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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Oct 23. 2024

[대학 일지] #29. 3학년 2학기 일기

입학) D+2596 2021. 4.10. (토)


<세상이 무너지고>


ㆍ 어느 날이었다. 아무 문제도, 고민도, 걱정도 별로 없던 그런 날. 2021년 2월 18일 목요일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사학진흥재단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자택 근무 명령을 받아 모처럼 한가한 하루였다. 곧 시작할 Youtube channel, 'Egg studio'의 출연진들끼리 만나서 밥이나 먹자며 목요일 점심 약속을 잡았다. 며칠 전 들린 '새마을 재단'에서 활동 수기를 모으고 있다기에 한가한 날을 맞아 원고를 쓰려했다. 오후 2시의 약속이라 여유롭게 대구 시내로 출발해 원고를 쓰고 있었다. 약속 시각에 다다를 무렵,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나처럼 별 대수롭지 않게 시큰둥하게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심각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많이 안 좋다며 지금 바로 포항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것도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며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만나기로 한 Egg Studio 출연진과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바로 동대구역에 가서 포항행 KTX를 탔다. 그땐 포항에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 KTX라 생각했다. 두 시 십 분쯤 동대구역에 도착했는데, 문득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포항역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갔단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포항역에 내려서 나는 바로 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왜일까. 장례식장 입구에는 친척들이 모여 울고 있었다. 왜일까. 왜 다들 여기 모여있을까. 어머니 얼굴을 보니 비로소 눈물이 났다. 그때까지고 얼떨떨했는데, 작은 이모가 아버지의 핸드폰과 지갑을 가져다주는 순간 조금씩 무언가 실감이 났다. 이내 장례식장에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부의 문자를 돌렸다. 곧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걸리고,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참으로 감사했다. 무엇이라 말은 못 하지만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신 모든 분에게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정말 정신이 없었다. 감염병이 이렇게 돌고 있는 지금 시국에도 우리를 위로해 주시러 많이 찾아와 주셨고 다들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전하느라 온전한 애도를 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손님을 만나고, 울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루는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다음 날, 입관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는데 크게 고통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 보았던 딱 그 모습. 하지만 피부는 그저 싸늘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염을 하고, 시체를 관에 넣었다. 평생 아버지가 누워계실 곳은 저 좁은 관속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손님도 많이 와 주었고, 밤을 같이 새 준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예비 사위이지만 상주 역할을 해 준 언욱이 형도 참 고마웠다.

장례식장에서 정신없이 사흘을 보내고 발인하여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보낸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이내 뜨거운 불꽃에 들어가 바수어진 뼈만 내놓은 채 모두 다 마르고 타버렸다. 불 안에서 아버지의 육신이 타들어 가는 동안 우리는 연도를 하였고, 아버지의 신체는 작은 항아리 안에 모두 담기어 버릴 만큼 작아졌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모작을 경주 진목정 성지에 모셨다.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세상에서 가장 슬펐던 이별은 일단 끝이 났다.


아버지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의사 선생님이 심근경색이 '추정'된다고 했으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심장 문제로 돌아가신 듯했다.

아버지는 아침까지도 참 멀쩡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과 국, 달걀부침을 먹고 평소처럼 출근하여 아침까지 업무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쓰러진 듯하다. '쿵'하며 쓰러진 소리를 들은 동료가 바로 응급조치를 하고 별안간 도착한 응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동했지만 더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바로 응급조치를 해주신 것은 참 감사하지만, 아쉬운 것은 자동 제세동기(AED)가 있었음에도 사용을 못 해봤다는 것이다. '금방 조치를 했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까'라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생의 큰 고통 없이 떠나게 된 점, 집이나 농막이 아닌 회사에서 쓰러져 어떻게든 조치를 한 번 취해 볼 수 있었던 점, 돌아가시기 전날 나의 등록금을 내주시며 마지막 내리사랑을 전해주셨던 점 등이 참 좋은 점으로 기억하고 싶다.


