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 회사의 편지

by 서효봉

아침에 일어나 씻으러 가보면 알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진면목을. 거울 속에 비친 그 사람은 졸린 눈으로 여길 본다. 아무렇게나 뻗친 더벅머리. 껌벅이는 눈에는 눈곱. 입 주변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다. 아니, 뉘시오? 어느 마을 원시인인지? 현대로 돌아오려면 좀 씻어야겠소. 아, 그전에 면도부터 해야지.


얼굴에 면도용 젤을 바른다. 조금 기다린다. 면도기로 입술 위부터 천천히. 몇 달 전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그램에 다니엘 헤니가 나와 면도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나는 다니엘 헤니가 아니지만 왠지 따라 하고 싶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길게. 여러 번 면도질하지 않고 한 번에. 확실히 이렇게 하니 피부가 덜 상하는 것 같다. 전에는 늘 면도 끝나면 어디선가 피가. 세수하다가 피 묻은 손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면도를 마치고 면도기를 씻었는데 이제 면도날을 갈아줘야 할 듯. 또 주문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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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쓰던 면도날을 주문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어제 SNS를 하다 봐 둔 사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면도기를 팔겠다는 스타트업 회사였는데 괜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싸다. 흐흐. 가격이 두 배나 차이나네? 주문도 편리해서 스마트폰으로 금방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면도기 도착. 생각보다 깔끔한 포장. 면도 팁을 담은 작은 매거진도 들어있다. 오, 괜찮은데? 더불어 작은 엽서 크기의 편지가 한 장 나왔다. 제목은 창업자들이 보내는 편지. 읽어보니 불합리한 면도기 시장을 바꾸겠다는 창업자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처음엔 ‘좋은 아이디어네’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군요. 힘내세요!’ 정도의 소심한 응원만 떠올랐다. 그리곤 다시 일상으로.


다음 날 욕실 수납장에서 전에 쓰던 것과 같은 면도날 2개를 우연히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착잡하다. 이미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예전 여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이런 기분일까? 난 나쁜 놈이다. 예전 여자 친구 아니 예전 면도날을 최대한 활용(?)하고 나서 새로운 면도날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미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그렇다고 남은 걸 안 쓰는 것도 웃기잖니. 덕분에 새로 온 면도기는 수납장에 대기 중. 출격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한 번도 써 보질 않아서 좋은 면도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뭐 특별히 최악만 아니라면 쓸 만할 것이다. 왜냐면 난 쉬운 남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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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면도기 회사 창업자들이 보낸 편지가 놓여 있다. 버릴까 하다가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버리더라도 면도기를 우선 써 보고 버리는 게 인간의 도리인 것 같아서. 글을 쓰다 생각이 안 날 때마다 그 편지를 힐끔 보게 되었다. 짧은 내용의 그 편지에 자꾸 신경 쓰다 보니 점점 더 그 편지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든 걸까? 조금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았다. (사실 글쓰기 싫어서 그러고 있는 거다) 그랬더니 ‘용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거대한 독점 자본에 맞서 남자 셋(창업자들)이 정직한 가격의 면도기를 만든다. 그들 역시 면도가 필요한 아저씨일 것으로 추정. 그들은 ‘수염 깎는데 이렇게 비쌀 필요가 있냐? 바꾸자!’하고 분연히 일어선 용사들이다. 아니 용병이라 해두자. 아무튼 난 그들을 응원하겠다. 독점으로 가격 거품을 만들어 면도시키는 거대 기업. 긴장해라. 우리에겐 용병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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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해서 몸이 떨린다. 아무튼 그 편지에서 난 용기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걸 선택하지만 조금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의 용기.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고 그 일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어쩌면 실패할 것이다. 또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를 얻든 용기 낸 사람들은 그 용기로 세상을 바꾼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세상일 필요는 없다. 그저 나 하나의 세상만 달라지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용기가 아닐까? 아직 잘 모르지만 살아가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숨을 쉬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어떤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삶. 삶을 꾸려나가는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우린 벌써 용사다. 하루라는 모험을 떠나고 별의별 일을 겪으며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영웅. 그러니 용사들이여, 용기를 내자. 용사의 진정한 덕목은 세상을 구하는 용기니까. 아직 초보 영웅이니 우선 각자의 세상부터 구하고 그다음 우리의 세상을 향해 말 달리자.


작은 면도기 회사에서 온 편지. 그 편지가 돈을 벌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 해도, 실은 아저씨 3명이 아니라 아줌마 3명이었다 해도 상관없다. 한 장의 편지가 내게 말해준 용기. 그것에 짧은 답장을 보내본다.


‘나도, 조금, 용기 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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