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기다리는 시간
1장
보이지 않았던 기척
『음, 그럼 넌 확실히 이상하군.』
기분이 이상한 날이다. 이렇게 벌렁벌렁하면서 상쾌한 기분은 오랜만에 찾아온 것임을 깨달았다. 왠지 어제 꿈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두드려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 기분이 간질간질한 적이 얼마만 이던가. 다만 그제부터 붉은 달이 떴던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뭐 어떠랴? 내 삶을 들쳐볼 때 항상 많은 것들이 내 앞을 스쳐지나가기만 했었다. 그냥 어떤 것은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 무엇인지 실눈으로만 떠서 보았던 적이 있던가 하면 또 다른 것은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물끄러미 보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 녀석도 있었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군. 분홍 까마귀가 사랑을 지저귀는 것을 보니 분명 좋은 징조야. 자네에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혹시 외로운 자네에게 기대어줄 친구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최근에 마지막으로 본 노인네의 말이 떠올랐다. 자주는 아니지만 더러 오는 그를 나는 ‘참견꾼’이라고 부른다. 그가 다녀간 뒤로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었으니 노인네가 완전히 헛다리를 집었던 것이다. 하는 말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게 허다하므로 어쩌면 그것이 더 놀라운 점이라며 속으로 낄낄 웃었다.
“그가 찾아올지 몰라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까까지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을 텐데. 분명히 납작하고 평평한 내 몸 앞, 뒤, 옆, 위로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내 밑에 있어준 모래밖에 없을 터이다.
“거기 누구냐? 숨어서 나에게 말을 걸지 말고 이리 오너라”
한참을 기다렸다. 여전히 바람만 드세게 불어 댈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뒤에 결국 기운이 빠져버렸다. 바람이나 흙에게도 물어봤지만 자기는 아니라고 얘기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껄껄껄. 그것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내가 분명 들었는데 알지 못하며 다른 이에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했으니, 나의 모름을 다른 이의 모름으로 하여금 확인한 것이 아닌가. 모른 다는 것을 함부로 모른다고 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재밌다. 재밌어.”
그 때 바람이 사그라지는 모래 언덕 위에 천천히 형체를 띤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음. 모래에 반쯤 파 묻혀 있어 확실치 않지만 저건 아마도 그래. 인간인 모양이군.”
『똑 똑』
그것을 발견한지는 꽤 지났지만 한참동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실망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하필 설레고 기다렸던 것이 그 노인과 같은 인간이라니.
“네가 데려온 것이냐?”
“제가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 위쪽 언덕에서 네가 잠잠해지자 나타났었다.”
“저와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문득 거기에 있었습니다.”
“문득? 깔깔 재밌는 농담을 하는구나. 그제부터 네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흙도 모른다고 했으니,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야?”
“허면, 별들에게 물어보시지요.”
하고 바람은 그새 불어가 파묻힌 그것을 보고 한 번 찡그리더니 다시 사라져버렸다. 바람과 헤어진 뒤 흥미로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와 후에 나타는 인간은 아주 긴 내 삶을 비춰볼 때 이전에 없던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참견꾼’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시시 콜콜 헛소리를 해대던 늙은이지만 어찌 한 번씩은 기가 막히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예견해 맞추곤 하였다. 어느새 ‘그것’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것’은 걸치고 있는 천 쪼가리와 발을 감싼 가죽으로부터 모래를 아래로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그 과격함과 비정함에 모래들이 몹시 서운해 하였다. 완전히 일어나 뒤꿈치를 들고 손을 눈썹위로 올린 뒤 두리번거리던 그것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띠었다. 재밌는 인간이로군. 머리 위로는 별들이 있고 아래로는 흙들이 있고 모든 만물의 곁에는 내가 있거늘. 무엇을 찾지 못해 풀죽은 눈인 건지. 나는 점점 ‘저것’에 대해 흥미로워 지기 시작했다.
“에헴.”
하고 짐짓 헛기침을 하였다. 그제 서야 ‘저것’이 나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죽을 각 각 손에 들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 노인보다 한 참 작은 체구였다. 어린 인간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지난 세월을 통틀어서 내가 보아온 인간이라곤 그 늙은이 하나뿐이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저것을 처음 보았을 때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어느새 보고 낯설다고 느끼고 있으니..... 음, 확실히 이상하군. 너는.”
지금 그 ‘이상한 것(a weird)’은 내 앞에 섰다. 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너도 나처럼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이상한 녀석’은 몸과 머리를 흔들흔들 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했던 것인지 모른다. 어젯밤 꿈부터, 아니면 며칠 전 늙은이의 헛소리부터, 아니면 그 한 참 오래전부터 나는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히 이 어린 인간은 지금 내 앞에 서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그리고 아주 느리게.. 내게 손을 뻗었다.
“에헴!”.
깜작 놀란 ‘이상한 것’은 입까지 크게 벌리고 눈을 몇 번 꿈뻑꿈뻑하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아!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똑. 똑
“그래. 나는 벽의 왕이다.! (Yes. I'm the king of the Wall)”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
수 년 만에 찾아온 진귀한 관경을 듣고는 아까 사라졌던 바람이 ‘하늘 눈물주머니 모래’를 태우고 함께 왔다. 그리고 그 뒤로 ‘황금 주전자 부리 독수리’가 도착해 내 머리위에 앉았다. 눈물주머니 모래는 3년 전 화창한 봄날이었을 때 해가 저물고 어둑해져 가는 동안에까지도 낮잠을 자고 있다 미쳐 어둠에 숨지 못했고, 지나가는 별똥별이 하늘 천장을 긁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가 내려오며 간신히 같이 챙긴 ‘눈물주머니’는 황금 주전자 부리 독수리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다. 황금 주전자 부리 독수리는 부리가 주전자 입처럼 위쪽으로 휘어져 나있다. 항상 머리 위에까지 뻗어 있는 입을 통해 물을 마시고 말을 하는 이 독수리는 구름이 땅으로 보낼 하늘의 샘을 먼저 훔쳐 마시다가 번개에 들켜 혼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 가장 먼저 ‘이상한 것’에 말을 건넨 것은 바람이었다.
“넌 어디에서 왔지? 나는 이 세상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로부터 그 생이 마감하는 그들의 말을 전하는 존재지. 그리고 직접 탄생하는 순간을 보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야. 그런 것들은 대게 외부에서 온 녀석들뿐이지. 조화를 깨트리고 불협화음 만들어 내. 예를 들어 저기 하늘 밖에서 온 별똥별 같은 녀석.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녀석의 말은 온통 알 수 없는 채널의 잡음 투성이야. 그래서 나는 절대로 하늘 밖을 나가지 않지. 아니 전혀 궁금하지도 않아! 그래, 처음 보는 넌 어디에서 왔지?”
하지만 수다스럽게 쏘아대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아무 미동도 없었다. 답을 재촉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맴도는 바람을 그저 기분 좋다는 듯이 팔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바람에 올라 탄 하늘 눈물주머니 모래가 ‘이상한 것’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너의 이름은 뭐지? 나로 말 할 것 같으면 한 땐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의 모든 생물들을 위한 샘을 솟아나게 돕는 자였지만, 지금은 가장 아래에서 모든 것에 기꺼이 샘을 제공하고 몸소 위로 일어설 수 있게 떠받쳐 주는 존재이지. 나로부터 모든 것이 힘을 얻고 솟아나 디딜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이들은 나를 존경하는 마음에 나를 근원이라고도 부르고 있지, 너의 이름은 뭐지?”
자기소개를 멋지게 마친 그는 의기양양해 반짝이는 자신의 하늘색 몸을 뽐냈다.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귀머거리’를 보고 몹시 무안해 했다. 오히려 ‘귀머거리’는 어깨의 그것을 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고, 심지어 그를 잔인하게 털어냈다. 단지 내 머리위의 독수리는 흘깃 한 번 눈길을 주고 두 어 번 껌벅거렸을 뿐이다. 바람이 간신히 잡아 사뿐히 내려놓았다. 몹시 부끄럽고 서러운 마음의 모래를 바람이 달래며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 모든 관경을 독수리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바람과 모래가 귀머거리가 나타났던 언덕을 넘고 사라지자 말을 꺼냈다.
“벽의 왕이시여. 이 자의 정체는 바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있으며, 연결이란 것은 접하는 이음매에 흔적이 남는 법이거늘 이 자는 아무런 티가 없는 자입니다.”
“그렇군. 만물의 소리를 옮기는 자와 근원이라는 자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서성이다 떠났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자로군.”
‘귀머거리’는 우리의 대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에게 기대어 그늘에 숨었다.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무엇을 얻을 거라 기대했던 나는 그저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귀머거리’에 혼란에 빠졌다. 답답하고 기대했던 마음이 한 가득이라 차라리 그 노인에게라도 시켜 말을 걸어보게 싶었다. 그리고 그 때 짧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으헉?!!”
나를 기대고 있던 ‘귀머거리’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굴러가 버렸다
.....분명히 지금, 말을 했다?
『소년과 이름』
벌써부터 ‘귀머거리’가 소리를 냈을 때 독수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본 듯이 놀란 채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고 지금은 이렇게 나와 함께 둘이 남겨진 채다. 어째서인지 이 인간은 나의 무언가에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독수리의 말처럼 나와 귀머거리와의 어디에는 이음매가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과 달리 호기심에 찬 표정이아니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입술을 얇게 깨물고 다시 나를 두 번 두드리고 내게 양손을 짚었다.
“그래. 나는 벽의 왕이다.! (I'm the king of the Wall)”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마치 알에서 거북이가 발을 빼려는 듯 부들부들 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귀머거리’는 무엇을 토해 내려하고 있다.
“벽?”
한참을 꾸물거리던 입술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 ‘귀머거리야’ 너는 나를 불렀느냐?”
“저는 당신을 부른 게 아니에요. 아니, 어쩌면 찾아냈다고 하는 게 맞는지도 말라요.”
“재미있군, 너는 내가 마치 숨어있었단 말이냐?”
“아니요. 당신은 숨지도 않고 숨겨지지도 않아요. 단지 당신과 저 사이에는 무언가가 충족되지 않았었어요.”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는 그 무언가라는 게 결핍돼 있었다는 말이로군?”
“결핍이 아니에요. 단지 열려있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당신을 처음 두드렸을 때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요.”
이 인간의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지만 분명히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다. 말을 꺼낼 때마다 무언가가 활짝 열리는 가 싶더니 또 닫혀버리고 상쾌해졌다가 답답해졌다가도 한다.
“흐흐흐. 분명히 이상하군.”
자세히 보니 이 인간의 손에는 문자로 된 무언가가 쓰여 있다. 다만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까 네가 팔을 벌리고 있었을 때 바람과 모래의 소리를 들었느냐?”
“듣지 못했어요. 저는 그저 당신 머리위의 새처럼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팔을 벌리고 있었는걸요. 아 참 그 새는 뭐였어요?”
“방금 전 황금 주전자부리 독수리는 왕의 머리위에는 존재로서, 오만함과 무모함을 상징하고, 때로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그를 나는 ‘하늘의 왕관’이라고 도 부르고 있지.”
어느새 귀머거리는 내게서 손을 땐 채로 손뼉을 치고 웃고 있었다.
“그래. ‘귀머거리’야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에요. 이름이 있어요. 아니 있었어요.”
“있었다?”
“그래요. 하지만 이곳에 온 뒤로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중요한건데 생각이 나질 않아요.”
“하하 재미있다. 잊어버렸지만 잃어버린 것은 기억하는 모양이군. 주인이 자신을 찾는 걸 알지만 실제로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안다면 널 위선자라고 욕을 하겠군?”
“제가 위선자라고요?”
“그래. 하지만 나는 널 그렇게 부를 수 없어. 그렇다면 나는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전 그냥 남자 아이에요.”
“그래 좋아. ‘소년’아 너는 어디에서 왔지?”
“저도 그게 참 궁금하단 말이에요. 처음 여기 오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생각을 해봐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어요.”
“네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붉은 곰’이 널 여기로 데려온 것일 수도 있겠군.”
“붉은 곰은 어떤 분인가요?”
“‘붉은 곰’은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외부 무언가의 출몰을 뜻하는 말이다. 이 세계에서는 달의 무늬와 색깔이 밤마다 바뀌는데 붉은 달에 곰의 무늬가 나타나는 밤이면 느닷없이 ‘낯선 것’이 찾아오곤 했지.”
“그럼 제가 오기 전에 붉은 곰이 나타났던 거군요?”
“그래.”
거기서 그날 밤 나의 꿈 얘기가 튀어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다면, 저는 그 ‘붉은 곰’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이름을 알아내 나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해 물어준 당신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너는 지금 모르겠지. 앞으로 나의 많은 것들이 너에 의해 부스러지고 다시 새로 세워질 것을 알아. 그리고 내가 기다려온 그것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 앞으로 알아낼 게 많아 보이는군. 널 데려온 누구뿐만 아니라, 너와 나에 대해서도 말이지.....”
『달 들이 지나가는 행선지』
“하지만, ‘붉은 곰’을 어떻게 찾아야 하죠? 다시 붉은 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저에겐 어떤 실마리도 없는 걸요.”
“모든 일어나는 이음매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지. 여기 오기 전 아무 것도 기억이 나는 것이 없느냐?”
“미안해요,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해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아! 이곳에 오기 전에도 저는 달을 보고 있었어요. 정확히 어떤 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달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만은 기억이나요.”
아주 오래전, 언제부터 내가 이곳에 살게 됐는지도 잊었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에는 나도 달을 자주 봤었다. 날마다 바뀌는 빛깔과 모양이 그 시절 내 유일한 관심사였지만 모든 그림을 전부 외워버린 뒤로는 그리 자주 보지 않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너를 도와줄 다른 이들을 찾아야 할 것 같군.”
“저와 같이 붉은 곰이 데려온 사람들을 말하는 거군요?”
“붉은 곰이 데려오는 것은 꼭 인간만이 아니야.”
“네. 그러면?”
내가 아는 것과 상대가 모르는 것의 차이를 하나 대라고 한다면 말하는 자를 지나치게 우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지. 지금의 경우라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다른 얘기지만.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조만간 직접 보게 될 테지. 우선 네가 가봐야 할 곳과 만나 봐야 할 자들이 있다. 이 세계에서 나보다 오랜 세월 존재해오고 있는 자와 그리고 너와 같은 인간인 자이니라. 비록 그 인간인 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 , 가끔 돌아보도록 도와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자였으니...”
“말 끊어서 죄송하지만. 잠깐 만요. 우선 저는 당신에 대해서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 실례이게도 아무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저이지만요. 하하”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군. 알다시피 나는 벽의 왕으로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 모든 것들의 부름에 항상 나지막이 서있는 존재이다. 그 어떤 모든 장애의 경우에도 나를 배제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이유인 즉슨, 나는 벽의 왕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거라. 만약 네가 어디에서라도 나를 찾고자 한다면, 나는 바로 여기에 있노라!”
“알겠어요. 저는 편하게 소년이라고 불러도 되고 아니면 아까 ‘귀머거리’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요.”
과연 이 소년이 ‘그것’ ‘저것’ ‘이상한 것’ 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자신을 소개한 말로 불러주는 게 좋겠지.
“그럼, 제가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아까 말하신 저와 같은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인가요?”
“아니 그곳은 나중에 들려보도록 하고 먼저 끓어오르는 산 아래 동굴에 사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스승인 ‘곱게 희어진 화석’을 만나 보는 게 좋겠군.”
“그 분은 바위이신가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나무지. 그것도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고목!”
“흠, 그건 그렇고. 벽의 왕님은 바람과 모래와 대화를 나누시는 분이잖아요. 혹시 그 ‘붉은 곰’과는 이야기를 해보신적이 없나요?”
“단 한 번도!, 수 차게 말을 걸어봤지만 저 하늘 밖의 것들은 좀처럼 오만해서 얘기를 받아주지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아주 옛날의 선조들은 위의 별들과도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했다더군. 어쩌면 달을 보고 이 세계로 온 너의 말은 그들에게도 닿을지 모르지.”
“하하. 맞아요. 다른 누군가의 말이 들리지 않지만, 당신의 말은 나에게 또렷이 들리는 것 처럼이요.”
“네가 나를 발견하게 된 그 ‘계기’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 순간 네가 보는 세상이 새로 열린 것은 분명하지.”
그리고 나에게도.... 언덕 위로 녹색 인어가 떠올랐다. 먼 길을 찾아가는 자에게는 분명 좋은 징조지.
“해가 지는군. 이제부터 네가 얻게 될 단서와 이정표를 찾아 떠나라. 가는 방향은 네가 여기 나타났던 언덕 쪽으로 쭉 가면 될 것이다. 우선 모래의 경계를 넘어야겠군.”
소년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 했다. 음 인사법 같은데, 여기 오기 전 세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건 아닌 모양이군.
“벽의 왕이시여 당신의 모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그리고 이 것도 놓치지 않았다.
똑. 똑
“아 참. 여기서부터 끓어오르는 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너의 걸음정도라면 이번과 똑 닮은 달이 나타날 때까지는 볼 수 있을 거다.”
“운이 좋으면 다시 붉은 달을 볼 수도 있겠군요. 그게 언제인데요?”
“보자.. 다음 윤년이니까 7년 뒤의 13월 52일 쯤 이로군.”
『낙타, 코끼리, 그리고 늙은 도적』
여기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왕이 일러준 방향대로 쭉 걸어간다고 하지만, 음 어째서 이 방향으로만 언덕이 불긋불긋 솟아 있는 건지. 다른 곳을 둘러보면 이 길과 다르게 전부다 평평했던 것이다.
“하하. 마치 낙타의 등만을 골라 넘어 다니는 것 같구나!”
낙타의 등 봉우리가 하나였던가? 두 개였던가? 만약에 왕이 일러준 방향에서 조금만 틀어 걷기 시작했으면 오로지 평지로만 갈 뻔했어.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낙타’란 나를 안내해주는 첫 번째 이정표인 셈이로군! 참 친절한 세계야. 비록 여기 하늘은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말이야! 이래저래 생각을 하는 사이에 앞에 조금 커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뒤 돌아 자신이 걸어왔던 언덕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음 오늘 저 언덕 꼭대기에 다다를 쯤에는 출발 한 지 7번 째 달이 뜨는 것을 보게 되겠군.”
소년은 오늘 언덕 하나를 다 넘지 못하는 것에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하루에 어느 정도를 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언덕을 오르기 위해 신발의 모래를 털어내고 끈을 다시 동여맸다. 출발한 지 3일 째 되는 밤까지만 해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순환에 대해서 마음속에 해결 못할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답답함이 자신이 체감하는 간격과의 괴리에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이 곳의 해와 달은 내가 느끼기에 이상하게 빠르게 지고 새로 뜨고 있던 거였어. 그래서 언덕들을 넘어 가는 동안에 새로운 해와 달이 뜰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던 거야. 언덕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해가 지고 있던 게 이상하다고 느꼈던 거지!”
소년은 고민에 빠졌다. 아니야,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 동안 아주 커다란 언덕들을 충분히 시간을 들여 넘어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잖아? 이미 내가 이 세계에 온 뒤로는 나의 세상과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말이야. 이전까지 내가 느끼던 답답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옅어져 가는 것을 보면 분명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나는 이곳에 와서 왕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눈 걸 보면, 이 전까지는 나도 말을 하고 귀로 들으며 살아왔던 걸 거야. 하지만 이 세계로 온 뒤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었어. 그리고 새로 들을 수 있었던 말이 있었고 말이야.
“만약 예전에 내가 살던 세상에도 이처럼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으면 어떡하지?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왕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아쉬웠다. 생각해보면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단서가 있다한다면 그에게서도 아직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어느 덧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앞 쪽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노란색 코끼리로군. 이미 어둑해져 멀리까지 잘 보이지 않지만. 남은 모래 언덕이 많지 않았다. 여전히 ‘낙타’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평평하게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저 쪽 너머에는 모래의 맞닿은 푸른 경계가 보였다. 며칠 밤이 지나면 새로운 땅과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새로 열리게 되겠지. 어쩌면 왕 말고도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될 지도 몰라! 소년은 신이 난 체로 양 손은 땅을 짚고 고개를 처든 다음 넓은 간격으로 발을 옮기며 묵직하게 누르며 걸어갔다.
“쿵. 쿵. 쿵. 이 땅은 하늘의 코끼리가 낙타의 혹을 피해 그 사이로 조심조심 넘어 다니는 곳이지요. 쿵. 쿵. 쿠..”
“선생님은 혼자 말이 많으신 분이군요.”
소년은 미처 든 한 쪽 발을 땅에 내딛지 못한 체 우뚝 섰다. 어느새 자신의 옆 아래쪽에 흰 너구리가 양 손으로 무언가를 꼭 잡은 체로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지?
“저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때로는 낯선 이와의 악수에 한없이 기쁘다.』
작아서 잘 못 봤던 걸까?
“그랬을 지도 모르지요. 세상 많은 것들이 작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바쁘게 지나치곤 하니까요.”
얼레. 나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러고 보니 이 너구리 입은 계속 다물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선생님께서는 입을 열지 않고 말하는 것에 놀라워하십니다만, 이 세계의 많은 말들은 입을 통하지 않고도 전달이 되지요.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처럼 요.”
자연스럽게 너구리에게 다가 무릎을 굽히고 몸을 웅크리고 말했다.
“저기 너구리님, 제가 너구리님을 불렀다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이번에도 그 이류를 알 수 없지만, 다시 나와 통하는 세계가 하나 더 열려 버린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 수수깨끼를 알아가는 게 첫 번째 과제인지도 모른다.
“혹시 괜찮다면, 너구리님이 들은 소리는 소리를 구체적으로 얘기 해주실래요?”
“제가 들은 소리는... 구체적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답처럼 감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맥이 풀렸다. 순간 답이 막히니, 어떤 질문을 이어가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레 한 손을 내밀었다.
“어찌됐든 반가워요. 저의 이름은 잊어버려서 알려드릴 수 없지만, 편하게 ‘소년’이라고 불러도 돼요.”
너구리는 손에 있던 ‘어두운 것’을 한 손과 가슴을 떠받친 채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 ‘소년’은 선생님이 직접 붙인 이름이 아니군요?”
“오. 그런 것까지 도 알아내실 수 있는 거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자기 이름도 잊어버린 자가 편하게 댈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편하게 불리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너구리가 감싼 것이 무엇인지 신경이 쓰였지만 계속해서 물었다.
“너구리님은 다른 분들처럼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으시는군요.”
“아마도 선생님이 저에 대해서 묻지 않으시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선생님과 저는 이미 은연중에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거겠지요.”
때로는 나의 인지를 넘어서까지 맞다고 여기는 것들과 내 주위에 이루는 생각들이 대립할 때가 있다. 그 신비한 외부의 세계까지도 나를 확장하기에는 아직 많은 것들이 이르고 잠시 머물다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한 번씩은 다른 한 쪽에 대해 불편함을 느껴야 할 때도 온다.
“하지만, 저는 너구리님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요. 저는 기억을 잃어버려 사실 소개할 것은 별로 없지만. 우선 저는 잃어버린 제 이름을 찾아 끓어오르는 산으로 가고 있어요. 그리고 벽의 왕님은 제가 이 세계에 오기에 앞서 ‘붉은 곰’이 나타났다고 했어요.”
“호오. 선생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같이 걸으면서 얘기하지요. 마침 선생님과 제가 가는 방향이 같아 보이니까요.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재밌는 분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네 발로 걸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은 빗나가게, 여전히 이 너구리는 손에 그것을 든 채로 두 발로 모래 언덕을 내려갈 줄 알았다.
“제가 낯선 외부인이기 때문이군요.”
“아니요. 아니요. 제가 놀란 것은, 선생님께서 이 세계 밖에서 오신 것도 사실 조금 흥미롭지만, 제가 정말 놀란 것은 벽의 왕과 얘기를 나눴다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말장난 같지만 그 분은 항상 ‘친근하게도 낯선 분’이니까요.”
“친근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제가 이 세계에 와서 제게 가장 먼저 말을 걸어주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떠난 이상 돌아오기 까지 다시 그 소리를 듣기 힘들 테지만요. 사실 이쪽 길을 알려주신 것도 그 분이세요”
“호오... 그렇군요. 그래서.. 음. 음. 뭐 그렇다고 해도 그러 분의 목소리를 한 번 들은 이상 다음번에 또 다시 듣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설명해드리지 않아도 조만간 알게 되실 테지요. 그럼, 이름을 찾아가는 길의 단서는 이미 발견하셨나요?”
“아니요, 저는 아직 이 세계의 작은 부분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는걸요.” “때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해답은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지요. 가령, 아까 선생님과 인사를 나눌 때 손 위에 쓰인 문자를 봤는데,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나요?”
정말 손을 펴보니 몇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 동안에서도 몇 번이고 손을 사용할 일이 있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제가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읽는 것이지요?”
“...키월드(KeyWorld)?”
『내 발 밑이 가장 어두운 곳이라고 하지.』
“선생님께서 제가 구하지 않아도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해주셨으니, 저도 하지 않으면 실례겠지요. 저는 이미 선생님께서 부르고 계시듯이 흰 너구리로서, 스스로를 소개할 때는 ‘늙은 도적’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늙은 도적이요? 그것은 무슨 의미에서지요?”
“말 그대로 남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자지요.”
“전혀 그러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적어도 저에게 만큼은 아무것도 빼앗지 않으셨는걸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우리는 서로서로 많은 것을 뺏고 또 뺏기지요. 그 순간들과 시간이 방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도 뺏거나 훔쳐 올 수 있는 것은 아주 많고요, 가령 선생님께서는 제가 안고 있는 ‘이것’에 대해서 처음 만날 때부터 눈을 때지 못하고 계시지요. 그것만으로 저는 선생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부터 뺏고 있는 거랍니다.”
뜨끔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저것을 바라만 보고 있던 건 아닌지 부끄러웠다.
“맞아요. 사실 다른 중요한 얘기를 한다고 계속 말을 했었지만, 사실 ‘도적’님의 그것이 계속 신경 쓰였어요.”
“기대하셨으면 실망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그냥 저의 ‘밥’입니다.”
늙은 도적이 품속에 감추었던 조그만 그것을 들어 보여주었다. 혹시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살짝 집어 그것을 만져 보았고,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내주었다. 보기에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심히 손을 뻗어 건네주었다.
“밥이라고 한다면 먹는 것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계속 머리를 굴려보았다. 밥. 먹는다. 밥. 먹는다. 생각이 날 듯도 하고 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혹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음식을 먹었다는 흔적은 기억을 억지로 하려하지 않아도 이미 각인이 돼 있는 것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내 몸을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손 위의 글자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방금 전 한 말은 선생님이 생각하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만, 구체적인 것은 굳이 찾지 않으셔도 선생님의 지금 존재 자체가 무엇을 먹어왔다는 증거이니까요.”
“제가 만약에 이전에 음식이란 것을 먹어왔다면, 지금은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요?”
“글쎄요. 제가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생각하자면 선생님의 몸이 당장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이상하다고 여기신다면 낌새를 눈치채셔야하고, ‘정말로 이상한 것’이라면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아주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란 지나치게 현실과 가까이 있어서 스스로도 알 필요가 없거나 눈치 챌 수도 없는 것들이니까요.”
