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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삼 Feb 15. 2023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

 곰곰이 생각해본 적 있습니다. 제가 왜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는지요. 처음엔 딱히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마음이 먼저 움직였어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필름 사진을 찍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좋은 기분이 들어서,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서, 틈날 때마다 어깨에 카메라를 맸습니다. 그리고는 포착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묵묵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렇게 누르고 또 누르다보니 어느새 필름 카메라와 함께 한지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더군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삶을 여행하는 새로운 방법 하나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행 루트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지요. 제게 필름 카메라가 그렇습니다. 올해로 41살이 된 낡은 필름 카메라와 함께라면, 전 언제 어디서든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세상에 저와 피사체, 단둘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줬거든요. 그 고요하고 홀가분한 느낌은 마치 추운 겨울날 새벽 공기처럼 신선하고 상쾌했습니다.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홀로 저벅저벅 걸어나와, 이방인의 낯선 시선으로 제 주변을 쓱 둘러보게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일상도 꽤 괜찮아보이더군요. 방금 전까지는 분명 말라 비틀어진 고목처럼 보였던, 그 퍽퍽했던 일상이요.  


하늘에 걸린 온음표처럼 보였던, 퇴근길에 만난 초승달. 2018년 by 아삼삼


 그렇게 '이방인의 시선'을 얻은 후로는, 가까운 이들과 그 일상 속 낯섦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글자글한 햇살과 톡 터져나온 웃음 같은,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찰나의 순간을 함께 찍고 나누며 추억했습니다. 가끔 신랑의 좋은 카메라로 찍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내는 건 낡은 필름 카메라더군요. 그래서 한때는 새벽 일찍 카메라를 들고 출근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단풍잎이 나뒹구는 거리를 정신없이 찍고 돌아서면, 그제야 출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퇴근길에는 자연스럽게 지하철 역 인근의 사진관에 들러 현상을 맡겼습니다. 어느 겨울 새벽에는 눈이 왔다는 일기예보를 듣자마자 잠옷바람으로 창문을 열고는 셔터를 누른 적도 있었습니다. 오가는 이 없는 새벽 시간, 보송보송한 눈 풍경을 제 눈에 가장 먼저 담고 싶어서요.


 외국 여행을 갈 때에도 전 언제나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사실 돌덩이 수준으로 무거워서, 걸어다닐 때 여간 짐이 되는 게 아닌데도 늘 매고 다녔습니다. (물론 때때로 '아 던져버릴까' 싶은 마음도 들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그 때마다 이성을 되찾았습니다.) 종종 지인들에게 "어깨 통증과 맞바꾼 즐거움"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사실 어깨 통증보다 더 두려운 건 이 카메라가 없는 순간입니다. 정확히는, 딱 찍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 이 카메라가 없는 순간이지요. 이미 그런 경험을 수차 해봐서 발을 얼마나 동동 굴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엔 동네 산보에 나설 때도 분신처럼 챙기곤 합니다. 지금 글 아래로 보이는, 바다 위로 차분하게 쌓이는 석양 빛도 놓치고 싶지 않던 순간 중 하나였는데요. 만날 때마다 제 어깨를 아프게 하지만, 그 누구보다 제 마음을 잘 읽어내는 츤데레님 덕분에 제 망막에 맺혔던 감동 그대로를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습니다.


어깨 통증과 맞바꾼 서해의 석양. 2022년 by 아삼삼


 저는 지난해 아기를 출산했는데요. 아기를 낳은 후로도 종종 필름을 맡기러 사진관을 다녀옵니다. 물론 저 대신 잠깐 아기를 봐줄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서요. 예전에는 제 시간이 오롯이 저의 것이었기 때문에 필름 사진 취미를 쉽게 가질 수 있었는데, 이게 이렇게 많은 이의 시간과 노력이 드는 취미가 될 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네요. 하하하. (게다가 요즘 필름 값이 거의 4배, 현상비는 2배 가까이 올라서 돈까지 드는 취미가 돼버렸습니다. 또르르...) 그래서 이제는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름의 확신이 서는지를 자문하곤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지불해서 포착하기에 전혀 안 아까운 순간이 맞느냐고 말이죠. 런데 지난해 혜성처럼 나타난 쪼꼬미 피사체 (=아기)는 이런 제 생각의 흐름을 무색하게 만들더군요. 틈날 때마다 팔색조 매력을 뽐내며 저에게 필름 탕진 재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엄마 지갑을 위협하며, 엄마 취미를 지켜주는 무척 고마운 존재죠. 덕분에 전 8년째 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됐습니다.

 

 

엄마에게 필름 탕진 재미를 선사해주는 아드님과 할머님의 손. 2022년 by 아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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