날 리나에게 전화가 오더니, JICA는 스리랑카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또다시 새로운 국면이다.
파견) D+314 2019. 6.17. (월)
<스리랑카 복귀>
ㆍ 스리랑카에 들어오기 전 리나는 JICA가 복귀하지 않는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 사실 극한의 상황에서 유일한 나의 낙이 되어 준 존재가 여자친구인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멀어지게 되다니. 무슬림들이 터뜨린 폭탄 테러에 우리가 헤어지는 나비효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결국, 앞으로 만나기 힘들다는 이유로, 다시 우리는 멀어지기로 했다.
ㆍ 마지막으로 아버지 별장에서 준비한 BBQ 파티를 끝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슬슬 하기 시작했다. 다시 스리랑카. 1 달이라는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구나. 당초 계획과 달리 지인들을 몇 만나진 않았다. 언제나처럼 다들 만나러 돌아다니기엔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다.
이제는 익숙해진 인천 공항에 도착해, 또다시 우리 단원 모두를 만나 스리랑카로 출발했다. 아무렴 두 번째라 그런지 설렘이나 긴장감은 다 사라지고 없더라. 비행기를 타서는 졸도한 듯 잤다. 왠지, 무척 피곤했다.
ㆍ 스리랑카에 도착해서도 변함없이 소장님을 뵙고, Cinnamon Red Hotel에서 조식을 먹은 뒤 언제나처럼 익숙한 마을로 복귀했다. 마을의 풍경은 별반 달라진 게 없지만, 옆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는 것. 그래서 약간 씁쓸해진, 스리랑카 생활.
ㆍ 어울릴 사람들도 따로 없기에 일단은 2기 후임들과 매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주말은 하루 종일 자고, 먹고, 게임하고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다.
파견) D+325 2019. 6.28. (금)
<새마을 사업 설명회에 출발하기 전에>
ㆍ 새마을 사업 설명회가 오늘 콜롬보에서 아침 10시부터 시작된다. 아침 시간에 콜롬보까지 가려면 새벽같이 출발해야 하므로 거의 뜬 눈으로 밤새우고 출발을 기다리는 중이다.
ㆍ 리나는 아프리카로 최종 파견지가 결정 났다. '보츠와나'라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위에 있는 널찍한 국가였다. Maun이라는 마을에 간다는데, 전기 / 수도가 모두 열악한 '진짜 아프리카'로 가는 듯 보인다. 꼭 한번 놀러 오라는데, 정말이지 놀러 가고 싶다.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토록 바랐던 아프리카행의 첫걸음을 뗄 수 있지 않을까. 부럽기도, 조금은 신기하기도 하다. 정말이지 나는 스리랑카 파견이 끝난다면, 아프리카로 기꺼이 날아갈 의향이 있다.
ㆍ 그 외로 스리랑카에서 지내고 있는 KOPIA 단원들을 만날 예정이고, 스리랑카 현지 또래들을 만날 예정이고, UNV에 근무하고 계시는 '최찬' 선생님을 잠시 뵐 예정이다.
ㆍ 최근 문화 충격받은 것이 하나 있다. 스리랑카의 여자아이들은 첫 월경을 하면 동네잔치를 한단다.
가히 충격적인 문화였다. 첫 월경을 하고 마을 잔치를 한다니. 나중에야 이유를 들어보니 이제 아이에서 여자가 되었으니 가볍게 다가오지 말라는 것을 알리는 행사이기도 했다. 가히, 뼈가 있는 행사였다.
우리나라에도 경사(慶事)가 있고 조사(弔使)가 있듯, 스리랑카도 그러했다. 월경 행사는 조사라고 생각하여, 마을 회계 직원 사만띠는 곧 친척 동생이 100일을 맞아 잔치가 있다며 이 행사는 참석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8살 소녀였다.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요즘 스리랑카 여자아이들의 초경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고 있다는데, 패스트푸드가 주원인으로 추측하고 있는 듯하다.
