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간 여섯 번의 병원을 경험하고 난 후
프롤로그
처음은 부러지진 않았다. 나는 원래 발을 질질 잘 끌고 발이 무거워서 항상 또각또각 걷는 게 힘들었다. 여기저기 잘 걸려 넘어지고 어릴 때 스키, 스케이트, 롤러스케이트 안 탄게 없었는데도, 크게 다친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살짝 삐끗했는데, 그럴 때일수록 빨리 치료해야 한다며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침이 들어가는 순간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고 그날 이후로 엄청난 통증이 시작됐다.
시작은 신경이 손상된 것이었다. 나중에 원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아주 작은 확률로 작은 바늘에도 신경이 손상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등이 퉁퉁 붓기 시작했고, 걷는 건 괜찮았는데, 양말이 쓸리거나 샤워할 때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몸서리치게 전기가 통하곤 했다. 어떻게 어떻게 찜질과 마사지, 치료를 하면서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내 골절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국제 학술대회 날이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한 후 정말 모든 학회를 쫓아다녔다. 학회가 내가 열심히 산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학회에 서는 그들을 꿈꿨다. 이 날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회가 있는 날이었다. 몇몇 친구들도 함께 참석한다고 해서 학회 전에 맛있는 파스타도 꿀꺽하고 스타벅스 한잔 손에 딱 끼고는 학회장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놀았나? 학회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진행하는 교수님이 연단에서 학회에 참석한 수많은 세계적인 학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겠다는 욕심에 살금살금 앞자리로 내려가던 나는 계단에서 우당탕탕 걸려 넘어졌다. 너무 웃긴 건 내 몸은 박살 나고 짐도 내팽기쳤는데 스타벅스 커피만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는 사실이다. 모두의 시선보다는 우선 너무 아팠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른 자리에 앉았다.
쿵! 소리에 모두들 놀라서 진행이 잠시 멈췄지만, 갈 길이 멀었기에 진행자는 어서 다음 발표자를 연단으로 불렀다. 그의 발표는 15분 정도였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동안의 넘어짐과는 다름을 느꼈고, 그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이것은 확실히 골절이었다. 분명 발 어딘가가 부러진 게 분명했다. 다만 걸을 수는 있었어서 정말 택시까지 최선을 다해 걸었다. 택시에 타고 집 근처 정형외과로 오는 약 40여 분 동안 나는 내 발이 2배가 되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정말 정신을 놓을 정도로 아팠고 속상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다치다니.
병원에 가서 발등골절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는 결국 한 시간을 엉엉 울다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조금 다친 거 같아요. 별거는 아닌데 저를 좀 데리러 와주시겠어요?" 말하고는 전화를 끊고 또 엉엉 울었다. 확실히 난 울보가 맞다. 병원에서는 대신 전화를 걸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또 얼마나 부모님이 놀랄까 싶어서 나 자신이 진정될 때까지 그저 엉엉 울었다. 태어나서 처음 골절이라는 것을 겪은 나는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실비 보험이라는 것을 가입했다. 그리고 7년간 미친 듯이 쫓아다니던 학회를 끊었다. 그냥 그것은 핑계였지만, 당분간은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처음으로 골절을 경험했던 나는 꽤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지금도 비가 올 기미를 뉴스보다도 먼저 알아채는 것 같다. 날씨가 촉촉해지면 내 발은 퉁퉁 붓기 시작한다. 두 번째 골절은 약하게 지나갔다. 그저 길을 가다가 살짝 삐끗했는데, 멍이 시커멓게 들어서 다음날 병원을 가니 금이 갔다고 했다. 처음 이후 들어놓은 실비보험을 빼먹으며, 그래 이래서 보험을 드는 거지! 기고만장했다. 한 일주일 깁스하고는 은근슬쩍 넘어간 거 같다. 문제는 세 번째였다.
6년간 변변찮은 휴가도 없이 일한 나에게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조카와 강릉 여행을 긴급하게 만든 것이다. 부모님과 나, 언니와 형부, 거기에 조카까지 총 6명이 함께하는 강릉 여행은 결국 마지막날 점심식사로 들른 맛없는 순두부집 앞 아스팔트가 부서졌는데 그 사이에 내 발이 끼면서, 발목이 댕그르 돌아가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난 그저 방학이 끝나가는 조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지나가던 커플이 놀란 부모님을 대신해 119를 불러주었고, 근처 종합병원에서 임시로 치료를 받고 엠블런스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오후 2시경 다쳤는데, 서울 응급실로 와서 병원에 입원하고 병실에 누우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조카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남겨주었다.
오른쪽 발목을 지탱하는 발목뼈 3개가 모두 골절, 심지어 왼쪽 발등까지 추가 골절이라는 놀라운 클라이맥스를 기록했다. 의사 선생님은 오른쪽이 너무 심하니 왼쪽은 그냥 디뎌도 된다고 했다. 철심 박는 수술과 한 달간의 입원, 퇴원과 동시에 약 3개월을 휠체어를 타고 지방 출장도 다녔다. 지방 출장때는 은퇴하신 아버지는 운전기사로, 어머니는 수행 비서로 함께 하면서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했을 뿐...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변 정리를 이어나갔다. 많은 일들을 어쩔 수 없이 놓치고 포기해야 했으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열심히 정리했다. 저녁에는 네이버에 있는 <골절 환자 모임> 카페에 들어가서 위안을 얻었다. 그거 아는가? 발목골절 따위는 대퇴부나 척추골절에게는 명함도 못 내민다. 다만 발가락 골절은 우리한테 쨉도 안된다. 손가락 골절? 그건 뭐 아무것도 아니다...ㅎㅎㅎ
엄청난 골절과 오랜 치료 후에 나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은 걸어서 화장실 갈 힘만 있어도 행복하다"
오늘도 나는 짜증 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에게 화를 내야 했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아려야 했으며, 이런저런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있기에 행복하다.
세상에 뭐 그지 같은 일이 없겠는가. 나도 정신 차리고 보니 강릉시를 고소하는 일도, 나 자신을 원망하는 일도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를 내면 뭐 하나...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있는데 말이다!
혹시 걸어서 화장실을 못 가는 사람도 실망하지는 마시길.. 까지껏 휠체어 타고 가거나 기저귀에 싸면 된다. 내가 좀 더럽다고 뭐 냄새밖에 더 나겠냐. 파리도 런던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냄새 개많이 난다.
photo by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