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J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디 Jul 07. 2024

퀴어 시티 은평 보이



안녕, J.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벌써 7월이라는 게 믿겨? 나는 은평구에서 자취한 지 두 달째 됐어. 이전에 와 본 적도 없는 곳에 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서울 전셋값이 나를 낯선 땅에 정착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살수록 맘에 들어. 집에서 창문을 열면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것도 좋고, 좁은 골목들이 많아서 산책하는 재미도 커. 집 앞 김밥집의 참치김밥이 한 줄에 3천 원일 만큼 서울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물가도 저렴하고, 원도심이라 오래된 맛집도 많아. 여길 알아가고 적응할수록 어른이 되는 듯한 기분이야. 서른이나 먹고, 우습지? 너도 미국에 정착했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니?


며칠 전엔 애인이랑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왔어. 각자 할 일을 하다가 배가 고파진 우린 도서관을 나와 연신내 먹자 골목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 좁고 한적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애인이 그러더라고. “K가 여기 사는 것 같던데. 지금도 살려나?” K는 이쪽 바닥에서 가히 시초 격인 게이 유튜버인데, 너도 알런지 모르겠다. 그의 영상에서 익히 본 낮고 오래된 풍경들이 이제 나의 동네가 되다니, 이다음에 그를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유명하다는 오징어삼겹살집으로 향했어.  


긴 웨이팅에 망설이다 결국 근처 찜닭집으로 행선지를 바꿨어. 커다란 찜닭 접시를 순식간에 거덜내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소화를 시키는데, 창밖으로 다정해 보이는 남자와 남자가 지나가더라고. 애인에게 말했어. “방금 이쪽 커플 지나갔어.” 애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답했어. “남자 둘만 지나가면 다 이쪽이래.” 평소에 애인한테 비슷한 말을 자주 했거든. 편견인 거 아는데, 동족이라는 확신이 들면 반가워서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걸 어쩌겠니. 못 믿겠음 나가서 확인해 보자고 하고 애인과 가게를 나섰어. 


어느새 두 남자는 작은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졌지만, 다행히 우리가 가려 한 빙숫집 방향으로 걷고 있더라고. 우리는 서둘러 두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어. 키가 더 큰 남자가 작은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를 때까지도 애인은 “그냥 친한 친구 같은데?” 하더라고. 눈치 없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의기양양해졌어. 큰 남이 어깨동무한 손으로 작은 남의 머리를 쓸다가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를 떼어 주고, 귓볼을 만지작거리고… 아주 안달이 났더라고. 두 사람과 우리의 거리가 5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애인은 결국 백기를 들었어. “인정…” 


더 따라가다가는 빙숫집이 아니라 두 사람 집에 들어갈 것만 같아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카카오맵을 확인했어. 빙숫집에 가려면 좌회전해서 대로변으로 빠져나가야 하더라고. 귀여운 앞 커플을 더는 구경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왼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글쎄 이번에는 덩치 큰 남자 둘이 바짝 붙어서 걷고 있는 게 아니겠니.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어. “아니, 은평구 무슨 퀴어 시티야 뭐야. 이 거리에 게이만 여섯이여!” 애인이 나를 또 불신의 눈초리로 흘겨보더라고. 일단 잠자코 걸었어. 얼마 안 가 젖꼭지가 다 보일 만큼 파인 흰 나시를 입은 왼쪽 남자가 오른쪽 남자의 어깨에 지그시 손을 올리더군. 나는 또 다시 승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며 애인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지. “이 날씨에 남자 둘이 팔이 부딪힐 정도로 붙어서 걷는다? 백 퍼야. 일반들이 저렇게 걸어 봐라. 누구 하나는 “아오 씨발, 좀 떨어져!” 하고 밀치지.” 애인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어. 