소년은 그사이 꽤 길어진 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늙은 도적은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왕에게 다 묻지 못한 것들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도적님 제가 가지고 있지만, 제가 알 수 없는 것들을 훔치셔서 제가 알려주실 수 없나요?”
만약 그게 된다면 그렇게 편리한 것도 없겠지.
“네, 그리 편리하지 못합니다만 선생님이 고민하시고 있던 고민 중 하나는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이 세계의 하늘에 대해서 말이죠.”
아무래도 이 늙은 너구리는 꽤 오래전부터 내 옆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세계의 달이나 태양이나 심지어 별들도 선생님께서 시간을 체감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 곳은 달만해도 뜨는 간격이 들쭉날쭉하고 어떤 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 세계에서 특정 목적지를 위해 움직이는 자라면 누구나 지표라던가 ‘길잡이’가 필요하지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는 길까지라도 제가 선생님의 길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에게는 낯선 인사법입니다만, 동행자로 제안하는 뜻으로 한 번 내밀어 보지요.”
고개를 돌려보니 ‘늙은 도적’이 한 쪽 손을 내민 채로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맞잡았다. 음,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방금은 입을 통해 말을....
“아참, 한 가지 제가 또 훔친 것들을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오, 그게 뭔데요?”
“5개의 태양과 달입니다.”
뒤 돌아 보니 어느새 낯선 땅의 경계의 코앞에 와 있었다.
(1장 보이지 않았던 기척 마침).................
2장
그 말 진심이오?
때로는 세상 모든 것들이 나와 같이 느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지. 비록 네가 얼마나 대단히 가치중립적이고 신중한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럴 때에 그것은 나의 손을 잡아주시오. 라는 구원의 메시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과의 괴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지른 절규의 비명일지도 몰라.
『조심해! 변화를 감지한 감각에 마냥 즐거워하지만 말고』
눈앞의 ‘흩날리는 것’에 당장 몇 걸음 앞으로도 무엇이 있는 지 잘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높은 언덕에서 멀리 보았을 때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람에 흩날린 모래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내 손과 볼을 스치는 이것이 그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눈’......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왜 나는 모래 옆에 눈이 있는 것에 답답한 감정이 드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찾아온 불편한 감정에 더 디디지 못하고 멈춰 섰다.
“저기 도적님 왜 사막의 모래 옆에 눈이 있어야 하는 거죠?”
‘늘은 도적’은 슬쩍 보고 한 번 눈을 얇게 흘깃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히 집고 넘어가지요. 선생님께서 느끼시는 그 답답함은 ‘눈이 왜 여기에 있느냐’ 에서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건 제가 지금 낯설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 에요.”
“선생님께서는 지금 같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것에 괴로워하시고 계십니다. 아니면, 스스로 지워낼 수도 없는 ‘다른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던가요.”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눈동자다.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벽의 왕이 더 이상 ‘소년’이라 불러 줄지... 그러고 보니 소년은 이 자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던가.
“그렇군. 나는 꽤 스스로한테 많이 얻어맞으면서 온 거였어. 왠지 그 동안 한 걸음 한 걸음이 쉽지 않더라니. 하하하”
“글쎄요. 정말로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 오셨다면요. 그렇다면, 자아의 우위는 어디 쪽이죠?”
“오! 스스로 안의 자아에도 우위가 있나요?”
“그럼요. 하나인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일입니다만,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균형이란 것도 항상 흔들흔들 거리는 것이죠.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맞아요. 하지만 난 서로를 부정하지 않아요.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면 괴로워 할 일도 없겠지요. 다만 내 안에 서로 다른 무엇이 있기에 선생님의 말씀처럼 싸우고 있어요. 내 눈 앞에 이것은 실제로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모든 감각으로 느끼는 이 존재감은 거짓이 아니에요. 대체 이곳은 어떤 곳이죠?”
“이 곳은 잿빛 사막과 통곡의 불모지를 잇는 통로로써 보통 오완의 구릉지라고 하는 곳입니다. 어떤 자는 하얀 분지, 또 다른 이들은 이 곳을 ‘태초의 도서관’이라고도 부르지요.”
“그렇다면 이 땅은 처음으로 오완이란 분의 이름을 딴 곳이로군요.”
“정확히 오완이 실재 존재했던 누군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오완은 ‘낯선 상황에도 제자리로 찾아 간다’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처럼 옛날에 누군가가 이 땅에서 오완을 직접 만났다고도 하는 얘기도 들어보긴 했습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오완’이란 말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도 이상하리만큼 아무도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는 땅입니다. 다만,”
“다만, 목적지로 가는 길은 길잡이만이 선택할 수 있다. 맞죠? 히히”
어느새 양발을 크게 벌린 뒤 이까지 내보이며 히죽 웃고 있었다.
“흠흠, 보아하니 아까까지의 근심은 좀 덜어낸 듯 하군요. 그럼 다시 가볼까요.”
소년은 늙은 도적의 뒤에서 사뿐사뿐 걸으면서도 한 번씩 어깨 위의 눈을 탁탁 털어내고 코앞에서 놓치지 않게 바짝 붙어 쫒았다. 그런 소년을 늙은 도적도 이따금 흘깃 돌아보았다.
“도적님께서는 참 아시는 게 많은 분이에요. 그럼 ‘붉은 곰’이 나타났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네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분명 이 세계의 특별한 존재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희귀하다거나 아주 목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사실 제가 태어난 곳도 붉은 곰의 축복을 머금은 땅입니까요.”
“네? 축복 받은 땅이요?”
도적은 잠시 멈춰 서서 길을 찾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갑작스레 멈추지 못하고 발로 머리를 누를 뻔 했다. 그리고 보니 이 땅은 밤 낮 할 것 없이 눈을 제대로 뜨고 걷기도 힘든데 어떻게 아무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온갖 생물들과 자연이 공존하며 서로를 북돋아 영원히 시들지 않게 해 주는 곳이며, 심지어 어떤 것도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생의 땅입니다. 모든 이들이 방문하기를 희망하는 곳이며 언제까지나 남아있기를 꿈꾸며 영원히 머무르는 곳이지요.”
“음,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다면, 마치 그곳만 단절 된 것만 같네요. 모든 것들이 안에서만 맴돌며 들어는 와도 돌아 나오지 못하는 곳. 어찌 보면 가장 무서운 장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
“그래도!!”
잘 못 들었나. 방금 소리를 지른 건가?
“전부다 메말라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허무해진 풍경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설사 무한히 발이 묶여 영속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 때 서로를 엮었던 그 숭고한 뜻만큼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 때?’ 무슨 의미지?
“저.. 늙은 도적님..”
늙은 도적은 뒤 돌아서며 한숨을 쉬었다. 한 숨도, 그런 표정도 처음이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냥 잊어주십시오. 저 답지 않게 잠시 흥분했었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저의 말로 불편하게 해드린 것에 사과를 드려야 하는 걸요. 가 던 길을 멈추고 얘기를 하실 정도니, 보통은 아니었을 거 에요.”
“네, 제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그것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지나가야 할 곳을 얘기해 드려야 하니까요.”
“네? 나만 안 보이는 건가? 여전히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그럴 수밖에요. 지금 ‘보이지 않는 미로’ 바로 앞에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옆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만. 하지만 걱정하실 것은 없고 침착하게 빠져나가시면 됩니다.”
“네? 무엇을?”
『너의 앞걸음은 뒷걸음만큼 비쌀까?』
늙은 도적은 앞으로 네 걸을 총총 걸어가 섰다. 그리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다시 확인 하고나서 이번엔 손으로 허공을 집고 말했다.
“선생님도 한 번 해 보시지요.”
나도 늙은 도적을 따라서 한 걸음 두... 쿵..... 넘어졌다.
“아야야야, 앞에 뭐가 있어요. 아직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미로에 들어오신 겁니다. 시작부터 갈라서게 될지는 저도 예상 못했습니다만...거기 제가 말하는 게 잘 들리십니까?”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바닥으로는 ‘허공’을 탕탕 치며 일어섰다.
“네, 다행히요. ‘보이지 않는 미로’가 소리까지는 막지 못하나 보네요. 아까 분명 도적님이 거기까지 가실 때까지는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게 어디서 생긴 걸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제가 간 뒤로 생겼다고 봐야 겠지요? 방금 미로가 바뀐 겁니다.”
“그새 바뀌는 미로라니..당연하게 생기는 것들이 있듯이 제 앞에 이것도 당연하게 사라지지는 않겠죠?”
“그럼요. 이 꿈틀대는 미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겁니다.”
“하하하. 꿈틀댄다니 미로가 이래저래 생기고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생명을 가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네요.”
“네 그럴 수밖에, 이 미로는 살아있으니까요.”
“네? 보이지 않는 것인데 살아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아세요?”
“소리입니다. 이 미로가 내는 소리. 시시각각으로 이 미로가 길을 알려주기 때문에 아무도 이 땅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지요. 들리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앗. 어느새 뒤에 무언가가 닿아서 밀고 있어요.”
“길을 안내해주고 있군요. 엇 저도 움직이라고 하는 군요. 이따 뵙겠습니다. 끝에서 뵙지요.”
“잠시만요.! 그냥 가시지 마세요. 저는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서는 낯선 세계에 오시면서 잠시 듣거나 말하는 법을 망각을 하신 것뿐입니다. 아직은 계기가 부족한 것 일뿐, 정 안 되면 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시지요.”
그냥 그렇게 우리는 갈라져 버렸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만 납득하지 못하고 상대가 훌훌 털고 떠나는 것이 서럽다는 심정임을 깨달았다. 전에 모래가 나에게서 외면 받았을 때가 이런 심정이었으려나. 비록 나의 고의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이리 간단히 헤어지게 될지는 전혀 예상도 못했다. 어찌할 수도 없이 자꾸 떠미는 이것에 계속 더듬더듬 거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은 똑같은데 나만 투명한 세계로 격리 되어진 것 같았다. 어째서 살아있는 이것은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 그리고 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건지. 눈앞에서 누군가를 쫒지 못하고 가로 막히고, 내 의지를 무시한 채 무언가가 나에게 강요를 한다. 허나 무력감을 느껴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 내가 ‘이것’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인가,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지? 떠미는 데로 가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는 건가. 정말로 늙은 도적과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어째서 우리를 갈라놓은 거지?
“아 불편하다. 불편해.”
몇 번의 깊은 한 숨과 일련의 걸음 뒤에 깨달은 것은 둘이다. 하나는 이 미로는 시시각각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방금까지 가로 막힌 방향도 옆이나 뒤에서 떠밀다 보면 어느새 갈 수 있게 열리게 된다. 그리고 내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 된 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몇 번의 시도를 통해서 얻게 된 가설인데, 특정한 경우가 성립할 때에 떠미는 방향과 상관없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경우에 미로가 나를 가게 허락해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벽의 왕으로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 모든 것들의 부름에 항상 나지막이 서있는 존재이다. 그 어떤 모든 장애의 경우에도 나를 배제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이유인 즉슨, 나는 벽의 왕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거라. 만약 네가 어디에서라도 나를 찾고자 한다면, 나는 바로 여기에 있노라!’
하하. 이럴 때에 벽의 왕의 생각나는군.. 언제든 자기를 찾고자 한다면 자기가 거기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으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직접 보려고 찾아오라는 얘기였잖아. 이럴 때에 그가 생각나다니... 그러고 보니 벽의 왕 때도 그랬어, 내가 직접 그를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가 우리를 한 세계로 통하도록 열어 놓았지. 설마. 내 손의 이것 때문인가. 대체 키월드(KeyWorld)가 뭐지. 난 어째서 이것을 읽을 수 있지. 만약 이것을 통해 지금 나의 인지를 넘어선 소통을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 동안 나와 벽의 왕, 그리고 늙은 도적을 연결했던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다시 한 번 이 것을 통해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나는 이 미로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몰라! 어디든 닿는 곳을 향에 손을 뻗고 집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저와 얘기를 해주세요. 저기 미로님? 아아아 알았어요. 그만 쫌 미리시라고요. 제가 어디로 가는 지, 제가 누구 인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이름을 찾고 있어요. 있잖아요. 아까 전에 그쪽이 저하고 떨어트려 놓은 것은 저의 일행이었다고요. 저의 길잡이에요. 저기요? 제 얘기 듣고 있어요?.....................”
한참동안 혼자 말을 늘어놓다가 깨달았다. 전혀 이야기가 되지 않고 있어... 뭐가 문제인거지. 왕이나 도적이나 다들 그렇게 잘 트이는데, 나만 뭐가 문제인거야. 혹시 이 손만으로는 ‘다른 뭔가’가 부족한 건가? 맞아! 도적은 미로를 확인하기 전에 한 번 냄새를 맡았었지. 더듬어서 손을 지탱할 벽을 찾고 천천히 고개를 쑥 내밀었다.
“킁, 크....ㅇ....어?...어어어어어!”
그렇게 자연스레 넘어졌다. 조금 전과 같이 푹신한 눈 위가 아니라 딱딱한 바닥에 찍어서 조금 충격이 있었다. 아까 처음 부딪혀 넘어졌을 때처럼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으음.. 분명히 이상하군. 이상해. 아까까지는 ‘이런 게’ 없었단 말이지.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내가 벽을 통해서만 밖을 볼 수 있었으니 어디까지나 왜곡됐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와 얘기도 들어주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이런 곳으로 안내해주다니... 한 쪽은 알 수 없는 일방적인 소통이란 참 뭐랄까. 피곤하군.”
뒤를 돌아 봤지만 방금 내가 들어왔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이곳에 도착하긴 했지만. 새로운 곳에 방문한 것 같은 느낌보다는 나도 모르게 잘 못 끼어든 느낌이야. 아까까지 바라보던 장소와 비교하자면 좀 더 각지고 더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곳이다.
“음, 이건 누군가의 방 같군.”
『만년설 도서관』
방은 꽤 큰 편이었지만 책장과 꽂혀있는 책 빼고는 딱히 이르다 할 다른 무언가는 없었다. 특이한 점은 책장의 높이가 꽤 높다는 것과 책장의 각 칸에는 별들로 새겨진 문양이 있다는 것이다. 책장들이 내 키의 세 배도 훌쩍 넘겠어. 저런 높은 곳에 있는 책은 어떻게 빼는 거지. 딱히 받힐 것은 보이지 않는데 무슨 도구가 있겠지. 하고 돌아 다녀도 보이지 않았다. 한 바퀴를 뺑 도니 이 방을 나가는 문이 보였고 긴 복도가 나왔다. 이 방은 길게 이어진 복도에 연결되는 7개의 방 중 하나였다. 길게 이어진 복도의 양 옆으로 세 개씩 그리고 복도의 끝으로 하나, 다른 끝에는 그냥 막다른 책장이 있었다.
“거기 계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음.. 내가 이곳으로 들어왔던 방으로는 다시 나갈 수 없으니 좀 더 이곳을 둘러볼 수밖에 없군. 각 방마다 문의 위에는 아까 책장처럼, 조금씩 다른 달과 태양으로 새겨진 장식이 있었다. 음 이리 넓은 곳에 왜 아무도 없는 것인지. 복도를 걷다 방들 중에 복도 옆의 3번째에 문 위로 붉은 달과 저무는 해의 모양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과 마찬가지로 책장과 책들을 제외하곤 별 다를 게 없는 방이었다. 책장하나를 돌다 눈높이의 책 하나를 꺼내 집었다. 마치 새하얀 눈과 얼음조각으로 된 것 같은 책이로군. 끝까지 넘겨봤지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다른 책장의 다른 책도 꺼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책장 옆의 투명한 벽에 비친 내 모습에 순간적으로 우뚝 멈춰 섰다.
“음,,,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던가?”
“이름도 찾지 못하는 자가, 자기의 겉모습도 의심하는군. 바보 같은 녀석”
내 모습 뒤로 거울에 비치는 불쑥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에 깜짝 놀라 벽에 기댄 체 주저앉았다. 저저저저... 저 커다란 몸과 기다란 신체....그,,,그래 저건..
“기..기린이야!”
“그래 기린이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갈색 흰 점박이 기린, 하지만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실례잖아 멍청아.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와서 봤더니 정말 무례한 녀석이군.”
과연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실로 대단하구나.
“음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저도 모르게...마음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흠”
“저는 ‘소년’이에요. 소년은 원래 저의 이름은 아니고 편의상 붙인 이름이에요. 제가 이름과 함께 기억을 잃어버려서 찾아가는 길 중에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음? 그럴 리가? 아니야. 너는 비록 작은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어린 남자 아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걸. 아까 스스로 의심했듯이 자신이 정말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아닌가?”
다시 몸을 돌려 투명한 벽 앞에 섰다. 확실히 손이나 발도, 키도 좀 큰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나는 이 도서관의 사서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은 정보를 가져와 책으로 만들거나 책장을 정리하는 일이지. 보통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만, 그래서 간만에 찾아온 게 누군지 궁금했는데,,,생각보다.. 음 그래 작군.”
“혹시 당신의 이름이 ‘오완’인가요? 이 땅이 오완의 구릉지나 태초의 도서관으로도 불린다는 것은 들었어요.”
“이곳이 태초의 도서관으로 불린다는 것은 맞고, 밖의 땅이 오완의 구릉지 인 것은 맞다만, 그렇다고 내가 오완은 아니지. 나는 랄시피다. ‘기록을 보관하는 자’라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이 곳으로 오는 길에 이미 오완은 만났을 텐데? 그러지 않고는 여기에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렇군요. 랄시피. 공교롭게도 저는 제 동행자와 미로에 들어와서 방금까지 길을 헤매다 이 곳으로 흘러왔는걸요. 설마 제 동행자가 오완이 아닌 이상이요. 하하”
“흥 멍청이. 알고 보니 이름만 잊어버린 게 아니라 말하는 법이랑 듣는 법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넌 소년이 아니라 그냥 아기수준이군.”
음 그러고 보니 이 사서는 나에게 처음부터 이름을 잃어 버렸다고 했어
“저기 그런데 사서님. 제가 이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나요? 혹시 늙은 도적님처럼 제 마음을 읽을 줄 아시는 건가요?”
“흠 ‘늙은 도적’이라, 버림받은 땅 출신인 녀석들인가.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녀석들처럼 마음을 잘 읽어내지는 못해. 그건 그 녀석들의 특별한 재주 같은 거니까. 내게 네가 이름을 찾고 있다고 알려준 것은 오완이다.”
“네? 제가 이름을 찾고 있다고 아는 것이라고는 왕과 도적 딱 둘일 텐데.”
그러자. 랄시피는 커다란 발로 벽을 꽝꽝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머리위로 하얀 가루와 작은 알갱이들이 우스스스 떨어졌다.
“호호호호. 너 참 개그를 잘하는 구나. 이 얘기를 오완 녀석한테 해주면 얼마나 그 녀석도 얼마나 좋아할지.”
“랄시피.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저는 오완이란 분을 만난 적도 없고 그 분과 얘기를 나눈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 분이 저를 어떻게 아는 거죠.”
이 사서, 내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것을 아는 걸까. 갑자기 얼굴을 내 앞까지 쑥 내밀며 말했다.
“애야. 널 여기로 보낸 것은 누구지?”
“.......‘그’로군요.”
“그래. 그가 오완이지.”
『머리에도 담지 못하는 모르는 것들 투성이로군?』
“전혀 몰랐어요. 미로가 살아 있다는 걸 듣긴 했지만, 그가 오완이었다니”
“많은 자들이 저 ‘살아있는 미로’를 통해 이 땅을 지나가지만 그것이 오완의 힘을 빌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지. 사실 그것은 오완 녀석이 안내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과묵한 것도 한몫을 하지만 말이야.”
“저기 여기는 어떤 곳인가요?”
“아까 말했던 데로 도서관이다. 하늘 밖과 이 세계의 땅에게서 온 기록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고이지. 또 나에게 있어서는 집이기도 하고.”
“아까 책을 몇 권 꺼내봤을 때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던데 혹시 그것은 아직 기록을 하지 않은 것인가요?”
“벌써 몇 권을 뒤져본 모양이군. 책은 제자리에 꼽아 놨겠지? 여기 있는 책들 중에는 단언컨대 단 한 권도 정보를 담지 않은 책은 없어. 태초에 이 천체의 탄생부터 일어난 모든 특정 사건이나 분위기를 기록한 체 책장마다 분류 돼있지.”
“하지만, 분명히..”
“하지만 네가 읽지 못하는 것은 너에게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안심해. 이건 네가 벙어리나 귀머거리 인 것 수준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니까. 아주 오래된 눈을 통해 기록을 끄집어내고 책으로 만드는 건 이 세계에서도 아주 특별한 능력에 속해”
“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것들이 꽤 있군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거나 눈치체지 못하게 은밀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네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이나, 은밀한 것’이란 반대로 보이는 것과 은밀하지 않은 것만큼 많이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너 역시 너 스스로 아는 만큼과 반대로 숨겨진 많은 것들이 잠재해있지.”
“맞아요. 여기 오는 중에도 스스로의 답답함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다고 몰랐던 것도 꽤 많았고요.”
“누구나 모든 것을 안 채로 살아갈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착각을 하지만 무엇으로 통하는 만큼 다른 곳이 닫힌다는 것을 알지는 못해. 그러고 보니 네가 오기 한 달 전쯤에 하늘 눈물주머니 모래와 바람이 잿빛 사막의 바람이 다녀갔었다. 너에 대해서도 얘기하더군.”
“오! 그들도 여기를 지나갔군요.”
“그래 널더러 귀머거리라더군. 처음엔 설명을 들었을 때는 어떤 얼간이인가 했었지. 근데 그게 너였다니. 푸흡”
“하하하...여기에 있는 것들이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면 제가 찾는 정보도 있을까요?”
랄시피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흥얼흥얼 거리며 이 곳 저곳 책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책들도 긴 목을 뻗어서 손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네가 아주 사소한 것을 찾는다 해도 내가 아주 최근까지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없어. 어떤 것을 찾아줄까. ‘세계를 이루는 11개의 땅들과 숨겨진 6가지 공간?’ 아니면 ‘벽의 왕의 연대기?’ ‘금지되는 3가지 위선’ 이것은 됐고, 음 듣고 보고 말하는 법에 관한 것도 있지 네가 찾는 것은 뭐지?”
“‘붉은 곰’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잠시 멈춘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지는군.
“그래....너는 그런 존재였지..”
사서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꼽으며 반대 편 책장으로 움직였다. 그것을 쫒아가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로 너구리와 기린의 한 걸음 차이는 엄청나군.
“이봐. 너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요. 그것은 그냥 저 같은 이 세계의 낯선 자가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 가하고 생각해요. 반대로 제 입장에서는 문득 낯선 길로 빠진 것이고요.”
“스스로를 별거 아닌 듯이 얘기하는군. 아니면 잘 모르는 건가. 붉은 곰 뒤의 출몰은 꼭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란다. 그것은 생명의 등장 같은 작은 사건에서, 기후의 변화, 지형의 개벽, 심지어 이 세계 질서의 궤변조차도 만들어 내는 대사건이지. 허나 너는 몰랐던 모양이군?”
전혀 몰랐다. 왕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고 늙은 도적도 그런 현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별의 출몰이 그리 대단한 일이었나.
“보자. 여기 있군. 붉은 곰 출몰에 관한 기록”
『나로서 해야만 하는 일』
“1317년 전, 천체 탄생 후 8억6천2백6십9만7천5백2십3번째 붉은 곰의 출몰. 대이변.”
‘이 날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오르고 달이 땅 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려 할 때 즈음에, 세계의 모든 이들이 심상치 않은 대기의 흐름과 느끼고 낯선 땅의 소리를 들었다. 태양이 완전히 지고 달의 빛이 완전히 찬지 체 잠시가 지나지 않아 일순간 하늘을 나는 모든 것들은 아래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고, 그 중에는 일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진 자들도 있었다. 본시 땅에 붙어 있던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변화된 낯선 현상으로 걸음을 때거나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했고 주저앉은 이들도 많았다................’
“그 뒤 37년 뒤의 붉은 곰의 출몰.”
‘몇 년 전부터 강해진 정체모를 힘이 더 강해졌고 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전까지 이렇게 바람이 드세게 불고 땅이 요동친 적도 없었으며, 급격하게 하늘이 바뀌고 기후가 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영향으로 많은 존재들이 사라졌으며, 세상도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바로 다음 붉은 곰의 출몰”
‘결국 하늘 밖과 이 천체를 연결하던 교신이 점점 약해져 더 이상 하늘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돼버렸다. 가장 하늘 높이 있는 자들도 희미하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그 의미를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정지었다...............’
“대이변 후 121년”
‘많은 생명들이 변화된 자연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요동치던 세계도 어느덧 규칙적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그 후로도 여전히 붉은 곰이 나타나는 밤이면 느닷없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생명들이 나타났다..............’
“대이변 후 666년”
‘누군가가 새빨간 불모지에 축복 같은 비를 불러왔다. 이것은 옆의 다른 땅들에게 돌아갈 섭리를 빼앗는 것이었으므로 이 의식은 이후로 죄악으로 금지시되었다.’
“대이변 후 925년”
‘본래 17개의 땅들로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그 동안 각 땅들에 작용하는 힘의 차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해왔고, 마침내 이날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로 인한 큰 폭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6개의 땅들이 독립적으로 탈락해 이공간으로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대 이변 후 1317년”
잿빛 사막의 땅에서 바람이 부는 언덕 위로 낯선 인간의 출몰
“여기까지가 마지막 기록이다. 대략적인 기록을 들은 감상은?”
“그냥 놀라워요.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저는 그냥 제 이름도 찾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인데,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혹시 저는 그냥 원래 이 세계에 살던 인간인데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것뿐이고, 진짜는 따로 있는 게 아닐까요? 꼭 저란 확실도 없잖아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정말 붉은 곰의 출몰이라는 징표도 없고 말이야. 음 잠깐만, 너 손위에 그건 뭐지?”
“아 이거요. 딱히 특별한 건 없어요. 단지 몇 가지 의구심이 드는 건 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아요.”
“오. 자세히 얘기해봐. 네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들 전부.”
“이것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몰라요. 그냥 키월드(KeyWorld)라고 읽는 건 알겠는 데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게 없어요. 한 때는 이것이 벽의 왕이나 늙은 도적과의 연결되는 세계를 열어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미로에서 시험해보려고 하니, 그것도 뜻대로 안 됐어요.”
“다시 얘기 해줘봐. 그 부분”
“어떤 부분이요? 미로에서 시험해보려고 한 거요?”
“아니. 벽의 왕이나 늙은 도적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한 부분”
“제가 벽의 왕이나 늙은 도적과 연결이 통했을 때의 한 가지 공통점이란 제가 무언가를 두드리거나 치고 있었다는 거 에요. 벽의 왕한테는 직접 똑똑 거렸었고, 늙은 도적의 당시에는 바닥을 손으로 쿵쿵 찍었죠.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처음에 두드렸을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그 다음에야 들리기 시작했거든요.”
“음 아마도, 그것은 완전히 너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만약 너의 생각한대로가 맞다면 다른 조건이 더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저도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하지만 다른 조건이라도 이렇다 할 연결점이 생각나지 않는 걸요. 만약 저의 이 손이 어떤 채널을 열기 위한 도구라면, 다른 필요한 조건이란 무엇이란 말이죠?”