ㆍ 현지 장례 문화도 사뭇 다르다. 내게 익숙한 장례식 풍경은 시신을 관에 모셔놓고 영정 사진을 보며 절하거나 헌화를 하는 것인데, 스리랑카에서는 시신을 바깥에 꺼내 손님들에게 보인다. 장례식에 참여한 이들은 시신을 마주한 채 명복을 빈다. 부의금 문화는 없지만 대신 장례식장에 방문할 때 과자를 조금 사서 간다. 고인에 대한 조의가 끝나면 상주와 인사하고 과자와 차를 대접받는다. 미리 사서 간 과자는 다음 손님을 위한 것이다.
참 적응 안 되는 문화이지만, 스리랑카에 있으면서 돌아가신 분을 참 많이 만나게 되었다. 물론 내가 평균 연령대가 높은 농촌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탓도 있지만, 여태껏 5~6번의 장례식에 참여했으니 꽤 많이 본 셈이다. 스리랑카는 열대 국가이다. 그래서 사시사철 덥다. 계절의 변화는 없지만, 우기(雨期)와 건기(乾期)는 존재한다. 건기보다 우기에 상대적으로 날씨가 더 추워지는데 그때 많은 사람이 돌아가신다고 한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시신을 마주할 일이 많이 없었다. 짧은 기간 스리랑카에서 생활하며 마주한 시신을 보며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잠든 이들은 모두 미소를 띠면서 편히 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인이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던, 혹여 가난했든지 부유했든지, 꿈을 이뤘든지 이루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참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며 느끼는 것이 참 많았다. 정말 모든 것을 놓은 이는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파견) D+328 2019. 7. 1. (금)
<벌써 반년>
ㆍ 2019년의 딱 절반, 올해의 반환점을 돌았다. 스리랑카 생활은 아직 반도 못 했다. 군대에 이어 스리랑카의 삶도 무척이나 길다.
ㆍ 스리랑카에 와서 처음 아팠다.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프고, 식욕도 없고, 먹으면 위산과 함께 구토하길 며칠, 퇴근할 때 즈음 되니 오한에 열까지 심하게 났다. 푹 쉬고 싶은 마음에 일찍 퇴근해 쉬었는데, 오랜만에 걸린 몸살이라 많이 힘들었다. 결국, 당일은 거의 아무것도 못 먹고 침대에서 사경을 헤매다 겨우 다 나은 듯하다. 근데 나뿐 아니라 단원 4명이 모두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재성이 형도 두통에 설사에, 동규와 동호도 다들 그다지 상태가 좋지는 않았던 듯. 먹은 것 중에 무엇이 잘못되었긴 한가보다.
ㆍ 그러다 보니 벌써 JLPT 3급 시험이 전날 코앞으로 다가왔다. 7월 7일 오전 10시. 대비를 크게 안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 있는 건 또 아니지만, 그냥저냥 조금씩 쌓아온 것이 있으므로 그렇게 또 불안하지는 않고, 합격점이 그렇게 높지 않기에 약간의 기대도 하는 중이다.
파견) D+335 2019. 7. 8. (월)
<JLPT 응시>
ㆍ 2019년 전반기 JLPT N3 급에 응시했다. N3 급이면 그래도 일본 교환학생은 떠날 수 있는 수준인데, 최종 목표는 N2 + JPT 700점이다. 이 정도이면 어느 정도 스펙으로 이용도 가능할 듯하다.
ㆍ 어쨌든 당일 BMICH(Bandaranayake Memorial International Conference Hall)에 도착했다.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책의 처음 부분은 꽤 많이 풀었지만 중간 부분부터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준비해 갔다. 뭔가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긴다. 시험장에 아침 10시까지 도착하라는 공지를 받아서 갔더니 입실이 10시이고 본격적인 시험은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쳤다. 예상대로 동양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시험 감독이나 여타 준비 위원 중에 동양인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없는 것 같았다.
시험장에는 필기구, 물, 수험표만 반입 가능하단다. 그래서 BMICH 입구에 짐을 두었고 지갑이나 다른 귀중품들은 감독관에게 맡겼다. N3 급을 응시했는데 시험은 총 3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실 뒤쪽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고 안내 사항은 영어로 한 번, 싱할라어로 한 번 얘기하더라. 교실에 있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감독관님이 도움을 많이 주시더라. 체크를 두 번 세 번 해 주시기도 했다.
