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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g Aug 23. 2018

일곱 살의 위로

나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는 것 또한 너희들

하루는 내가 악몽을 꾸다 흐느끼며 깼다. 아이들이 오고 난 뒤에 수개월 동안은 아이들이 쉽게 잠들지도 못했을뿐더러 잠든 뒤에도 쉬 마려워 깨고, 이유 없이 깜짝깜짝 놀라며 깨고, 꿈꾸다 울며 깨고, 불길한 잠꼬대를 하며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후에 든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가 번갈아 그러다 보니 하룻밤이면 적게는 두어 번에서 많게는 대여섯 차례 꼴로 나도 함께 깨어났다. 심신이 말도 못 하게 지쳐있었지만 아이들의 기척에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어릴 적부터 잠이 많고 잠귀도 어두웠던 터라 그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무려나 새벽에는 잠들어 있을 때보다 깨어 있는 때가 많았고, 잠들어 있었다 한들 숙면 상태로는 거의 진입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촉각이 곤두서 있다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달까. 


아이들이 오밤중에 깨면 쉬 하러 화장실에 동행하거나, 물을 가져다 먹이거나, 품에 안고 달래거나, 토닥토닥 다시 잠들 수 있게 도와주곤 했다. 작고 어수선한 방, 먼지 낀 어둠 속에서 조그만 등을, 손을, 엉덩이를, 어깨를, 쓸고 매만지면서 나도 참 많이 울었다. 그럴 때면 두 아이와 나, 그리고 늙은 부모님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아프게, 그러나 날카롭고 또렷하게 다가오곤 했다. 


2018년 4월 14일 토요일. 동네 도서관. 공룡을 좋아하는 H와 J. 꿈에서 만나는 공룡도 이렇게 평화롭고 친구 같기를.


아이들이 잠 속에서 흐느끼거나 잠꼬대를 하면서 깼을 때는 거의 꿈에서 괴물을 만났을 때였다. H는 큰 공룡이 나타나 공격당하는 꿈을 줄곧 꾸었다. H는 쥐라기와 백악기의 거의 모든 공룡을 줄줄 꿰는 아이였다. 낮에는 그렇게 좋은 공룡이 한밤 꿈속에서는 적이 되어 나를 공격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치였을까. J는 꿈에 나타난 그게 무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목을 놓아 울기만 했다. 어느 날은 문어가, 어느 날은 멧돼지가 그랬다. 


H와 J가 꿈과 현실을 오가며 험한 일을 겪는 동안 얕은 나의 잠자리도 편안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기도 여러 번,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면 악마를 본 듯 소금기둥처럼 온몸이 굳어 치를 떨다 깨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놀라서 흐느끼며 깼는데, 잔뜩 구겨진 인상의 굴곡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을 때 H가 엎드려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티를 입고 있던 H는 하얀 티 보다 더 하얀 것 같았다. 눈을 마저 떴을 때도 목구멍에서 신음이 새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H와 눈이 마주치고도 나는 어쩐지 마른 울음을 계속 울었다. 평소라면 H와 내가 뒤바뀐 상황이었다. H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간 얼굴로 평온하고도 담백하게 말했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이리 와.


그리고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눈꼬리를 따라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느끼며 나는 H의 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H도 나도 다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단잠 후에 H는 다시 영락없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위안, 그러나 이렇게나 여운이 긴 일곱 살의 위로. 너희들에게 내가 필요하다 여겼는데 지금의 나를 가장 깊이 느끼고 있는 이가 너희들이구나, 큰 사랑을 내게 주고 있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간적인 따뜻함과 곰살궂은 매너로 나를 각성시키곤 하는 신사들. 

그래서 말인데 고모가 꼬마 신사들 덕분에 한결 마음이 넓어지고 사려 깊어진 것 같기도 해.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H의 학교 운동장. "이게 고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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