“그것은 이제 네가 생각해보거나 찾아봐야지. 그것을 위한 여행일 테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도서관을 다 뒤져도 그 ‘키월드’란 것에 관한 정보는 없을 게다. 하지만 상황이 모두 틀린 게 아니라면, 너는 그 연결의 이음매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벽의 왕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모든 연결점에는 이음매가 있다고, 나와 그들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무슨 ‘계기’가 있어.
“좋아요. 해야 할 일은 변함이 없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뚜렷해졌어요. 저는 여행을 떠나야 해요.”
“그래. 이 이상 볼일이 없다면 지체 없이 네 손에 가진 능력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떠나라. 다음에 돌아올 때는 그 동안의 너의 얘기와 알아낸 것들을 들어보지.”
“랄시프. 신세 많이 졌어요. 많은 정보 주셔서 고마워요. 하하 그럼 저는 어디로 나가야 하죠?”
“문이 있지 않고 막혀있는 복도의 맨 끝으로 가봐.”
“네. 안녕히 계세요. 돌아올 때 들릴게요.”
“아! 마지막으로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바깥 공기의 시원함은 어쩌고 저째?』
“흥 뭐야. 그것까지 가르쳐줘야 하나 했는데 걱정할 거 없이 잘 빠져나가잖아.”
그녀는 세 번째 방과 두 번째 방의 문 사이를 가볍게 탁탁 쳤다.
“ TTT. 잠시 나와 봐요.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무슨 볼 일이지. 랄시피. 한 동안은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더니?”
“당신, 저 아이의 손 위의 저것 알고 있었나요?”
“물론. 하지만 처음엔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 혹 그것일지 모른다는 건가?”
“혹시 저것이 먼 옛날 끊어졌던 모든 연결점을 다시 세워 줄지도 모르죠.”
“흥 그게 쉬운 거라면, 이미 몇 천 몇 만 전에 누군가 해냈겠지. 저 녀석을 모를 거야. 이건 상상 훨씬 그 이상으로 반복되어 온 이야기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흥미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내가 찾는 것은 것이랑은 완전히 다른 것이니.”
“그건 그렇고 저 아이 ‘당신’을 닮았어요. 아니 점점 닮아가겠죠. 아마 당신을 처음 두드렸을 때부터 그건 완전히 우연이 아니었을 테니”
“흥, 그건 나한테 있어 이미 그가 떠날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바다.”
도서관을 빠져나온 뒤 전과 똑같이 미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오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전처럼 더듬거리지 않아도 된 다는 점은 다르다. 그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 중에서 날 옮기려는 의지만큼은 확실히 전달되고 있으니까.
“랄시프에게 감사해야 될 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을 까마득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내 마음속의 어떠한 답답함이 당신과 저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누구고 당신의 이름을 안 것만으로 당신에게서 들리지 못했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재밌는 관경을 다시 보지는 못하시겠지만, 이제는 냄새를 맡다가 넘어질 일도 없고요. 하하. 아무튼 나의 ‘두 번째’ 길잡이. 잘 부탁해요.”
그나저나 여기는 정말 눈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저 쪽 땅의 언덕에서는 멀리까지 탁 트여 보였었는데. 오완씨는 아마 이쪽에서 저쪽으로 쭉 뻗어 있을 테니까 무지막지 크겠지. 내가 그 정도로 크다면 단숨에 저 너머까지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이 안에 있는 덕분에 계속해서 눈을 어깨나 머리에서 털어낼 필요도 없고 억지로 보려고 실눈을 뜰 필요도 없잖아. 어찌 보면 오완이란 대단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기껏해야 이 손으로 이따금 무엇을 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완은 여는 것뿐만 아니라 닫는 것도 가능하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무엇과 통하는 것에만 집중해왔지 닫거나 차단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어. 만약 내가 무엇을 열고 통해서 지나간 다음에, 닫힌 뒤 그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지? 원래 내가 있던 자리는 사라져 버리는 건가? 이것도 재밌는 농담인 것 같군. 히히 아마 벽의 왕이 들었으면 좋아했을 것 같아.
“한창 재밌는 생각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무슨 농담을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오! 늙은 도적. 저희 결국 미로에서 다시 만난 거군요.”
“아니요. 저는 한참 전에 미로를 빠져나왔고, 선생님은 막 나오신 참입니다. 본래는 통과하는 데 그 정도 시간은 걸리지 않는데 좀 더디셨군요. 제대로 안내를 받지 못해 부딪히거나 또 넘어지셨습니까?”
“하하. 둘 다 맞아요. 저는 결국 미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듣지 못해도 들은 게 있는 모양이군요. 말장난 같지만”
“그래요. 저는 분명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의지는 일부나마 들을 수 있었어요. 아 그리고 저, 이쪽으로 오다가 오완을 만났어요.”
“오호? 미로로 들어와 도중에 다른 이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선생님은 정말 행운이시군요. 어떤 자였습니까? 최소 수천의 세월을 견뎌 왔으니 퍽이나 늙은 자였겠군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을 나눌 정도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자고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늙은 도적은 이번에는 마음을 읽지 못했는지 몇 번 갸우뚱 거렸다.
“아쉽게도. 대화는 무리였던 것 같네요.”
“흠 그랬습니까.”
“도적님께서는 이쪽으로 오시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으셨나요?”
“저는 딱히 그렇다 할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저 오면서 다음 길을 그리고 있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도적이 가는 길은 전혀 묻지 않았었다.
“이 다음이 통곡의 불모지라고 했었죠. 저희의 길은 어디로 이어지나요?”
“어디 쪽으로 가든 다 통하는 길은 찾아낼 수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은 통곡의 불모지를 통해서 한 군데의 땅을 더 지나서 가셔야 할 겁니다. ‘푸른 별자리 계산대’라는 곳인데 이상한 점이 많은 이 세계에서도 정말 유별난 곳에 속하지요.”
“아하, 그렇다면 거기가 선생님의 고향이로군요. 저희 동행의 종착점이기도 하고요.”
“아니요. 저의 고향은 그 쪽 방향에 없습니다. 불모지에서 옆으로 빠지는 샛길로 통하지요. 그리고 제가 고향으로 갈 것은 맞지만 중간에 다른 볼일이 먼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 아쉽지만 저희의 동행은 다음 땅까지입니다. 아마 그 다음부터는 새로운 길잡이를 찾으셔야 하겠지요. 미리 알려드리지 않은 점은 죄송합니다.”
『멀어져온 그 동안의 내 발자취에 감사해』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말없이 계속 걸었다. 그래 미리 알든 이제 알 게 됐든 결과는 변함이 없어. 뜻밖의 상황에 말을 할 수 없게 돼 버리는 것은 해야 할 말도 못하게 됐기 때문이 아니야. 그건 내가 변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종전과 다르게 두 번 세 번은 막혀서 걸러져 나오는 걸...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도적이었다.
“저기 선생님? 제가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제 옆에 계시지요?”
뻔하지.
“그것은 도적님께서 저의 길잡이이기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제가 도적님과 함께 있는 것은 제가 도적님과 맞잡았던 그 손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 놓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지요.”
“그래요. 제가 도적님한테 동행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짧은 시간이었든 긴 시간이었든 저한테 있어서 도적님은 완전히 별개가 될 수 없었으니까요. 아니요. 어쩌면 저의 소리를 듣고 나타나신 순간부터 그랬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요. 선생님의 길을 정하는 것은 누구지요? 뻔한 대답이지요. 선생님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렬하게 의지를 내뿜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은 저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중간까지의 동행자일 뿐 저에게서 무엇을 두고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고... 두고..”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걸. 열렸던 통로와 그 시간의 세계가 진짜였던 만큼 연결에는 이음매가 남기 마련이니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나의 발걸음은 멈췄다. 마음이란 참 재미있군, 무엇이든 불어넣은 대로 커지기 마련이니까. 나를 단숨에 저 밖으로 뻗어나가게 할 것 같았던 동력원도, 어느새 다른 부풀은 것에 시들어 나를 멈추게 하는걸. 답답하군. 답답해.
“저기 선생님?”
어느새 도적은 바로 내 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작은 그것’을 내밀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무엇을 먹는 다는 것은 현재 스스로가 존재하는 증거라고 한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세상에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일부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일부 생명체들은 시간이 흘러 진화를 거듭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자연은 받아들이고 내뿜어 돌려보내 순환시키는 일을 하지요. 지금 내가 있게 된 데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유와 시간들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기의 일부에는 이 음식이란 것도 있지요. 혹시 선생님께서 떠나보내지 못한 미련과 떠나면서 새로 얻을 인연에 고민하고 무엇을 포기하기 어려우신 거라면, 이 작은 것으로서 저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분명 이 음식과 별개로 눈에 잡힐 듯한 마음도 같이 내게로 왔다. 만약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온 마음이 진짜라면, 내가 직접 이 손으로 연 문이 닫혀 버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겠어.
“저는 드릴 것이 없으니 마음을 받았다는 의미로 ‘저만’의 표시를 해야겠어요.”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집고 몸을 엎드려 도적과 눈높이를 맞췄다. 도적도 처음으로 네 발로 같은 형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와 도적은 서로 머리를 쿵. 쿵. 부딪히고 아주 엷게만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서로와 그리고 자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렇게 앞을 가리던 눈보라도 걷혔다. 대지를 태울 듯이 작열하는 태양빛, 붉게 익어버린 듯한 메마른 땅.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2장 그 말 진심이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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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히 계세요. 돌아올 때 들릴게요. 아. 마지막으로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이쪽으로 오는 길에 제 길잡이랑 떨어져서 가게 됐거든요. 오완이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하는 거죠?’
‘글쌔.... 그건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 런지..’
‘네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오완은 이 땅을 지나가는 자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돕지만 나쁜 의도로 가지 못하게 방해하지는 않아, 오완은 미로로 들여보내면서 지나가는 자의 행선지와 목적을 읽고 그들의 생각이 자연스레 흘러갈 수 있게 돕는 일을 하지. 그래서 보통 이들이 얘기하는 오완의 의미처럼, 그는 각자의 뜻을 자연스레 흘러가게 돕는 거야. 그래서 보통 같은 방향을 가는 자들은 흩어 놓지 않고 같이 들여보내지. 다만’
‘다만?..’
‘다른 방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즉 오완은 이번에 너희 둘이 같은 길을 가지 않게 될 거라고 판단 한 거야. 어쩌면 그 너구리 녀석, 너를 순수하게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 아닌지도 몰라. 조심해’
3장
무성한 소문이군요.
대부분의 꽤 많은 것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내 염원과 희망을 담았던 자루는 그렇게 나의 기대와 함께 부담, 걱정, 상처도 같이 담고 떠나 가줬다. 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담지 못하고 흘리고 갈 때도 있었다. 왜냐면 떠날 듯한 그 시간·그 자리·그 모든 자들을 다시 한 번 들춰 보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그 자루를 붙잡고 구멍이라도 내야 했었기에...
『결실을 거둘 수 없는 땅』
“저기요. 늙은 도적님”
“네. 선생님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도적님께서 저한테 ‘이것’을 주셨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선생님이 한 번도 음식들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간만에 길을 찾느라 집중하느라 다시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군. 하지만 목적지와는 상관없는 낯선 땅으로 흘러가지 않고 내가 이렇게 제 길로 갈 수 있는 것도 다 이 자 덕분이지.
“음... 제가 길을 잘 못 잡은 게 아니라면 슬슬 ‘그들’이 보이기 시작해야 할 텐데 말이죠. 오호. 방금 건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어째서 먹는 행위를 하지 않고 있는 지 궁금하셨군요. 사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아. 비밀이었군요.”
어째서 나는 우리 사이에 비밀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생각했었을까. 비밀이란 것은 그 의미가 하잘 것 없을 정도로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적어도 이 때는 몰랐다.
“저는 사실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선생님처럼 이요. 제가 드린 그것은 그냥 제가 몸에 소유하고 다니는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음식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거군요.”
“그 ‘음식’이란 것을 어디까지 확장할지의 문제입니다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자신 밖의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요. 저희같이 ‘특별한 자’들을 제외하고는요.”
‘혹시 같이 가는 길에 저희와 다른 이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하려다 하지 못했다. 옆의 동행자에게 어떠한 부정의 말을 들을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음식이라면, 저는 어째서...”
“항상 어떤 비교를 할 때 반대의 말이 적용되는 오류를 조심하십시오. 내가 어떤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그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항상 예외가 있는 법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단지 ‘조금’ 특별하실 뿐이고요.”
“그리고 도적님도요?”
“저 말입니까?”
“아까 도적님도 저와 같이 특별한 존재라고 하셨잖아요.”
“하하 제가 그랬습니까? 제가 무슨 실언을 했나 봅니다. 저와 선생님은 분명히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분명히, 분명히...”
으음. 뭐가 이 세상에는 다른 게 많은지.
“그나저나 불모지란 말은 굉장히 척박한 땅이란 의미지요? 그렇다면 ‘통곡’이란 말은 무슨 뜻이죠?”
“원래 이 땅의 이름은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었다고 하는군요. 수백 년 전 이 땅을 대표하는 왕과 그리고 다른 땅을 다스리는 앙숙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둘, 공동의 필요한 ‘한 보물’을 얻기 위해 달이 스무 번 바뀔 때까지 싸웠고, 그 결과로 왕에게서 승리한 자가 그 보물뿐만 아니라 패배한 나라의 모든 자원과 빼앗았다고 하지요. 그 뿐만이 아니라 패배한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승리한 새로운 왕을 환호하며 이 전의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그 관경을 지켜 본 패배한 왕은 두 땅을 연결하는 다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계속 해서 눈물을 흘렸고, 왕의 ‘통곡의 눈물’이 구름을 불러와 큰 비 내렸다고 합니다. 통곡이란 말은 전설에서 그 때 그녀가 흘린 눈물에서 따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나눠 가질 수 없는 것 때문에 싸움이 있고 또 그것 때문에 전혀 뜻하지 않던 것들이 떠나간다니, 큰 비극이로군요. 욕심과 싸움이란 사랑과 배려처럼 많은 것들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만 느껴지는 것과 그 크기의 차이는 꽤 다르네요. 그럼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나요?”
“흐흐. 사랑과 배려라니. 선생님의 입에서 그런 단어들을 듣게 될 줄을 몰랐군요.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있지만, 꽤 달리 지셨습니다. 어쩌면 점점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되찾고 계신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설명했을 뿐, 저도 이 이상은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하.”
“그런가요...? 단지 저는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누군가에게 있어서 주고 싶은 한 쪽 마음과 받고 싶은 다른 쪽 마음이 어째서 그 크기가 다른지요. 어찌 보면 반대라 할 수 있는 이 두마음은 본래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근데 한 쪽으로만 강하다면 균형이 맞지 않아 결국 무너져 버리게 될 거에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부의 그 마음과 별도로 ‘외부의 힘’, 즉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의 두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난해한 말이었다. 그냥 한 번 다시 물어볼까 하다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 해보려고 그냥 말았다. 상대를 통해 자꾸 답을 듣는 것도 습관이다.
『가끔 스스로 입에서 하는 말을 듣기 싫을 때가 있어.』
풀 한포기는 물론 어떠한 생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이런 저런 방향으로 갈라진 땅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 곳은 해와 달은 좀 달라 보인다. 오완의 구릉지는 그것을 파악하기에는 좀 어려웠지만, 굳이‘모래의 땅’과 비교하자면 해와 달의 순환이 순환이 좀 더 빠른 편인 것 같고. 그곳이 해와 달이 거의 수직으로 떨어져 차이가 난다고 한다면 이 곳은 그 반 정도 밖에 안 되겠는걸. 보이는 달의 크기도 이 쪽이 좀 더 큰 편이고.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달이 하나가 아닐지도 몰라. 하하
“예 맞습니다. 각 세계의 땅 별로 서로 다른 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해와 별들만큼은 보이는 차이를 제외하고는 똑같지요. 하하”
“그렇다면, 달의 윤년이란 것도 각 땅별로 다르다는 말인가요?”
생각해보면 이게 딱히 내 목적지에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네, 당연한 얘기이지요. 뭘 기다리시는 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참 ‘붉은 곰’이겠군요. 딱히 이 곳으로 와서 마음에 드는 달이라도 만드신 것은 아니실 테니. 어디를 기준으로 할지에 따라 다르니까 혹시 알아내시려 하신다면 각 땅의 ‘왕’을 만나보시면 될 겁니다.”
“왕이요?”
“그렇습니다. 이미 만나 보셨지요? 각 땅의 왕이란 존재는 그 땅에 해당하는 해와 별, 달이 지나는 모든 규칙과 순서, 그리고 순환에 해당하는 현상과 사건을 추정하고 기록을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불규칙적인 이변 상황에서도 그들만의 고유한 대처법으로 특별한 능력을 사용 할 수 있는 위대한 자에게만 붙여지는 칭호 입니다. 다만 ‘예언’에 대해서만큼은 몹시 휘기한 능력에 속하기에 제 아무리 왕이라도 불가능하지만요.”
추가로 짐작 가는 자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과한 지난 땅에서도 왕이 있었겠군요?”
“예. 뭐. 정상이라면 있었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 땅의 이야기 속 왕의 결말을 다 듣지 못했군.
“너희 둘. 거기!, 그래 바로 니들 말이야. 웬 놈이냐!”
뭐야. 저 오리는? 흰 깃털에 검은 칠이나 하고 막대기까지 들면서 노려보고 말이야.
“저기 오리님? 저는 여행자입니다. 그저 우리는 제가 목적으로 하는 곳을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옆의 분은 저의 길잡이이자 동행자이고요. 저희에게 그걸 묻는 그 쪽이야말로 어떤 분이신지?”
“거짓말마라! 보통의 자가 단순히 여행을 목적으로 이 곳을 통행지로 삼았을 리가 없다. 숨김없이 말해라! 이 땅에 무슨 볼일로 온 거지?”
어느새 도적이 내 발을 잡으며 앞에 나섰다.
“제가 이 자와 얘기를 나눠보지요. 그 쪽은 ‘북쪽 하늘 감시자’가 아닙니까? 왜 강줄기 한 참 아래쪽에 있어야 할 자가 여기 서북 평야까지 와 있는 거지요? 혹 거기도 다른 곳과 마찬 가지로 메말라 버린 건가요?”
“시끄럽다. 이놈. 네 놈이 무얼 안다고 함부로 떠드는 게야. 어서 제대로 된 정체나 밝혀라. 너희들도 저 뒤의 우물을 차지한 도적놈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냐?”
“저런. 저런. 그 쪽 강도 이제 살기 쉽지 않나 보군. 또 다른 곳으로 찾아 옮겨 다녀야할텐데. 이제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할지... 그런데 축복으로부터 버림받은 떠돌이들 따위가 감히 ‘낙원의 순례자’를 저런 잡배들과 같이 취급하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그 말로 아까까지의 오리의 기세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양쪽은 그저 소리 없이 대치했다. 오리의 목으로 침 넘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저 자가 잔뜩 긴장 한 거지?
“그럼, 볼일이 없어진 것 같은데 저희는 그만 지나갑니다. 선생님. 계속 지나가지요. 그리고 그 쪽 친구. 아직 좀 어린 것 같은데 그대가 나중에 모든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큰 희망이 되어야겠군. ‘흰 표범’의 가호가 있기를. 행운을 비네.”
“칫. 이기적인 족속들 같으니. 너희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느냐.”
오리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모른 체 하고 도적은 그냥은 계속 앞길을 갔지만 나는 가면서도 몇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멀어진 후에도 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자도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을 테지. 도적의 말들이 저 오리의 가야할 길과 의지를 빼앗은 것인가. 난처하군.
“흥. 덤벼들 의지도 없으면서 입말 살아서는”
“도적님, 저들은 대체..그리고 낙원의 순례자란 또..”
“흥 저들은 점점 모든 것이 소멸해 가는 이 땅의 마지막으로 남은 토박이들이지요. 그것도 곧 얼마 안 남은 것 같지만요. 저런 자들은 결국 모두 이 땅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단 하나도 예외도 없이 그렇게 되어야 맞고요.”
저 화난 듯 한 진지한 표정. 그래. 저번에도 본적이 있다. 늙은 도적을 통해 볼 수 있는 평소와 다른 표정과 느낌,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내게 한 가지를 사실을 알려준다. 그 장소와 시간은 이미 코앞이라고. 틀림없이 이 자는 나와의 이별을 서두르고 있어. 나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이 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자신이 찾는 것이 당장 눈앞에 밟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니까. 아무 이유 없이 하나와 다른 하나의 연결은 쉽게 멀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틀림없이 다른 새로운 연결점이 닿고 있는 것이거나 또는 다른 통로가 열리려고 준비 중일 테지. 그것도 아니면 아마 그 때는 내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순간 일 테니 말이야.
“오오. 보이는 군요. 저 밑의 큰 물 웅덩이가 보이십니까?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바로 제가 들리려고 했던 곳입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출발이 되겠군요.”
어떤 의미에서의 ‘새로운 출발’인가. 누군가에게 있어서 새로운 출발인가. 처음부터 가야했던 곳은 바뀌지 않았으며 중간에 다짐 했던 의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붙었다 떨어지는 것뿐. 그저 저 말은 내게 누군가로의 이별의 선언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오래된 호수에 신통한 악어가 산다고 하지.』
도착한 곳은 꽤 많은 수의 다양한 동물들로 시끌벅적 했다. 한 쪽으론 커다란 천으로부터 막을 드리우고 그늘 밑에서 무언가를 펼쳐 놓은 자들이 있는 가하면, 다른 쪽으론 같은 무리인지 여럿이 모여서 한 쪽에 둘러 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이 세계를 온 뒤로 많은 달들이 넘어가고 두 땅을 넘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자들을 보게 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여정이었습니다만,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네. 그 동안 함께했던 먼 길과 함께 오가던 생각과 많은 대화들, 그 모든 것들에 감사드립니다. 도적님께서는 이제는 어디로?”
“저는 이곳에서 좀 알아봐야 할 것과 만나 봐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다음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자들을 찾아 봐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니요. 그 동안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걸요. 이제부터는 제가 직접 스스로 만나보고 찾아볼까 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선생님처럼 재밌는 분과 함께 동행을 한 것 제게 영광이었습니다. 그 동안 선생님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재밌었고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도적님처럼 친절하고 공손하신 분을 만나는 것은 또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만큼 저한테 행운이었어요. 꼬마였던 저에게 ‘선생님’이란 호칭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요.”
“아아. 그야 얼마나 오래세월 이 세상에서 존재해오셨을지 모르는 분인데 그러한 호칭이라도 붙이는 건 당연하지요. 그러면 혹시 다음의 재회를 기대하며.”
어느 누군가와 비슷하게 그 자리에서 바로 떠나지 못했다. 그저 한참 동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그때와 다르다면 이번에는 내가 떠나지 못하고 남겨지는 것이지만.
“음, 이번에는 누구를 만나 봐야 할까. 그래, 꼭 길잡이를 구할 필요는 없지. 내가 혼자서 단서와 이정표를 찾고 앞으로 바르게 찾아가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이 곳에 있는 자들과 그들이 하는 행동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많은 이들이 이 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팔짱을 낀 채로 대화만 나누고 있는 자들도 있지만, 자기 물건을 가져와서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 가는 자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스쳐 지나왔던 길들에서 이 처럼은 아니어도 많은 존재들을 지나쳐 왔을지 모르는데, 내가 그 동안 보지 못했거나 볼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 지금은 내가 무슨 이유에선지 이렇게 많은 자들 사이에 둘러 쌓여있고 말이야. 지금 여기를 보면 내가 그 동완 도적과 랄시프를 제외한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야. 아 그러고 보니 오기 얼마 전에 이상한 오리도 만났었지. 도적이 보채지만 않았어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물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다음에 또 볼일이 있으려나. 그리고 저 쪽 편의 한 동물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한 눈에도 바로 주목을 받을 만한 꽤 커다란 체격에 다리까지 오는 기다란 옷과 기울어진 갈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감추기에 적합해 보이는 복장인 듯 했지만 아쉽게도 툭 튀어나온 커다란 입과 옷 아래로 삐져나온 꼬리 때문에 그러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그 앞에는 저 ‘덩치’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커다란 날개를 뽐내고 있는 타조가 있었다. 씩씩 대고 있는 것을 보면 둘이 시비가 붙었거나 무언가 갈등이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들과 스무 발자국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천막 밑의 한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내 조금 지나지 않아 덩치가 먼저 돌아섰다. 무언가가 엇갈린 것 일 테지. 사실 아까가지의 저 둘의 분위기를 볼 때 혹시 싸우게 되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다. 무언가 화난 듯이 중얼거리는 덩치는 이 천막으로 바로 걸어와 나의 앞에 앉았다. 내가 계속 쳐다보고 있었지만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 말이 병에 담긴 마실 것을 가져와 이 자 앞에 놓고 갔다. 내가 딱히 서운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들키지 않게 코를 벌렁거려보기도 하고 딴 데를 보고 있는 체하며 힐끗힐끗 보았다. 그제 서야 이제 기억났다는 듯이 모자를 벗어 옆에 두었다.
“흥, 다들 한 통속 같으니 그런다고 내가 저들의 속내를 모를 줄 알고?”
그렇게 말하더니 병째로 연거푸 마셔대기 시작했다.
“음 그렇다면 이 땅이 본거지가 아니었던 건가. 꽤 넓게 발을 두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여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때 뒤에서 작은 돌풍이 불어와 이 안까지 불어 천막을 뒤집어 놓았다. 덕분에 이 자의 모자가 옆으로 떨어지고 안의 물건들이 이래저래 휘날렸다. 이 덩치의 얼굴도 방금 마시던 음료가 얼굴에 쏟아져 웃기는 몰골이 되었다.
“이런 제길, 여기는 언제와도 재수 없는 곳이로군. 얼른 이것만 마시고 다른 데를 찾아보든가 하려고 했더니”
나는 바닥에서 모자를 주워 가볍게 탁탁 털고 이 자에게 건네주었다. 덩치는 고개만 갸우뚱 거리며 이상하게 보고 가만히 앉아 받지를 않았다.
“저기요?”
“아 깜짝이야. 뭐야 넌 유령이냐?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이것 참 실례잖아. 어지간히 너무하는군.
『우리가 닮은 거라면 남성이라는 것뿐이지만 말이야.』
“이거. 이거. 실례했군. 친구. 하하 평소에 비하면 많이 안 마셨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리고 아까부터 내 앞에 있었다고? 그렇게 작은 친구도 아닌데 내가 못 알아보다니 하여튼 미안하네. 사과의 의미로 내가 한 턱 내지. 와도와도 지글지글한 붉은 땅뿐. 파릇파릇 한건 찾을 수도 없는 정이 안 드는 곳이지만. 이 가계 솜씨만큼은 괜찮은 편이야. 그리고 이곳 여주인도 제법이고 말이지.”
아까 마실 것을 날라 준 검은 말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들고 있던 것을 다른 자리에 놓아주고 이쪽으로 왔다.
“오랜 만이야. 자기. 잘 지냈어? 이런 땅에는 다시는 볼일이 없다고 술병을 던지고 떠날 때는 다신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섭섭하게 말하지 말라고 세부. 저번에 조사하던 게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는 아직 이 땅을 완전히 작별할 수 없다고. 그리고 내가 억지로 뭐 든 볼일을 가지고 와 들러야 자기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지 않겠어?”
