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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Jan 21. 2023

그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비디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와 루두스 장치

<드래곤 퀘스트 11>의 한 전투는 이렇게 진행된다. 주인공 ‘용사’는 6개의 오브를 모아 용사의 검을 부활시킨다. 이때 그들의 뒤를 추격해온 마왕 우르노가의 부하 호메로스가 용사 일행을 습격한다. 이어지는 전투 시퀀스에서 호메로스는 ‘어둠의 오라’를 두르고 무적 상태가 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호메로스를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 이러한 게임 문법에 익숙한 플레이어 대부분은 그냥 패배를 하나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전개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이 상황을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결과가 규정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디오게임의 성격으로 거론되는 ‘일체화의 신화’와 위배되는 성질이다. 많은 이들이 비디오게임의 참여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디오게임에서의 일체적 경험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비디오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인 내가’ 마왕을 쓰러뜨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사에는 비디오게임에서의 두 주체(플레이어와 캐릭터)가 일종의 동일시된 경험을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때에 따라서는 이 두 주체는 동일한 경험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발화가 가능하다. 호메로스의 공격에 쓰러진 용사와 동료들에게 있어, 이는 충격과 굴욕의 패배일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 패배는 단순한 스크립트의 결과일 뿐, 전략적/행위적 패배로 인지되지 않는다. 


  발화의 어긋남은 두 주체가 가진 수행성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상황의 동일시가 발생해 일시적 공명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박근서는 <게임하기>(박근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에서 이런 구분을 ‘몰입’으로 정리하는데, 그는 몰입이 ‘특정한 서사적 위치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것(이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두 주체의 거리감은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서 언제나 뒤따라오는, 게임의 디제시스가 게임 플레이와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다는 문제(소위 말하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ance’)와 연결된다. 이 문제에 어떻게든 화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게임 플레이에서 플레이어와 캐릭터라는 두 주체의 간격에 대해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주체는 개념적으로 어떠한 거리감을 지닌 것인가? 


시뮬레이션과 원본 

  많은 비디오게임 이론가들은 비디오게임이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예스퍼 율Jesper Juule은 ‘레이싱 게임은 자동차 경주게임의 시뮬레이션이다. <피파 2002>는 축구 경기의 시뮬레이션이다.’(<하프 리얼>, 예스퍼 율, 비즈앤비즈, 2014)라고 정확히 정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들에서 개념적으로 고려해봐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레이싱 게임이 ‘실제’ 자동차 경주를 목표로 하는 정확한 시뮬레이션인가?  



  율이 예시로 말한 스포츠 게임 시리즈 <피파>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 게임의 구조는 실제의 축구를 시뮬레이션한다고 말하기 모호한 구석이 있다. 물론 <피파>는 일견에 실제의 축구와 유사한 시청각적 감각을 제공한다. 문제는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방식에 있다. 플레이어는 결코 ‘축구 경기를 수행하는’ 선수와 동일시될 수 없다. 모든 플레이어는 TV 방영과 유사한 버드아이뷰 시점에서 경기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모든 플레이어는 자신의 팀 선수 전원을 조작한다. 공의 위치,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반자동으로 조작 대상이 되는 선수가 변경된다. <피파>는 ‘축구를 한다’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감각을 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감독에 대한 시뮬레이션인가? 선수를 ‘직접’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는 어떠한 지휘자의 감각도 아니다. <피파>를 비롯한 대다수의 축구게임이 가지는 체험적 재현 형태는 원본이라 주장되는 실제 축구와 결코 유사하지 않다. 이것은 축구를 기반으로 하는, 실재하지 않는 ‘괴상한 무언가’의 시뮬레이션이다. 율은 이 현상을 단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시뮬레이션은 원본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으므로 일정량 단순화를 거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실제 축구 경기와 <피파> 간의 이 상이함을 단순화라는 개념으로 모두 정리할 수 있을까? 애초에 <피파>의 목적은 축구 경기에 대한 시뮬레이션 적 재현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축구 경기를 기반으로 한 하나의 ‘재미있는 구조ludic structure’를 만드는 것일까? 후자가 목표라고 한다면, 이 현상은 (시뮬레이션을 위한) 단순화라기보다, (재미 구조를 위한) 변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재차 율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이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율은 비디오게임에서 발생하는 매체 간 이동을 실행과 각색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눈다. 