ㆍ 시험 응시 이후에 KOICA YP(Young Professional) 선생님 두 분과 튀김 덮밥, Dilmah Tea 한 잔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파견) D+338 2019. 7.11. (목)
<교환학생 준비>
ㆍ 나는 내년 8월 인턴 계약이 끝나면 바로 1년간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나머지 1년은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졸업 이후를 도모하려 했다. 그 첫걸음으로 JLPT 3급을 응시했고, 올해 안으로 TOEIC이나 JLPT 2급을 응시하려 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치는 TOEIC을 한국에서 인정을 잘 안 해주는 듯 보인다. 그리고 만약 교환학생에 합격하더라도 스리랑카 현지에서 각종 행정 제반 사항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지금 제일 가고 싶은 곳은 단연 남미 쪽. 스페인어 권역. 콜롬비아나, 칠레나, 페루나. 남미를 다녀온 모든 분이 다들 칭찬을 자자 하기에 어떤 세상일까 너무 궁금하다.
하지만 스리랑카에는 남미와 관련된 대사관이 몇 없다. 대사관을 몇 개 거쳐야 하는 행정 처리들이 있는듯한데, 스리랑카 현지에서 진행하는 건 무리인가 싶기도 하고.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남미는 고사하고 일본이라도 가야겠지만, 일단 지금 내가 떠나고픈 곳은 남미 쪽이다. 영어 공인 인증 성적은 IELTS로 인 것은 충분히 스리랑카에서도 지원 가능한 듯 보인다. British Council(영국 문화원)도 있고. 일단 1년 남았으니 천천히 어학성적 만들어 보자.
파견) D+345 2019. 7.18. (목)
<휴양>
ㆍ 소장님 내외, 글로벌 청년 새마을 지도자 1, 2기가 함께 Bentota에 다녀왔다. 이번에 묵은 숙소는 Taj Resort. 확실히 생활비를 여유롭게 받고 있다 보니 이런 Resort를 이용해 보는 기회와 경우가 많아진다. Hikkatranz by Cinnamon부터 시작해서 Vivanta by Taj, 다음에는 Geoffery Bawa의 호텔도, Shangri-la의 호텔도 전부 누려보고 싶다. 해외에 나와서 좋은 건 이런 리조트 숙박 경험이 많아지는 것. 스리랑카에 있는 동안 리조트를 돌아다녀 봐야지.
ㆍ 휴양지로 유명한 Bentota, 생각보다는 급히 숙소 예약이 진행되었고 다행히도 예약 만석이 되기 전 방을 3개 잡을 수 있었다. 140,000원 정도로 동규랑 같이 방을 쓰면 10,000루피 정도 내면 되었다. Bentota의 외진 곳에 있는 Taj Hotel을 가기 위해 콜롬보 소장님 댁에서 동규 생일 기념 겸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잔 후 Bentota로 출발했다.
Taj Hotel은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 Private Beach도 가지고 있는 5성급 호텔이었다. 5성급에서 묵어보는 건 처음인 듯.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해변에는 빨간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래도 탁 트인 느낌. 마치 미국 San diego의 Colorado 해변에 다시 온 것 같았다. 커다란 건물에 내부도 정결, 깔끔한 분위기도 좋았다. 바다에서 놀고, 수영장에서 놀고, 다트도, 보드 사커도, 탁구도 재미있게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밤에는 깔루아 밀크 한 잔에 잠까지 푹 잤다. 휴양도 잘한 듯.
ㆍ 다음날은 휴가라 Lipton Seat 트래킹을 가 보려고 했지만, 체크 아웃도 늦고 2~30분 정도 할 줄 알았던 Boat Safari도 2시간 이상 소요되는 바람에 Haputale 행은 무산되었다. 그 대신 KOICA YP들이 Hikkaduwa, Weligama 여행을 하고 있길래 그곳으로 갔다. 같이 저녁도 먹고 물놀이도 하고 서핑도 타고 놀았다. KOICA YP들이랑 많이 친해진 듯하다. 나중에 국제 개발 협력의 길로 나가려면 KOICA YP도 도움 많이 된다는데,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
파견) D+365 2019. 8. 7. (수)
<요즘 드는 생각 / 파견 1년 차>
ㆍ 파견된 지 만 1년 차를 맞이했다. 50% 반환점을 도는데, 정말 길고 길었던 1년이었다.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사람, 적지 않은 충격을 맛보았다. 앞으로 1년 더 잘 지내보자, 스리랑카.