“흠. 능글거리는 건 여전하군.”
“그나저나 라윈이 이 땅 어딘가에 비밀 휴양지는 알아 놨다던데?”
“흥, 알아도 너에겐 비밀이야. 그건 그렇고 옆의 이 괜찮은 남자는 누구지? 분명..아까까지는 안 보였는데 언제부터 조수라도 들여 놓은 건가?”
“짝도 있는 암말이 그렇게 가계 들어오는 수컷만 보면 홀리려고 하지 말고 배고프니까 음식이나 몇 가지 가져다줘.”
“흥. 내가 그쪽에 한 번이라도 잘 보이려 한 적이 있나. 그렇게 드세고 섬세하지 못하니까 당신이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인기도 없는 거라고. 호호. 그럼 푹 쉬다가요 멋진 총각.”
“저래 보여도 옛날에는 아주 멋지고 터프한 여자였어. 이 가계 사장의 바깥주인이 나의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지. 그래서 예전부터 우리 셋은 아는 사이야. 그는 지금 ‘황혼의 틈’으로 조사를 하러 떠나 있지. 아주 소름끼치는 곳인데 그 친구 무사해야 할 텐데 걱정이군. 혹시 그곳에 가 본적이 있나? 인간친구는 어디에서 왔지?”
“아니요. 저는 잿빛사막에서 오완의 구릉지를 건너왔어요.”
“오호. 재밌는 곳을 지나오셨군. 내가 비록 더운 곳과 추운 곳을 싫어해서 그 쪽으로 잘 가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쪽으로 아는 친구들이 몇 몇 있지.”
“오 정말이요?”
“모두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지. 사막의 큰 쥐나 미로의 입구에서 고릴라들을 보지 못했나?”
“글쎄요...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못 본 것 같아요.”
“그래? 보통은 자리를 잘 옮기지 않는데 별일이로군. 여하튼 다시 한 번 반가워. 나는 맬기스라고 하지. 뜻은 잘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야. 보시다시피 아주 큰 악어지. 인간친구 이름은 뭐지?”
“저는 사실 정해진 이름이 없어요. 정확히는 잊어 버렸고요. 제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그 동안 소년이나 선생님으로 불리곤 했어요.”
“내가 이 세계를 많이 돌아다니고 숫하게 많은 자들을 만나 봤지만 기억을 잃은 자는 또 처음 보는군. 어쩌면 우리 인연인지도 몰라. 하하하. 한잔하지.”
맛을 보았는데 처음엔 시큼하게 톡 쏘고 끝 맛이 달달했다.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짐은 어디에 뒀나?”
“짐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걸친 이 옷뿐인걸요?”
“와하하하. 이거 진짜 농담을 잘하는 친구로군. 세부. 여기 와서 이 친구가 하는 농담 좀 들어 보라고. 혹시 전에 언제 누군가한테 농담을 잘한다고 들어본 적 없나?”
어쩌면 내 말은 덩치 큰 동물들한테 잘 먹히는 건지도 모르겠군. 비록 절대로 웃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음 그럼 하다못해 물병이나 식량 주머니도 없어? 어떻게 그곳에서 여기까지 맨 몸으로 건너 온 건지...어디 ‘동쪽 끝 왕’이 여기까지 납치라도 해온 건가.”
“아무 것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대신 오는 길에 길잡이가 있었어요.”
“오. 역시 그랬군. 이런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순진한 남자가 여기까지 혼자 왔을리가 없지. 거기들도 여기 못지않게 음식 귀하고 나쁜 놈들 잔뜩 우글거리는 곳인데, 아주 괜찮은 길잡이였나 보군. 얼마를 주고 고용했지?”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정도도 모를 정도로 잘 안내를 받은 거였나. 아까 헤어질 때 제대로 감사할걸 그랬군..
“그냥 그분도 이쪽으로 오시는 길이라고 해서 동행자 겸으로 같이 온 거에요.”
“흠,, 그랬었군. 이제 여기도 별의별 놈들이 한 건 하려고 모여드니까. 뭐 좋아. 그렇다면 이제는 어디로 갈 참이지?”
“이제 ‘끓어오르는 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만나 봬야 할 분이 있거든요.”
“오! 그렇다면 ‘푸른 별의 계산대’를 지나가겠군. 마침 나도 그 쪽으로 볼일이 있는데 그럼 같이 가면 되겠어. 하하하. 진짜로 인연일 줄 알았다니까. 한잔 해 친구.”
쓰고 맛없어. 가지고 다니면서 마실 것은 못 되겠군.
“이봐. 세부 이거 가져가게 몇 병만 담아줘,”
아 제발.. 설마 또 먹으라고 안 하겠지?
『가끔 서로 아는 것을 비교하는 건 정말 재밌어』
“보자 이것으로 당분간 먹을 거랑, 마실 거랑, 필요한 건 다 챙긴 거겠지.”
내가 보기엔 아까 그 이상한 음료만 잔뜩 챙긴 것 같은데....
“엄한 짓 하지 말고 가계 잘 지키라고 세부. 다음에 돌아올 때는 그녀석도 데려올 테니까 말이야.”
“흥 그런 매정한 사람 다시 돌아오든 말든, 호호 거기 잘생긴 청년도 조심해서 잘 가요. 옆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크게 신경 쓸건 없어요.”
“하. 저런 말본새 하곤, 원래 저렇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맬기스는 받은 음료 한 병은 허리 옆에 차고 나머지들은 다른 짐과 함께 천으로 싸서 긴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걸쳤다. 이 자의 덩치에 비해서는 알맞은 정도였지만 저 지팡이는 크고 꽤 무거워 보였다. 이 천막 뒤 쪽으로 늙은 도적이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 이 곳의 볼일이 안 끝난 모양이군. 지금 가서 인사하고 다시 감사해볼까. 아니야. 다시 돌아오는 길에 찾아서 만나보기로 해야겠다.
“뭘 보고 있어 친구? 자네를 이 곳으로 데리고 와준 길잡이라도 있나? 음....저기 저 퓨마 말인가? 저들은 꽤나 소문난 악질인데.”
“아니요. 그 분이 아니라 그 앞의 이야기 하고 있는,,”
어? 사라져버렸다. 자기 일로 많이 바쁜 모양이군.
“그렇다면 맬기스. 우리는 어떻게 푸른 별의 천문대로 갈 거죠?”
“그냥 무작정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어. 우선 동쪽으로 가서 강의 지류에서 배를 타고,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가야 해. 내가 비록 악어지만 수영을 해서 갈 마음은 없어. 기왕 가는 거 편히 가면 좋지. 더군다나 이번에는 우리 인간친구도 옆에 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현재 떠돌이 감시자들이 터전을 찾아서 강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는데.. 혹여나 재수 없게 마주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지.”
“혹시 ‘북쪽 하늘 감시자’들 말인가요?”
“오 그들을 알고 있나?”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다가 그들 중 한명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들이 위험한가요?”
“음, 사실상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아. 사실은 좀 불쌍한 자들이지. 다 옛날부터 이 땅에서 뿌리 내리고 살았던 자들인데 현재는 쫓겨나다시피 살아가고 있어. 그래서 불모지의 다른 세력들에게는 보통 적대적이지.”
“당신에게도 말인가요?”
“나랑은 딱히 악연이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위험한 장소에서는 나를 감추고 숨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니까. 세상에는 나같이 무엇을 찾으려는 자가 있는 가하면 반대로 드러나지 않게 숨고 숨기려는 자들이 있어. 하지만 재밌게도 찾으려는 자가 비밀을 만들기도 하고 숨기려는 자가 때로는 많은 진실들을 알려주지.”
“이 땅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 미처 승리한 다른 땅으로 건너가지 못한 세력들이겠군요. 하나의 싸움이었지만 모두에게는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었다니, 이 또한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비극의 발단은 두 왕에게 있었던 것 같지만요.”
“오호. 그 이야기는 꽤 유명하지. 비극의 발단이라.. 어떤 부분이 말이지?”
“전설에 따르면 사이가 나빴던 왕과 또 어떤 다른 땅의 무리가 가지고 싶었던 한 보물을 두고 욕심을 부려 크게 싸웠다고 했어요. 결말로 패배한 왕의 통곡의 눈물이 이 땅에 큰 비를 불러왔다 하고요. 결국 두 왕의 욕심이 다른 많은 자들에게 피해를 끼친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거 이상한데?”
“네? 제가 얘기한 것 중에 문제가 있었나요?”
“음, 그런 이야기야 돌고 돌아 조금씩 다르게 변형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데? 우선 내가 알기로는 둘은 원래 사이가 나빴던 게 아니라 처음에는 사이좋은 친구사이였다고 하던걸? 그리고 그 둘이 탐하는 보물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고 하고 말이야. 원래 왕이란 존재는 무엇을 탐하는 그런 자들이 아닌데 이 전설이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어. 물론 내가 이 세계를 돌아 보건데 모든 왕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음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도 누군가한테 전해들은 얘기이니까요.”
“그리고 그 이 땅에 비가 내렸다고 하는 부분도 아마 아닐 걸. 이 메마른 땅에 비가 내렸다면 아마 그것은 ‘축복’같은 소식 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맬기스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 때 그 장소에 없었던 우리는 그 모든 진실을 알 수 없으니까”
“이 봐 친구.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내가 설령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어도 다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진실’이란 위대한 것이라고.”
간만에 내 손위를 의식해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그 진실이라는 것도 내가 찾고 있는 것에 가까울까?”
“음, 미안하군. 방금 말은 잘 듣지 못 했어 뭐라고 했었나. 친구?”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을 했어요. 근데 뭐하시는 건가요?”
악어는 큰 지팡이를 넓게 잡고 우리가 걸어온 길 뒤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뒤를 쫓고 있어. 한 참 전부터 눈치를 챘는데, 계속 숨어서 보기만 할 뿐 달리 뭔가를 하지 않아. 한 놈뿐이긴 한데 혹시 우리를 방해하려는 자일 수도 있어, 저 녀석 여차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뭐가 보이시는데요?”
“확실치 않지만 작은 놈이야. 헌데 나이가 어린지 미행이 꼼꼼하거나 은밀하지 못해. 아마 다행히도 ‘그 녀석들’은 아닌 모양이군.”
『난 수영을 내 아버지께 배웠지.』
“우선 그냥 가지. 내가 강가에 숨겨둔 배가 있어. 그걸 타고 따돌려야겠어.”
우리가 강 지류에 다 닿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추격을 받고 있다고 해서 긴장한 탓인지 하루가 되게 길게 느껴졌다.
“이 땅에 처음 온 친구는 모를 수도 있겠는데, 이 불모지의 땅에서 동쪽 끝으로 가까이 갈수록 옆의 땅의 영향을 받아 시간이 느리게 가지.”
말 끝나기 무섭군. 이런 점은 늙은 도적과 닮았어.
“그거 신기하군요. 이 때까지의 지나온 땅들은 느끼기에 다 지나칠 정도로 하루가 빨랐었는데. 저런 땅으로 가면 빠르게 변하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게 그렇게 불편했다면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도 좋지도 않아. 하루가 빨리 지나 가는 땅에서는 시간이 잡아먹히는 느낌을 받아 이상하다고 느낄 순 있지만, 옆에 동쪽 땅으로 가면 차라리 그게 행복이라고 느끼게 될 걸? 무엇을 해도 변화하지 않는 세계를 봐야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느끼기에도, 피부로 실감하기에도 꽤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니까...”
시간이라... 저번에 도적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의 마음은 내부의 힘만으로 그 균형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마음의 외부에 작용하는 밀거나 당기는 힘의 작용이 이 이외의 현상에도 적용된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저 달이나 태양, 그리고 이 세계라는 천체도 무엇에 이끌려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그래. 손에 이것도, 나 스스로는 무엇으로 연결 될 거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밀어 내고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주위가 이제 꽤 어두워졌습니다.”
“횃불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 구간은 그냥 참고 지나가자고 친구, 혹시 잘 못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게 나아. 어디 보자. 이쯤일 텐데 잠시만 기다려 보게”
맬기스는 그리고 엎드려 네 발로 엉금엉금 수풀로 기어 들어갔다. 저렇게 보니 진짜 네발인 채가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는 군. 잠시 후 쪽배 하나를 끌고 나왔다. 저런 데에다 숨길 수 있을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쪽같이 가지고 나왔군. 길잡이로서의 능력은 어떨지 몰라도 이런 기술에는 전문가인 것 같았다.
“거기서 멀뚱멀뚱 뭐 해 친구. 어서 와서 이것 좀 밀어봐.”
금세 달이 해로 바뀌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느긋하게 달을 보면서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말이야. 낮에는 대지를 태워버릴 듯 한 강렬한 에너지의 땅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들리는 조용히 들려오는 물소리와 벌레소리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마음에 담아둔 무엇을 정리하기에는 좋은 밤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봐요. 맬기스.”
“음? 뭐야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낮 동안 그 거리를 계속해서 왔으니 제법 지칠 만 한데. 그 쪽도 꽤 한 체력 하는 구만 하하. 그래도 내일을 위해 좀 쉬어두는 게 좋아.”
“아까 낮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큰 웅덩이 있잖아요. 그 곳은 어떤 곳이죠?”
“이봐. 다시 그곳으로 갈 게 아니라면 그냥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아. 이건 충고야. 나는 이번에 사귄 친구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야. 뭐 때문이지?”
“그곳으로 도착하기 전에 한 오리를 만났었어요.”
“들었어. 북쪽 하늘 감시자라지.”
“그가 저보고 그 웅덩이를 차지한 도적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냐고 했어요.”
“음, 그래서?”
“실제로 그 웅덩이는 어떤 곳이고 거기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해서요.”
“나도 거기를 빼앗은 도적놈들 중 하나인 것이 아니냐?”
“아니에요. 맬기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요. 단지 나는 그 오리가 한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궁금할 뿐이에요.”
“이봐 친구. 아까 말하지 않았나. 진실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도 알기 어려운 것이라고.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 자들 같았나?”
“글쎄요. 보기에는 그곳에서 물건을 주고받거나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 같았어요.”
“그래 네 말대로다. 그들은 그저 이 세계 각지에서 온 상단들과 그들로부터 물건을 구하거나 정보를 얻으려는 자들이다. 그리고 아까 세부가 있었던 객점이 있지.”
“역시 그랬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
“그건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보기에는 단지 상인과 그들에게 물건을 사려는 자들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 세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암거래와 유통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세계 곳곳에 세력을 두고 있지. 그들이 탐내고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어쩌면 이 세계를 흔들 수도 있는 매우 거대하고 강렬한 힘일 수도 있지. 난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어. 하지만 그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은밀해서 쉽게 정보를 흘리지 않아. 그래서 그 쪽에 첩자를 심었지.”
“세부로군요.”
“그래.”
“하지만 이런 중요한 얘기를 어째서 나한테?”
“처음에 자네가 나한테 자네를 이곳으로 데려다 준 길잡이에 대해서 얘기해줬을 때, 솔직히 나는 자네를 의심하고 있었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고 하면 그런 녀석들과 엮여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에게 함께 여행을 제안했지. 그런 자네를 통해서 그들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갈려고 했었던 건 아니었네. 속여서 미안하네.”
“그렇다면... 나에게 의심을 거두게 된 이유는?”
“자네 이야기를 듣는 중에 의심이 풀렸네. 자네는 정말 바보같이 순진하지. 나는 오랫동안 그런 세력의 놈들을 상대해봐서 그들에 대해서 잘 알아. 그리고 자네의 말투로서 그가 자네에게는 정보를 숨긴 채로 그저 동행자의 역할로서 옆에 있다 자네를 보내준 것을 알았네. 자네에게서 느껴지는 그를 향한 한 순간의 섭섭함은 분명히 거짓이 아니었어.”
결국 나는 나 스스로도 속일 수 없었나. 다른 자를 통해서 깨닫게 되다니.
『자. 발목을 붙잡은 자여 무엇이 가장 먼저 느껴지는가.』
“그래서 이제 어찌할 셈인가?”
“뭐를 말이죠?”
“너를 그곳으로 데려다 준 길잡이.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나?”
“글쎄요. 제가 뭘 어찌해야 하죠. 만약 지금 내가 그를 찾겠다고 하면, 맬기스 당신은 나와 협력해서 그는 물론 함께 연관 돼 있는 세력을 쫓을 셈이 아닌가요?”
“바로 그렇다네.”
“......한 가지만 더 묻죠.”
“해보게.”
“어떻게 이 땅의 토박이들이 원래의 터전을 빼앗기고 저렇게 무력하게 떠돌아다니는 꼴이 된 거죠?”
“수 백 년도 넘게 지속되어온 극심한 가뭄 때문이지. 원래 이 정도까지 척박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어. 하지만 해가 거듭되고 세월이 흐르자 더 이상 이 땅은 무언가가 발 붙여 살기에는 어려운 땅이 된 거지. 그러다 이 불모지로 유입되어온 여행객들과 이런 저런 상인들과의 큰 대립이 있었었지. 그러다 양쪽 진영의 죽음이 늘어나자. 감시자들이 이 곳을 포기하고 떠났고 지금과 같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지.”
“다시 한 번 전설과 같은 싸움이 되 풀이 되었군요. 이 땅에 사는 자들과 밖의 외부인들이... 그렇다고 뻔히 불쌍한 처지의 약한 그들을 몰아내다니.”
“약하지 않아.”
“네?”
“약하지 않다고. 그들은 무척이나 날래고 용맹하지. 원래라면 그들의 선조는 왕 옆에서 호위를 담당했던 경호부대였다고 하니까.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그들이 순수하게 물러난 건 다툼을 싫어하는 그들의 성향 때문이야.”
“잘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맬기스. 덕분에 의문이 많이 풀렸어요. 제가 해야 할 일도 알았고요. 저는 이대로 원래 목적대로 제 이름을 찾는 여행을 계속 할 거 에요.”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이 이상은 별말 않겠네. 에고 오늘 한참을 이동하고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많이 마르군.”
그렇게 병을 몇 번 기울이더니 더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팡이 위에 묶여있는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칫, 벌써 다 떨어졌나. 새로운 걸 꺼내야겠군. 그러고 보니 친구. 자네에게 준 한 병은 어디에 있나?”
“난 받지 않았는데요?”
“뭐라고? 그럴 리가? 어! 정말이네 남은 병수가 그대로잖아.”
“하하 내가 받지 않은 것이니 당연한 계산이지요.”
“당연하지 않아... 이건 불가능해... 자네 정말 귀신인가?”
“네? 그게 무슨?”
“자네는 나와 함께 오늘 그 지옥의 폭염을 뚫고 오면서 전혀 마실 것을 손에 대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전혀 더워하지도 않고 지친 기색도 없었어. 세부의 객점에서도 술 몇 잔을 제외하고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어떻게 산 자가 그럴 수 있는 거지...내가 정말 귀신을 상대하고 있는 건가”
맬기스는 정말로 헛것을 잘 못 보았다는 듯이 말했다. 흔들리는 저 눈동자는 내 존재를 의심받게 만들고 있어. 우선 진정시켜야 해
“그렇지 않아요. 저는 보시다시피 살아있는 걸요. 다만 맬기스처럼 음식이나 마실 것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런 녀석이 있다니 들어 본적도 없어. 너 설마 ‘그림자’인거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인간친구는 내 눈 앞에 똑똑히 존재하니까 말이야.”
“그림자?”
“쉿!”
일순간 맬기스가 다시 배 바닥에 바짝 엎드려 강 뒤쪽을 노려봤다.
“낮에 쫒아오던 추격자가 아직도 따라오고 있어. 낮에는 형체를 정확히 못 봤지만 이젠 확실해. 저건 분명 오리야! 어쩌면 자네를 만난 그 후로 계속 쫒아온 것일 수도 있겠군. 낭패야. 곧 그들이 있을 강 남단에 도착 할 텐데, 포위를 당하게 되면 가장 안 좋은 상황이라고! 우선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 배를 정박한 후에 조심해서 이동해야겠어. 자네가 우선 이 홰를 받게, 유사시에 불을 밝혀야 할 수 있으니”
보기에는 풀이나 나뭇가지 같은 걸 천으로 감싸놓은 길쭉한 막대기 같군. 아까 낮에 마셨던 음료랑 엇비슷한 냄새도 나고 말이야.
“나는 추가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몇 가지 챙겨야겠어. 흠. 이것도 챙기고.. 응? 뭐야! 친구 벌써 불을 밝히면 안 돼.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 노출되게 된다고!”
“제 생각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아요.”
“뭐?...... 이런 제길.”
강가를 사방으로 횃불이 하나씩 나타나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대의 진취적 전진이 아니라 그건 거부감이었소.』
강둑의 불들은 점점 둘러쌓고 좁혀 왔다. 앞의 강에서도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이 불을 밝혀 드러냈다. 아마 처음부터 따돌리기는 어려웠던 모양이군. 드디어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 봤던 그 자와 마찬가지로 오리이긴 하지만 보다는 확실히 훨씬 크고 사납게 생긴 자들이다.
“이 봐 친구 두 번 안 할 테니 잘 들어. 처음엔 온순히 따라주는 척하다가 기회가 보여 여차하면 내가 방심한 놈들을 틈타 제압 하고 길을 열 테니까, 그 틈에 친구는 먼저 도망치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너무 위험해요. 맬기스의 말대로라면 여기는 저들의 소굴인데 아직 이들 말고도 얼마나 더 있을지 몰라요. 적대관계가 아니라면 우선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어요.”
“이 세계의 모든 자들이 자네의 생각만큼 그렇게 상식적이지 않네.”
“적어도 상식의 반대가 비상식이 아니란 것만큼은 알아요. 저들이 비상식적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볼 수 있는 상식의 여지는 있어요.”
“쳇. 어려운 얘기나 늘어놓고. 완전 고집불통이로군만.”
무리 중에서 한 명이 나와 창을 들고 맨 앞에 섰다. 한 눈에도 무리 중에서 가장 용맹해 보이는 자 같았다. 비록 오리라고 하지만 눈빛을 가다듬고 분위기를 달리하는 것으로, 그 위용은 독수리나 매에게도 뒤지지 않는군.
“저자가 우두머리인 모양이군. 좋았어. 녀석만 쓰러트려 잡는다면 방법이 없진 않아.”
“맬기스. 무슨 짓을 하려는 거 에요. 그만 둬요.”
“하하하하. 저기 오리선생님들? 그쪽이 여기 우두머리시죠? 저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여행자입니다요. 저는 그저 이 친구와 함께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가고 있을 뿐입죠. 에이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세요. 여기 보시다시피 제 짐 꾸러미 안에도...”
일순간 악어가 지팡이를 다시 부여잡았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뒤에서 숨어있는 자들이 나타나 활로 겨누었다.
“하하 친구! 그러니까 내가 평화적으로 가고, 이런 것은 그만두자고 그랬잖나!”
그렇게 우리는 그대로 지팡이에 꼼짝없이 묶여서 들려왔다.
“후... 그렇게 큰 소리 뻥뻥 치더니.”
“그렇게 실망하지 말라고 친구. 불행 중 다행이도 우리는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가는 계곡으로 가고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혼자 남아 시간을 벌어서라도 자네는 가게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상태로 뭘 할 수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혼자 가긴 왜 혼자가요. 우리는 이미 동행자잖아요. 그러니까 누굴 두고 혼자 가지 않는 다고요. 안 그래요 악어친구?”
“크으, 내가 인간하나는 제대로 봤군. 하지만 악어의 눈물은 이럴 때 흐르진 않아.”
“그런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요?”
“아마도 이들의 본거지겠지. 이 정도의 규모가 한 번에 나타난 걸로 봐서 어딘가 제대로 마련된 거주 장소가 있는 게 분명해.”
“혹시 우리를 그냥 계곡 아래로 던지려는 걸 수도 있잖아요?”
“오!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게. 제발!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야지.”
“지금 무슨 비밀 길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요?”
“다행이군! 나의 생각이 맞았어. 하지만 이상하군. 이들은 딱히 아무나 이렇게 누군가를 잡아서 데려가는 그런 자들이 아닌데.. 그새 무슨 변화를 겪었나? 자넨 무슨 생각나는 것 없어? 죄 지은 거라도 말이야.”
“전혀요. 혹시 맬기스야말로 무슨 원수질만한 짓을 한 거 아니에요?”
“흥. 나는 자랑스러운 깊은 바다 출신의 악어 맬기스다. 큰 뜻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세상 모든 자를 감싸지 못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일 뿐!, 아무 연고 없이 죄 없는 자들에게 해를 가하는 일은 결단코 없다고!”
이들은 우리를 묶고 있던 지팡이를 일순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풀어라.”
왜 그녀가 여기에?
“쳇. 이왕이면 좀 살살 내려놓고 신사적으로 풀어달라고.”
이 곳의 모든 무리가 모인 가운데 자리에 한 커다란 짐승이 앉아 있었다. 아까 강에서 보았던 용맹해 보이던 자가 다가가 그 자에게 귀띔을 하였다.
“아마도 저자가 이곳의 진짜 우두머리인 모양이군. 조심해. 혹시 저자가 화가 나서 저 기다란 다리나 커다란 목으로 휘두르는 순간에는 뼈도 추리기 힘들겠는걸.”
“...랄시프?”
(3장 무성한 소문이군요. 마침).................
4장
내가 손님인가 보오.
내가 어릴 적 달을 무서워하던 때가 있었어. 그 시절 보았던 달은 단순히 하늘에 매달려 있다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 그것은 나의 위로도 아래로도 있었지. 그런 달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나는 늘 마음속으로 충동과 답답함을 느꼈고. 그것이 뭔지 궁금했었어. 어느 날 나는 알게 되었지. 그 것이 나와 저 달의 메울 수 없는 괴리감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그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한 순간 위의 달로 빨려 들어가거나 아래의 달로 추락하는 충동을 느꼈던 거야.
『항상 누군가를 부르는 말의 출처를 확인하시오.』
“저기 랄시프?”
“오! 자네, 저 자와 아는 사이인가? 이거 잘 됐군.”
이상해. 분명 내가 아는 랄시프 같은데. 단순히 닮은 자인가?
“이봐. 잘 얘기해봐 정말 자네랑 아는 자라면 이야기를 못 들어줄 것 없으니까”
“이상해요. 불러도 별 내색이 없어요.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닌가 봐요.”
잠자코 있던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나를 자꾸 랄시프라고 부르는데 그건 누구의 이름이지? 너희 둘이 강의 남쪽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것을 들었다. 대체 무슨 목적이냐?”
“하하 자네가 이 곳의 우두머리인가. 내가 아까 만났을 때 다 얘기했네... 우리는 그냥 여행자이고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가고 있을 뿐이야. 자네 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수상한 자들이 아니네.”
“웃기지 마라 이 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린은, 큰 포효와 함께 땅을 찍어 내린 두 앞발로 일순간 이 주위 일대를 진동시켰다.
“흥 쉽게 되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친구 그 쪽의 지팡이를 내게 던져!”
“이거요?”
“그래. 서둘러!”