  “실제 카드 게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컴퓨터를 이용한 카드 게임에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카드 게임은 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컴퓨터를 이용한 스포츠 게임은 실행이 아니라 각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컴퓨터를 이용한 스포츠 게임은 실제 세계를 너무 단순화하기 때문에 스포츠 게임의 세부 사항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앞의 책) 


  이 서술은 매체 간 이동 양상에 대한 것이지 비디오게임에만 적용되는 성질에 관한 서술은 아니다. 말하자면 실행의 원본이 되는 카드 게임에도 유효한 개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매우 모호한 진술이 된다. 실행의 원본이 되는 카드 게임 역시 어떠한 대상물의 각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테이블 보드게임인 <카탄의 정복자>를 생각해보자. 비디오게임판 <카탄의 정복자>는 원본인 보드게임의 규칙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실행에 해당한다. 하지만 보드게임 <카탄의 정복자>는 개척행위와 상거래라는 실제 행위를 원본으로 삼는 각색물이다. 그렇다면 비디오게임판 <카탄의 정복자>와 개척행위/상거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혹은 카드 게임인 <마블 스냅>의 경우를 살펴보자. <카탄의 정복자>와는 달리, <마블 스냅>은 원본이 되는 보드게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마블 스냅>의 몇몇 기능들이 컴퓨터 연산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블 스냅>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보드게임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이 가상의 보드게임 역시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 간에 발생한 소규모 전투를 원작으로 한 각색물일 것이다. 다시금 <마블 스냅>과 가상의 전투 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비디오게임이 규칙을 가져야 하는 한, 컴퓨터에서 재현되는 시뮬레이션은 가상으로 구성된 게임 규칙에 대한 ‘실행’이 될 수밖에 없다. 게임 규칙이 (<마블 스냅>의 경우처럼) 실행을 위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규칙 자체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게임 규칙은 원본이라는 대상물을 기반으로 해석되어 나온 개념적 각색물이다. 비디오게임은 이것을 기계적으로 실현하는 시뮬레이션이다. 비디오게임은 시뮬레이션이지만, ‘현실의 대상’과 일차적으로 대응하는 시뮬레이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디오게임과 현실의 대상은 게임 규칙이라는 통로를 통해 이차적으로 매개한다. 


  곤살로 프리스카Gonzalo Frsca 역시 자신의 책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곤살로 프리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에서 비디오게임 전체를 시뮬레이션으로 규정한다. 프리스카는 에스핀 아세스Espen Aaseth의 ‘에르고딕 텍스트Ergodic Text’ 개념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시뮬레이션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뒤, 시뮬레이션의 형성 구조를 비디오게임 구조에 덧씌운다. 프리스카의 텍스트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그가 비디오게임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갖지 않은’, ‘존재하지 않거나 심지어 우리 세계의 물리학 법칙들과 배치되는’ 대상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삼각형을 시뮬레이션의 성립 개념으로 이용한다. 시뮬레이션은 ‘대상object’에 대한 ‘해석소interpretant’를 거친 ‘재현체representamen’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리스카는 이 모델에서 ‘해석체interpretamen’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는다. 해석소가 대상에 대해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면, 해석체는 재현체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말한다. 이 모델에서 시뮬레이션은 해석자가 대상을 해석소로 한번 해석해낸 뒤, 최종결과물일 수 있는 재현체에 입각해 해석소를 구체화한다. 이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해석체가 된다. 


  말하자면 프리스카가 말하는 ‘해석체’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의 문제다. 해석체를 시뮬레이션의 과정 내부에 둔다면 시뮬레이션의 원본은 현실에 있는 대상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게임이 언제나 원본과 멀어지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로 귀결되어 버린다. 율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므로 단순화를 거치게 된다고 말하지만, 앞서 말했듯 게임의 변형이 ‘별수 없는 단순화’라기 보다는 ‘재미 구조를 위한 변화’로 읽힐 수 있으므로 재고의 여지가 존재한다. 도리어 비디오게임은 현실로부터 일정량 추출, 정리, 변화시킨 특정한 ‘재미 구조’를 원본 삼아 시뮬레이션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이는 단순히 비디오게임의 매개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 비디오게임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 결국 현실 재현의 한계를 통해 단순화하는 것을 비디오게임으로 규정한다면 개별적 비디오게임은 언제나 실패하거나 혹은 비틀린 시뮬레이션으로 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시티>를 시장(市長)의 입장에서 도시 경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으로 규정하면 결국 <심시티>는 엉뚱한 재현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심시티>는 시장의 행위, 실제 도시의 경영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 경영이라는 현실 전반에서 재미 구조로 재구축한 대상물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이해할 때 더욱 확실하게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비디오게임은 무엇을 원본으로 하는가? 그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선별되고 편집된 그 무엇인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원본은 애초부터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저 구현의 과정에서 세계의 것들을 해석함으로 설정된다. 비디오게임의 그러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원본으로 삼아 출발하는 시뮬레이션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웹진 퐁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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