ㆍ 점점 미래에 대한 생각에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 드디어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
최근 깨달은 것은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이 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글 쓰는 건 잘하고, 또 좋아하고. 음악은 좋아하지만, 잘은 못 하고. 국제 개발은 좋아하진 않지만 잘할 자신은 있고. 지금 생각에는, 글과 음악을 묶을 수 있는 '작사가'라는 직업에 엄청난 관심이 간다. 음악을 못 하더라도, 가사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쓸 자신이 있다. 끈기 있게 오랫동안 창작을 이어나갈 자신이 있다. 'Finale' 등 악보 채보 프로그램을 익히고, 꾸준히 악보와 가사 분석을 하며 혹시 찾아올 기회를 향해 슬슬 준비해 보자.
ㆍ 파견 1년 차를 맞으며 휴가를 소진했다. 원래는 휴가 동안 스리랑카도 한 번 돌아볼 겸 동행을 구했다. 베트남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30대 초반 누나였는데, 스리랑카에 들어오기 이틀 전 직장에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해 버렸고 그렇게 내 휴가 일정은 붕 뜨게 되었다. 청승맞게 혼자 스리랑카를 방황하긴 싫고, 소장님 댁에서 3일간 묵으며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고 오랜만에 운동도 하며 땀도 쫙 뺐다.
중간에 JLPT 시험장에서 만난 아이들과 차를 한 잔 마셨는데, 그 아이들과 친해져서 같이 해변도 걷고, 요 며칠간 등하교도 같이하면서 지냈다. 짧게나마 '일과 관련 없는' 여자아이들을 만나 보았는데, 사실상 관계를 지속하긴 힘들어 보였다. 일단 생활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관계로 무언가를 하려면 내가 다 지불해야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리나와 만날 때는 서로에게 그래도 외국 생활인지라 새로움과 재미가 있었는데, 이 아이들과 있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감도 잘 안 잡히고, 무엇보다 공유하는 감정이 적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생각 외로 얻는 것들도 꽤 많다. 일단 스리랑카 사람들에 대한, 특히 스리랑카 여자에 대한 환상이 없어졌다. 누구를 만난다 한들 관계 유지가 참 힘들어 보인다. 운동, 헬스도 열심히 하고 영어와 일본어, 음악 실력도 팍팍 키우자.
기윤아, 1년 축하한다. 고생했다.
파견) D+374 2019. 8.16. (금)
<무료>
ㆍ 무료하다. 무기력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의지도 없다.
ㆍ 혼자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여행을 다녀왔다. 'Dambulla'의 'Pidurangala'라는 곳으로. 목적지는 단 한 곳, 그곳. 산 중턱에 올라가 광활한 숲길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혼자 숨을 헐떡이며 돌산을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너무나도 시원했다. 이 바람이 내 마음도 같이 실어 가 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대체로 만족한 Pidurangala 산행이었다. 조금만 더 괴로움을 참고, 다시 걸어가야겠다.
파견) D+379 2019. 8.21. (수)
<한 걸음씩>
ㆍ 어떻게든 의미 있고 힘차게 하루를 보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학원도 알아보고 있고 이따금씩 일본어 공부도 하면서 꿈을 향해 한 글자씩 적고 있는 작사 분석이라던가. 근무 시간인 낮보다 혼자의 시간인 밤이 가득 차니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워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작사 분석은 생각보다 아주 재밌다. 와인병을 곁에 두고 한 잔씩 홀짝이며 명반의 가사를 볼 때면 마음속 문장이 줄줄 나온다. 꼭 매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내 노력을 기울여야지. 참고로 오늘 한국 바로 알림 서비스의 '대한민국 바로 알림단 10기'에 1차 합격했다. 이런 활동들을 거쳐 가면서 조금씩 더 의미 있는 시간을 쌓아 가야지.