주위의 자들이 창과 화살을 들어 초점을 맞추었다. 보기보다 이 지팡이. 장난 아니게 훨씬 무겁다. 땅을 끌면서 빙글빙글 돌리고 힘차게 악어 쪽으로 던졌다. 이런.. 생각보다 높이 날려 버렸어. 그리고 동시에 활시위가 튕기고 창들이 손을 빠져 나왔다.
“으흠.”
악어는 민첩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온 화살과 창들을 꼬리로 쳐서 떨어트리고 나머지는 빠르게 기어가며 지나치고 지팡이를 집었다.
“잘 했네. 친구”
그리고 곧바로 근처의 셋이 맬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가 많아요. 조심해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가볍게 몸을 틀어가면서 뒷걸음치는 동작 중에 창을 피했다. 순간,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고, 창 하나를 피해 겨드랑이 사이로 끼웠다. 그리고 그의 두껍고 투박한 무릎으로 창 자루를 격파한 다음 빠르게 파고들어 가볍게 손바닥으로 턱을 쳐내 날려 보냈다. 그리고 아까 땅에 꽂은 지팡이에 매달려서 다음 창을 피하고 곧바로 발을 내질렀다. 발은 막으려는 창을 부수고 정확히 가슴뼈 아래 중앙을 가격했다. 그리고 뒤로 달려드는 자의 옆얼굴로 그의 꼬리가 강력하게 내꽂혔다.
“저런 위험해!”
순식간에 내던진 그의 지팡이가 내 얼굴 바로 오른 쪽을 스쳐 지나가 나를 기습하려던 자의 이마에 명중했다.
“이 봐 친구 일단 내 뒤에 있게. 이 뒤쪽 우측으로 쭉 달리면 다음 땅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어떻게든..”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요. 맬기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흥 자네야말로 정말 바보로군.”
순간 머리위로 커다란 큰 검은 그림자가 뒤덮었다.
“뭐지? 갑자기 큰 구름이 지나가나?”
“아니에요. 여긴.. 그의 밑이에요!”
그 순간 발 사이로 얼굴이 날아와 맬기스를 쳐 날려 보냈다. 방금의 일격과 암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맬기스는 정신을 잃은 듯 했다.
“정신 차려요. 맬기스.”
“거기 인간. 그 자에게서 떨어져라. 그는 우리 동료 네 명을 다치게 만들었다.”
양 팔을 벌려 막아섰다,
“그럴 수 없어요. 그것은 당신들로부터 저를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 에요.”
“왜지? 너에게는 그를 지켜줄, 그의 목숨을 대신할 명분이나 깊은 인연도 없다.”
“그는 나의 동행자에요. 그와 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같이 가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는 절대로 별개가 아니에요. 내가 이 손으로 연 통로가 비록 외부의 힘으로 닫혀 진다고 해도. 서로의 내부에 있는 이음매는 결코 끊어내지 못 해요!”
짧게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이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일전에 너의 동행자에게도 똑같이 그럴 텐가?”
“그게 무슨...?”
그러곤 그의 왼 쪽 앞발이 들리는 것을 본 뒤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때로는 그리움이 잊혀짐을 잡아먹는다.』
몽롱하다. 부유하며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떤 공간으로 둘러싸여 갇혀 있는 것 같은데.... 이 것은 혼란스럽다는 것일까 어지럽다는 것일까...
“오랜만이군.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누굽니까. 거기 나를 부르는 게.”
“에헴. 소년아 나를 벌써 잊은 것이냐.”
“아...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벽의 왕이시여.”
“어째서 여기까지 들어 왔느냐.”
“저도 모릅니다. 저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요. 여기는 어떤 공간입니까?”
“무엇이 보이느냐?”
“수업이 새로 열리고 닫히는 문들이 보입니다. 그 숫자가 무한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그 규칙 변화무쌍해서 이해를 할 수 없으며, 그 너머로도 통하는 길이 많아 어디로 통할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들리느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과 이해할 수 없는 웅성거림으로 섞여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도 일정치 않고 변화를 거듭해 발전을 하거나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느껴지느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요. 모든 만물 사이에 밀고 당기는 힘. 그것은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 곳에 머물거나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것이 있어요.”
“무엇이 말이지?”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공간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어떤 물질이 있어요. 만질 수도 피부로도 실감할 수 없지만 그것은 존재하고 있어요. 마치 텅 비어 버린 공기처럼.. 하지만 진공(vacuum)도 아니에요. 분명히 그것은 물질을 이루며 질량을 가지고 있어요. 대체 저것은..”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지?”
“나는....나는.... yyy..............,
“이봐! 이봐! 정신 차려 친구. 정신이 들어?”
“으음.. 어떻게 된 거에요?”
“자네랑 나나 그 녀석한테 한 대 맞고 기절을 한 것 같네. 그리고 여기에 가두어 둔 것 같아. 자네가 한 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않아 진짜로 걱정했었다고!”
“으음.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잠이란 걸 잔 것 같아요..그리고 누구를 만났는데..”
“뭐 처음? 아직 이 친구 제정신이 아니군, 죄 없는 친구마저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흥 아까 기린 자식 다시 제대로 일대일로 맞붙게 된다면 그 땐 가만두지 않겠어. 치사하게 부하들을 시켜서 공격하다가 갑자기 자기가 나서다니!”
둘러보니 아까 그 계곡의 어디 동굴 안인 것 같다. 가둔 대나무살 앞으론 둘이 양쪽으로 감시하고 지키고 있었다.
“저 정도는 별거 아니야. 쉽게 부수고 나갈 수 있지. 하지만 탈출하기 전에 내 지팡이와 짐을 찾아야 하는데 큰일이군.”
“쉿. 그 자가 와요.”
기린 옆에 붙어 있던 것으로 봐서는 그 자의 측근으로 예상되는 자. 그리고 무리 중에서도 오리들을 이끄는 행동대장일 것이다.
“저 둘을 끌고 나와라. 혹시 거기 악어. 이번에는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아까처럼 날뛰다간, 이번엔 내가 이 창으로 그 목에 바람구멍을 내줄테니까.”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오리대장나리.”
그 말이 저 자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순간 매우 거칠게 쏘아보았다. 속 깊은 곳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눈빛이다.
“이제부터 이 곳의 높으신 분을 만나 뵈러 갈 거다. 특히 인간 너. 아까처럼 누구의 이상한 이름을 데며 그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툭하면 거기 너! 거기 너! 손을 묶은 이것부터 풀어주고 얘기하지. 당체 요구하는 것도 많구만. 확실히 그 분께서는 우리 같은 동물들보다는 높이 계시는 분이지. 암”
“이봐 악어. 넌 꼭 다음에 내가 상대해 주도록 하지.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흥. 깊은 바다의 악어는 대결을 피하지 않는다. 너야 말로 조심하는 게 좋을걸.”
이 둘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군.
『다리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야.』
동굴의 규모는 생각보다 꽤 컸다. 단순히 원래 여기 생긴 동굴 치고는 꽤 섬세하고 공간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는 단지 소수의 오리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맬기스의 지팡이와 짐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었다.
“이봐 거기 지팡이를 맨 녀석. 그건 내 꺼야. 어서 돌려주지 못해?!”
‘용맹한 자’는 창의 아래쪽으로 맬기스의 배를 찔렀다.
“조용히 해라. 네 놈이 지금 어떤 처지인 줄 모르는 거냐”
“커걱. 퉤. 너 이따가 진짜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 분께서는 어디에 계시나?”
“지금 아래쪽 절벽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벽으로 내려가는 길에 보니 계곡 곳곳으로 무리들이 하나씩 보였다. 보통은 모두 동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정찰을 나가거나 망을 보는 자들도 구성 돼 있는 모양이군.
“그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수고 했습니다. 트라올가. ‘벼락같이 강한 자’여”
“흥 벼락은 무슨. 네가 여기서 가장 세? 저 멀대보다 강한가?”
“이런 건방진 녀석! 누구 앞이라고 입을 놀려!”
한 순간 눈으로 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응축된 몸이 그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왔다. 게다가 순간 상대를 얕본 탓인지 맬기스도 미처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몸을 돌려 피했다. 하지만 그의 목 아래로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흥. 제법 겉가죽이 단단한 녀석이군. 보통의 녀석이라면 이미 목에 바람구멍이 나서 죽었을 테지. 하지만 다음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칫. 제법 빠르군 이 녀석. 어디 할 수 있으면 들어와 봐.”
“흥 입만 살아서는.”
이번에는 진짜로 위험해.
“그냥 도망쳐요 맬기스.”
“말했지? 깊은 바다 악어는 대결을 피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이 녀석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해. 뒤에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해!”
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다음을 준비했다. 단순히 내가 보기에도 저것은 알 수 있다. 온 몸이 경직 된 것 같지만 이번 동작을 위해서 근육이 잔뜩 긴장해 있는 걸 거야. 일순간 시야에서 저 자의 모습을 놓쳤다. 어디로 간 거지? 그 짧은 찰나, 맬기스가 봐라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혀를 찔렸어. 그는 창을 던질 셈이야! 그의 허리의 회전에서 어깨에 힘이 실려 팔을 지나 손으로 가려고 할 찰나, 맬기스가 땅에서 꼬리로 모으고 있던 것을 하늘로 향해 뿌렸다. 일순간의 흙으로 하늘에 있던 자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흥! 단순하긴. 벼락같이 위에서 아래로 밖에 떨어지지 못하는 녀석 같으니!”
초점이 흔들리고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창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맬기스의 손을 묶고 있던 끈을 잘라냈다.
“좋아 이제야 할 만하겠군. 비겁한 녀석. 너 정도는 지팡이 없이도 상대해주지. 수컷들끼리 어디 맨손으로 붙어보자고!”
공기가 따갑다. 동굴에서 저 자에게서 느꼈던 살벌함도 대단했지만, 지금 보니 맬기스도 지지 않아. 이 것이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에서 뿜어내는 기운인가.
“그만두세요. 트라올가. 그리고 거기 악어도.”
“흥 이제 네가 나설 건가? 아까의 복수를 해주지. 잘도 나뿐만이 아니라 내 동행자도 건드렸겠다? 깊은 바다의 악어의 명예를 걸고 깎여진 내 친구의 명예도 되찾아주지.”
“하지만 위대한 ‘젠’이시여. 이 자는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료들 까지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부디 제가 처리할 수 있게 허락하소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니까요. 거기 악어와 인간. 일전의 일은 내가 사과하지요. 그 때의 일은 내가 잠시 흥분해서 지나쳤었습니다. 지금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이기 때문이요.”
“이봐. 기린. 이쪽은 여러모로 억울한 일도 있고 지금 내 물건과 짐들까지 도둑맞아 빼앗긴 상태라고. 대화가 하고 싶으면 서로 공평해야 할 것 같지 않나?”
“트라올가. 번거롭겠지만 이 자가 가지고 온 것들을 모두 가져와 주세요.”
“안 됩니다. 위험한 자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이 자가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무모한 자들도 아닌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그러한다면.. 내가 이 절벽과 함께 완전히 으깨 버리겠습니다. 하하하”
“거 농담 한 번 살벌하군.”
“저건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게 까지 말하신다면.”
저 정도로 흥분한 자가 순순히 물러난다니. 이 자는 역시 보통이 아니야.
“나는 때때로 복잡한 생각으로 골치가 아플 때면 이 절벽으로 온 답니다. 이 절벽 위에서 아래를 보면 나의 머리에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생각들도 얌전히 제자리를 찾아 하나로 모여드는 듯 했으니까. 나에게 있어선 특별한 곳입니다.”
“중요한 것처럼 불러놓고 뜬금없이 절벽타령이라니.”
“일단 들어 봐요. 맬기스”
“자네만 듣고 있게. 난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올 테니.”
“하하. 괜찮소.”
“그럼 얘기해주세요. 젠.”
“어디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예전에 한 왕이 있었소.”
『멀리 떠나는 바람에 내 바람의 모래 한줌을 싣고..”』
“어째서 지금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지? 맬기스. 무슨 상황에 있는 거냐.”
“이쪽은 이쪽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그보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됐나”
“그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보름 전에 황혼의 틈에서 드디어 ‘형상’을 발견할 것 같다고 한 것이 마지막이었지.”
“칫. 알았어. 혹시 다음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라고.”
“흥, 너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치는 거냐.”
그러곤 날개를 펴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생각 보다 일을 그르쳤다. 내가 신경을 쓰고 조금 더 경계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 쯤 저 산의 경계와 맞닿은 곳을 넘어가 녀석에게 연락을 했어야 했었다. 어서 그들이 다음 ‘그림자’를 찾아내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헌데 이 번에는 정말 이상했다. 분명히 그들과 그림자가 접촉한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 후로는 그들에게서 평소와 같은 어떤 징후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목표물이 도중에 증발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누군가 중간에 그것을 가로챈 것이라면 필시 ‘그 셋’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하고 이 땅에 왔지만 보기 좋게 허탕이었다. 게다가 흉터가 남을 것은 덤이고...
“씁. 쪽팔리게 이건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아까 그 자식, 그래도 이번엔 진짜로 위험했어.”
“악어. 여기서 뭐하나. 얌전히 있는 줄 알았더니 탈출이라도 하려고?”
“흥, 도망가긴 누가 도망간다고 그래, 갇혀있던 게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잠깐 쐬려고 한 것뿐이다. 내 물건 가져왔으면 어서 줘봐.”
“저 분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돌려 줄 수 없다. 그런데 방금 독수리 하나를 본 듯한데? 설마 너와 내통을 하는 자인가?”
“흥, 이제 의심이 가관이군. 저 땅에 더 이상 먹을 게 없으니 뭐나 주워 먹으려고 이 남쪽까지 내려온 거겠지. 너희들이랑 비슷한 꼴 아닌가?”
“너희들은 우리가 싸움에 밀려 도망쳐 내려왔다고 생각하는군.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뭘 또 숨기려는 게냐. 아까 그것은 이 땅에서 서식하는 종의 동물이 아니다.”
칫.
“하긴.. 요즘은 모두 제 생활권을 지키지 않고 이탈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지. 너도 이제 기분전환을 좀 했으면 그만 돌아가지.”
휴 다행이군. 그런데 언제부터 감시자들이 무장한 세력을 이렇게 늘렸지? 아까 봤을 때 규모도 그렇고 심상치 않아.
“오! 돌아왔군요. 맬기스. 이제는 한결 사이좋아 보이네요?”
“산책 도중에 만났을 뿐이네, 얘기는 잘 들어가고 있나?”
“깊은 바다 악어여. 이제는 인간 옆에서 같이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대도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 나는 그대들이 이 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그대들에 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감시자들에게 해가 될 것은 없어.”
“그대가 아닙니다. 깊은 바다 악어여. 나는 그대들이 오기 전 날 밤에 북쪽으로 나가 있던 전령으로부터 온 한 보고를 받았지요. ‘낙원의 순례자가 큰 동물을 하나를 데리고 불모지를 건너서 강을 타고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것 같다’고...”
“뭐? ‘낙원의 순례자’라니! 어째서 자네는 그것을 이제까지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나?”
“그야 그건 제가 아니니까요.”
“그렇소. 그것은 일전에 이 자와 함께한 동행자였습니다. 몇 가지 대화를 통해서 이 인간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소. 정보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그대들을 함부로 대한 것은 정말 미안하오.”
“이봐. 기린 자네. 그것이 ‘낙원의 순례자’라면 단순히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지 않나?”
“그런 것은 저희가 알아서 할 일이니 관련 없는 자가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얘기는 저 인간과 다 나누었으니 들어보면 될 겁니다. 트라올가. 저들이 이 곳을 나가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지만 위대한 젠이시여. 그것만으로 저자들에 대한 혐의가 완전히 풀렸다고 단정하기에는... 더군다나 저 악어는 위험한 자입니다. 혹시 잘 못 알고 그냥 보낸 거라면 저희에게 해악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나를 믿으세요. 트라올가. 저들은 그들의 편이 아닙니다. 설사 염려대로 연관이 돼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해가 될 자들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판단하셨다면...너희 둘 따라와라. 내가 안내해주지.”
“젠. 안녕히”
“그래요. 그대의 여행에 늘 바라는 것이 옆에 있기를..”
“내 지팡이랑 보따리도 이리 줘. 흥, 그래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군. 역시 이 맬기스님의 손에는 이 지팡이가 있어야지.”
정말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 온 것인지 모르겠군. 어째 오해가 풀렸다고 하지만 아직 한 켠엔 답답한 무엇이 남아 있으니.,, 만약 진짜로 해결되지 못한 것이라면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나 발생하겠지. 언제까지나 매듭을 계속 묶어 방치할 수 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트라올가. 이 쪽으로 보고를 한 전령 말인데요. 혹시 제가 불모지에서 마주쳤었던 그 오리인가요?”
“그렇다. 아직 어리지만 멋지게 일을 잘 해내고 있지, 이번에는 착각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강에서 까지 저희 뒤를 쫒아왔다면 얼굴을 한 번 비췄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소리지? 그는 아직 임무를 수행중이라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미처 여유가 없어서 그대들을 뒤에서 추격하라고 보낸 동료들은 없었을 텐데?”
응?
“다 왔다. 이제 이 사잇길로 쭉 올라가면 너희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곳이지. 혹시 말해두는 거지만, 나는 너희들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다.”
“흥, 끝까지 뒤끝이 있는 녀석이군.”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착각을 한 것으로 그대들을 붙잡아 둔 것이라면 미안하다. 이것을 받아라. 많지는 않지만 며칠분의 식량이다. 그리고 인간 네게는 이것을 주지.”
하얀 빛깔의 조그맣게 생긴 깃털들로 꼰 목걸이다.
“우리 감시자들이 이 땅으로 들어갈 때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지. 분명 도움이 될 거다. 혹시 이 무식한 악어에게 무작정 길을 맡겼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흥 뭣이 어쩌고 어째? 그래도 처음엔 재수 없었는데 마지막엔 제법 괜찮군.”
“악어. 다음에 만날 때는 네 녀석과 제대로 승부를 가려보고 싶군.”
“흥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그럼 트라올가. 무사하세요.”
저 둘은 보기에는 안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만 제법 잘 맞는 모양이군. 서로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른지만 같이 가는 길의 약속만큼은 그들을 묶어 줄 수 있는 것일까. 흠, 너무 참견인가. 나는 나의 준비를 해야지.
『밤이 되면 별들의 노래로 내 마음이 지긋이 눌리네.』
“이봐 친구. 자네랑 저 기린이랑 아까 무슨 얘기를 나눴나?”
“아 그건. 아까 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오해한 거였어요.”
“그게 다야?”
“음, 그 외에 사적인 얘기도 나누긴 했어요. 저 절벽에 관한 얘기라던가.”
“아니. 자네의 이전 동행자가 ‘낙원의 순례자’라는 것 말이야. 내게 얘기할 것은 그것 뿐이냐는 말이네.”
“왜 그런 것에 그렇게 집착하죠. 맬기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요?”
“흠,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만약 이전의 자네 동행자가 그런 인물이라는 것은 몹시 중대한 사안이네. 어쩌면 그는 현재 저 통곡의 불모지에서 벌어지는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어. 그리고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자네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네.”
“그래서요?”
“‘그래서’가 아니야!! 말했듯이 이건 몹시 중요한 사안..!”
“누구한테 중요한 거죠?”
“모두에게 중요하지! 나를 포함해서 저 땅에 있는 모든 자들! 그리고.”
“당신이 쫓고 있는 그들에게 도요.”
“부정은 하지 않겠네.”
“말했듯이 저는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랑은 저랑 상관없는 일이고요. 저 땅에서 어떤 세력들끼리 다툼을 겪고 있고 어떤 문제를 불러오고 어떤 결과를 불러오든 그것은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이봐 자네! 정말 자네가 해야 할 일이 그것뿐이라 느끼는 건가! 자네 삶의 목적이 단순히 이름을 찾는 일, 그 하나면 충분하냐는 말이네!”
“제 삶의 길은 제가 정합니다! 나는 조그만 한 꼬맹이 이었을 때 이 낯선 세계로 와 기억을 잃고 스스로 가야 할 방향도 잃어버렸죠. 그래서 그 당시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전의 나와 진정한 스스로를 위해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야 하고, 그러고 나면 언젠가 그 끝에는 내가 바라던 진짜 자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르는 것은 점점 더 많아졌어요. 이 세계를 이해하기는커녕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했죠.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스스로 불안정한 무엇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기대야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죠? 각자 모두 서로의 방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이 손으로 나와 너, 당신, 그리고 모두의 문을 열수 있을 거라며 히히대고 있을 때 어느새 닫힌 문을 통해 나를 조롱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당신도 마찬가지! 지금 나한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약 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되면 제 곁을 떠나도 좋습니다.”
“이봐... 나는 자네에게.....”
맬기스는 앞서가는 인간의 손을 잡으려다 미처 뻗지 못했다. 손이란 것이 그렇게 들고 있기에 무거운 것인 줄은 그때 처음 깨달았다.
“후우... 이봐. 같이 가세나”
계곡의 사잇길을 올라 볼록 솟은 언덕위로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로 땅에서 볼록 솟아 저 끝까지 뻗어있는 수 백 아니면 그 이상의 언덕들.
“보기에는 그냥 언덕들과 그 아래에 사이를 오가는 숲 길 뿐이지만, 저 아래 숲에는 위험한 함정들이 있다고 하네. 숲의 나무들은 발을 들인 자들의 공간 인지를 교란시키는 특수한 물질을 내뿜는 다고 해. 게다가 다 같은 숲의 같은 나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뿜어내는 물질이 조금씩 달라서 덕분에 숲에 들어간 자는 각자 여러 방향으로 교란을 당한다고 하네. 일행끼리 저 숲에 들어가서 서로를 잃어버리고 나오지 못하게 되는 일도 부지기수지.”
“그렇다면... 방법은요?”
“세 가지로 다행히도, 하나는 일단은 어떤 언덕이든 올라오면 저 교묘한 나무들이 없어 뿜어내는 물질의 영향을 피할 수 있지, 그리고 언덕과 언덕 사이가 그렇게 무척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마지막으로 나무가 그렇게 높고 커다랗지 않지. 그래서 나는 이것을 사용할 생각이네.”
악어는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돌려 조각으로 분리하고 꾸러미에서 몇 가지 이음도구와 유지 장치를 끼워 새로 맞춰 조립했다.
“이 지팡이는 여러모로 쓸모가 참 많아. 언덕과 언덕사이는 약 800보. 석궁 화살 끝에 끈을 매달은 다음 언덕 근처 나무를 겨냥해서...”
그렇게 새롭게 탄생한 지팡이에서 빠져나온 화살은 이 다음 언덕의 앞에 있는 첫 번째 나무로 정확히 꽂혔다. 놀랍군. 기껏해야 나무와 쇠를 맞춰 끼운 도구 같은데 저 먼 거리를 날아가다니.
“좋았어. 솜씨는 죽지 않았군. 이제부터 출발할 건데 한 가지만 더 명심하게, 저 숲에는 우리를 방해하는 나무들뿐만 아니라 기괴한 점쟁이들도 같이 살고 있다고 하네. 듣기로는 숲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저 나무들뿐만이 아니라 숲 속에 숨어 살고 있는 점쟁이들이 홀려서 데려간 것이란 소문도 있어. 절대로 내 뒤를 꼭 붙잡고 떨어지지 말고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낯선 자의 말을 믿지 말게.”
“알겠어요. 맬기스. 하지만 아까 저 밑에서 질문을 많이 들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나도 질문을 하나만 하죠.”
“음,, 좋아 해보게”
“어째서 당신은 이 땅에 나와 함께 들어왔죠? 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없다면 나와 같이 길을 가줄 이유가 없을 텐데요?”
“분명히, 난 자네를 안내해주는 것 이외에도 이 땅에서 해야 할 것들과 개인적으로도 조사해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네.”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알려주세요. 맬기스가 해야 할 일이 대체 뭐죠?”
둘은 한 참 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간절히 바라는 듯한 인간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 악어의 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침묵을 지키다 맬기스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군. 친구라도 이것은 알려 줄 수 없네.”
『네가 밟은 땅이 너를 발자취라 기억해줄지.』
우리는 하나씩 나뭇가지 부러뜨리거나 당겨 걷어내는 식으로 나무위에 걸린 끈을 걷어내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 했다. 단순히 이어진 줄을 따라가는 것조차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자네 어디로 가는 건가. 이쪽이야. 끈을 놓지만 않으면 돼.”
“지금 맬기스가 잡고 있는 것은 끈이 아니라. 늘어진 나뭇가지에요.”
“아차. 내가 또 언제 끈을 놓아버리고 이것을 잡은 거지?”
“인지해서 끈을 잡고 있으려 해도 한 번씩 끈을 놓는 동작 때마다 헛것을 사로잡히게 게 돼요. 정신 집중해요. 맬기스”
“알고 있다고. 지금 자네야말로 이상한 나무를 붙잡아 안고서 나로 착각하지 말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숲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나무에서 나오는 물질 따위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가고 싶은 각자의 길을 가려는 것임을, 이때는 몰랐다.
“휴 드디어 하나의 길을 지나왔군. 이렇게 한참 걸릴 줄이야. 해가 지기 전에 건너와서 다행이야. 아니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러게요. 아무 준비 없이 왔다면 정말 영락없이 조난당했을 거 에요. 음, 그런데 밤이 되도 푸른 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네요.”
“이 땅의 이름말인가? 나도 책에서 읽은 것이네만. 아주 먼 옛날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저 하늘 밖의 존재들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하늘 높이 있는 자들이나 특별한 소통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게 쉬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고 했어. 그러다 이 땅의 왕이 모든 자들도 하늘 밖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지. 이 천체에 있는 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천체의 단서들 즉, 운동, 깜박거림, 밝기, 색깔 등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 세계의 언어로 변환시키는 거였어.”
“하지만 변환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을 어떤 수단으로 해냈다는 거죠?”
“그것을 해낸 것이 바로 이 땅의 왕이었지. 오직 왕만이 모두 각자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 땅의 왕은 에너지와 운동의 힘을 특정 부분만 볼 수 있도록 가시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
“상식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로군요. 지금 당신이 하는 얘기는 나에게 어떤 상상도 유발할 동기를 불러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현실에선 본적 만무한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분명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 시절이 있었네.”
“단순히 제가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불가능한 능력과 현상이라고 단정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내 사고의 안으로 가져오지 못할 만큼 내 안에서도 까마득히 저 멀리 있기 때문이죠.”
“외부의 모든 것이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하듯이, 모든 것을 나의 안에서도 설명할 수는 없네.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죠? 결국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요? 결국 또, 그 새로 나타난 공백을 매우기 위해서 무작정 외부의 무엇을 채워 넣으란 얘긴가요? 그렇게 달라진 자신이 되면 결국 무엇이 남죠?”
“친구. 자기 바로 옆이나 때로는 자기 자신 안에 있을지라도, 가려져 그것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할 외부의 힘이나 내부에 잠재한 것들이 스스로를 어지럽힐 때도 있지. 그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네. 쉽게 묻겠네. 자네는 지금까지 여태 어떤 한 ‘왕’도 만나보지 못했나?”
“만났습니다. 만났지요. 그것도 ‘둘’이나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아니. 이런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두지. 후우.. 나도 이 이상은 말하지 않겠네.”
