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awrithink Jan 11. 2023

나쁜 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

어젯밤 꿈의 괴로움은 오늘 오전까지 이어졌다.

꿈속의 나는 고등학교의 교실 안에 있었다. 한 학생이 나에게 와서 '너 소지품 몇 개 없어지지 않았어?'라고 물었다. 그제야 내 책상 위의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어서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 몰랐어? 너 싫어하는 애들끼리 짜고 하나씩 숨기고 있는 거야..」

없어진 물건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나를 싫어하는 무리가 있다는 감각이 온 마음을 새까맣게 태웠다.

잠에서 깬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무리 속에 나를 응시하고 있던, 관계가 잘 해결되지 못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 그리고 마주하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겪는 상황이 있다. 다수가 소수를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상황이다. 한 단어로 말하면 '따돌림', '집단 괴롭힘'이다.

처음으로 이 상황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창 학교에서는 '왕따놀이'가 유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놀이의 내용은 이렇다. 상대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학생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모아놓고 이야기한다.

「오늘은 누구를 왕따 시킬까?」

다수의 합의 아닌 합의 하에 한 명을 지목한다.

「오늘은 쟤로 하자.」

왕따놀이의 타깃에는 어떠한 이유도, 특별한 잘못도 없었다. 주로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거나 말소리가 작고 소극적인 친구들, 혹은 일반적인 학생들과 다소 다른 성향을 띤 친구들이 타깃이 되었다. 나는 그때 강한 영향력의 학생의 말을 함께 듣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사실 그 자리에서 「그건 잘못된 거야, 얘들아」라고 강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정도의 카리스마나 영향력을, 강한 친구만큼 가지지 못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찰나의 판단이 필요했던 순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학급의 최상단에 있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저 아이들이 OOO 이를 왕따 시키려고 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운 모습이기도 한데, 나는 그 감정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울먹이며 선생님께 말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화들짝 놀라시며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교탁에 서서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왕따는 나쁜 것이고, 그런 일을 도모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멋쩍어하던 무리의 표정들이 기억나고, 그 훗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행동은 왕따의 타깃이 될 뻔한 그 친구가 고마워할만한 일이었을까? 혹은 그다음 타깃은 나였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지혜로운 선택지가 있지는 않았을까?


두 번째 일화는 어느 직장 동료와의 대화 내용이다. 당시 우리는 엄격하고 무척 힘든 강도의 업무를 선호하며 매 순간 도전과제를 부여하는 상사 밑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 상사의 열정과 엄격함을 높게 사는 편이었지만, 그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고 나의 동료는 그 상사의 모든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야근과 훈계로 둘 다 녹초가 되어 버렸던 어느 날, 나는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팀장이 된다면 이런 경험을 물려주진 않을거야」

그 동료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나는 내가 겪은 것과 똑같이 후임들에게 되돌려줄 거야」

그 대답을 듣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동료가 무서웠다. 내가 겪은 괴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가치관이 달라 자주 부딪히던 나와 그 동료는 머지않아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세 번째 일화는 강아지들을 임시보호하고 있던 어느 카페에서 목격한 일이다. 당시 '아메'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검은 강아지는 유난히 나를 잘 따르던 탓에 짧은 시간에 마음을 많이 주게 되었다. 잠시 눈을 떼고 음료를 마시고 있는 사이에 아메가 다른 개들에게 공격받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얼른 끼어들어 아메를 구하고 무리와 떼어놓았다. 아메가 공격받은 이유는 그저 무리들 근처를 거닐며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아메의 귀와 얼굴이 뜯겼고 큰 상처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아메는 풀이 죽어버렸다. 카페 사장님에게 들어보니, 아메는 몸이 약한 강아지였기 때문에 무리들 속에서 가장 낮은 서열에 속한다고 했다.

