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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g Sep 05. 2018

교문 바라기

1학년의 등교 배웅과 하교 마중 풍경

H가 초등학교 입학 후, 나는 진귀한 경험을 몇 차례 했다. 그중 하나가 등하교 풍경이다. 부모님과 함께 등교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H와 같은 1학년이거나 많아도 3학년을 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출근길에 H를 학교에 데려다주는데, 등교길 풍경은 그나마 약 30분 텀으로 많이 분산되는 편이라 특이할 것은 없었다. 하교는 엄마가 나가신다. 입학하고 처음에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아이고야,, 말도 마라...
학교 앞이 장사진이다.
지 새끼들 찾아 갈라고 다 시뻘겋게 불을 키고 있다.

 

4교시면 대략 12시 30분부터, 5교시면 대략 1시 30분부터 학교 앞에 젊은 엄마들이 진을 치고 서서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교문만 바라보고 섰다는 것이다. 요즘은 차량은 물론이려니와 학부모라도 교문 안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교문 어귀 보안관실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1학년은 담임선생님께서 교문 앞까지 하교 지도를 나오시는데, 일렬로 줄을 세워 나와서 학부모나 학원 픽업 교사에게 인계해 주신다. 담임교사의 하교 지도는 입학 후 한두 달 정도 하려나 싶었는데, 1학기 내내, 2학기를 시작한 지금도 계속되는 걸 보니 아마도 1년 내내 해주시는 모양이다. 보안관실도 그렇고, 담임교사 하교 지도도 그렇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니다. 물론 내가 1학년이었을 때는 교문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엄마들도 없었다. 에그머니.. 30년이면 그러고도 남을 세월이기는 하다만.


엄마가 한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끔 내가 회사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하교 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교문 앞에 나가는데 3~4월의 몇 차례는 실제로 보고도 그 광경이 믿기지 않았았다. 글쎄 약 한 수십여 명은 되려나. 그 많은 엄마들이 교문 앞 몇몇 상점 앞을 점령하고 차양 아래에 서서는 교문 바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번 더 하교길에 나가고서는 교문 앞뿐 아니라 카페, 샌드위치 가게 등 교문 앞 가게 속에 무리 지어 들어앉아 있는 엄마들의 수도 어마어마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1학년 현장학습이 있는 날이었는데, 관광버스가 학교 앞까지 들어오지 않고 대로변에서 아이들을 하차시켰는데, 그때는 또 그 도로가 장사진이라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엄마는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지나는 어떤 엄마에게 얘기를 듣고는 헐레벌떡 도로변에 나가보니 그 모습이 교문 앞보다 더 장관이더라고 했다.


2018년 4월 2일. 등교길 H.


처음 입학할 때는 H의 등하교를 얼마 동안이나 지도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되는 데까지는 해보자 싶었는데, 그런 상황을 듣고 보고 겪다 보니 교문 앞 배웅과 마중을 결코 그만둘 수는 없게 되었다. 학교를 혼자 오가는 H는, 사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야무지고 똑 부러지게 대처하지 못하고 이내 어리둥절한 채로 어쩔 줄 몰라하는 H가 도무지 미덥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도 배웅도 마중도 해주지 않는 어떤 상황에서 H가 느낄 수도 있는 감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경험 속에서 다정히 엄마 손 잡고 등교하는 아이를 H가 혼자서 보게 되는 것도 싫었다. 같은 반 친구라면 아마 더 그럴 것이다. H는 입학 두 달 후부터 매일 태권도에 다니고 있어서 하교 후 바로 태권도 픽업 선생님께 인계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우리는 하교 마중을 그만두지 않았다. 엄마는 교문 앞에서 H의 책가방을 받고 태권도 도복이 들어 있는 가방을 건네주거나, 방과 후 수업 준비물 가방을 받아오거나, 간간이 짬을 내 간식을 사 먹이기도 했다. 그래 봤자 10분도 채 넘지 않을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 사이라도 아이를 보아야, 무사히 다음 장소로 가는 것을 보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2018년 4월 4일의 출근길. H 등교 15분 후.