우리는 비록 한 언덕이지만 저 만치 멀리 떨어져 앉았다. 적어도 얘기는 끝까지 들어볼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나 흥분했었어. 이런 적은 없었는데... 분명히 나의말로 상처를 받았을 거야. 사실 여기까지 안전하게 오고, 앞으로 갈 방법을 찾은 것도 다 맬기스 덕분이지. 내가 그에게 화를 내다니. 정말 나도 나를 모르겠군. 이따가 기회를 봐서 사과를 해야겠어. 계속 그 후로 맬기스의 말이 계속 내 안을 맴돌아. 나도 스스로 모르는 나라니, 내 안에서도 나를 잡아먹는 괴물이 있는 걸까?
“저 자의 말을 전부다 믿지 마.”
지금 소리를 내는 것이 누구입니까?
“모든 것은, 자신의 추악한 피로서 남을 얼룩지게 만들려는 말들”
누구야? 지금 누가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말을 거는 것이냐?
“오 ‘검은 보석’, 순수한 존재여. 그냥 그대의 본연,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지금 누가 아무도 열지 못한 나의 방을 열고, 나를 흔드는 건가?
“외부의 티끌은 자신에게 공포만을 가져다 줄 뿐”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면 이리로 나와서 말해!! 어디 숨어서 던지는 말 따위는 들어주지 않겠어. 너도 날 기만하려는 게 아니라면 이리로 나와 비겁한 녀석!”
저 쪽에 있던 악어가 그 소리를 듣고 지팡이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자네 괜찮나?”
“누군가 저의 안으로 들어와 말을 걸어 왔어요.”
“음, 아무래도 이 땅은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듯 하군. 자네는 좀 쉬는 게 좋겠어. 내가 망을 볼 테니 먼저 잠에 들게.”
“저는 잠을 자지 않아요. 하지만 맬기스의 말대로 잠시 쉬는 게 좋겠어요. 아마 낮에 숲에서 들이 마신 그 물질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미안해요 맬기스. 제가 말이 지나쳤었어요.”
“아까 일은 신경 쓰지 말게. 나야 말로 미안하네. 내가 먼저 불편한 자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니. 다음부터 그런 점은 조심하겠네. 날이 밝는 대로 일찍 출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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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젠. 그 이야기는 꼭 돌아가는 길에 전할게요. 분명 ‘그녀’도 이 소식을 듣는다면 깜짝 놀랄 거 에요.”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재 당신의 동행자 말입니다만, 어떤 자입니까? 알기로는 그도 큰 상인연합의 소속이라죠.?”
“네? 아니요. 정반대에요. 그는 오히려 이 세계의 행해지는 바르지 못한 거래와 물건들을 조사하고 그런 세력들과 대립하는 조직에 속해있어요”
“음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는 그들도 똑같은 상인일 텐데요? 그도 한 번씩 이 땅에 오기 때문에 불모지에 나가있는 전령들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젠이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겠죠. 짧지만 그와 여행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결코 그런 분류의 자들과 연관이 돼 있는 자 같진 않아요.”
“글쎄요.... 취급하는 것이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 본연 상인이란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자기들끼리는 대립관계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큰 테두리 안에서 연합하고 이득을 취하는 것을 위해선 같이 뭐든지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불모지 중앙의 웅덩이에 그들이 운영하는 객점 하나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네, 하지만 그것은....”
“보고에 따르면 그 곳의 주인을 맡고 있는 세부라고 하는 암말이 그 곳 연합 중에서도 거래에 관한 중요한 물자유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습니까?”
『만남은 어디에서 찾아오는가.』
“후... 두 번째인데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구만. 매 순간의 환각으로 지나치게 혼란스러워. 이제는 내 걸음 조차 나의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군. 자네는 괜찮나?”
“네, 전 다행히도 맬기스만 따라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것에 의지하면 버틸 만 한 것 같아요. 그것도 쉽지는 않지만요.”
“언제까지 누군가의 등 뒤에서 스스로의 길을 알고 싶어 할 것인가.”
정말 짜증나는군. 그것은 내 눈을 속이는 이 숲도, 내 귀를 어지럽히는 이 목소리도 아니야. 무엇보다 나를 구역질나게 하는 건, 온갖 추악한 생각들을 하는 나 자신이야. 너무 답답해, 제발 누가 도와줘. 내 마음 속에서 드는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이지. 무엇 때문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이럴 땐 세부라도 있으면 정말 편리한 데 말이야. 세부가 내 친구 녀석과는 다르게 길은 신통하게 정말 잘 찾았는데 말이야. 이건 비밀인데 친구. 사실 내 친구 녀석과 세부가 맺어진 것도, 임무 중에 다친 상태로 행방불명이 돼 아무도 찾지 못한 녀석을 세부가 기가 막히게 찾아냈기 때문이지.”
“.....길만 잘 찾았나요?”
“길 만이라니? 음 다른 능력도 나쁘지 않았는데 유난히 그런 쪽으로 특출 났었지. 비록 지금은 퇴역이지만 말이야. 하하”
“...그래요.”
“이런, 이번 나무에는 제법 골치 아프게 걸린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 친구 어디가지 말고 아래에 있게. 혹시 잠시 볼일이라도 본다고 내게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영영 미아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하하하.”
“.....난 당신 없이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나요.”
“흠, 이봐 친구 그런 의미는 아니었잖아.”
“하하 아니에요. 맬기스 어디 안 갈 테니, 조심히 올라갔다 와요.”
“알았네 친구, 내 실력만 믿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디다. 보통이라면 밤에도 쉬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을 텐데, 이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 정도 속도라면 보름정도면 이 땅을 넘어갈 수 있으려나. 그나저나 풀을 해치고 온다고 옷에 이것저것 많이도 묻었군. 왠지 언젠가부터 옷을 터는 것을 조심하게 됐단 말이지... 그 때 내 몸에게서 하나가 툭 떨어져 날아갔다. 저건 늙은 도적이 오완의 구릉지를 지나기 전에 내게 준 것이다. 한 동안 잊고 있었다.
“어떻게 스스로 이해 못한 것에서 도망쳐 자유를 찾겠나.”
“휴.. 검이나 도끼라도 가져 왔으면 좀 편리했을 것을..이런 힘쓰는 일에는 그 친구가 딱 인데 어째 내가 필요할 땐 자꾸 옆에 없는지 허허.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친구? 영차. 친구? 재미없으니 장난치지 말게. 이 봐 친구.”
어지러워. 힘이 하나도 없어.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마치 내 의지가 내 몸을 떠나 있는 것 같이. 그렇다면 이 몸은 내 것이 아닌 게 되는 건가? 흐흐.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군. 내가 스스로 내 몸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지금 내가 아무 것도 관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신이 내 몸을 떠나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내 스스로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있다고 만들어 내 속이고 있다는 얘기로군. 재밌는 농담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이렇게 되면 맬기스와 점점 멀어지게 되는데 어디까지 가는 거야. 단순한 숲길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곳이 있었던가...
“낄낄낄. 여깁니다. 여기. 어서 오십시오. 잘 찾아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지요. 운명을 받아들일 ‘검은 보석’이시여.”
(4장 내가 손님인가 보오 마침).................
5장
찢겨진 공간으로
한 번씩. 걷다가 옆을 돌아보고, 위를 올려다보고, 아래로 내려다보고, ‘무척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씩, 아름답게 반짝이는 오색 자연들과 가볍게 스치는 바람이 세계를 멋지게 구성한다고 생각했었지요. 한 번씩, 멈추어 제자리에 서고 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와 나를 가득 채워준다고 느꼈습니다. 한 번씩...
『열쇠장이도 출장 중이야..』
“으흐흐흥. 나는야 하늘의 밭에 씨를 뿌리는 자요. 그 곳에서 자란 싹에 물을 주어 지상의 바닥으로 뿌리내리게 돕는 자요. 그 생명은 이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하늘 밖의 전언을 전할 테니. 오! 온 우주여 나의 말을 귀담아 들으소서.”
“여기는...?”
“오호. 정신을 차리는 데 꽤 오래 걸리셨군요. 생각보다 그릇이라는 자가 온전하지 못한 것 같아 심히 걱정을 했답니다. 아니면 그 사이 불순물로 혼탁해진 것인가요?”
“당신은... 어제부터 내게 계속 말을 걸어오던 자로군. 이 곳으로 온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래요. 제가 데려왔습니다. 당신을 직접. 이곳으로. 숲속의 나무들을 시켜서요. 호호호. 그것조차 간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쉬웠지.”
“그건 무슨 말이지?”
“원래 정상대로의 당신이라면 저런 숲의 물질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겠죠. 모든 것이 그랬듯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마냥 그저 당신을 지나쳐 갔을 테니. 뭡니까? 그 표정은? 당신 설마 아무 것도 모르는 건가요? 호호호. 지혜로운 자처럼 어리석군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요. 나를 여기 데려온 목적부터. 당신이 누구인지.”
“흠, 삐딱하긴. 뭐 좋아.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 딱 한 번 인사를 건네지. 나는 마지막 진실에 다다르려는 자요. 하늘 끝에서 모든 진실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편하게 그냥 나를 ‘농부’라 불러도 됩니다.”
“그래요. 농부. 아직 나를 데려온 얘기를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사실 당신은 너무 멍청해서 내가 얘기를 해도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나는 친절한 자이기에 간단히 설명을 해주겠어요. 난 당신을 이용해서 저 먼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그 쪽에서 오는 전언을 들을 생각입니다. 또 반대로 나의 목소리를 그 쪽으로 전달할 수 있을 테죠.”
“미친 것이로군요. 당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야.”
“흥 당신에게 얼마나 설명을 해줘도 저 밖을 오가는 힘과 그 실체에 대해서 이해할 리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당신은 축복받았어! 당신은 바로 그 자체니까! 아니야 어쩌면 불행일지도 몰라.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고 왜곡된 세상과 거짓말을 일삼는 자의 말을 믿고, 오염돼 스스로를 잃어버린 자신을 진짜라고 믿으니까. 아아. 이 어찌 대불행이 아닌가!”
“당신..... 나와 맬기스를 일부로 떨어트려 놓은 것이군.”
“이제 와서야 눈치 챘나? 그 악어는 당신에게 있어서 해악일 뿐이야. 늘 거짓으로 당신을 속이고 자신이 잘난 마냥 위선을 일삼지.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고 말이야.”
“우리 사이를 꽤 오랫동안 지켜봤군요. 불모지의 강에서부터 뒤에서 우리를 쫒았던 것 당신이었습니까?”
“아주 완전히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이 저 악어를 만나기 그 훨씬 오래 전부터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그 요망한 늙은 너구리가 날름 냄새를 맡고 당신을 훔쳐가는 그 때부터 말이지!! 원래 당신은 내 것이었어! 내 것이었다고! 왜 그땐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지? 왜! 왜!”
“글쎄 어쩌면 나도 그 ‘충족되지 못한 나머지’를 찾기 위해서 여행 중이거든..”
“흥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어떻게 됐든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비로소 당신이 내 손에 들어 왔고,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지. 난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아주 멋진 기적을 일으킬 생각이야. 어쩌면 이 천체의 맨 처음 대이변 이후로 가장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돌아갈 거야.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흥미 없어.”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났다. 낭패로군. 지금쯤 맬기스가 나를 한창 찾고 난리도 아닐 텐데. 휴우. 또 이 앞 숲을 지나면 헤매게 될 거야. 어떻게든 아무 언덕이든 찾아 올라가서 그 다음 그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돼. 어? 움직이던 몸이 일순간 우뚝 섰다. 뒤의 자가 호리병을 하나 들고 빙글빙글 돌린 채로 날 부르고 있다. 어제부터 내게만 울리던 그 목소리같이 뿌연 안개처럼 나의 안으로 흘러들어와.
“네놈 거기 서라!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다고 생각하느냐! 어서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의 말을 듣거라. 옳지. 옳지. 나의 앞으로 오너라.”
“오직... 오직 ‘왕’만이 물질과 힘이 통하는 특수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어... 지금 내게 오는 이 이상한 힘을 분명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의 겉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왜 오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당신은 누구야?”
“.....지금 그 상태로 나의 의지를 거부할 수 있다니... 곧 이 세계의 그림자로 흩어지게 될 자가 내가 무엇인지 알아서 무얼 할 텐가.”
그리고 그는 재빠르게 날아와 나의 입을 통해 호리병의 ‘그것’을 부어 넣었다. 내 몸으로 들어온 ‘그것’은 마치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던 마냥 자연스레 나의 일부로 녹아들어 갔다. 처음에는 나란 물위로 그것들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내가 그 커다란 바다 안에 깊숙이 빠져있었다. 그 심상(心象)은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나를 아주, 아주 깊숙한 곳까지 가라 앉혀졌다. 이상한 기분이야.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는데 나와는 점점 멀어져 가.... 나라는 방에서 스스로 문을 두드릴 수도 없이 나는 옅어져 가고 있다. 더 이상 허우적거릴 수도 없이 힘이 빠져갈 바로 그때, 나는 아무에게도 묻지 못한, 스스로에게도 하지 못한 그 질문을 비로소 꺼냈다.
『넘어질 때 발이 가장 서러워하였다.』
“이봐 친구!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대답하게. 혹시 들린다면 이동하는 걸음을 멈추게. 더 이상 멀어지면 안 돼.”
휴.. 냄새로 봐서는 꽤 오래전에 이 길을 지나간 것 같은데 대체 왜 어째서 혼자.....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우둔한 친구는 아니야. 이 숲에는 분명 우리와 다른 짐승의 냄새가 섞여 있어.
“누구야!”
저 만치 지켜보고 있던 자가 몸을 돌려 숲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맬기스는 그런 그의 뒤를 전력으로 뒤 쫒는다. 만약에 하나, 지금 도망치고 있는 자가 인간의 행방과 관련이 없다면 가장 큰 낭패다. 계속 멀어지다간 영영 그를 찾을 수 없게 돼버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지금 쫓고 있는 자를 반드시 잡아야 해. 이 자는 단순히 우리같이 숲에 들어온 자가 아니야. 찰나의 사이로 시계(視界)가 교란 받는 이 곳의 길을 문제없이 잘 지나가고 있어. 제길. 숨을 참는 것도 오래는 버티지 못해.
“휴. 따돌렸나... 이 곳의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덩치 큰 놈이라 엄청 놀랐잖아.”
그 때 날아온 지팡이가 이 자의 다리를 걸어 쓰러트렸다.
“헥헥... 간신히 잡았다. 곧 한계였어. 분명히 저기 그놈들처럼 오리 같은데? 이 놈 정체가 뭐냐. 왜 날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지? 이 곳으로 들어온 인간을 알고 있나?”
“몰라 나 그런 거, 나한테 이러지 말고 저리 꺼져.”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서서 숲속으로 내 달렸다.
“놓치지 않는 다 이놈! 거기 서라! 헥헥 꼴에 자기도 새라고 무지 날래군.”
“으악, 절벽 쪽으로 와버렸잖아. 제길”
두리번거리며 주춤거리던 그를 악어가 날아와 덮쳤다.
“잡았다. 이놈! 이제 정체를 밝혀 주실까.”
“젠장 이거 놔라고 놔. 왜 다들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 달이야.”
“뭐야 넌? 저 쪽 건너편 오리들과 같은 놈들이 아닌 거냐?”
“그를 놓아줘라. 그의 말대로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어느새 뒤로 여럿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젠장, 쫓는 데에만 집중한다고 반대로 내가 쫓기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 이 놈들 다들 어디서 있다가 나타난 거야.
“흥, 아직은 안 되지. 이쪽도 볼일이 있다는 말씀이야. 혹시 너희들 중에서 이 숲에서 길을 잃은 인간을 본 자가 없나? 키는 요만한데”
그 중에서 가운데에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자가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보자. 모두 고개를 저었다. 가만 보자 이 녀석들, 저쪽 녀석들에 비해서 좀 다른데? 분위기가..
“저희 중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 같군요. 어서 그를 놔주시오.”
“하나만 더, 대체 너희들은 누구지? 저 쪽에 있는 녀석들과 무슨 관계야?”
무리 중 비교적 그나마 전사다운 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저들과 상관없소. 더 이상 뜻을 같이하지 않으니까.”
다시 그 늙은 자가 제지하며 말을 했다.
“이보게 악어. 내가 여기 있는 자들을 대표해서 얘기하지. 옆의 이 친구의 말처럼 우리는 ‘북쪽 하늘 감시자’를 떠나왔네. 그러니 거기 그 죄 없는 친구를 놓아 주게.”
잡고 있는 손에 다시 한 번 꽉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아니라니..? 그건 무슨 말이지?”
무리 중 몇 명이 수근 거렸다.
“괜찮아. 이제 곳 일어날 일인데 숨길 필요는 없을 테지. 그럼 저 땅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일을 알려주지.”
그 무렵 간만에 자신이 태어난 땅에 돌아온 자는 처음으로 오랜 세월에 대한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이 흰 너구리는 지금 드넓은 불모지 전체를 내려 보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어쩌면 다시는 보게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같은 시간 다른 장소, 거기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특별한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고, 그것을 숨어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아주 큰 바람 조차 싣지 못하는 것이 있어.』
여긴.. 전에 본적이 있는 곳이다. 분명 언젠가 와 봤었던 것 같은데.....
“에헴.”
“정말 제 스스로 바보 같다 느끼지만, 혹시 이 상황을 설명할 어떠한 말이라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으흠 글쎄.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나는 뒤에서 내 몸을 뚫는 소리를 들었노라.”
“제가 그대의 몸을 부쉈습니까?”
“글쎄, 그게 ‘너’였을지? 그러곤 지금 너와 나는 함께 있지.”
“저희가 혹시 얼마 전에 보지 않았습니까?”
“글쎄, 설사 나를 만났어도 그게 ‘나’였을지?”
“벌써 처음 만남을 뒤로한지 6년이 지났습니다만, 분위기나 느낌이 일전과 사뭇 달라진 것 같습니다. 벽의 왕이시여.”
“나는 모든 방향에서 부수어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존재요. 본디 그런 자다. 너야말로 눈빛과 기운이 전과 다른 듯하군?”
“그래 보입니까?”
“그렇다. 이름을 찾는 여행 중에 일을 겪고 무엇을 깨닫게 된 것인가?”
“네, 전부터 저를 괴롭혀왔던 답답함의 원인을 하나 알게 됐어요.”
“그게 뭐지?”
“저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너는 여기에, 이 나에게로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제가 직접 찾아왔습니까?”
“네가 스스로 두드린 결과이다. 그리고 내가 너의 부름을 듣고 응답을 하였지.”
“제가 다시 이 손을 사용한 것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의 부름에 항상 나지막이 서있는 존재이다.”
“대답해주십시오. 제가 대체 이번에 어떤 조건을 충족한 것입니까? 저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 차지 않았던 겁니까? 여행을 계속했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존재하는 것들조차 제 눈에 다 비춰지지 않았지요. 난 왜 볼 수 없습니까? 왜 들을 수 없습니까? 왜 저들을 느낄 수 없습니까? 헌데 어째서. 어째서 당신만큼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시작한 후로 단서와 이정표를 찾아 떠났지. 이미 이 세계의 여러 곳과 만났던 자들이 너에 관한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더냐.”
“글쎄요. 저도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지요. 길을 가다보면 나를 감싸는 모든 우주가 나의 편을 들어줄 만 알았어요. 하지만 이내 깨달았어요.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는지. 나는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였어요. 거짓과 비밀들로부터 본래가지고 있던 마음과 뜻도 지킬 수 없었죠. 왕이 불러주신 이름말고도 다른 많은 이름도 얻었어요.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습니다. 과연 내가 찾게 될 이름도 과연 나의 이름이 맞는가? 아무렇게 불려도 상관없다면 내가 더 이상 이 여행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스스로의 의미가 의심스럽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그날, 이름을 찾는 여행이란 게 무슨 가치가 있어서 떠난 거지?”
“제가 이 만한 꼬맹이였을 때 말입니까? 글쎄요. 치기어린 충동이었을지 모르지요. 누군가 나의 이름과 정체를 물어 와도 나는 답을 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지요. 왕께서는 나에게 스스로를 소개하셨지만 제가 할 말은 그저 나의 겉으로 드러난, 포장된 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들에게 내가 어떤 자인지.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대들이 누구인지. 나도 듣고 싶었습니다. 내 주위의 모든 웅성거림을. 하하하. 맞았어요. 왕께서 하신 말처럼 저는 이 세계에서 단순히 귀머거리에 벙어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 스스로를 버리고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인가?”
“제가 원해서 이리로 온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이곳으로 떨어트린 거죠. 그는 저에 대해서 뭔가를 아는 자인 것처럼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저를 ‘검은 보석’이라고 불렀습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 지금 나에게는 숱하게 많은 의미와 형상들이 스쳐가지만, 너에 관해 연관된 것이라면 아마 ‘그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군. 그것은 이 세계를 이루는 힘과 관련된 거대한 물질이다. 아마 그것이 맞다고 한다면 그림자하고도 연관이 돼 있을 텐데.. 혹시 그런 말도 들어보았나?”
“그림자... 그러고 보니 지금 같이 다니는 악어와 날 이곳으로 보낸 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대체 그것들이 지금 저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 거죠? 그는 저를 이용해서 하늘 저 밖으로 통하는 소통에 관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음,,, 그렇다면 지금 사태는 꽤 시급한 모양이군. 만약 네가 여기 오기 전으로 제때 돌아가지 못한다면 지금의 너를 영영 찾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아... 저는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여기서 나갈 어떤 방법이 없습니까?”
“내부에 깊이 잠들어있는 자아는 밖으로 드러난 자아의 존립과 균형을 위해서 스스로 나서지 못한다. 끊임없이 상호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결코 외부의 자신을 붕괴시킬 힘을 가지지 못하지. 허나 두 가지로 가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첫 째는 죽음. 몸에서 비롯돼 발생한 영혼을 가정할 때,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죽음이란 현상 앞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든 자아와 내부에 드러나지 않는 모든 자아들은 일시적 균형을 가져오기 위해 대등한 상태로 위치할 수 있게 된다. 그 때가 되면 너도 위로 올라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어떻게 말한다면 죽음과 비슷한 상태. 아주 특별한 상태를 맞닥뜨려 정상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길을 엇갈린 경우지. 어쩌면 궤도에서 이탈했다고 표현한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 경우는 제가 완전히 저 밖의 저를 누르고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말했지 않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부의 자아는 균형을 위해서 밖의 자아의 존립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내부를 아주 정확히 보게 되는 것뿐이지. 그러곤 다시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원래는 아주 불안정한 상태로서 정상적으로는 현실에선 일어날 수 있는 따위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제가 그 특별한 경우인거군요...?”
“그렇다. 원래의 너라면 내부의 너를 두고서 저 밖으로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저 밖의 너도 사라지고 스스로의 경계가 죽음과 같이 붕괴되어 가는 지금이라면 너는 할 수 있다. 자 이제 여기에 지금의 너를 두고. 새로운 너로 저 위로 올라가라.”
“저를 여기에 두고 가라고요? 어떻게 그것이...”
“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너를 붙잡아 둠으로써 네가 내부와의 공백과 저 밖과의 균형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서둘러라! 자칫 너무 늦기 전에. 나의 이 부서진 틈 사이로 너의 손을 집어넣어라.”
“네?..... 잠시만요. 어디.. 여긴가... 저기 벽의 왕님. 우리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죠? 그 때는 제대로 그 동안의 저의 여행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하하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다고요.”
“그래 그 때는 또 한 번. 그 손으로 다시 나를 두드리거라.”
이로써 나의 부서진 틈은 다시 한 번 새로이 다른 것으로 메워 졌다. 원래 보여서는 안 되지만 존재하는 실체여.. 하지만 원래 태초에 네가 있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하고말고.. 암..
『아스라이 이 자리 잡은 박제여.』
“음,,,,, 저기 저 자는 분명 북쪽 하늘 감시자인 것 같은데... 그 앞에는 인간이 아닌가? 헌데 저 자가 인간을 상대로 행하고 있는 의식은 대체... 아무래도 위험해. 끝까지 지켜보려 했는데 이젠 나서야겠어. 응? 이상하군. 분명 의식이 진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중단 되었어. 왜지?”
“이..이..있을 수 없어!! 껍데기로 외부의 자아가 개입할 수 있어도 갑자기 난데없이 내부의 자아가 스스로를 찢고나와 외부로 나오다니! 불가능해.... 어떻게 된 거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네 녀석은 대체 무슨 귀신인거냐? 한 자아가 균형을 망가뜨리고 제멋대로 나타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고.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이냐?!”
“불가능하지 않아요. 나는 느낄 수 있어요. 지금 나의 내부에는 나와 별개로 다른 내가 잠을 자고 있어요. 그 덕분에 나는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어쩌면 일부는 당신의 도움이기도 하고요.”
“너...너는 대체 누구입니까..? 아까 그녀석이 아니야. 느낌이 달라. 의식이 시작하기 전이랑 기운이랑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하하. 재밌는 말을 하시네요. 난 어디까지나 ‘그’입니다. 다르지만 같은 존재죠.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우린 서로를 계속 공유하고 있어요.”
“그. 그.. 런일이... 변해버린 형질이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다니..”
“이제는 같은 방법으론 당신이 저를 다시 괴롭힐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기다려라 이놈! 어떻게 내 손에 들어봤는데 이대로 보내지 못한다!!”
“칫.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어. 내가 나서야겠군. 응..? 저건 맬기스잖아?”
“이 건방진 오리 녀석 꼼짝 마라! 잘도 이 맬기스에게서 동행자를 뺏어갈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군.”
재빠르게 달려온 맬기스가 순식간에 이 자를 덮쳐 쓰러트렸다.
“이봐 괜찮나 친구? 내가 이제 여기로 왔으니 아무 걱정 말게! 이 못된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냐. 좋게 말할 때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맬기스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그건 내가 묻고 싶다고 친구. 대체 이 이상한 녀석은 뭐야? 인상 한 번 고약하구만. 그리고 자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네.”
“이봐~ 맬기스.”
허허.. 장난 아니게 엄청 커다란 동물이잖아. 젠이나 랄시프보다는 안 되겠지만 맬기스보다 훨씬 큰걸. 혹 저 자가 맬기스가 말 했던 그 동료인가?
“아니? 라윈! 자네가 대체 여기 어떻게? ‘황혼의 틈’에서 조사를 하다가 연락이 끊어졌다고 들었네만? 어째서 이 곳에 있는 것이지?”
“전부다 말하자면 얘기가 기네. 어쨌든 드디어 황혼의 틈에서 ‘검은물질 형상’을 발견해서 날개가 빠른 친구를 통해 먼저 보내두었네. 현재 본부로 보냈으니 확인 중일 거야. 헌데 지금 보다 시급한 일이 있어.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지. 아차. 옆의 분을 신경을 쓰지 못했군. 실례했습니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난 이 녀석과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지낸 라윈이라고 합니다. 이 큰 덩치 때문에 간혹 나를 다른 동물들로도 착각하는데 저는 그저 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인간친구.”
“네 맬기스에게 들었습니다. 맬기스 그리고 세부와 함께 예전에 같이 일을 했다죠?”