ㆍ 내 부하직원 수주버는 며칠 전 약혼을 했다. 만난 지 며칠 안 되어 약혼에 결혼 준비까지. 이곳 결혼 문화가 이런 건가 싶다. 아직 약혼자와 스킨십도 많이 안 해 본 듯한데, 과연 이렇게 결혼해도 행복한 결혼 생활 이어갈 수 있을지. 또한, 사만띠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우리 사무실을 떠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공무원이 되었는데, 곧 있을 선거 때문이란다. 공공기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여 경제를 진작하고 동시에 표심을 끌어모을 작정인데 결국 나라의 비축된 재산을 쓴다는 그것밖에 되지 않고 현재 각 나라에서 차관을 받아 가며 연명하는 국가인데 이렇게 국가 예산을 쓰는구나 싶다.
파견) D+385 2019. 8.27. (화)
<새마을 리더 해외 봉사단 선생님들의 일시 귀국 / 주말>
ㆍ KOICA의 승인을 얻어 송봉주, 선신호, 주용식 팀장님이 약 3박 4일간 스리랑카로 복귀하셨다. 일요일 새벽 입국하여서 마을 이동까지 제반 사항에 대해 인솔을 도와드리고, 마을에 이동해서는 식사 대접 및 업무 브리핑까지. 아주 정신없고 바쁘다.
평소보다 출근 시간이 약간 일러졌고, 평소보다는 일과에 긴장이 많이 된다. 호텔에서 지내고 계시므로 꼭 한 끼는 초대해서 대접해 드리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피로도가 많이 쌓인다. 피곤하고, 또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다. 일단, 이 패턴이 목요일까지만 유지되기에 다행이다. 그냥 푹 쉬고 싶다. 이번 주말에도. 송봉주 선생님은 요 며칠이 마지막이다. 또 뵐 일이 있을까. 이렇게 마냥 웃으며 마무리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닌데. 어찌 되었든 이곳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상만 심어주려 노력하시는 모습이 멋지시다.
ㆍ 주말에는 콜롬보에 다녀왔다. 꿈이 '작가'인지라 글을 쓰며 먹고사는 방법을 연구 중인데 그중 '방송작가'도 있어서 그 세계가 궁금해진 차 10년이 넘게 방송 작가에 몸을 담그신 '권정민' 코디님을 잠시 만나 뵈었다. 작사가라는 꿈을 듣더니 충분히 비전 있다며 잘 준비해 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방송작가의 생활, 왜 그만두셨는지, 왜 KOICA에 지원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꽤 자세히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3년이 넘는 시간을 방송작가 생활에 몸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천부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느껴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하셨다. 결혼하거나 나이가 40이 되면 작가 일을 그만두려 했으나 지지부진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중 어쩌다 스리랑카를 겪게 되었고 그 길로 코디네이터까지 풍덩 빠져들었다고 하셨다.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같이 식사도 하고 커피숍도 들렀다가 어쩌다 보니 코디님 집에도 초대받았다. 피아노도 치고 이야기도 듣고 정보 교환도 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ㆍ 이후에는 EXIM Bank(한국 수출입은행) 인턴 '김민주'씨를 만났다. 저녁 시간에 만나 독일식 족발 학센(Haxn)을 먹고 Shangri-la 호텔에서 커피도 한잔했다. 예사 그렇듯 스리랑카 생활, 정보 교환도 하고 곧 있을 KOICA, KOPIA, EXIM Bank, 새마을 세계화 재단 인턴 모임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밝은 성격이라 제법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파견) D+388 2019. 8.30. (금)
ㆍ 새마을 리더 해외 봉사단 선생님들은 귀국하시고 비교적 평안한 주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8월 말 업무는 일찌감치 다 끝내 버리고 일찍 퇴근하여 마음 정리도 하면서 맛있는 중국 음식이 먹고 싶어 음식점으로 왔다. 가파른 3일이었다. 퇴근 후에도 업무 아닌 업무가 이어지니. 이번 주말에는 집에 칩거하면서 하고 싶은 작사 분석이나 잔뜩 해야겠다.
ㆍ 우리 기수의 첫 번째 이탈자가 나왔다. 베트남으로 파견된 김우진, 이남현 단원. 사업을 굴려 보려 온갖 노력을 다했다지만, 일 년간 노력을 기울임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결국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국가별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연히 스리랑카를 택한 것도, 오게 된 것도 참으로 큰 행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