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awrithink Jan 25. 2023

시선과 관심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첫 자세

우리 집 막내 카키는 올해로 네 살이 된 강아지이다.

카키는 언뜻 사람 피부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모래색 계열의 짧은 털을 가지고 있고 주둥이가 길어서 기본적으로 표정이 잘 보이는 종에 속한다.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눈인데, 눈이 유독 크다. 눈동자의 빛깔이 카키색을 띠고 있고, 그 눈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면 어떤 신비로운 우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해서 오랫동안 '카키 눈 멍' 하고 있을 때도 많다. 이처럼 눈이 크고, 표정이 잘 드러나는 카키이기에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개를 좋아했다. 그래서 개를 기르는 것이 하나의 꿈이었고 어쩌다가 강아지를 만나게 되면 특별한 이벤트처럼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호감은
 그 존재를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닌, 단순히 '개' 이기 때문이라는 요인에 대한 단편적인 관심이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강아지를 만나면 인형처럼 만지고 싶고, 장난감처럼 소유하고 싶은 그런 어리숙한 마음이었달까? 하지만 막상 같은 공간에서 매일을 함께 살게 되니 이 친구와 함께한 세월이 고작 만 3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카키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일원으로, 또 매우 당연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카키와 나의 관계는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을 만큼 끈끈하고 견고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느낀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카키가 우리에게 들이는 관심과 우리가 카키에게 들이는 관심의 노력이 동일하게 느껴질 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카키는 나와 내 배우자에게 무척 관심이 많다.
오랜 시간 동안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탓에 하루종일 카키와 함께 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는데 덕분에 이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들이 늘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디로 움직이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카키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깨더라도 내가 깰 때까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사실은 우리 집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 또한 나 이기 때문에 쉽사리 깨우지 못하는 까닭도 있다..) 내가 잠에서 깨는 제스처를 하면 그제야 아기처럼 밥을 달라고 보채곤 한다. 카키는 내가 외출할 때 준비하는 프로세스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평소보다 공들여 입고,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리는 순간 카키는 내가 나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몸을 부르르 떨곤 한다. 낮잠을 자다가도 이따금씩 서재방에 들러 내가 혹여 몰래 어디 나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눈치다. 바쁜 업무로 서재 방에서 야근을 하는 날에는, 카키가 조용히 다가와 의자에 앉은 나의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얹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두 눈은 명백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엄마 왜 안 나와? 그만 일어나서 나랑 놀자~'


실제로 이런 말들을 하지는 않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면 실제로 어떤 것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껴질 때가 많다. 


눈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눈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관심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표현을 할 때 '동공이 흔들린다' 라던지, '눈이 반짝인다' 따위의 관용구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실제로 눈을 통해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도 같은 맥락의 이론이 소개되는데, 유인원과 인간의 차이점으로 꼽는 부분 중 눈의 '공막' 색소 여부이다.

쉽게 말하면 유인원의 눈동자는 흰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어디를 보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려운데 사람의 눈동자는 공막에 색소가 없어 하얗기 때문에 홍채의 움직임에 따라 어디를 보고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개들의 눈에서도 이따금씩 드러난다. 인간처럼 흰자가 뚜렷하진 않지만 개들이 눈치를 볼 때 드러나는 흰자를 생각해 보라)