두 번째 커플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우린 빙숫집을 향해 마저 걸었어. 가는 동안 나는 애인을 마구 귀찮게 했어. 끈적거리는 팔을 만지작거리고, 검지로 뱃살을 쿡 찌르고, 팔을 꼬집고,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면서. 손을 잡거나 허리춤을 감싸안는 식의 대놓고 연인 같아 보이는 행각은 별수없이 자제하면서.  애인이 피하면 다시 늘러붙길 반복하며 걷는데, 애인이 물었어. “다른 사람들도 우리 보고 똑같이 생각하겠지?”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제법 당차게 답했지만, 속으론 스스로를 비웃었지. 그러든 말든 상관 않는 사람이 나는 못 되니까.


애인과 올초에 일본 여행을 다녀왔어. 취기 때문이었을까, 아님 외국이라는 공간이 주는 일탈의 기분 탓이었을까. 여행 첫날 밤 야끼니꾸집에서 고기랑 맥주를 배 터지게 먹고 나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애인의 손을 덥석 잡았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인지 애인도 손에 힘을 꽉 쥐더라고. 그렇게 헤테로 연인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계단을 마저 내려가는데, 반대편에서 남자 둘이 걸어오는 거 있지. 왼쪽 남자의 오른팔과 오른쪽 남자의 왼팔 간격이 30센치 정도는 확보된, 누가 봐도 ‘일반'인 두 사람이. 나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손을 뺐어. 거기까지만 하면 될걸, 그만 떼어낸 손으로 애인의 왼쪽 엉덩이를 “뻥!” 소리 나게 때리고 말았어. 지금도 의문이야. 나 왜 그랬을까? 엉덩이를 힘껏 치는 게 남자다운 제스처고, 거기서 그걸 해야 게이임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무튼 건너편 남자들이 우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가며 곁을 지나가자마자 나와 애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빵 터졌어. 그 이후 애인은 내가 사람 없는 으슥한 골목에서 손을 잡거나 엉덩이를 주물럭대면 가끔 말하곤 해. “왜, 누구 오면 또 내 엉덩이 때리려고?” “아니거든…” 내 용기는 벌건 대낮에 희미하고 암실 같은 골목에서 발한다는 걸 알고 놀리는 게지. 짓궂은 녀석! 


가끔 애인이랑 강남역같이 사람 많은 곳을 거닐면 우린 자동으로 ‘친구 모드’가 돼. 팔과 팔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고, 가급적 서로의 몸을 만지지 않지.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의 눈총이 따를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다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면 주변을 둘러봐. 어김없이 커플들이 눈에 들어와. 손과 손을 맞잡고 있거나 팔과 팔이 엉켜 있거나 몸과 몸이 포개져 있는, 나무와 매미 같은 여남들. 순간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애인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려. 비록 여기서 애인의 손을 잡거나 그를 끌어안을 용기는 없지만, 우리도 저들 못지 않게 다정한 연인임을 그렇게라도 표하고 싶어서. ‘우린 언제쯤 저들처럼 손 잡고 여길 활보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지.


미국은 어때? 네가 사는 주는 동성 결혼이 합법인 곳이니 남자 둘이 손 잡고 걷는 것 따위야 예삿일도 아니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마저 손을 잡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온 신경과 용기를 써야 한다면… 


이번 주말엔 애인이 우리 동네로 놀러오기로 했어. 아마 우린 밖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집에 들어갈 거야. 돌아가는 길에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면 나는 퀴어 시티 은평 보이답게 용감해지겠지. 나보다 조심성 많은 애인이 “왜 이래!” 하며 내 팔을 떼어내면,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으흐흐 하고 웃을 거야. 우리의 야외 애정 행각은 시시하게도 그걸로 끝이겠지.


우린 여전히 숨어서 사랑하지만, 짐작하건데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날을 그렇게 보내겠지만, 그래도 나는 바라. 언젠가 나와 애인이 손을 잡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날이 오기를. 그 자리에 너도, K도, 수많은 은평 보이들도 함께이기를. 그 바람을 멈추지 않을래. 우리, 부디 그 천국 같은 날에 함께할 수 있도록 무사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D라는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