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어느 정도일까?
프롤로그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괜한 허세로 가득 차 있었다.
주변 모든 사람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가졌고,
나 혼자 정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에게서 인생을 보았다고 믿었다.
우리나라도, 해외에도 역 근처는 항상 그랬다.
누군가 쓰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난다.
쓰러진 사람 옆으로 또 누가 자리를 깔고 눕는다.
인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우린 우리의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까?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우연이 우릴 도운 건 아닐까?
인문학을 위하여
야근. 벌써 5일째다. 요즘은 집에서 잠만 자고 나오길 반복하고 있다. 오늘도 벌건 눈으로 회사를 나와 차에 탔다. 시동 걸고 잠시 한숨을 내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여보, 언제 와?”
“지금 출발했어, 곧 가.”
“얼른 와, 나 할 말 있어.”
할 말이라니, 무슨 말일까? 전화를 끊고 집에 가는 내내 불안감이 마음을 적셨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집에 있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내가 무슨?
도착해 씻고 나왔더니 아내가 흘겨본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할 말 있다면서?”
“응”
“얼른 해.”
“피곤하지?”
“괜찮아, 내일 쉬잖아”
“그래서 말인데”
아내는 내일 도서관에 강연을 들으러 간다고 했다. 아는 사람이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처음으로 하는 강연이란다.
“어디서 하는데?”
“거기 우리 전에 공부했던 거기”
결혼 전에 우린 가끔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곤 했다. 동네 도서관에 아침부터 줄 서서 들어가 하루를 보냈다. 그 도서관은 지금 사는 곳에서 차 타고 50분은 걸리는 먼 동네에 있었다.
“태워달라는 거지?”
“아니”
“그럼?”
“같이 가자는 거지.”
“같이?”
다음 날, 우린 그 도서관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전이었지만 차가 많이 밀렸다. 난 야근 후유증 때문인지 연신 하품이 났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숨 막히는 정체를 뚫고 도서관 주변을 세 바퀴쯤 돌아 겨우 주차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도서관 출입이 까다로웠다. 발열 체크를 하고 QR코드를 인증하니 명찰을 하나씩 나눠줬다.
명찰을 맨 아내와 나는 도서관 지하로 향했다. 이미 강연은 시작되었다. 강연장 입구에서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팸플릿을 받았다. 의외로 썰렁했다. 그리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나와 아내는 뒤에서 다섯 번째 줄쯤에 자리를 잡았다. 난 그 정도면 뒤쪽이라 생각했는데 앉고 보니 강연자가 정면으로 보이는 한가운데 자리였다. 부담스러워 자리를 옮기려 했으나 아내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참아야 했다.
다큐멘터리
강연은 지루했다. 관심 없는 책의 작가가 그것도 처음으로 하는 강연에 반강제로 와서 피곤하게 앉아 있으니 죽을 맛이다.
죽을 맛을 넘어 의식이 죽어가고 있다. 시야가 흐려지고 고개가 넘어간다. 작가와 눈이 마주쳐 잠시 각성할 뻔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목소리가 잦아들 정도로 자제력을 잃어버렸을 때쯤 옆구리에 전기가 흘렀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급히 돌아온 자제력이 입을 틀어막았다.
또렷해진 의식으로 강연을 듣기 시작했다. 작가는 원래 방송작가를 10년 넘게 했다고 한다. 방송작가 생활 끝에 진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청소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책이 나와 이렇게 강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다. 사회자가 질문을 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사회자가 잠시 머뭇거리다 자기가 질문을 하나 했다. 아주 아주 매우 매우 뻔한 질문이었지만 그 덕분에 다음 질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방송작가로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소설을 쓴 작가에게 방송작가로 생활하던 이야기를 해달라니. 당신이 쓴 소설에는 1도 관심이 없으니 얼른 끝내 달라는 질문 같아서 거슬렸다. 강연자는 아주 정성스레 그 질문에 답했다.
“다큐멘터리를 찍었을 때였어요. 역 앞 노숙자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생활을 취재했죠.”