아버지 본인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아침에는 주식 종목을 검색하거나 동료와 농담을 주고받은 문자 이력이 있었고, 동영상을 몇 개 보고, 오후 업무에 관련해서 동료와 전화를 주고받았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흔적이다. 회사에 뼈를 묻겠다며 입사하던 한 청년은 정말 회사에 뼈를 묻었다. 본인의 마지막 순간도, 어찌 되었든 회사였다.


사후에 처리해야 할 일은 정말로 많았다. 보험금 수령부터 각종 명의 이전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신고하고, 그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일을 처리하는 것, 정말 일도 많았고 심적으로도 정말 힘들었다. 꼭 도망가고만 싶고, 하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ㆍ 이후 일상은 돌아왔다. 인턴 생활을 했었던 회사의 계약은 끝났고, 냉정하게도 학기는 시작되었다.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Covid-19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집에서 비대면 수업을 듣고 있다. 그중 '영남 라이프 아카데미'라는 수업은 대면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대구로 갔어야 했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고, 장례가 끝난 이후에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어머니를 잘 챙겨야 한다.'라며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그 무엇보다 클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가 나도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긴 듯하다. 모든 것을 어머니 위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챙기고, 어머니부터 생각하고. 당연히 그만큼 나 자신을 챙기지 못했다. 나도 몰래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언젠가부터 심장 부분이 따끔따끔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잠시 영대사랑 선배인 재원이를 만나 학교 앞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휘청거리더니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재원이에게 '병원에 가고 싶다.'라고 이야기하곤 바로 택시를 타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로 가는 택시는 유난히도 택시 기사님이 여유를 부리시는 듯했다. 경산 세명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신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스트레스성 공황장애'로 보인다고 했다. 이내 나는 곧 괜찮아졌지만 한순간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언제 다시 이 공포가 찾아올까'라는 예기불안이 있었다. 이따금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갑자기 심장이 멈춰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공포가 찾아왔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고 싶거나 우리 집 침대가 자꾸 생각이 났다. 앞으로 내가 '일상생활'이라는 것을 다시 영위할 수 있을까 싶었다. 불안함과 약한 공황증상이 찾아올 때마다 깊은 심호흡 하며 겨우 버텨내었다. 그래도 그 무서운 불안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고 한동안의 생활이 엄청나게 힘들었다. 결국, 신경과에 들러 안정제 처방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며 전형적인 공황증상이라며 지금 하는 그 걱정들은 결코 일어날 일 없을 것이라 확신해 주셨다.


ㆍ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일상 찾기'였다. 집에 그저 가만히 있노라면 계속 무기력하기만 했고 좋지 않은 생각과 의미 없는 시간 보내기가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무리해서 이번 GTEP 사업단에서 진행하는 '부산 국제 식품 박람회'에 참가했다. 부산에서의 약 3박 4일의 일정이었는데 어떻게든 일상을 되찾고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 참가하였다.

나는 주식회사 영풍과 협력하여 박람회장에서 '요뽀끼'라는 제품을 홍보하였다. 시식 메뉴로 치즈 떡볶이를 준비했는데, 향이 진해서인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박람회 첫날 반나절 만에 우리가 가져온 물량 전부를 판매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이전에 받아 온 물량의 3배 정도의 양을 공급받았고 3박 4일 동안 받은 물건을 열심히 판매하였다. 컵 떡볶이를 1,000원에 봉지 떡볶이를 2,000원에 판매하였는데 무려 170만 원 가까이 되는 매출을 올렸으니 정말 많이 팔긴 했다.


나는 여태 박람회라고 하면 도매 구매자를 만나 상품 설명을 하고 도매 계약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도매상보다는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고 물건을 판매하였다. 또한, 박람회에 찾아오신 분들도 거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많았는데 손주에게 줄 간식이라며 몇 봉지씩 사 가셨던 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GTEP 활동은 여느 때처럼 여느 MT와 비슷했다. 밤이 되면 술을 엄청 마시고 밤새 해롱거리다 다음 날 출근하는, 정말 대학생다운 활동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완판을 하고 마지막 날 조금 일찍 마감할 수 있었다. 완판하고 나니 정말 뿌듯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인지. 완판해도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자체로 좋았다. 그렇게 GTEP 단원들과 안면을 텄고, 하나의 즐거움이 또 생겨났다.




