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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효봉 Dec 18. 2022

위 선 추 억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기억 속의 위선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토요일은 쉬는 날이다. 일요일도 쉬는 날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정한 줄 알았지만, 내가 일하는 곳에선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토요일 출근 후 평일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퇴근도 쉽지 않았다. 나의 상사는 근무 시간 내내 놀다 퇴근 30분 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 주말 근무를 했던 동료 직원과 카톡을 나눴다.     


- 진우씨, 퇴근 안 해요?

- 해야죠. 언제 할까요?

- 전 마무리 다 했어요~~

- 저도 컴퓨터만 끄면 되는데 ㅋㅋ

- 저 인간은 왜 안 가죠?

- 먼저 퇴근하면 다음 주에 또 뭐라고 할 텐데….

- 그러게요. 에이, 그냥 가요.

     

10분 뒤 우린,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상사에게 퇴근하겠다고 하니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와 동료와도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순두부찌개 냄새가 났다. 난 가방을 던진 후 손만 씻고 식탁에 앉았다. 넷플릭스로 좋아하는 드라마를 재생했다. 훌륭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잠이 쏟아졌다. 언제부턴가 일 마치고 돌아오면 허기가 졌고, 허기를 해결하면 바로 잠이 몰려왔다. 체력이 바닥난 탓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인지 모르겠다. 다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에 저항할 마음은 없었다.     


다행히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녁 먹은 걸 치우자 아내가 자청해서 설거지했고, 한숨 자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난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와 덮었다.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내는 옆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노오란 침실 스탠드 불빛만 보였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찾아 켰다. 새벽 두 시 삼 분이었다.      


‘왜 갑자기 이 시간에 잠이 깬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스마트폰으로 온 동네의 기사를 읽었다. 누가 누구에게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나, 사고로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었고 흔했다.      


어두운 침실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보는 건 먹어도 먹어도 허전한 뻥튀기를 씹는 것 같았다. 기사 말고 다른 거 뭐 없나? 영화나 볼까?     


영화, 그런데 어떤 영화? 주로 보던 넷플릭스를 실행해보았지만 볼 게 없었다. 그동안 참 부지런히 봤던 모양이다. 대부분 봤던 영화나 드라마였다.     


유튜브를 볼까? 유튜브로 자동차 관련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쌍용에서 새로운 차가 나왔는데 대박이란다. 자동차 관련 유튜버들이 너도나도 그 차를 시승하고 리뷰 영상을 찍었다. 그렇군. 차 좋네. 그럼 뭐 하나?   

  

그때부터 유튜브 알고리즘 여행을 시작했다. 자동차 관련 세계를 여행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넘어갔다. 내가 중학생 때였나? 많은 청소년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던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해 온갖 명작들이 올라와 있었다.     


일본은 만화만 유명한 게 아니었다. 한창 성에 관심 많았던 시절 남자 학교에서는 유명한 일본 포르노 배우의 이름이 떠돌았다. 나도 그때쯤 친구들과 봤던 영상의 주인공이 생각나 검색까지 했다.    

 

그러니 우리의 똑똑한 유튜브님께서 내 마음을 알아채셨다. 음흉한 놈, 너 이런 거 원하는 거지? 라고 슬그머니 야한 동영상들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련 영상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나는 입을 벌린 채 온 나라의 여성들이 발가벗고 등장하는 영상들을 탐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야한 동영상들 사이로 뜻밖의 영상도 등장했다. 그건 바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의 경기 영상이었다.      


야한 동영상과 프로게이머 경기 영상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청소년기와 대학생활의 사 분의 일 정도는 함께한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였기에 또 그걸 보기 시작했다.        


영웅이 필요한 사람                              

1998년이었다. 집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연명하며 세월을 보내던 나는 당시 게임잡지도 매달 사서 볼 정도로 게임에 빠져 있었다.     


그때 잡지에서 본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은 가히 혁신적인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학교에도 전해져 친구들 사이에서 대유행이 되었다. 덕분에 학교 주변으로 PC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린 방과 후 PC방 활동에 나섰다.     


PC방 초창기에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오천 원을 내고 가입 후 한 시간에 이천 원씩. 비쌌지만 친구들과 함께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신념에 가득 찬 청소년들을 말리긴 어려웠다.     


