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취향은 한결같습니다. 따끈한 신상과 흔치 않은 빈티지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별 고민 않고 후자를 고릅니다. 지금 당장 반짝하는 관심을 받는 새 것보다, 오랜 세월 애정을 받은 낡은 것에 좀 더 마음이 가는 편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소소한 관심을 얹어놓는 시간과 노력도 딱히 아깝지 않게 느껴집니다. 마치 신간 베스트셀러를 읽고 후회한 적은 있어도, 고전 스테디셀러를 읽고 실망한 적은 없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지금은 절판돼서 구하기 힘들지만 한때 절찬리에 판매됐던 옛날 책이나 필름 카메라, 그릇 같은 식기류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설령 지금의 시류와는 맞지 않아 잠시 먼지를 뒤집어썼다 해도, 가치를 알아보는 새로운 안목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반짝이거든요. 특히, 절판된 옛날 책은 그 자체가 희소해서,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자연스럽게 저만의 생각과 색깔을 확장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릇 하나도 장인이 정성스럽게 빚어내면 빛깔부터 다른데 하물며 책은 오죽할까요.
이런 제 취향을 묘사하는 표현은 '할머니 같다'부터 '고리타분하다', '예스럽다', '옛날사람 같다', 그리고 '클래식하다'까지 꽤 다양한데요. 표현이 뭐가 됐든지 간에, 세상이 '돈'과 '신상'을 외칠 때 정반대로 '돈이 안되는 것'과 '낡은 것'을 들여다보는 비주류 취향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딱히 시간과 노력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 올드한 취향, 그래서 자연스럽게 비주류가 되는 취향이죠.
하지만, 주류로 살아갈 것을 권하는 세상일수록 비주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런 취향의 한결같음이 제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도 딱 맞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중앙으로 달려갈 때, 누군가는 경계에 놓인 것을 봐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취향으로나마 그 누군가가 제가 될 수 있다는 게 뜻 깊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이 취향을 유지하는 게 마음이 편안합니다. 마치 늘 입던 옷을 꺼내 입은 것처럼요.
게다가 오래된 것은 새로 구입하거나 선물을 받을 때도 깊은 뜻을 담아낼 수 있어 좋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는 친할머니가 물려주신 반짇고리와 이모 할머니가 물려주신 그릇 세트인데요. 두 물건 모두 두 분이 살아생전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해오셨는지를 증명해주는 물건들이기에 제게는 그 어떤 물건보다 값지고 소중합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크나큰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죠. 나중에 저도 그런 물건을 가족에게 꼭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옛 물건만이 의미있다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전 주인에 의해 쉽게 버려지지 않은 존재들은 그게 어떤 것이든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래서 특별하니까요. 당X마켓에 나온 것이든, 중고X라에 나온 것이든, 해외 중고거래 사이트에 뜬 것이든 말이죠. (물론, 사기 거래로 뜬 건 제외하고요.) 그 물건이 어떤 것이든, 전 주인이 버리지 않은 것에는 그만한 가치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각각의 깊은 의미를 발견해내는 건 새 주인 안목의 몫으로 오롯이 남지요.
이런 예스러운 취향에는 예상밖의 장점도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후 변화가 심각할 때 옛 물건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다른 이가 쓰던 옛 물건을 물려 받으면 그 자체로 탄소 발자국 줄이기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해법도 됩니다. 물건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과 재활용품에 새로운 가치를 더한 업사이클링을 뛰어넘는, '버리지 않고 주구장창 사용하기'라는 원초적 방법으로 쓰레기를 원천차단하는 해법이죠. (단, 옛 물건을 너무 자주 들이면 그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물론 집이 골동품 전시장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취향을 적당히만 유지한다면, 환경도 보호하고 돈까지 절약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죠.
저는 이런 예스러운 취향을 나름 꾸준히 유지해온 덕분에 얼마 전 쪼꼬미 아들의 돌잔치도 잘 치렀습니다. 제 한결 같은 취향의 발원지인 친정집에서, 누군가의 눈에는 낡아보이는 옛날 물건들ㅡ그러나 제 눈에는 보물같아 보이는 옛 물건들ㅡ을 촬영 세트장처럼 차곡차곡 쌓아놓고 돌 사진을 찍었거든요. 나무 보관함과 나무 촛대, 호롱, 도자기, 그리고 놋쇠 화로로 돌상 차림을 꾸미니, 제 눈에는 여느 돌상 부럽지 않았습니다. 집안 곳곳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빼놓았다가 다시 정리하려니 가족들 모두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결과물을 보니 만족스럽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공간에, 좋아하는 취향의 물건들을 채워놓고, 그 한 가운데 저의 최애 쪼꼬미를 앉혀놓으니, 제 눈엔 이보다 더 완벽한 돌 사진이 없더라고요. 말 그대로 좋음과 좋음과 좋음의 조화,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들이 크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리타분한 취향이든, 트렌디한 취향이든, 한결같은 나만의 취향을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즐겁고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리고 취향은 꼭 지금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비슷할 필요는 없고,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요.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목표ㅡ돈, 행복, 성공 등ㅡ를 향해 달려가는 시대에 잠깐 숨 돌릴 때나마 나만의 취향, 나만의 시선으로 일상을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니까요. 이게 바로 제가 할머니 취향을 고수한 끝에 얻어낸 깨달음이자 가장 큰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 대문 사진 : 82년생 필름 카메라로 찍은 전기 난로. 난로마저 낡으면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데, 이것도 할머니 취향이라서 그런 걸까요?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