입학) D+2609 2021. 4.23. (금)


<관계>


ㆍ 장례식장에 꽤 많은 이들이 찾아와 주었고 나를 위로해 주셨던 지인들을 시간 내어 조금씩 만나며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정말 먼 곳에서 달려와 주신 분도 계시고 밤늦게 찾아와 주신 분도 계셨다. 그들의 작은 마음이 참 큰 힘이 되었고, 정말 고마웠다.

'영남 라이프 아카데미'라고 동원 그룹에서 지원해 주는 특강 수업을 하나 수강하고 있다. 현재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꼭 대면 수업을 하는데, 그곳에서 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수업 내에서는 반드시 동아리 활동을 하나 해야 하는데, 동아리 활동을 하고 조별 활동을 하면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꽤 친해졌다. 여유가 생기면 여름에 같이 MT를 추진하려 한다.

나는 같은 수업을 듣는 '이동찬'이라는 후배와 같이 문화 체험 동아리를 맡아 이끌게 되었다.


또한, 'Egg Studio'라고 대학생이 모여 진행하는 Youtube 활동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출연팀'이라며 영상 출연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알음알음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학과에서는 GTEP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역학부임에도 불구하고 학과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학과 학생들을 잘 모르는데 이번 계기로 정말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Dale Carnegie Leadership Camp에서 만났던 친구들이나 영대사랑 선후배를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이 공허함의 이유는 무엇일까.




입학) D+2639 2021. 5.23. (일)


<변화>


ㆍ 5월이 되었다. 올해 5월의 가장 중요한 일은 단연 우리 누나의 결혼식이었다. 작년부터 그렇게 준비하고 고대했던 누나의 결혼식이 이렇게 찾아오긴 했다. 전날 수업을 마치고 바로 경주로 올라와서 몇 시간 쉬고선 바로 예식장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화장이라는 것을 하고, 전문가 선생님이 만져주신 머리로 예식장에 들어갔다.

예식장에서 나의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혼주인 어머니와 함께 예식장을 찾아와 주신 손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분께 정신없이 인사를 드리고 있다 보니 신부 대기실에 있는 누나와 사진을 한 장 찍지 못하고 바로 예식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식장 내의 정원은 100명이라며 갑자기 직원이 예식장 입구를 막았고 들어가지 못한 하객들은 밖에서 멍하니 대기해야 했다. 이후 조금씩 조금씩 해서 들어오긴 했지만, 초대받은 자리에 눈치 보며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누나의 결혼식에는 주례가 없었다. 요즘 예식은 주례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고 누나도 매형과 앞으로의 다짐 같은 것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사돈어른께서 간단한 축사를 해주셨다. 축사 중 '결혼식을 앞두고 명을 달리하신 사돈 바깥어른을 추모한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상상하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고대하던 우리 누나의 결혼식인데 혼주석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닌 큰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결혼식장 전광판에 나와 있는 故자가 그리도 슬프고 원망스럽게 다가오던지. 결혼식의 말미에는 누나의 친구들이 가수 아이유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매형의 친구가 축가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누나의 친구들이 깜짝 영상을 준비해서 틀어주셨다. 마지막으로 결혼 행진을 하는 것으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예상외로 누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엄마도 잠시 훌쩍일 뿐 울거나 하지 않았다.