우린 패거리를 결성해 끝나자마자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PC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 이유는 PC방은 하나인데 근처에 학교가 3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으면 자리는 없었다.   

  

요즘은 더 그렇지만 이때에도 게임 잘하는 이는 대접을 받았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기에 영웅이 되고 싶었던 난 잡지에 나오는 빌드오더를 달달 외우면서 PC방으로 쳐들어갔다.

    

솔직히 그때 게임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면 서울대 정도는 가볍게 가지 않았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간간히 할 정도로 난 진지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세 가지 종족이 등장한다. 지구인 테란, 외계종족 프로토스, 괴물종족 저그. 이렇게 설명하는 게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종족별로 특성이 달랐다.     


친구들은 고급스러운 유닛이 나오는 프로토스나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저그를 선호하기도 했지만 난 무조건 테란이었다. 지구인이 지구인 편을 들어야지 외계인이나 괴물이 되어 지구인들 죽이면 되겠어? 하는 꼰대 비슷한 마인드로 종족 선택을 했다.     


테란은 쉽지 않았다. 강하거나, 수가 많거나 둘 중 하나라면 쉽게 해결될 문제들도 어중간한 테란은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젠장. 그렇다고 배신할 수도 없고. 이거 진짜, 왜 이래? 블리자드(*스타크래프트를 제작한 게임회사)에 전화라도 할까?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그렇게 PC방과 함께 온 동네를 점령하던 중 나는 고3을 맞이했다. 인생 망치기 싫으면 공부하라는 협박을 내내 들으며 한동안은 게임과 PC방을 멀리해야 했다. 죽은 듯이 학교에서 EBS 방송을 듣고, 수능 문제집을 풀어댔다.     


대학에 진학하자 고삐가 풀렸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시대처럼 여겨지자 다시 스타크래프트가 내 인생에 등장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 상우는 나의 스타크래프트 런닝 메이트였다.    

 

우린 날마다 PC방에서 만나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함께 힘을 모아 배틀넷에서 적을 물리쳤고, 그것도 지루해지면 서로 일대일로 붙으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사실 상우의 게임 실력은 형편없었다. 컴퓨터랑 친하지 않았던 녀석이었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실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중에는 내가 아무리 덤벼도 이길 수 없을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 난 녀석에서 오 연패를 당한 후 물었다.     


“야, 너 무슨 약 빨았냐?”

“뭔 소리야?”

“아니,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

“흐흐, 실력을 쌓으려면 고수의 플레이를 익혀야지.”

“고수의 플레이?”

“그래. 인마. 너 프로게이머 경기 같은 거 보냐?”

“그런 것도 보냐?”     


그랬다. 녀석은 나와 함께 PC방 특훈을 끝낸 후 집에 가서도 프로게이머들의 리그 경기를 시청했다. 그들의 전략과 진지함을 몸에 익혔기에 순식간에 실력이 상승한 것이다.     


나도 질 수 없었다. 집에서 게임 방송을 시청했다. 재미있었다. 특히 나의 영웅 임요환의 경기는 정말 멋졌다. 티비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던 건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골 넣을 때 빼곤 없었는데 임요환의 플레이는 환호성을 불러일으켰다.     


술과 사랑의 전개                              

실력이 늘자 집착이 심해졌다. 우린 PC방에서 밤을 새기 시작했다. 당시 PC방들이 여기저기 엄청나게 늘어나자 이용료를 경쟁적으로 내리던 때였다. 한 시간에 오백 원 정도까지 내려가자, 밤을 새더라도 오천 원 정도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나와 상우는 수많은 적을 죽이고, 그들의 기지를 파괴했다. 또 그만큼 우리도 죽었고 파괴되었다. 그렇게 밤새 담배 연기 가득한 PC방에서 싸우고 새벽 여섯 시쯤 천천히 기어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냥 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린 너무 허기가 졌다. 젊음의 에너지를 모조리 적과의 전투에 소비하고는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후루룩댔다. 우린 이상하게 그 의식을 반복했고, 항상 사리곰탕면이라는 컵라면을 해장하듯 먹어 치웠다.     


그러다 그 생활에 염증이 생겼다. 매일 이렇게 영양가 없이 적들을 죽이고 온몸이 담배 냄새에 쩔어 집으로 돌아가니 남는 게 없었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우도 어느 순간 PC방은 그만 가자는 말을 내뱉었다.     