메인작가가 되고 첫 방송이었다고 하는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노숙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큐멘터리는 3일간 누군가의 삶을 밀착 취재하는 형식이었다. 방송작가는 취재를 위해 서울역 노숙자들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섭외해야 했다.
섭외라는 건 참 웃긴 일이다. 정해진 것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게 목적인 약속을 하는 것이다. 취재를 할 테니 늘 하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걸 찍으려면 사전에 당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모든 걸 알려달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은 생각보다 섭외가 어려웠다.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도 노숙자로 공중파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방송작가는 섭외가 안 되어 몇 날 며칠을 서울역에서 헤맸다. 나중에는 그냥 아예 서울역에 자리를 깔고 앉아 노숙자가 되었다. 그래야 그들 사회에 낄 수 있을 것 같아서.
3일의 취재를 위해 그녀는 3주간 노숙 생활을 했다. 그들 옆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고 그들과 함께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섰다.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어떤 인생
얼굴 모자이크를 조건으로 결국 누군가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원래 유명한 식당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예상대로 장사는 끝내주게 잘 되었다. 덕분에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더 살 게 없어서 2호점을 내고 또 내고 다시 내고 계속 내어 50호점까지 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노숙자가 된 건 믿었던 고향 후배 때문이었다. 가게 관리가 힘들어진 그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고향 후배를 불러 관리를 맡겼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일을 고향 후배가 처리했고 그는 골프나 치면서 인생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후배가 연락이 두절됐다. 그로부터 3일 후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청구하는 사채업자가 찾아왔다. 가게는 누군가에게 넘어갔다. 재산이 사라지자 가족도 무너졌다. 아내는 자식들을 데리고 도망갔다. 남아 있던 집을 팔아 어딘가로.
노숙자의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배시시 웃는 걸 보았다. 다 지난 이야기를 하니 쑥스럽다며 머리를 긁다가 출연료는 없냐며 손을 비볐다.
다음 날 또 다른 노숙자를 만나 허락을 얻었다. 노숙 생활 30년에 빛나는 그는 어릴 땐 부잣집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보기 드물게 외제 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고 가정교사가 항상 붙어 있을 정도로 상류층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부모와 가족여행을 가다 큰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고아가 됐다. 집사는 부모의 재산을 가로채 해외로 도망갔다. 친척도 없던 그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근데 그 고아원에 불이 나 많은 아이가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그는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거리를 돌아다니다 노숙자가 되었다. 잠시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30년을 그렇게 살게 되었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티비 앞에 앉아 리모컨을 쥐었더니 손에 힘이 없더란다. 버튼을 누를 자신이 없어 그냥 잠이 들었는데 잠만 이틀을 꼬박 잤다고 한다.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 천천히 뜨면서 질문자에게 답했다.
“그들은 생각보다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해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해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약한 사람들이었어요.”
강연이 끝났다. 아내는 빛보다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왜냐고 묻기도 전에 내 몸은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 앞에, 앞에, 앞에 있던 그 여자 둘 내가 아는 사람들이야.”
“아는데 왜 그냥 나와? 그것도 이렇게 빨리.”
“으이그, 어중간하게 아는 게 모르는 사이보다 더 어색해.”
“어색할까 봐 도망 나온 거?”
아내가 사나운 표정을 짓는 바람에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입 다물고 한 시간을 운전해 집에 도착하니 택배가 와 있었다. 책이었다. 아까 그 방송작가 아니 강연자 그러니까 갓 데뷔한 그 소설가의 책.
난 주문한 적 없으니 아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택배 포장지를 뜯었다. 주황색으로 된 표지를 이리저리 구경하다 보니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소설은 아무 상관없는 내용이었지만.
에필로그
사람은 늘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도 그걸 자기 자신과 비교하며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금 슬픈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배려하고 걱정해주는 건 어느 정도 진심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예의상 말로만 그렇게 걱정하는 척하기도 하고, 또 그게 별다른 의도 없이 진심인 경우도 있다.
나는 대충 절반이라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 절반에 그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 절반.
물론 끝도 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고 믿고 싶다.
절반만이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팍팍한 인생이 조금은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래서, 사는 맛이 느껴지고 건강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