원래는 해외로 신혼여행을 계획했던 우리 누나는 현재 시국의 문제로 인해 제주도로 일정을 바꾸었고 호텔에서 하루 묵은 뒤 다음날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어머니와 나, 동규, 수진이와 외가 친척들은 우리 집에서 간단한 피로연을 가지는 것으로 이렇게 행사는 전부 끝이 났다. 그토록 준비를 많이 했었고 근심도 많았던 큰 행사가 끝났다. 그렇게 우리 어머니는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ㆍ 결혼식이 끝난 이후 나는 GTEP 사업단에서 파견하는 서울 SETEC Mega Show 2021에 참여했다. 우리를 맡아준 회사는 'WowD'라는 회사로, '미쓰리 떡볶이'의 물건을 납품 바다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판촉업체인 듯했다. 부산 BEXCO 국제 식품 박람회에 이어서 또 떡볶이 업체의 판촉을 도와주게 되었다. 떡볶이 업체는 그 특성상 엄청나게 바쁘다. 심지어 부산 박람회와 비교하면 물량이 훨씬 더 많았기에 일은 훨씬 더 고되었다. 사장님은 하루에 식대를 꼭 만 원씩 쥐여 주셨는데 그래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주셔서 일이 크게 고되지는 않았다. 다만 구두를 며칠씩이나 신고 뛰어다니다 보니 발이 정말 아팠다. 그리고 업무는 대개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했는데, 밤이 되면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지인을 만나고 같이 하루를 보낸 단원들과 한 잔 기울이느라 며칠간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희주랑 꼭 아침밥을 챙겨 먹느라 더욱 못 자기도 했다.


박람회 기간 중 생일이 찾아왔다. 한창 박람회 중에 다가온 생일이라 별생각이 없긴 했다. 마침 생일날 밤 유럽에서 만났던 윤지 누나와 유리를 만났고, 내 생일임을 알게 된 윤지 누나가 생일 선물로 body pillow를 챙겨 주었다. 이후 숙소에 돌아오니 동규와 동훈이가 와서 케이크를 사주며 축하를 해주었고, 기프티콘을 무려 60개 가까이나 받았다. 예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하루였지만, 많은 분이 축하해 주셔서 참 감사했다.


ㆍ 박람회가 끝나고 나서 바로 대구 국제 섬유 박람회에 참가했다. '쪽빛나라'라고 천연 염색 공방의 업무를 도와드렸는데, 대표님께서는 물건을 팔러 왔다기보다는 쉬러 오셨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전시회는 아주 평화롭고 여유 있게 끝이 났다. 특히나 대표님이 너무나도 잘 챙겨 주셔서 참으로 감사한 3일이었다.


ㆍ 이렇게 시간을 눈코 뜰 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0일 앞을 앞두고 있다. 여느 때처럼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문득 사주를 봐주시는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어 내 사주를 봐주신다고 했다. 31세를 기점으로 인생의 변곡점이 오며 내 삶의 완전한 신상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름을 날리고 대성할 것이라고 하셨다. 결혼은 미모의 여성분과 하게 되는데 33세 이후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전에 하면 이혼 수가 있다면서. 그리고 신사답고 예의 있는 겉모습이지만 아이다운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라며 20대 때 만나는 여자는 대개 멀리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뭔가, 사주를 들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다가 무언가 가슴에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도 많고 동정심도 많은 사람이라며 내게 집중하라는 말을 해주셨다. 덧붙여 공부로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했다.


ㆍ 돌아보니 느껴지는 것이 참 많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불안감이 컸다. 이 불안함을 어떻게든 채워보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갈구하고, 만나고, 약속을 잡고 에너지를 쓰며 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의 나를 돌아보면 진정 '나'만을 위한 시간은 많이 없었다. 돈도, 시간도, 그 무엇도. 그래 이번 주는 진정 나를 위한 것을 해보려고 한다. 사고 싶은 옷도 사고 물건도 사고, 양말과 신발도 사고. 이제부터는 꼭 나를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공부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겠다. 멍청하게 핸드폰 속을 들여다만 보는 행동을 멈출 것이다. 나를 좀 더 소중하고 성실하게 대할 것이다. 운동도 하고 식단도 조절하며 맥주를 많이 마시고 싶다.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조용히 이루어 내고 싶다.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잘라버리자.