책에 수록된 이미지를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가장 먼저 눈을 보는 편이다. 상대방의 눈매가 어떠한지, 대화할 때 눈동자는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 웃음 지을 때 눈 모양은 어떠한지 등. 눈 주변에 주름이 많이 지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웃는 표정을 많이 지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에 나는 그런 인상들을 참 좋아한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눈매가 선하거나 눈이 반짝인다고 느낀 사람들은 대개 좋은 사람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반대로 대화할 때 눈을 맞추지 않거나 눈빛이 흐린 사람들은 속내를 쉽게 알 수 없어서 어려웠다. 눈이 유리알 같다는 표현은, 유리처럼 그 사람의 안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서 생긴 말일 수도 있겠다. 눈의 인상과 더불어, 그 사람의 시선에서 배려심을 느낄 때도 있다. 대화를 할 때 눈을 맞추는 사람에게서는 끈끈한 연대의 힘과 더불어 공감하려는 마음까지 전해진다. 눈을 맞추는 행위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내가 너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어'라고 전해주는 텔레파시 같기도 하다. 상대방의 감정을 잘 알아채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이들은, 시선이 따라가는 반경이 넓고 섬세한 움직임도 잘 느끼는 것 같다. 카메라에 비유하자면, 이들은 접사 렌즈와 광각 렌즈가 함께 탑재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때때로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다. 여기서 몇 가지 정의를 하고 들어가면, 첫 번째로 나에게 '관심'이란,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 돈을 얼마나 버는지 / 부모님의 재력이 어떠한지 / 무슨 차를 타는지와 같은 종류가 아닌, 오롯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앞에 나열한 것들은 조건이나 환경적 요인이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때때로 많다'라고 쓴 이유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와 충분히 가까운 사람들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람들 중에서도 부정적 에너지보다는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일 때 조금 더 호기심이 많이 생기는 듯하다. 어쩌면 다소 선택적인 관심이기도 해서 적으며 머쓱하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바라본 나는 그렇다. 어떠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마음에 씨앗으로 뿌려지면, 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가고 시선에 따른 다양한 단서를 얻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 웃음 짓는지, 인상을 찌푸리는지, 걸음걸이가 어떤지, 어떠한 말하기 방법을 구사하는지 등. 시선이 내 머릿속에 저장하는 그 사람의 데이터에 따라 씨앗은 새싹으로 자라기도 하고, 금세 나무처럼 굳건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시선 관찰 데이터는 제법 잘 맞는다. 좋은 영향을 주는 타인의 어투나 제스처 등을 유심히 보다 보면, 나도 그 부분을 흡수하기도 하고 타인의 데이터를 기억했다가 특정 상황에 그들이 원하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뜬금없지만, 이 내용을 쓰다 보니 넷플릭스 시리즈 중 <너의 모든 것> 이 떠오르는데 내가 누군가를 스토킹 할 정도로 소름 돋고 집요하게 데이터를 모으는 것은 아니라고 미리 안심시켜주고 싶다. (엄밀히 말하면, 그 시리즈의 주인공은 세심한 시선의 소유자가 맞다. 그 드라마 역시 시선에서 시작해 시선으로 끝나는 것에서 관심과 시선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다. 단지 그 관심이 병리적으로 커져버려 범죄를 저지른 것이 문제지만...)

그의 소름 돋는 시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책 속의 문구를 조금 더 인용해 보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 맞춤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유일한 종이다. 흰자위가 뚜렷하고 동공의 움직임이 노출되어 있는 것은 결국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따금씩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어 하며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으로 '얼굴에 철판을 깐다' 나 '포커페이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협력적 의사소통을 전제로 했을 때 이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은 서로에게 큰 도움을 주는 행위는 아닌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나는 표정만 봐도 감정이 드러나고 그것이 큰 단점이라고 여겨왔는데, 이 이론에 맞추어 반추해 보면 나의 흰자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크고 동공이 작은 외모적 요인에도 이유가 있는 듯하다. (여담으로 나의 배우자는 내가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쳐다보면 너무 쉽게 시선이 노출되기에 노파심이 들어 조심하라고 일러주기도 했었다) 이전에는 감정이 잘 드러나는 것에 대해 선배들에게 지적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고쳐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해 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 근육을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이러한 특성 또한 나의 자연스러운 일부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선이 아니라면 최대한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알리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협력적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이어야 할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선 보고(視), 자세히 살피고(觀), 관찰(察)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자가 제시한 세 가지 한자가 모두 <눈으로 보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눈과 시선은 참 재미있다. 숨겨있는 타인의 욕망이 눈을 통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가늠하기 어려운 여유와 큰 그릇이 눈의 깊이를 통해 잔잔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작은 강아지 카키의 시선이 나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전해진 것처럼, 나 또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때 기왕이면 그 사람에게도 따뜻한 무엇인가로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점심시간이 되니 카키가 또다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간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카키에게 사랑이 담긴 간식을 주고 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쁜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