우린 이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대학생답게 살아보기로 했다. 게임 때문에 과 생활은 접은 지 오래되었지만, 동아리라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었다.     


동아리 가두모집 기간에는 동아리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였다. 우린 탁구부에 가입하기로 했다. 탁구가 왠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큰돈 들이지 않고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근데 탁구부에서 탁구는 좀처럼 치지 않았다. 우린 첫날부터 술집으로 몰려갔다. 학교 문 앞에 자리 잡은 막걸리 가게에서 1차를 진행하고, 그 옆옆 맥주 가게에서 2차를 진행하며 세상이 빙그르르 돌 때까지 마셔 댔다.  


그렇게 친해지는 것이라는 선배들의 말을 믿고 엄청나게 마신 후 또 엄청나게 토했다. 엄청나게 늦게 집에 가고, 엄청나게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엄청나게 친해진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엄청나게 어색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말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 퍼마시고, 토하고, 집에 가고, 머리 아팠다. 결국은 친해졌고 탁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더욱더 친해지기 위해 우린 엠티라는 걸 갔다. 멤버쉽 트레이닝이라는 이 활동의 목적은 역시나 술 먹기였다. 그러나 술을 먹는 이유는 친목 도모다. 계속해서 이런 활동을 전개하는 걸 보니 아직도 덜 친해진 모양인가 보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친해져야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합숙까지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다들 술에 취해 나가떨어졌고 상우 녀석도 더는 못 먹겠다며 화장실에서 잠들었다.  

   

내 앞에는 평소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던 예쁘게 생긴 동기 여자애만 남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모두가 나가떨어진 뒤에도 맥주를 두세 병쯤 더 마셨다. 내가 꼬부라진 혀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 술 쎄다?”

“너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내일 괜찮겠어?”

“너나 걱정해. 난 멀쩡해.”    

 

난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맥주를 한잔 더 마셨다. 그 순간 그녀가 옆으로 꼬꾸라지는 게 보였다. 난 술병을 치우고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웠다. PC방에 앉아 의미 없이 적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입술에 뭔가 촉촉한 게 닿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그녀가 나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를 끌어안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나는 상우와 함께 숙소 구석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어제 먹은 술병과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꿈…이었나?”     


엠티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 너, 왜 아무 말이 없어?

- 무슨 말?

- 어제 기억 안 나?

- 아…

- 없었던 일로 할까?

- 아니, 그게 아니고…     


그녀와 사귀기로 했다.     


내가 파괴한 세상                                                                      

그녀의 집은 서울이었다. 우리 학교는 국립대이긴 했지만, 지방에 있었기에 그녀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학기 중에 그녀와 나는 손잡고 다니며 수업을 듣고, 데이트를 즐겼다.     


방학이 되자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고 데이트를 포기할 순 없었다. 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서울로 올라가 그녀를 만났다.      


특별히 묵을 곳이 없었기에 모텔을 잡아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박 2일 정도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오면 밤새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었다. 난 군대에 가야 했다. 영장을 받고 입대한 후 그녀와의 연락은 뜸해졌다. 면회를 오지는 않았지만, 편지는 가끔 왔다. 난 그녀의 편지에 열심히 답장했고 휴가 때마다 그녀가 있는 서울로 향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전역했다. 대학으로 돌아와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이미 졸업해 서울에서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직장인이 된 그녀와 아직 학생인 내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와 나는 노는 물이 달랐다. 직장인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나 데이트 코스는 대학생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곳이었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뒤처지는 것이 이렇게까지 큰 차이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우린 전화로 계속 다퉜다. 한번 싸우고 나면 한 달 넘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툼이 반복되자 괴로웠다.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난 학교 수업에서 만나 친해진 같은 조 여자 후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결국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난 여자 후배에게 고백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여자 후배는 상우와 사귀다 얼마 전에 헤어진 사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우가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일 이후로 여자 후배와도 연락이 끊겼다.

    

나는 여자 친구를 잃었고, 스타크래프트 동지도 잃었다.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영웅도, 술도, 사랑도 그때만큼 새롭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내 눈앞에 추억의 스타크래프트 경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첫 여자 친구를 닮은 여자들의 영상이 추천되어 있었다.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오 분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뒤척이는 아내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스마트폰을 끄고, 머리맡에 둔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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