입학) D+2667 2021. 6.20. (일)


<그리고, 그 후>


ㆍ 변화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그러하였듯 무기력증이다. 이전에는 기력이 없지만, 의욕은 가득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기력도, 의지도, 심지어는 정체성과 유대감 따위도 없다. 매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자극도 없고 다른 무언가의 필요성도 느끼기 힘들다.

시험을 치는 듯 마는 듯 정말 손에 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지난 육 개월을 그저 이렇게 보내고 말았다. 잡념은 많았지만, 행동은 없었던 어찌 보면 번 아웃 (Burn out)으로 치부되기 쉬운 젊은 날의 한순간을 그냥 이렇게 흘려보냈다.

한국으로 귀국할 때 내가 원했던 것은 아주 단순했다. 돈이나 성취감 따위는 아무래도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아리따운 이성과 안정적인 관계이다. 물론 중간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내가 원한 것은 대단히 지엽적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자연스레 나는 미용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분칠하고 입술을 색칠했다. 몸에 향을 뒤엎고 굽이 있는 신발을 신었다. 나름의 효과라도 있었던 것인지 몇몇 이성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내가 원하는 정도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나는 누구를 만나던 상대방이 내게 쏟아주는 절대적인 애정의 양이 부족했다고 항상 느껴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항상 내가 '사랑을 준다'라는 인상을 느낄지언정,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느낌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다. 결국, 내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수준을 높이거나, 눈을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ㆍ 최근에 재호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며 약속을 잡았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날 일정을 비워두었다. 별안간 재호는 자기 후배도 같이 만나자길래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무언가 그 후배라는 사람이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같이 술을 마셨는데, 꼭 나의 이상형은 아니지만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락을 서로 주고받기 시작했고 몇 번의 만남을 가지고선 연인의 초입 단계에 다다랐다. 그래, 거기서 나는 만족하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전의 사람들처럼 내게 한 줄의 문자만 남기고선 그냥 떠나가버렸다. 이제는 분노도, 슬픔도 없다. 그저 무기력함이 깊어짐과 동시에 짜증만 늘어난다. '무언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무엇이 문제일까 하는 회의감도 많이 든다. 어떤 특정한 것을 하나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어떤 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증이 난다.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내 몸을 조여 오는 것만 같다.


ㆍ 우리 가족은 근 30년 만에 '경주'라는 땅을 벗어난다. 이번 달 말 즈음이 되면 우리는, 우리 가족은, 아니 어머니와 나는 '포항'으로 이사를 떠난다.

이사라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해보기에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사를 떠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을 떠나고픈 마음이 큰어머니의 판단이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 눈물을 가득 흘리며 들어왔던 우리 집 대문을 더 밟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변화가 있다면, 그래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변화할까. 변화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그래, 지금은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ㆍ 이번 학기에 맛본 도전과 실패는 '도전 학기제'이다. 도전 학기제라고 한 학기 간 매주 일정한 활동을 하고,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면 학점과 함께 소정의 장학금을 지금 받는 프로젝트이다. 물론 알량한 생각에 빠져 쉽게 이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조그마한 활동 내용을 부풀려 학교 본부에 제출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학교 교직원이 보고서의 활동 시수를 지적하며 추가자료 소명을 요구했다. 물론 내게는 추가자료 따위는 없었고 어쩌면 부풀린 활동 내용이 모두 거짓으로 인식될까 싶어 지레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나는 F 학점과 함께 장학금 수여도 못 받게 되었다. 이번 학기 게으름의 방증이자 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렴 어때.




입학) D+2684 2021. 7. 7. (수)


<이사>


ㆍ우리는, 우리 가족은 그 20년 만에 보금자리를 옮겼다. 원래 살던 도시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은 포항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바꾸었다.

집은 아주 마음에 든다. 현대식 시설과 구조,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지리적 위치 등 여러 부분에서 내 마음에 든다.