올여름 불볕더위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에도 교문 앞 하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엄마들 사이에서 엄마가 달래야 할 서글픈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하교 마중을 그만 두시라 말하지 못했다. 한 차례 담임 선생님이 할머니께서 안 나오셨는데 그냥 집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전화를 해온 적이 있었고, 태권도에서 픽업 실수를 하는 바람에 H가 난데없이 미아가 될 뻔한 사건이 있어 더더욱 그랬다. H와 J가 온 뒤로 더 늙어버린 엄마는 깜빡깜빡하는 일도 잦고 걸려오는 전화를 놓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그런 엄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발에 불이 나게 H 뒤를 쫓는 모습은 짐작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안쓰럽기 짝이 없는 H와 그런 H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시린 가슴으로 눈물 훔치며 늙어가는 예순일곱 엄마라는 사실은 더없이 고통스러우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게 하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고통은 배가됐다.


오늘은 월요일. H가 4교시 후 하교하는 날이다. 휴무였던 나는 8시 40분에 교문 앞 등교 배웅을 하고 12시 30분 교문 앞 하교 마중을 했다. 등교 풍경은 여름방학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는데, 하교 풍경은 좀 달랐다. 마중 나온 엄마들이 현격하게 준 것이다. 두 번째 순서로 교문 앞에 나타난 H 반도 반수가 안 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학기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방과 후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곧 나를 발견한 H가 뛰어와 안긴다. 바로 옆에 태권도 픽업 선생님이 나와 계셔서 나는 더 어쩌지 못하고 이내 가방을 받아 든 뒤에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한걸음 물러서서 고민하다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별안간



고모! 고모!
내 띠! 띠! 띠!



책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둔 태권도 띠를 H도 나도 잊고 있었는데, 그것을 찾는 소리였다. H는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띠를 찾는 목소리도 우렁차고 익살스러웠다. H도 나도 하하호호 깔깔껄껄 한바탕 얼굴을 이겨가며 웃다가 H가 띠를 쥐고 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나도 곧 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했는데, 우리의 그 모습을 지켜본 이가 있었다. 학교 앞을 지나던 80줄 할머니였다.



엄마가 저리도 좋을까.
엄마가 참말로 좋은 가보오.
엄마가 좋지, 좋아. 암.



할머니는 H가 큰 소리로 '고모 고모' 하는 것을 아마도 '엄마 엄마'라고 들은 모양이었다. '내 띠, 내 띠' 하는 말은 그냥 기분 좋아서 내뱉은 어떤 감탄사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나는 별 대꾸를 할 방도가 없어서 그저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을 지으며 목례를 하는 양 몸을 약간 수그렸다. 나는 모르는 누가 봐도 H의 엄마였으므로 이제 이 정도의 일들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는데, '엄마가 좋지, 좋아'라는 말은 목이 턱 막히면서 가슴에 박혀버렸다. 그런 채로 거의 뛰다 피시 할머니를 스쳐 가는데 할머니는 그런 내 뒤꼭지에다 대고



장가갈 때도 저래야 될 건데
장가갈 때는 딴 판이라



어라,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 허허. 나는 또다시 모른 체를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몸짓을 하며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할머니가 아들을 출가시킬 때 퍽 섭섭하셨던 모양이구나, 싶다가 할머니 나이로 짐작해 보면 손주가 있어도 꽤 큰 손주가 있을 것 같은데, 아들 장가갈 때 퍽 섭섭했던 마음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으신 게로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런 옛날 일을 생면부지 나 같은 사람 앞에서 내비칠 리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 보니, 할머니가 최근에 막내아들을 장가보내셨나, 아니면 큰 손주가 장가를 가는데 할머니 딸이나 며느리 마음을 박박 긁고 갔는가 보다, 까지 이어졌다.


그러게나, H와 J가 장가갈 때까지 녀석들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어른들의 일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누구도 묻지 않은 그 질문을 내가 꺼내놓고는 답을 찾고 있다. 어느 어여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건강한 남자로 자라나 그 여인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아름다운 사내가 된 H와 J의 모습은 아직 너무 멀지만 또한 그만큼 벅차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내 곁에서 자라준다면, 아마도 장가갈 때는 딴 판이라도 괘념치 않을 텐데. 새털처럼 많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견디고 지켜야 그 날이 올 수 있을까. 그 날까지 나는 과연 지금 같은 마음으로 너희들의 엄마로서 있을 수 있을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그 어떤 무엇도 원망하지 않아야 나는 비로소 그리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럴 수가 과연 있을까. 나는 내 마음도 멍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H와 J가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마도 등가일 것이다.



2018년 8월. 국제갤러리. 꼭 한번은 보고 싶었던 칸디다 회퍼 전. 클로징 이틀인가를 남겨두고 점심시간에 들렀는데, 전시보다 이 창밖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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