“호오. 세부도 만났습니까? 그것까지 알고 계시는 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현재 세부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활동을 하고 있고, 맬기스와 그리고 저 둘만 밖으로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끊어서 미안하네만 인사는 거기까지만 하지. 나도 얼른 해야 할 얘기가 있으니. 이봐 인간친구. 여기 자네를 구하러 오기 전에 부족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북쪽 하늘 감시자들을 만났네. 그 들을 통해 저 땅에서 벌어지려는 일을 들었어.”
“맬기스. 아무래도 자네가 하려는 얘기가 나와 같은 것 같군. 나도 이 땅으로 달려오기 전에 전령을 통해서 들었네.”
“다들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는 군요. 대체 뭐가 일어난다는 건데요?”
“친구. 이 곳으로 오기 전에 계곡에서 무장한 감시자들 기억하나? 이제 다시 한 번 저 땅에서 벌어지려는 거야. 바로 순례자와 감시자들의 전쟁이!”
“네? 전쟁이라니요? 천천히 설명해보세요.”
“자네와 떨어지고 일이네. 나는 곧 벌어질 큰 싸움을 피해 이 숲으로 도망을 온 감시자들을 만났어. 그들은 곧 불모지에 벌어질 큰 그림 얘기를 했네. 이젠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해주겠네. 내가 쫓고 있는 자들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나? 저 땅에는 오랫동안 그들이 노리는 큰 힘과 관련된 것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고 하는 정보를 첩자를 통해서 들었네. 바로 세부 말이야. 우리는 몇 년 동안 조직의 세력을 큰 상단으로 위장을 해서 그들에게 접근을 했네. 그 것의 정체를 알고 필요하다면 몰래 빼돌리기 위해서 말이야. 결국 세부를 연합의 물자유통 중심 역할까지 맡게 하는 데 성공했네. 하지만 결국 상단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훨씬 어둡고 깊은 곳까지 이 일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지. 그래도 다행히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오로지 그 특수한 힘과 물질은 가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가 있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아무나 맡지 못하는 그 일을 소수의 중개자가 그것을 취급한다는 것이지. 그리고 나는 저 땅에서 곧 출몰할 것이라는 그 자를 추격하고 있었던 걸세!”
“그래. 맬기스의 말대로 우리는 그와 관련된 일을 계속 해오고 있었지. 지금 저 땅에서 벌어지려는 일은 정말 큰일이네. 하필 저들이 노리는 목표물이 저 땅에 있다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점에 말이야. 만약 두 세력과의 전쟁으로 우리가 찾는 그것이 유실되고, 만약 그것을 노리는 다른 자들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손을 쓸 수 없게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만은 막아야 해!”
“그렇다면 당신이 쫓고 있는 그 세력 뒤에 숨겨진 중개자가 어쩌면 내가 아는 그라는 말이군요.... 그리고 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중요한 실마리이고요...”
“경각을 다투는 일이야. 나와 라윈은 서둘러 가야하네. 자넨 이제 어찌 할 텐가? 절대 억지로 강요하진 않겠네. 아 그리고 자네를 찾다가 땅에 떨어진 이것을 발견했네. 덕분에 자네의 냄새를 맡아 쫓아 올 수 있었지. 이게 자네의 것인가? 돌려주겠네.”
....이것은..
“그래요. 제가 도적님한테 동행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짧은 시간이었든 긴 시간이었든 저한테 있어서 도적님은 완전히 별개가 될 수 없었으니까요. 아니요. 어쩌면 저의 소리를 듣고 나타나신 순간부터 그랬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요. 선생님의 길을 정하는 것은 누구지요? 뻔한 대답이지요. 선생님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렬하게 의지를 내뿜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은 저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중간까지의 동행자일 뿐 저에게서 무엇을 두고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랬었던 것인가..
“지금 내가 있게 된 데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유와 시간들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기의 일부에는 이 음식이란 것도 있지요. 혹시 선생님께서 떠나보내지 못한 미련과 떠나면서 새로 얻을 인연에 고민하고 무엇을 포기하기 어려우신 거라면, 이 작은 것으로서 저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다시 한 번 그를 만나, 하지 못한 얘기를 해야만 해요. 부탁해요. 나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잠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그새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정말 내가 알던 그 인간인가?
“좋아. 시간이 없으니 나머지 얘기는 가면서 하지. 그전에 잠깐 이 붙잡은 녀석부터 무슨 꿍꿍이였는지.. 어라 어디 갔어? 감쪽같이 도망치다니?”
“흠 무슨 주술을 써서 도망친 것 같군. 나도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어. 지금 일에 집중하지. 둘 다 내 등에 타게.”
“이 봐. 여기가 어떤 숲인지 잊지는 않았겠지? 벌써 밤이야. 고작 이 앞만 나가도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흥 나보다 길을 잘 찾는 자를 달리 본 적이 있나? 그리고 이 앞 계곡 까지는 숨도 안 쉬고 달려갈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혼자서 낑낑대다가 결국 맬기스가 들어 올려 줘서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막상 올라타니 생각했던 것 보다 높군. 나랑 맬기스를 태우고도 이 정도라니.. 정말 작은 동물은 무슨 작은 코끼리나 되는 줄 알겠어.
『빨리 달리는 것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나?』
“바람같이 빠르군요. 정말 숨을 안 참고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할 정도면 맬기스가 생각한 방법이 아니라도 숲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겠어요.”
“뭐, 이 친구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런데 자네 목에 빛나는 건 뭔가?”
“음? 정말이네. 이건... 일전에 트라올가에게서 받은 목걸이에요. 아무래도 밤에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면 빛이 나는 모양이네요.”
“그 놈이 그래도 꽤 쓸만한 것을 줬군.”
“맬기스. 그건 그렇고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글쎄. 그들이 준비를 하고 정말 싸우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 땐 어쩔 수 없어. 그들을 다 때려눕혀서 말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저들보다 몇 수 빠르게 읽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어디에 있는지 까지 파악한 다음 지켜낼 뿐이지.”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 그 다음은 없네. 우선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에 신경을 써야지.”
“젠이 저번에 자신들과 순례자들의 대립에 대해 얘기 해줬어요. 저들과 지금 어떤 대립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건 오랜 싸움 같았어요.”
“그렇네. 내가 알기로도 순례자들과 감시자들 두 세력 모두 저 불모지의 토착민들이지. 그 싸움은 먼 옛날 그 한 전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네. 헌데 이상한건 두 세력의 싸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순례자라는 자들은 자주 세상에 나타나서 불모지나 그 밖의 땅에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쓰고 간섭을 하는데, 감시자라는 자들은 이상하게 싸움을 거부하고 도망쳐 다닐 뿐이지. 하지만 반대로 순례자들의 근거지는 실제로 알려진 곳은 없어. 대립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봐도 둘 사이에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래. 어쩌면 저 불모지 중앙의 도적패와 감시자들의 싸움을 부추긴 것도 그들일지도 몰라. 이상하게 그들 사이 직접적인 물리적 대립은 없지만 말이야.”
“만약 둘 사이에 정말 갈등이 커져 큰 싸움으로 치닫게 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한 쪽이나 양쪽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로군!”
“이봐 거기 한창 얘기중인데 계곡에 다 왔어. 내려 보게. 휴, 난 숨 좀 돌려야지.”
“역시 라윈이군. 수고 했네. 그런데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니 이상하군. 다들 어디로 들어가 숨어 버린 건가. 자네랑 자네는 잠시만 여기에 있게 내가 둘러보고 올 테니”
“혹시 모르니 조심해요. 맬기스.”
“내 실력은 이미 알지 않나. 어차피 저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맬기스를 믿어 봐요. 저래 봬도 저 친구 실력만큼은 다들 인정하니까.”
“아까부터 고마워요 라윈. 저는 처음 보는 낯선자인데도 긴장하지 않고 편히 대해주시는 군요.”
“맬기스가 인간친구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맬기스가 믿는 자라면 저도 믿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이 없이 저돌적인 친구지만 겉보기 보다 생각도 깊고 꽤 괜찮은 친구거든요. 그런 그가 신뢰하는 자들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긴, 사실 이렇게 말해도 옛날에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지만요. 하하하. 그와 아직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입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속이며 자신까지도 속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맬기스는 끝까지 믿고 싸워줬지요. 인간친구도 이번 인연으로 그와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아마 기회가 되면 종종 도움도 받을 수 있을 테죠.”
“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봐 자네 둘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는 건가. 언덕 위에도, 망을 보는 녀석도 아무도 없다고! 흔적으로 볼 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바로 추격하지!”
“칫.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바로 달려야 하는군. 어디로 가지? 저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강으로 쫓아야겠군.”
“아니야. 저들이 그 많은 인원으로 갔다면 육지를 통해 갔을 가능성이 크네. 전에 이 곳으로 왔을 때 그들 모두를 태울만한 많은 배는 있지 않는 듯 했어. 그렇다면 다소 험한 길이라도 불모지 산맥 쪽으로 돌아갔을 것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한 발 빨리 배를 타고 저들을 앞질러 가야하는 것 아닌가요?”
“음 인간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 곳으로 미리 가 있어도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네. 차라리 우리가 뒤를 쫓아가 그들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는 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될지 몰라. 잘하면 그들도 설득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는 없지. 둘 다 빨리 내 등에 타!”
이번엔 맬기스가 나를 밀어 올리지 않고 험하게 잡아서 위로 던졌다. 아야야. 나도 빨리 강해져야겠어.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으니 몸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군. 우리를 태운 라윈은 계곡을 통한 산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맬기스. 혹시 말이에요. 두 세력 사이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전설과 관련되지 않았을까요? 그 갈등이 지속되어 온 것이라면 전설에 단서가 있을지 몰라요.”
“흠, 두 왕이 두 가지의 보물을 가지고 다투고 패배한 왕의 통곡으로 불모지에 큰 비가 내렸다라... 그렇다면 아직 보물을 차지하는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그 보물은 현재 낙원의 순례자들에게 있고 그 것을 북쪽 하늘 감시자들이 다시 차지하기 위한 것이겠군요. 흠,, 맬기스. 낙원의 순례자라는 자들이 혹시 맬기스와 라윈이 쫓고 있는 세력과 관련된 자들인 거죠?”
“음 정확히는 그자들 뒤에 있는 세력이지. 우리는 세계에 그것을 노리는 큰 상단들과 그와 관련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셋 정도의 세력을 단정했네. 그 셋 중 하나가 바로 낙원의 순례자인 것이지.”
뭔가 꺼림칙해. 아직 중요한 몇 가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친구들~ 그들이 지나간 흔적을 찾았어. 아래 발자국을 봐. 지나간 지는 하루 밤 정도 된 듯 하군. 다행히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들과 만날 수 있겠어.”
“맬기스. 혹시 그 보물이라는 것 말이에요. 생각보다 단순한 것 아닐까요. 어쩌면 척박한 불모지에 필요한 건 비 같이 기본적인 것이니까요.”
“친구의 생각도 재밌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뺏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혹 그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같은 불모지인데 뺏어서 무얼 하겠나.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전설에 의하면 싸운 것은 두 왕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땅도 두 곳이라는 얘긴데 다른 한 땅은 대체 어디지? 서쪽으로는 오완의 구릉지, 동쪽으로는 지지 않는 바다, 남쪽으로는 푸른 별의 계산대, 북쪽으로는 칠흑 안개 산림... 어디하나 물이 부족한 척박한 땅은 아닌데...”
왕은 둘.. 보물도 두 개... 땅은 두 개...하지만 불모지는 하나..
“이봐 라윈, 그리 무섭게 달리지 않아도 돼 어차피 자네의 속도라면 다시 해가 지기 전에 잡을 듯 하니까. 그러면 그렇게 급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자칫하다간 위에 타고 있는 우리도 최소한 중상이야.”
“속 편한 소리하지 말게. 설사 그들을 따라잡는다고 해도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만에 하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어두는 게 현명한 길이네.”
“라윈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맬기스가 한 얘기처럼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힘을 아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요.”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었네 친구!”
“음... 인간 친구마저 그렇게 말한다면야. 조금 속도를 줄여보도록 하지.”
앞으로의 여정이란 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이로군. 불모지에 도착하기 전만해도 내가 새로 동행자를 구해서 저 푸른 별의 계산대로 넘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런 그와 함께 위기를 해쳐나가고 도중에 헤어지기도 했지. 지금은 불모지로 다시 돌아와 그의 동료와 함께 예전 나의 동행자일지도 모를 누군가를 쫓고 있고 말이야. 벽의 왕이 나의 도착을 7년 정도를 잡았는데 역시 예상은 예상뿐, 왕은 예견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말이 맞군. 어쩌면 나의 여행은 단순히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닌 만큼 그 결과도 뜻하지 않던 것이 될지도 몰라.
“달리면서 나도 자네들이 한 얘기를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혹시 그들의 보물이란 건 우리가 찾는 암흑물질이랑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 순례자들이 그것을 취급하는 중개자이긴 하지만 그것이 감시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감시자들이 탐낼만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그들과 무슨 연결점이?”
“그냥 이건 말의 감이야. 길 찾는 데에 특화된 본능 같은 거라고”
“글쎄..... 세부는 믿을만했는데 자네는 좀...”
“어허! 자네 지금 내려서 걸어가고 싶은 건가?”
“이봐. 알았어. 믿을 테니까 좀 봐달라고.”
늙은 도적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힘이 넘치고 건강한 기운을 보내고 있어.
『어김없이 전해지는 말들』
“드디어 따라잡았군. 저기 앞을 보게.”
족히 수백은 될 듯한, 하늘을 향에 창을 든 행렬이 줄을 이어 전진하고 있다.
“저기 맨 앞에 있는 짐승, 혹시 기린 맞나? 듣던 대로 아주 무지막지 하군... 혹시 잘못해서 뒷발로 한 방 먹었다가는 훅 가버리겠는 걸”
“그건 이미 시험해봤답니다...하하”
“아니야 그건, 녀석의 머리였다고”
라윈은 산 길 옆으로 돌아달려 그들 행진의 맨 앞에 섰다. 요란스러운 등장에 순식간에 일순간 무리 줄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침착해라!!!”
모든 것을 평정할 듯한 고함소리와 앞발의 위력은 다시 들어도 여전했다. 처음 듣는 라윈은 그렇다 치고 다시 듣는 맬기스도 긴장한 듯 보인다.
“음, 저번에 푸른 별의 계산대로 간다고 계곡을 빠져나간 인간과 악어가 아닙니까. 이번엔 말까지 데리고.. 벌써 목적지까지 갔다 왔을 리는 없을 텐데... 우리가 이 길로 간다는 것까지 알고 쫓아와 앞을 막아서다니. 우선 말을 들어볼까요?”
“이봐 젠. 시간 끌 필요 없이 얘기하지. 자네들의 지금 이 무리. 정말로 전쟁을 하려는 것이 맞나?”
“흠, 출발 전까지 모두를 철저히 함구시키고 은밀히 준비를 했으며, 대규모 무리가 중간까지 들기지 않기 위해서 애써 산맥을 돌아왔는데 우리의 출발을 눈치 채다니...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인가...”
젠 옆에 있는 트라올가가 분노를 띈 얼굴로 앞에 나섰다.
“역시 네 놈들은 믿을 게 아니었어! 한 순간 너희들에게 신뢰를 주려 했던 내 생각이 정말 부끄럽고 치욕스럽다. 역시 그때 네 녀석들을 끝장냈어야 했다!!”
“이봐 맬기스. 저기 저 녀석 자네만큼 장난 아니게 앞뒤 안 가리고 나설 것 같은데?”
“날 저 녀석같이 무식한 놈이랑 엮지 말라고. 최소한 나는 신사의 덕목은 갖췄으니. 이봐 오리. 진정해! 우리는 푸른 별의 계산대에서 너희들로부터 이탈해 나온 다른 붉은 하늘 감시자들을 만났지. 그들이 앞으로 자네의 행보에 대해서 얘기해주었네.”
“오호라 그들이... 싸움을 싫어해서 마지막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자들을 내보냈더니 하필 그들이... 그렇다고 난데없이 기동성이 좋은 말과 함께 여기에 그대들이 타나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될지?”
“처음 뵙겠소 젠. 나는 라윈이라고 하오. 우리는 자네들이 일으키려고 하는 싸움을 말리려고 왔소. 그 이유는 우리 쪽의 보고를 통해서 불모지 중앙에 있는 상인들이 곧 위험하고도 중대한 것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오. 혹시 그대들의 전쟁으로 그것들이 옳지 못한 자들에 손에 넘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오. 아니면 혹시 그대들이 찾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 아니요?”
“라윈?”
맬기스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검지로 입을 막는 행동을 했다.
“쉿. 인간친구. 저건 라윈이 떠보고 있는 거야.”
“저번에도 그대의 친구들에게 말했지만, 우리가 무엇을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든 그건 그대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요. 그대들이 그대들의 이유로 움직이듯이 우리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이상의 경고는 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의지는 확고하니 막을 생각하지 마시오. 막을 수도 없겠지만 정말로 우리를 방해한다면 이번에는 나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만은 없소.”
이번에는 맬기스가 나서서 말을 했다.
“이봐 기린. 이건 자네 부족을 위한 말이기도 해. 이대로 불모지로 달려간다고 자네들이 찾는 순례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준다는 가? 어쩌면 우리가 자네들한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네놈들한테 도움 받을 것은 없다. 이 이상 시간 끌 생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무운을 비네. 우리는 그만 물러나도록 하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맬기스? 이대로 물러난다니요?”
“괜찮아. 이 이상 저들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야. 그리고 한 번이라도 말을 더 던지려고 하면 저기 저 살기를 잔뜩 내 뿜는 녀석이 가만있지 않을 걸.”
이 때 트라올가가 창으로 땅을 한 번 치며 소리쳤다.
“잠깐. 누가 순순히 보내준다고 했나. 보아하니 이제야 허겁지겁 뒤에서 쫓아온 모양인데 이대로 그냥 보내주면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봐라 다들 저 녀석들을 구금해.”
순간적으로 젠과 눈을 마주쳤지만 온화했던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있어 더 이상 우리의 편을 들어줄 것 같진 않다. 어느새 라윈이 맬기스를 태우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어서 손을 잡게. 여기서 도망쳐야 해.”
나를 향해 뻗은 맬기스의 손을 잡고 그대로 라윈 위로 올라탔다.
“위험해요. 저기 앞에!”
어느새 젠이 목을 양쪽으로 흔들고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
“그대들과 나쁜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유감입니다.”
“젠장 앞뒤로 포위되다니 이러다간 정말 위험해. 뒤로는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앞으로 뚫어야만 해. 이 봐 라윈 저 기다란 채찍을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 걱정 말고 둘 다 날아가지 않도록 꼭 잡으라고. 잠시 동안은 난폭하게 달려야 할 것 같으니까.”
정면으로 돌진하는 우리의 방향을 읽은 듯 젠은 몸을 약간 틀어 자세를 잡은 뒤 흔들리는 추같이 움직이는 목으로 돌아오는 반동에 체중을 싫어 순간적으로 휘둘렀다.
“그의 목이 옆으로 날아와요! 이대로 가면 정말 피할 수 없어요.”
“아니 오히려 정면승부가 맞네. 어차피 저 기다란 목은 어디로도 피할 순 없어.”
라윈은 순간적으로 달리는 방향을 틀어 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향해 꺾었다. 그리고 몸을 미끄러져 눕혀 아슬아슬하게 밑으로 기어 피했다. 그러곤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 그의 다리사이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휴 십년감수했군. 다 라윈 자네의 빠른 발 덕분이네.”
“아직 이에요! 그가 뒷발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 때 맬기스가 빠르게 짐 꾸러미를 풀어 그 안에 있던 동그란 것을 뒤로 던졌다. 순간의 폭발과 함께 많은 연기가 퍼졌다. 그로인해 내딛기 직전에 그의 뒷발이 멈췄다.
“제법이군. 저런 재주도 있었나.”
“아직 완전히 도망칠 때까지는 방심할 수 없어. 이제부터 전력으로 빠져 나간다!”
“맬기스. 라윈과 함께 그들의 행선지를 떠본 거군요.”
“그렇네. 그들이 찾는 순례자들은 다른 땅이 아닌 이 불모지에 있는 것은 확실해. 문제는 불모지 그 어디에 있냐는 것이지.”
“그 뿐만이 아니라 낌새로 볼 때 저들의 싸움에는 ‘어둠물질’과도 무언가 관련이 있는 듯 하군. 역시 내 감이 맞았어.”
“그런데 왜 그것을 어둠물질이라고 부르는 거죠? 언제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이라고도 했잖아요. 정확히 그게 어떤 것이죠?”
“힘도 맞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각각 힘을 가지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단 어둠물질은 특별하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고 힘을 저장하고 있다고 하네. 재밌는 건 그것이 이 세계에서 매우 희귀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즉 이 천체에 어느 곳을 뒤져도 다 있을 만큼 풍부하고 어디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 누구도 그것을 쉬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야. 이 세계를 흔들어 놓을 만큼 강력하고 커다한 힘이 잠재 돼 있는데 정작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자들은 아주 극히 소수라네. 아주 때때로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어둠물질, 어둠형상, 때로는 그림자라고도 부르고 있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조직은 어쩌면 그것들이 이 세계에 붉은 곰이나 대이변을 가져온 것이 아닌 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네.”
“이 세계에 큰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는 힘이라... 과연 그것이 어떤 힘이 길래 과거에 두 왕 간에 싸움이 과거로 이어져 오는 것인지.. 참 슬픈 힘이로군요.”
“그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네. 우리가 할 일은 한시바삐 그 순례자들의 땅을 찾고 그 문제가 될 만한 것을 지켜내는 것이지.”
라윈이 갑자기 급하게 정지하고 앞발을 높이 들더니 방향을 틀어 뛰기 시작했다.
“욱, 이봐 친구 갑자기 그렇게 거칠게 달리면 어떡하나 하마터면 떨어질 뻔 했어.”
“쳇. 완전히 따돌리진 못했어. 나도 산길에서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데 저 오리들이 상당히 빠른 것 같아. 무척이나 민첩한데 따돌리기 쉽지 않겠어. 특히 저 뒤에 오리들의 대장 쯤 돼 보이는 자는 보통이 아니군.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오고 있으면서도 나머지 오리들에게 명령을 해 서서히 포위시키려 있어.”
트라올가다... 설마 거기부터 계속 쫓아 온 것인가. 바람같이 달리는 라윈을 따라올 수 있다니, 설마 등에 태우고 있는 우리 때문인가?
“이대로는 안 돼, 더 이상 추격당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할 듯 하군. 이 봐 라윈 저쪽 앞에 좁은 골목 보이나 그 쪽으로 저 들을 유인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맬기스. 좁은 골목에서 혹여나 포위당하게 된다면 어찌하려고”
“허허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을 듣게. 내가 개발한 이 새로운 도구로 좁은 골목 사이의 양 벽을 무너뜨리고 저들이 오지 못하게 차단할 걸세.”
“뭐 자네한테 그런 꾀가 있다면 믿고 달려볼 수밖에! 꽉 붙들어 매”
“오! 맬기스 저번에 본 것 말고도 지팡이에 그런 능력이 있었나요?”
“하하 당연하지! 이 천하의 맬기스님만 믿으라고!!”
감시자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추격해 따라붙었다. 정말 여기서 승부를 보고 따돌리지 못한다면 잡혀버릴 꺼야.
“휴 다 왔어. 맬기스 할 거면 어서 빨리 하라고!”
“흥 마지막인데 부추기기는..”
맬기스는 라윈에게서 뛰어서 내려 꾸러미에서 검은 공 모양의 두 개를 꺼냈다.
“맬기스 설마.. 뭐하려는 거 에요?!”
“설사 내가 이 길을 무너뜨려 막는다고 해도 저들은 금방 그것을 넘어서 추격 해 올 테지...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네. 언제까지나 뒤나 밟히면서 신경 쓸 여력은 없어. 어차피 강 말고 직접 뒤를 쫓자는 것도 나의 생각이었어. 이렇게 되리란 것도 몰랐던 게 아냐. 그리고 나는 길잡이이자 동행자로서, 나의 동행자가 여정의 끝에는 나 없이도 갈 수 있도록 앞으로의 길을 열어줘야만 해. 미안하군. 미리 말한다면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네. 마주하며 웃던 자네의 친구로서가 아니라 내 뒷모습만을 기억해주게.”
그러곤 양 손의 두 개를 서로 양쪽으로 집어 던졌다. 아까의 연기가 났던 것과는 다르게 일순간의 큰 폭발과 굉음으로 벽이 무너져 골목으로 통하는 길이 완전히 차단됐다. 어째서 그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무모한 짓을 하리란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라윈은 잠시동안 멈추고는 이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라윈!!! 멈춰요. 맬기스를 구해야 돼요.”
“가야하네.....”
“맬기스를 두고 어떻게 가요. 그는 우리 동행자에요!”
“이미 길이 무너져 그를 구할 수 없네. 그가 뜻을 이해해서라도 계속 앞으로 가야만 해. 그리고 그는 무모하지만 강해. 항상 어떠한 위험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지. 저런 상황 속에서도 괜찮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런 보장도 없잖아요. 당신은 그의 친구가 아닌가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 동료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길잡이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나면 뒤를 위해 앞에서 비켜줘야 해. 그리고 그건 그가 택한 길이지. 이미 내 등에서 내렸을 때부터 말이야...”
그래, 사실 라윈은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흥, 사실 좀 걱정하긴 했는데 다행이도 어떻게든 해낸 모양이군. 역시 이 맬기스님이란 말이지. 하하하하.”
“이봐 너희 나머지는 이 길목을 제외하고 통하는 길을 찾아라. 무슨 일이 있어서도 추격해서 잡아야 한다.”
“이봐 오리. 우리 꽤 인연인 것 같지 않아? 그것도 꽤 질긴.”
“네 녀석들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걱정마라 네 친구들도 곧 너의 길을 따라 가게 될 테니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흥, 우리 사이에는 이미 말보다 편한 대화가 있잖아?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들어와!!”
(5장 찢겨진 공간으로 마침).................
6장
새로운 이음매와 함께
한 때에 꽤, 아니 요즘도 더러 그런 고민을 하곤 합니다. 분명히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주위에는 그저 그런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매우 충격적이거나 마음으로 몹시 크게 와 닿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냥 그것을 기괴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근거로 하는 나와는 잦은 충돌을 빚어 왔기에 그럴 때의 나는 꽤 내부로부터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변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던 나의 머리도 나의 마음도, 어떻게든 닮아 보여고 받아들이는 척하려고 그렇게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그 동안 버리지 않았던 조각들을 모아.』
짧은 순간에 퍼부어진 충격과 함께 찾아온 공허함으로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잊은 채 혹시 지금 일어난 일이 모두 꿈이 아닌 가하고 그리 생각했다.
“다 내 탓입니다..... 마음 한편으론 안일하게 그저 그에게 기댔어요. 한심하게, 내가 좀 더 힘을 냈어야 했는데 스스로 빠른 다리만 믿고 완전히 따돌렸다고 자만했습니다.”
“...라윈은 최선을 다했어요. 이건 당신의 잘 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분명 라윈의 말대로 그는 강하니까 어떻게든 살아있을 거 에요... 그렇게 생각하며 믿어 봅시다.”
그렇게 인간은 몸을 앞으로 뻗어 이미 붉게 얼룩진 말의 눈 밑을 닦아주었다.