이사를 하고선, 어머니는 여전히 우셨다. 이제 완전히 새로 시작했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많은 것들도 많이 비워 내었다. 중고거래 매체인 '당근마켓'을 통해 집에 있는 자잘한 물건, 장식품, 가구 등을 많이 팔았다. 집을 정리하며 느끼게 된 것 중 하나는, 참 엄한 물건이 많았다는 것이다. 부처님 동상, 옥새, 청진기 등 실용성도 활용성도 없는 자잘한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서 많이 나왔다. 참 신기했던 것은 내게는 엄한 것으로 생각했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각물일주라고, 모든 물건은 주인이 있다고 했다. 물건들이 꼭 주인을 찾아가는구나.


ㆍ 그리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건은 힘들지만 일단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내일, 심의 위원회가 열린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는 겸허히 수용하겠지만, 부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ㆍ 재단에서 우리가 현장에서 활용한 수기집을 출판해 주신다고 했다. 수기집 출판은 내가 스리랑카 현장에 있을 때도 바랐던 것 중 하나이고, 몇 개월간의 탈고와 수정의 과정을 거쳐 곧 책으로 출판된다고 했다. 책이 나오게 된다면, 내 이름이 걸린 첫 번째 책이 된다. 작가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ㆍ 그래도 일단 포항에 오게 되었으니 여기서 적응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일단 장성성당 청년회에 가입했고, 최근에 개설되었다는 일본어 회화 스터디도 가입했다.

대구에서도 사업단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영남 라이프 아카데미 친구들도 계속해서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해당 교양 수업에서는 나를 잘 따라주는 든든한 동생들이 있어서 마음이 많이 놓인다.




입학) D+2696 2021. 7.19. (화)


ㆍ 이사를 하고 곧 GTEP 사업단에서 방학 특강을 한다기에 바로 대구로 올라왔다. 수업을 듣고 나면 하루가 없다시피 했다. 늦은 낮까지 잠을 자다가 대충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학교로 가서 특강을 듣고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끝이었다. 저녁 식사도 대충 하고, 잠시 운동을 한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해준 맛있는 밥을 먹다가 혼자 지내게 되니 또 대충 끼니를 때우게 되었다. 저번에 공황을 겪었던 것처럼, 한 번 더 비슷한 증세가 왔다. 이전만큼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내 건강을 더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ㆍ 정말, 오랜만이랄까. 연락하거나 관심이 가는 이성 친구가 없다. 나이가 들면 만남이 귀찮아진다더니, 정말 사실인가 보다. 가능성이 낮은 선택보다는, 어디선가 누군가가 먼저 내게 호감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살짝 외롭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막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다.


ㆍ 아버지의 산재 보험 심사는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오리무중 속으로 빠졌다. 판정 위원회에 10명의 위원이 있는데, 과반수의 승인이 있으면 산업재해로 인정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공단에서는 5:5 동률이 나왔고, 그래서 조만간 재공판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사실 내 처지에서 보면 조금 의외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산업재해'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청은 해보되,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높은 비율의 승인이 나와서 내심 놀랐다. 만약 산업재해 인정이 되면 말 그대로 어머니의 노후 걱정은 한결 가벼워진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ㆍ 새마을 재단에서 만난 순재 형이 곧 결혼한다. 사실 벌써 신혼집에, 결혼사진 촬영에, 예식장까지 다 예약을 해두었다. 하지만 아직 청혼을 안 했다며 내게 조금 도움을 요청하셨다. 그래서 beam projector도 빌려드리고, 청혼할 장소인 형의 신혼집에서 현수막도 달고, 풍선도 불었다. 그런데 풍선을 불다 보니 생각보다 개수가 모자라 잠시 편의점에서 간단한 안줏거리와 풍선을 사 오려고 나갔다. 하지만 그 2~3분 나간 사이에 형수님이 신혼집에 들어오셨다. 우리의 짧은 노력은 빛을 1도 발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들키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준비한 청혼 영상을 틀고, 형은 반지를 건넸다. 매우 엉성하고, 정말 어이없게 청혼을 해버렸다. 형수님은 깔깔 웃으며 반지를 받아 주셨고, 그렇게 허무하게 청혼 작전은 끝이 났다. 그래도 형은 수고했다며 맥주와 치킨을 사주셨고, 한 캔 마신 뒤 형 집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입학) D+2733 2021. 8.25. (수)


ㆍ 방학도 곧 끝난다. 실질적인 휴식은 거의 9개월간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올해는 유의미한 준비도, 노력도, 성과도 없다. 크게 무언가에 몰두할 여유가 없기도 하다.


