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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Nov 08. 2018

샌디에이고 한 달 살기의 실체

일요일의 게으름_ ep18

나의 첫 미국 여행의 절반은 서부 패키지 투어였다. 첫 미국 여행인 데다가 운전에도 서툰 여자 둘이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감히 차를 렌트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운전을 못하는 우리가 3대 캐년과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를 한 번에 다 둘러보려면 패키지 투어 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 준비를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일행이 정한 대로 따를 뿐.   

   

“헉. 대박 대박”

“진짜 사막이네.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사진 좀 잘 찍어봐.”  

   

패키지 투어를 하던 첫날, 나와 일행은 버스를 타고 편하게 서부 사막을 감상하며 꽤 만족스러운 여행을 했다. 운전을 못하는 우리에게는 정말 최선인 여행이라며 우리의 선택에 끝없는 찬사를 보냈다. 버스에서 들려오는 가이드 아저씨의 아재 개그도 마냥 재밌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광활한 미국 서부를 탐험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이동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었고, 더 둘러보고 싶은 여행지에서도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기념사진만 찍고 이동을 하다 보니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극기 훈련을 하러 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보다 한식을 더 많이 먹고 있었다.      


‘아, 이렇게 예쁘고 볼 것도 많은데.. 벌써 이동할 시간이라고? 인 앤 아웃 버거, 치즈케이크 팩토리도 못가 봤는데 서부를 떠나야 한다고? 그냥 여기서 여유롭게 딱 한 달만 살면 소원이 없겠다.’     

극기 훈련 같은 여행의 중반에 다다르자 마음 한 켠에는 언젠가 미국 어느 도시에서든지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이리도 광활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단기속성으로 스치듯 여행한다는 것은 이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정확히 1년 후 현실이 되었다.      


‘흠. 그럼 도시 선택을 해볼까?’

일단 동부는 너무 추워서 탈락, 로스앤젤레스는 너무 사람이 많으니 탈락, 라스베이거스는 유흥의 도시니까 탈락, 샌프란시스코는 물가가 비싸서 탈락, 시애틀은 이름이 그냥 안 당겨서 탈락, 탈락, 탈락. 오디션 프로그램도 울고 갈 정도로 이리저리 심사를 하고 나니 딱 하나의 도시가 남았다. 대도시보다는 저렴한 물가를 자랑하며,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고, 원하면 매일 해변에 가서 놀 수 있고, 로스앤젤레스와도 가까워 주말을 이용해 대도시 관광을 할 수 있는 샌디에이고!      


그렇게 샌디에이고로 목적지를 선택한 후,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샌디에이고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를 숙소를 빌렸다. 여자 혼자 에어비엔비를 이용하기에 나는 쫄보였고, 그래도 한국인이 주인인 집을 빌린다면 좀 나을 듯하여 한국인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샌디에이고에 한 달을 간다고? 거기 시골인데. 한 달 동안 뭐하게?”


샌디에이고에 가 본 적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곳은 너무 소도시라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든 그저 미국에서 한 달을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설레기만 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샌디에이고에 짐을 풀었다. 한 달간 무제한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Monthly 티켓을 구입하고, 미국 온 김에 영어 공부도 할 겸 어학원에 등록하고, 프로모션 쿠폰으로 저렴하게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우버 어플도 다운로드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일과를 하나하나 꾸려나갔다.    

  

주말만을 기다리며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던 한국의 아침과는 달리 새로운 하루 대한 기대로 가뿐하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미국의 아침이 신기하기만 했다. 학원까지 대략 1시간이 걸리는 버스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나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학원가는 길 편의점에서 내려 마시는 1달러짜리 커피에,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먹는 패스트푸드에, 별거 아닌 일상에 행복이 넘쳐흘렀다. 행복에 허우적대는 사이 3주가 지났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하아-'     

정확히 3주 차가 되던 월요일 아침.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알람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새로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잠시 잠들어있던 익숙한 리액션이었다.  

     

‘쳇바퀴 같은 하루가 또 시작이군.’    

 

비가 많이 내린 아침. 꽤 쌀쌀한 날씨에 패딩 조끼를 입고 평범한 아침처럼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문득 이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나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 그냥 차가울 뿐이었다. 학원가는 길 편의점에서 내려 마시는 1달러짜리 커피? 수업시간에 졸지 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먹는 패스트푸드? 3주 만에 쌀밥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속았다.’     


그랬다. 그저 아름답기 만한 세상은 지구 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아름답게만 보였던 미국 땅에서도 아침이면 사람들은 학교로,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고 저녁이 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하는 그냥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샌디에이고가 시골이고, 너무 작은 도시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다. 샌디에이고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샌디에이고는 감언이설로 나를 꼬신 적도, 허위광고를 한 적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새로운 일상에 대한 근거 없는 동경을 품고 한 달 살기에 나선 자가 현실을 자각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내일 있을 거래처 직원과의 미팅에 대한 염려 없이, 다가올 토익시험에 대한 압박 없이 새로운 일과를 꾸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이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새로운 일상에 대한 기대로부터 오는 미화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행지를 향한 동경은 멈출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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