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lite (誠品)
씩씩하게 여행을 이어가던 어느 밤.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홀로 쉬던 나는 어쩐지 걷잡을 수 없는 무료함에 빠져들었다. 읽던 책도, 듣던 음악도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밤. 산책이나 할까 싶어 뒷주머니에 지갑을 찔러넣고 거리로 나섰다.
제아무리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순간은 찾아온다. 스스로 외로움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이런 외로움은 다르다. 여행지에서 겪는 외로움은 대부분 두고 떠나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먼 타국에서 그 마음을 달래기란 늘 녹록지 않다. 북적이는 번화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달래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차피 그곳은 여행자인 내가 진짜 속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날도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카페 몇몇 곳을 기웃대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그저 길을 걸어보기로 한 밤이었다. 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텅 빈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아이들을 가만히 구경하기도 하고, 여전히 반짝이는 타이베이 101의 불빛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거리가 부쩍 어두워져 아쉬운 대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 그 느리고 긴 밤 산책의 끄트머리에서, 어둑해진 대로변에서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는 <성품 서점>을 만났다.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서점 앞에는 24시간 영업점이라는 안내가 붙어있었다. 불 꺼진 빌딩 지하에서 번져 나오는 빛을 따라 가면서 나는 내내 의심했다.
‘영업 중인 거 맞아?’
‘왜 이렇게 조용하지?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냐 …?’
쭈뼛대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나는 서점에 들어서자 단숨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책장 앞에 자리를 잡고 저마다의 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동질감을 느꼈다. 곧이어 내가 속할 수 있는 곳에 왔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나도 내가 읽을 수 있는 적당한 책을 찾아 구석진 책장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낯선 도시에서 대책 없이 떠돌던 여행자를, <성품 서점>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나를 받아주는 일도, 내가 느끼는 외로움도,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책장 앞에 앉아 책과 함께 잠시 쉬는 시간을 보낸 나는, 산책하듯 서가 사이 사이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책장 사이에 놓인 낡은 가죽 의자에 눈이 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업자 로버트 우 Robert Wu가 생전에 사용하던 의자라는 금속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그가 서점을 찾는 이들에게 쓴 듯한 짧은 편지가 함께 붙어있었다.
독서는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우리의 영혼을 되살려냅니다. (중략) 실질적인 동시에 문학적인, 이 독서의 즐거움을 누려봅시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영혼은 분명 즐거움과 지적 통찰을 얻게 될 거예요.
(중략)
진정성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 그 가치를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마음의 습관이 되면, 사그라들지 않는 영원한 미덕으로 남을 것입니다. 진정성은 지혜의 정점이자 삶의 본질에서 나오는 빛과도 같습니다.
나는 이 짧은 글과 손길에 닳아 번들대는 가죽 의자를 보며, 로버트 우가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노력했을 사람일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책과 읽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책을 몰입해 읽는 것, 그 빛나는 순간의 기쁨을 제대로 알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만든 서점. <성품 서점>은 읽기의 즐거움을 너머, 책이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 듯했다. 서점을 24시간 열어두는 결정도 그 일환이었으리라.
나는 오늘 밤 서점에서 보낸 모든 순간에, 그의 의도와 뜻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영혼에 빛을 밝히는 위로의 시간들. 그리고 그곳에, 책이 함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외로움을 떨치고 내일을 기대하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신의점 : No. 11, Songgao Rd, Xinyi District, Taipei City, 대만 110 ‣ Goole map
송얀점 : No. 88號, Yanchang Rd, Xinyi District, Taipei City, 대만 110 ‣ Goole map
난시점 : No. 14號, Nanjing W Rd, Zhongshan District, Taipei City, 대만 110 ‣ Goole map
1989년 타이베이에 처음 문을 연 성품 서점은 대만 최대의 서점 브랜드가 되었다. 타이베이뿐 아니라, 대만 여러 도시에서 크고 작은 지점을 만나볼 수 있다. 타이베이의 대표 지점은 신이점, 송얀점, 난시점. 방대한 장서와 다양한 해외 서적, 음반 코너, 기념품 숍을 둘러보다 보면 두어 시간이 훌쩍 흐르기도 한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서점은 해당 지역 사람들의 관심과 트렌드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인 만큼 방문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 24시간 운영 지점이었던 둔화점은 코비드 시기를 거치며 현재는 폐점 상태이다.
✓ 둔화점에 있던 로버트 우Robert Wu의 가죽 의자는 새로 문을 연 난시점으로 옮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