ㆍ 불안 증상도 조금씩 심해지고, 왠지 소화도 잘 안 되고 해서 집 근처 병원으로 가서 심장 부분 검사를 받았다. 24시간 심전도 검사를 하고, 심장 초음파 사진을 찍었다. 혹시나 했던 부정맥이나 다른 이상 증세는 없었지만, 심장 초음파에서 여태 알지 못했던 병을 하나 알게 되었다. 심장 초음파를 찍는 도중에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몇 분 들어오시더니, 가족 중에 심장병이 있으셨던 분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알겠다고 말씀하시곤 나가셨다. 무언가,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서 면담시간에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게 선천적인 심장병이 있어, 심장 아랫부분에 약간의 구멍이 있다고 했다.

무언가, 언제부터 있었던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장에 약간 병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심리적인 타격이 더해진 듯 불안 증세는 점점 커졌다. 일단 증상이 없으면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추적 관찰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언제인가 구멍에 핏덩이가 생겨 다른 장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일 년에 꼭 한 번은 추적 관찰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병을 알게 된 김에 확실하게 병세를 진단하기 위해 대학 병원에도 진찰을 예약했다. 어린 나이부터 건강을 꼭 챙기면서 살아야지.


ㆍ 며칠 전 코로나 잔여 백신 알람이 뜨는 것을 보고 언제나처럼 안될 줄 알고 신청하기 단추를 눌렀는데, 덜컥 돼버렸다. 우연히 Pfizer 접종을 득했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접종을 받았다. 일반 예방주사를 맞게 된 것은 만족스럽지만, 확실히 부작용이 무섭긴 했다. 아프지는 않지만 감기몸살약을 먹고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주사를 맞고 난 이후부터는 피로감과 어지럼증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만약 코로나에 걸린다고 한들 중증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ㆍ 이번 방학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학교 교양에서 만난 친구들과 같이 가려 했던 MT도, 압량성당 수녀님이 추천해 주신 DMZ, 울릉도/독도 순례도, 아니 그 많은 다른 것들 모두 현재 시국에 발맞추어 취소하고 있었다. 그래도 채은이가 추천해 준 농촌동아리 4-H에서는 MT를 추진한다고 했고, 4-H 단원들과 함께 경상북도 문경에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MT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행사장에서 점심을 먹고 간단한 흙 공을 만드는 Recreation을 하고서 쉬다가 저녁에 거기를 구워서 먹는 것으로 일정은 끝났다. 아무래도 농촌동아리이다 보니 원예학과 학생들이 많았고, 미리 서로 알고 있던 단원들도 많아 보였다. 일정을 다 마치고선 잠을 자려고 하는데, 친해졌던 여자 단원들이 갑자기 부르더니 밤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자고 했다. 별똥별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을 핑계로 삼아 그 아이들과도 약 2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들어와서 잤다. 이것이 이번 방학 동안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활동이었다.


ㆍ 그래도 방학인데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는 없기에 요 며칠간 충청도를 다녀왔다. 성민이 누나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현종이, 동훈이, 재성이 형을 만났고 마지막으로는 진주로 내려가 GTEP 사업단 동기인 진현이를 만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집에서 대충 가방을 사서 올라간 뒤 약 10일가량을 유랑하며 지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이었다.


ㆍ 그리고, 완전히 안 될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산업재해 신청이 승인되었다. 정말 다행이다.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우리 어머니는 크게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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