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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May 27. 2023

점수(회복)의 방향

돈오(깨달음)의 방향은 생각을 넘어선 실상계 한곳을 향한다.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확인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점수(회복)의 방향은 생각의 영역인 현상계를 향한다.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을 통해 그동안 생각이 빚어놓은 참상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한 온갖 부조리와 비효율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점수의 과정이다.


한 방향을 향하는 돈오와 달리 점수의 방향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형성되어온 신체적 습관, 무의식적 방어기제, 관계를 맺는 방식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부작용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점수는 갈고닦아 무언가를 새롭게 증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해롭게 하는 자학을 멈추고, 본래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다.


단, 돈오가 먼저다. 깨달음 없는 점수는 필연적으로 자기강화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자기강화적 관성으로부터 자기해체의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이 깨달음의 요체이고, 무분별한 자기강화로 인한 비효율적 에너지 낭비와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부터 점진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 점수의 요체다.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하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 한걸음 한걸음 걷는 것이다.


선어록에 나오는 닦을 거울이 없다는 혜능의 주장은 돈오(생각 아닌 것, 실상계)를 바라보는 관점이고, 거울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신수의 주장은 점수(생각, 현상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므로 서로 상충될 이유가 전혀 없다. 지금의 나는 생각을 통해 생각이 아닌 것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체득하였으며, 관점의 전환을 통해 그동안 생각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손상된 심신과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향하는 점수의 방향은 결핍을 채우는 쪽이 아닌 과잉을 자제하고 지양하는 쪽이다. 불필요한 생각, 언행, 행동의 과잉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로 심신과 관계가 손상되었으므로, 일단 손상을 가하는 행동을 멈추는 일을 먼저 실행하고 있다. 멈춤의 시작은 과잉됨이 비효율임을 분명하고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제대로 각인되는 것이다. 나의 돈오와 점수는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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