더욱 마음이 쓰였고 그날 늦게까지 나는 아메의 곁을 떠나기 어려웠다. 다른 개들이 미웠다. 그러면 안되지만 인간의 힘으로 엉덩이를 찰싹 한 대씩 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보호해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고 되뇌었다. 풀이 죽은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 아메가 꿋꿋하고 건강하게 성장해서 누군가의 사랑받는 반려견이 되어있다면 좋겠다.


세 가지 나의 경험은 모양이 다르지만 모두 혐오의 짙은 정서가 녹아들어 가 있다.

학급에서 누군가를 왕따의 타깃으로 정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마음에 자라난 억울함과 상처를 연관 없는 타자에게 옮겨 복수하려는 마음,

약한 개체를 공격하며 무리의 건재함을 공고히 하려는 마음.

혐오의 뿔을 단 자의 깊숙이 자리 잡은 본심이란 결국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며 이는 방어기제이다.

나쁜 마음의 구조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공동체 내부에서 부정적 감정을 배출하기 위해 희생양을 정하는 것이 '왕따' 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어떠한 대상을 순수히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욕망 중개자'를 거쳐서 욕망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하는데, 이 욕망 중개자는 내 친구나 동료, 후배, 친척, 지인, 연예인 등 누구든지 될 수 있다. 나의 욕망으로 인해 중개자를 시기하거나 질투하기도 하며 그 감정의 분출을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더' 가진 사람에게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드는 것, 즉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메커니즘으로 보았을 때 왕따놀이는 가장 간편한 차별의 수단이 된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정하고 그를 열외 시키고 괴롭히는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주체자는 쾌감을 느끼고 정당한 차별의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어린 시절 체득한 차별의 방식은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 장애인차별 등으로 가지를 치며 혐오의 깊은 뿌리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리 잡게 된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추는 가수 조권은 요즘 수많은 시선의 총에 겨누어져 있고, 실제로 그의 마음엔 수천 개의 탄알이 박혔을 것 같다. 성별과 역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들은 인스타그램에서 [비공개 계정]이라는 방패를 두르고 온갖 종류의 비난을 퍼붓고 있다. 단지 하이힐이 좋고 아름다운 의상과 화장으로 나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뿐인데 <남자는 남자다워야>라는 공통의 잣대로 그는 갈기갈기 뜯겼다. 하지만 그는 버텼고 굳이 편견을 가진 이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행한다고 했다. 수많은 탄알을 맞으며 생긴 나 자신의 굳은살이 단단한 자존감이 되었고 누군가에겐 힘이 되어주고 있다. 조권을 보며 배운 점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건강한 방법은 타인을 매개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단련하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 또 나의 다름과 같이 타인의 생각 또한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만약 내가 4학년이었던 그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라도 용기 있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너희들은 혐오하고 있는 거야. 그건 나쁜 마음이야. 나쁜 마음이 전염되면 누구나 언제든지 희생양이 될 수 있어. 여기에서 멈춰!라고.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다음 타깃이 내가 되는 결과를 낳겠지만)


얼마 전에는 연말을 맞이하여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속 주인공 둘은 서로의 출신이나 나이·성별·환경·지위와 같은 욕망의 요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감각,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 선한 목적으로 더 알고 싶어 하는 관찰력을 키워내어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음의 결실을 만들어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 마음에 긴 여운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들과 같은 사랑의 정서가 충만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살만 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실 사랑보다 혐오의 감정에 더 많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는 마음보다 틀림으로 지적하는 것이 더 쉽고, 내 마음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혹여나 불필요한 혐오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진 않았는지, 그것이 욕망의 중개자에 의한 것이었는지, 혹은 타인의 혐오에 함께 동조하고 있는 무리 속에 있지는 않은지 곱씹어본다.

강아지 '아메'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집단 괴롭힘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지능이 높은 동물에게 드러나는 생물적 특성이라고 한다. 내가 본 영화와 같이 온 세상의 정서를 사랑으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내적으로는 나의 욕망에 대해 돌아보고 그 욕망을 뒤틀리게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외적으로는 타인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미래에 퍼질지도 모르는 혐오의 뿌리들을 미리 잘라낼 수 있을지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결(結)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