“고맙네. 내가 맬기스보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세부가 이 것을 알면 뒷발로 걷어차 버릴 거라고! 슬슬 우리의 방향을 확실히 정해야 하네. 대체 이 불모지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말이야!”
세부라.. 그러고 보니 다시 만날 수 있겠군. 그런데... 푸른 별의 계산대에서 그 수상한 자를 만난 후부터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 원래 이 땅에 생물들이 이렇게 많이 살았던가. 어째서 전에는 보지 못했지?
“그렇습니다! 이럴 때에는 힘을 내야죠!”
분명히 어딘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 모든 이음매에는 흔적이 남는 법.... 단서를 찾으면 이어지는 길로 연결할 수 있어....
“대이변 후 666년”
‘누군가가 새빨간 불모지에 축복 같은 비를 불러왔다. 이것은 옆의 다른 땅들에게 돌아갈 섭리를 빼앗는 것이었으므로 이 의식은 이후로 죄악으로 금지시되었다.’
분명 드러난 불모지는 하나뿐이고 비가 내린 곳도 한 곳이야. 하지만 분명히 감춰져서 숨겨진 땅이 하나 더 있어....
“그런가요...? 단지 저는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누군가에게 있어서 주고 싶은 한 쪽 마음과 받고 싶은 다른 쪽 마음이 어째서 그 크기가 다른지요. 어찌 보면 반대라 할 수 있는 이 두마음은 본래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근데 한 쪽으로만 강하다면 균형이 맞지 않아 결국 무너져 버리게 될 거에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내부의 그 마음과 별도로 ‘외부의 힘’, 즉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의 두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반대로 향해 작용하는 두 가지 힘..
“전부다 메말라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허무해진 풍경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설사 무한히 발이 묶여 영속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 때 서로를 엮었던 그 숭고한 뜻만큼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원래 이 땅의 이름은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었다고 하는군요. 수백 년 전 이 땅을 대표하는 왕과 그리고 다른 땅을 대표하는 어느 앙숙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왕은, 공동의 필요한 ‘한 보물’을 얻기 위해 달이 스무 번 바뀔 때까지 싸웠고, 그 결과로 승리한 다른 땅의 왕이 그 보물뿐만 아니라 패배한 나라의 모든 자원과 빼앗았다고 하지요. 그 뿐만이 아니라 패배한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승리한 왕을 환호하며 이 전의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음, 그런 이야기야 돌고 돌아 조금씩 다르게 변형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데? 우선 내가 알기로는 두 왕은 원래 사이가 나빴던 게 아니라 처음에는 사이좋은 친구사이였다고 하던걸? 그리고 두 왕이 탐하는 보물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고 하고 말이야.”
만약 이 전설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대이변 후 925년”
‘본래 17개의 땅들로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그 동안 각 땅들에 작용하는 힘의 차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해왔으며, 마침내 이날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로 인한 큰 폭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6개의 땅들이 독립적으로 탈락해 이공간으로 떨어져 나갔다.’
“라윈. 혹시 이 세계에서 이탈해 간 땅들의 공간이란 것에 대해서 알아요?”
“알다마다. 이번에 조사를 나갔었던 곳도 그런 곳인걸. 저 푸른 별의 계산대 옆의 그 부글거리는 산도 그런 곳 중에 하나이고 말이야. 근데 그건 갑자기 왜?”
“흥 당신에게 얼마나 설명을 해줘도 저 밖을 오가는 힘과 그 실체에 대해서 이해할 리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당신은 축복받았어! 당신은 바로 그 자체니까! 아니야 어쩌면 불행일지도 몰라.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고 왜곡된 세상과 거짓말을 일삼는 자의 말을 믿고, 오염돼 스스로를 잃어버린 자신을 진짜라고 믿으니까!”
“이 세상 모든 물질은 각각 힘을 가지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단 어둠물질은 특별하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고 힘을 저장하고 있다고 하는군. 재밌는 건 그것이 이 세계에서 매우 희귀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즉 이 천체에 어느 곳을 뒤져도 다 있을 만큼 풍부하고 어디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 누구도 그것을 쉬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야.”
“처음 뵙겠소 젠. 나는 라윈이라고 하오. 우리는 자네들이 일으키려고 하는 싸움을 말리려고 왔소. 그 이유는 우리 쪽의 보고를 통해서 불모지 중앙에 있는 상인들이 곧 위험하고도 중대한 것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오. 혹시 그대들의 전쟁으로 그것들이 옳지 못한 자들에 손에 넘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오. 아니면 혹시 그대들이 찾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 아니요?”
“라윈... 혹시 이 불모지 중에서도 좀 유별난 곳이 있나요?”
“자꾸 질문의 의도를 이해 못하겠군. 나도 알기 쉽게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말이네. 자네가 말한 ‘유별난’ 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가령... 갑자기 기온인 내려간다든가 바람이 강하게 분다는 가 그런 곳이오.”
“응?! 자네가 그곳을 어떻게 알고 있지? 한산할 때 세부랑 몰래 놀러 가려고 맬기스한테도 안 알려준 비밀장소인데.. 칫! 그 놈이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냈구만!”
“거기에요.”
“거기라니?”
“바로 순례자들이 있는 곳이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어요!”
“오! 정말인가? 그 곳이라면 여기서 멀지 않네! 자넨 어떻게 그것을 알아 낸 거지?”
“라윈이 전설과도 관련된 이 오래된 싸움이 혹시 그 어둠물질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고 추측한 부분에서 착상을 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라윈”
“내가? 허허 난 그냥 길을 찾는 말의 육감을 믿었을 뿐이지.”
응? 지금 누가 나를...
“라윈 혹시 방금 무슨 말을 했나요?”
“말의 육감 말인가?”
“아니 그것 말이고 다른 말이요.”
“글쎄?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는 걸?”
이상하다. 분명히 그 소리가 맞는 것 같은데
“음 그래요? 이상하네. 아까부터 들리던데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조금만 기다려요 맬기스. 곧 당신을 구하러 갈게요. 그리고 늙은 도적.. 당신이 정말로 이 앞에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는.....
『술래잡기에서 유리한 것은 어느 편인가.』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불모지의 큰 웅덩이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보기에는 여태 지나온 곳이나 다른 지형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인데.. 이상하리만큼 이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서늘하다. 이 공간으로 어딘가 찬 공기가 섞여 들어오는 것 같아. 그 발생점을 찾아야 돼.
“어때 나의 비밀장소가? 피서로 제격이지? 그런데 정말로 자네 말대로 이런 곳에 순례자들의 근거지가 있다는 말인가? 여태 몇 번이고 와봤지만 그런 것은 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한시바삐 그 늙은 도적이라고 하는 자를 찾아야 돼. 하지만 여기서 그 자가 아는 길 빼고는 통하는 길을 찾을 수 없어.. 어떻게 하지?”
“이 다음이 통곡의 불모지라고 했었죠. 저희의 길은 어디로 이어지나요?”
“어디 쪽으로 가든 다 통하는 길은 찾아낼 수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은 통곡의 불모지를 통해서 한 군데의 땅을 더 지나서 가셔야 할 겁니다. ‘푸른 별자리 계산대’라는 곳인데 이상한 점이 많은 이 세계에서도 정말 유별난 곳에 속하지요.”
“아하, 그렇다면 거기가 선생님의 고향이로군요. 저희 동행의 종착점이기도 하고요.”
“아니요. 저의 고향은 그 쪽 방향에 없습니다. 불모지에서 옆으로 빠지는 샛길로 통하지요. 그리고 제가 고향으로 갈 것은 맞지만 중간에 다른 볼일이 먼저 있습니다.”
“옛날에 늙은 도적이 제게 불모지에서 옆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고 했어요.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는 한 지점이 있을 거 에요.”
“음, 가만 보자 느낄 수 있을 것도 같네... 찬 공기가 불어오는 곳..”
그렇게 나와 라윈은 아주 조금씩 찬 공기가 느껴지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불모지에서 원래 부는 더운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섞이고 있어. 더운 바람은 제각기라도 시원한 공기만큼은 일정한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어. 그리고 점점 가까워져 가던 순간
“라윈 잠시 멈춰 서 봐요.”
“뭐지 친구. 혹시 발견이라도 한 건가!?”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갈기가.. 갈기가 계속 날려요. 이쪽인가..”
손을 쑥...... 들어갔어. 손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 사라졌어. 찾았어. 여긴 거야.
“여기에요 라윈! 드디어 찾았어요!!”
“뭐라고 거기라고?! 잠시만 기다리게! 응? 응? 나는 들어갈 수 없는 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난 덩치가 커서 안 되는 건가... 인간친구 자네만 가능한 듯한데?”
“네? 어디 보자. 정말이네요. 무엇 때문이지?...”
“여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자네가 특별한 것 아닐까?”
특별하다라... 이상하다라...
“제가 만약에 이전에 음식이란 것을 먹어왔다면, 지금은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요?”
“글쎄요. 제가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생각하자면 선생님의 몸이 당장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이상하다고 여기신다면 낌새를 눈치채셔야하고, ‘정말로 이상한 것’이라면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아주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란 지나치게 현실과 가까이 있어서 스스로도 알 필요가 없거나 눈치 챌 수도 없는 것들이니까요.”
내가 그동안 그에게서 받은 그 것이, 지식이나 지혜일지 모르나 어찌됐든 내게는 많은 증거와 단서가 되었어. 그를 만났었던 인연이 다시 그와 나를 연결해주는 데, 단순히 우연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군. 그리고 옷 안 쪽에서 가지고 있던 작은 그것을 손으로 집어 보았다. 그리고 손톱으로 눌러 반으로 나누어 쪼갰다.
“아마도 이게 그 ‘특별한 것’인 모양이에요. 받아요. 라윈. 우리를 저 곳으로 이어줄 이음매가 돼 줄 거에요.”
“이건 뭐지? 열매인가? 먹어도 되겠지? 음... 케헥 케헥. 에이 젠장 쓰잖아. 이건 뭐 다람쥐나 너구리같은 녀석들이나 먹을 만한 것이군.”
“자 그럼 들어갑시다. 드디어... 이 건너편이네요.”
그렇게 우리는 그 높은 곳에 도착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땅을 찾아냈어! 이봐 거기 앞에 괜찮아? 나 눈 떠도 되는 거지?”
“예상했던 것이 맞았어요.”
“헉.. 어떻게 된 거야... 여기는..”
“네. 또 하나의 숨겨진 불모지에요. 그것도 하늘에 떠있는..”
“분명 디딜 수 있고 땅은 땅인데.....전혀 흙 같지 않아. 생물들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아. 마치 죽은 땅같이 이상하군. 반투명한 게 아래쪽도 비춰 보이고... 마치 누군가 불모지의 땅을 보이는 대로만 베껴서 가짜를 갖다 놓은 것만 같아.”
“‘가짜’라니.....듣기에 몹시 거북하군요.”
『그대와 손을 잡고 별 위를 사뿐사뿐 넘어 가네』
“뭐야?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 난거야?”
“흥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네만? 아까부터 정말 건방지고 무례한 말 같으니..”
“늙은..도적..”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그 동안 여행은 어떠셨는지요? 보아하니 꽤 겉으로도 성장한 듯 보입니다. 어찌된 게... 제가 살고 있는 집까지 방문해주시고.. 흐흐흐흐”
“자네가 바로 그 늙은 도적이로군! 북쪽 하늘 감시자들이 지금 자네들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어! 그것을 알고 있나?”
“아~ 그야 뭐.. 여기서 다 내려다보이는 것이니 당연한 거지. 당신들이 이 쪽으로 오는 길도 전부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보고 있는데 꽤 흥미진진하더군. 당신들의 악어 친구가 그 후로 어떻게 된지 알고 있나요? 하하하하”
순간 커다란 말의 입이 거칠게 푸득거렸다.
“흥분하지 말아요. 라윈.”
“후우.. 알았네. 이 봐 너구리 자네에게 물어봐야 할 것 있어. 대답해주면 좋겠군.”
“글쎄? 네가 그 대답을 내 입에서 들을 수 있을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우선 나는 가만의 재회에서 이 앞의 분과 얘기를 나누고 싶군.”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늙은 도적. 사실 나는 여기까지 오면서도 이 앞에 있는 그 누군가가 당신이 아니길 바랐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는 필요 없겠지요.”
“그렇습니까? 섭섭하군요. 저는 언젠가 당신과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여행 동안 저는 꽤 즐거운 시간이었거든요. 궁금하군요. 선생님께서 과연 어디까지 눈치 채고 오셨을지.”
“늙은 도적과 헤어지고 새로운 동행자인 맬기스를 만나고 처음 한 가지 이상한 것을 알게 됐어요. 그건 도적께서 말해주신 전설이야기와 맬기스가 알고 있는 것이랑 달랐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니까 그런 것이니 했어요. 그리고 후에 우리는 순례자들의 땅을 찾아야 할 때 가야할 방향을 정해야 했죠. 그런데 어디에도 이 땅을 제외한 또 다른 불모지란 곳은 주위에 없었어요. 오직 이 통곡의 불모지를 제외하곤 말이에요. 그래서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어쩌면 전설과는 다르게 불모지는 처음부터 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멋진 추리입니다. 허나 아직 그 가설을 완성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한 듯 한 데요?”
“네, 가설이 들어맞기 위해서라도 추가적으로 증명해야 했던 것이 있었죠. 사실 전 오완의 구릉지의 미로에서 우연히 한 도서관을 찾았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랄시프인가 하는 기린이 사는 곳이죠. 그녀는 저기 저 아래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감시자들의 우두머리인 젠의 혈족이기도 하고요.”
“전부 알고 계셨군요...”
“선생님이 숨기려고 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눈보라 속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 집중하느라고 그냥 모른 척 신경을 안 썼을 뿐입니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우연히 랄시프가 있는 도서관에서 붉은 곰에 관한 자료를 알게 되던 중 불모지에 관한 부분을 듣게 됐습니다. 붉은 곰이 뜬 날 불모지에 축복같은 비가 내렸고 다른 땅에 돌아갈 섭리를 빼앗는 그것은 죄악으로 금지시 되었다는 부분이요. 여기서 누군가가 비를 가져 옴으로써 그것이 해악이 되었다는 부분에서 저는 하나 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가설을 세웠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다른 땅에 내릴 비를 빼앗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겉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도적이 내게 해준 말이었어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내부의 힘과 별개로 외부의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작용한다.’...그래서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세계의 나누어진 땅들의 공간처럼 누군가 인위적인 힘을 이용해서 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이탈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맞아 떨어지게 되었죠. 누군가가 두 가지 힘을 사용해서 원래 하나였던 땅을 두 개로 격리시킨 뒤 하늘의 비를 끌어와 독점 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론을 완성할 증거를 찾는 거였죠. 그리고 라윈을 통해서 이 불모지에는 다른 곳과 달리 기온이 낮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전설... 왕 뿐만 아니라 그와 싸웠던 자가 탐냈던 두 가지 보물... 그것은 바로 청력과 인력입니다.”
흰 너구리는 양 손을 머리위로 올려 손뼉을 치면서 큰 소리로 낄낄 웃어댔다.
“대단합니다. 선생님이 풀어내신 그 추리보다도 그 동안 진화한 선생님의 사유(思惟)가 훨씬 더 저를 놀라게 하는군요. 정말 이 세계의 단순히 벌어지는 현상으로만 답답해하고 속으로 끙끙되던 그 선생님 맞습니까? 재밌다. 재밌어. 이 일만 아니었어도 선생님과의 유쾌한 여행을 좀 더 늘릴 마음도 있었는데. 낄낄낄낄”
“이봐 너구리. 끼어들어서 미안하네만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네. 이 쪽도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말이야.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자네가 숨기고 있는 그 보물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겠나?”
“낄낄낄낄. 덩치만 크고 눈 안은 한없이 작으면 뭐하겠나. 이미 마음속으로 집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 웃음 그 이상 멈추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인내심이 더 이상 이 앞발을 멈추게 하는데 한계가 된 듯 하니까.”
“멍청하긴. 그 보물과 관련된 힘 말인가? 그래서 여태 바보같이 찾아만 다녔나? 바로 자네 옆에 있지 않은가? 위대한 붉은 곰의 그림자. 고귀한 검은 보석이시여.”
『하늘의 달과 별들만큼 그 실체를 착각하기 쉬운 것이 있나?』
뭐..라고?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그 힘이라고?...
“헛소리마라.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한다니! 듣자 듣자하니 못 참겠군.”
“제가... 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모든 비밀을 가능하게 만드는 재료지요.”
“그 녀석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듣지 말게.”
“바로 선생님 같은 자가 이 비상식적인 현상을 지탱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겁니다. 약 천 년 전 이 천체에 그 대이변 발생 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중력 이상. 그 후로 일정한 시기마다 이 세계에 찾아와 크고 작은 질서혼란을 만드는 현상들, 혹시 그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그 모든 일의 뒤에는 바로 그런 암흑물질이 있었지요!”
“내가...암흑물질?”
“그렇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상태. 대이변 후 세계 전체에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진 후였지만, 상당히 많은 존재들이 무력하게 그것을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받아 들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일부 그렇지 않은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하늘 밖, 저 우주에서 찾아온 개입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오랜 적응과 연구를 통해 그 힘을 일부 다룰 수 있는 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극소수 그대로 자연에 구현된 각성상태를 제외하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집을 수도 없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큰 제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드디어 세상을 모두 놀라게 할 만한 기적 같은 발견을 하게 됩니다.”
“가공할 수 있는 형태로도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비록 그 성질이 균일하지 않아 일단 각성을 해보아야 완전히 확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요.”
“흥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어떻게 됐든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비로소 당신이 내 손에 들어 왔고,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지. 난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아주 멋진 기적을 일으킬 생각이야. 어쩌면 이 천체의 맨 처음 대이변 이후로 가장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대와 내가...”
이제야 알겠어.... 내가 이 손의 키월드(KeyWorld)과 함께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다른 하나의 조건인 수수께끼. 나와 그의 공통의 연결점을 말이야...
“하하하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선생님은 상태가 너무 온순하고 불균일했지요. 그렇기에 이용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데... 지금 같은 상태를 보니 놀랍도록 개성이 두드러져 있군요. 혹시 여행 도중에 다른 누군가가 각성을 도와주기라도 한 겁니까?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 들 듯이 분노에 찬 이글거리는 눈. 흐흐흐 저와 헤어지기 전에 선생님이 이랬다면 주저 없이 이용했을 텐데....쯧쯧 아깝다 아까워.”
“그리고 젠에게 오래전 자신의 선조들이 섬기던 왕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흰 표범..말이군요.”
“네. 그를 통해서 그들만이 아는 전설의 숨겨진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불모지의 옛 왕은 아주 절친한 친구인 한 동물이 있었다고 해요. 겉보기에도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둘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우정을 유지하며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하죠. 그 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요.”
“이봐 인간 친구, 자네도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건가. 인력과 청력이라니 그런 것으로 정말 멀쩡히 있는 땅을 떨어트려 놓을 수 있다는 건가? 만약 분리 되었다면 아래에 있는 저 땅은 대체 뭐란 말이야? 이 가짜 땅의 원본이라는 말인가?”
“아니요. 아마도 아래의 저 땅은 원래 태초부터 있던 불모지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처음부터 있던 새빨간 불모지 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황폐하게 죽어버린 땅에서 얻으려고 다툴 게 뭐가 있다고 어떻게 그 전설상에 그곳이란 말인가? 그리고 멀쩡한 두 땅이 어떻게 둘로 나뉘었다는 것인가?”
“제가 지금 말할 부분은 순수하게 저의 추측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축복같은 비가 내리기 더 오래 전부터 이 땅의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비극은 어느 날 밤 이 땅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 붉은 곰의 출몰로 시작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이 대지의 속성이 완전히 뒤 바뀌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바로 이 땅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재앙을 안게 될 인력을 가지고 말이죠. 그렇지요 늙은 도적님?”
“...계속 해보시지요.”
“젠은 전설에 감춰진 정말 놀라운 부분을 얘기해줬어요. 새빨간 불모지의 모든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그 누구보다도 그 땅을 사랑한 불모지를 다스린 흰 표범 여왕이었다고... 모두가 알지 못하는 전설의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땅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의 생존 여부를 걸고 대자연이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정복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냐는 문제 앞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싸움 뒤에 숨겨진 가장 큰 복병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가장 큰 조력자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왕은 그녀를 따르는 북쪽 하늘 감시자들과 함께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지나치게 억압하려 하였다. 몹시 순수했던 그녀는 모두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긍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그와 돌아서게 될 것을 알면서도 완강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에게 찾아 올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였다. 우연히 전쟁 도중의 연구결과로 많은 이들이 원하던 보물을 얻은 흰 표범 여왕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힘에 취해 자신을 제대로 제어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내면으로부터 완전히 스스로를 잡아먹혀버린 왕은 단 하룻밤 만에 불모지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죽음의 땅으로 밀어 넣었다. 일부 그녀의 변화를 옆에서 미리 눈치 챈 감시자들만이 서둘러 멀리 벗어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뭐야.. 하지만 자네의 말대로라면... 결국 오랜 싸움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왕과 대립하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땅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달라 반목이 있었을 뿐, 그 둘 간의 전쟁이었던 것은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아니, 이 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많은 자들이 속고 있었던 거에요. 누군가가 퍼트린 순례자들과 감시자들이 대립관계라는 말만을 믿고 그저 둘이 전설로부터 계속되는 오랜 싸움을 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자네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와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네. 그렇다면 저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여태까지..”
“그렇습니다. 싸움을 싫어해서 분쟁을 피해 도망치고 살 곳을 찾아 터전을 옮겨 다니지만 자신의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땅도 아닌 곳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그것 순례자와 감시자들이 분쟁이라는 말들을 누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퍼트렸다는 것인가? 자네의 말이 다 맞다면 어째서 지금 감시자들이 잔뜩 무장을 하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야? 그 오랜 세월 잠자코 있었다가 갑자기 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까닭은 아마 앞의 늙은 도적이 가지고 있을 거에요. 그리고 감시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 이 땅을 돌려받는 것이겠죠.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만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들의 오랜 터전은 지금 통곡의 불모지라고 부르는 저 아래의 불모지가 아니다 라고요. 그들이 이렇게 갑자기 움직인 이유는 아마......”
“아마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선생님?”
“네. 제가 도적님을 따라서 불모지의 중앙의 웅덩이에 와선 주위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웅성거림을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저는 그냥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여러 곳에서 들리고 있구나 하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들은 소리 중에 희미하지만 이상하게도 분명히 머리 위쪽에서도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어요. 그땐 제가 잘 못 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이쪽으로 오면서 또렷해진 그 소리를 다시 듣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라고요.”
이 때 갑자기 우리가 밟고 있는 대지가 굉음과 함께 크게 흔들거렸다. 늙은 도적이 바닥에서 모래 한 줌을 손으로 잡아 올린 채 말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 같은데 서둘러 얘기 해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는 이 오랜 이야기의 결말을요.”
『가끔은 햇빛과 그에 반사된 먼지만으로 노래가 들려』
“그 당시 불모지는 생명들이 살기에는 몹시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성질이 변한 땅은 새로 가지게 된 인력으로 주위의 자원이라 할 수 있는 물, 양분, 힘, 생명력, 자연을 모조리 부수어 흡수해 놓아주지 않았죠. 문제는 흡수한 그 것들을 그 땅 깊숙이만 빨아들여 저장할 뿐, 밖으로는 내보내지 않는 것이었죠. 결국 어떠한 결실을 거둘 수도 없고 생명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불모지를 상대로 이 땅의 짐승들은 하나의 결단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힘과 상쇄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력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라고 생각했기에 필사적으로 이 세계에서 자신의 땅과 반대되는 힘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의 힘이 가져온 재앙은 다른 힘으로 막을 수 있어도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해 이에 반대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녀를 지지하던 자들은 서서히 반대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모든 땅에 사는 생명들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왕과 같이 소극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전설의 이야기대로 결국 연구의 끝으로 이 오래된 재앙을 해결할 힘이 발견됩니다. 하지만 이를 억압한 왕이 그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오지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왕이 그 힘을 사용하게 됩니다. 아마도 왕도 눈앞에 문제를 당장에 해결해준 힘의 유혹에선 어쩔 수 없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왕의 예상과 달리 그 힘은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충분히 큰 힘을 빌려야 했지만 왕은 완벽히 그것을 이끌어 낼 수 없었죠. 결국 왕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이 땅의 힘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저 먼 곳으로 보내야한다’ 라고요. 결국 불모지를 하늘 저 위로 올려 보내기 위해 마지막 큰 힘을 써야했던 그녀는 아마......”
“그만!!”
“제 얘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이야기는 왕의 마지막 염원대로 성공을 하게 됩니다. 밀어내는 힘과 당기는 힘, 그리고 중력이 균형을 이루어 하늘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불행히도 그대로 이 하늘 위 땅에 갇힌 생명은 그대로 이 땅과 함께 비극의 최후를 맞게 되었을 겁니다. 그들이 바라는 희망은 온데 간데도 없이 ‘낙원’이라는 말이 우습게도요...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러 진짜 이 땅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하나 사라질 무렵 왕의 추측대로 이 땅이 가진 힘과 함께 균형을 이루는 이 땅도 남은 중력과 함께 떨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땅은 하늘에 남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늘의 태양빛은 아래로 내려 보내고 비만은 이 땅에 머금은 채로 말이죠.”
“그만.. 거기까지. 선생님의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군요. 이만 더 늦지 않게 돌아가십시오. 아쉽게도 선생님과 저 성난 말이 찾으러 온 것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곧 먼지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흩어집니다.”
뭐?
“이 조그만 너구리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라윈! 우리가 여기로 온 곳으로 나가야 돼요. 서둘러야 돼요!”
“서둘러야 돼요! 곧 이 공간이 하늘 아래로 떨어져 버릴 거에요.”
“그게 정말인가?”
그 때 다시 한 번 큰 소리와 함께 아까보다 더 크고 오랜 진동이 일어났다.
“휴 며칠 전부터 위기의 연속이로군. 여기서 최후를 맞을 수는 없지. 이 봐 친구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세.”
“네 알았어요. 잠시만요.”
그새 늙은 도적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무얼 꾸물거리는 겐가. 자칫 하다간 땅도 밟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늙은 도적이 보이지 않아요... 라윈 먼저가요! 전 늙은 도적을 찾아야 해요.”
“그 자는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자신이 살 길은 찾아 놓고 내뺏을 테지.”
“그럴 것 같진 않아요. 아직 여기에 있을 거 에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봐 그럴 시간은 없어. 어서 이곳으로 오게!!”
이 때 3번째의 큰 진동으로 라윈은 공간의 틈으로 완전히 빠져버렸다.
“라윈!!”
라윈의 말대로 꾸물거릴 여유는 없다. 어서 그를 찾아서 나가야 돼. 그러곤 정신없이 사방으로 달렸다. 처음 와서 느꼈던 대로 이 곳은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어떻게 늙은 도적은 이 외로운 공간에서 혼자서 견디고 살았을까. 이 곳을 떠나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한 참을 뛰어다니다 다시 한 번 저 땅 밑에서부터 들리던 그 ‘부름’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 곳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그 방향에는 늙은 도적이 허공을 바라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도적님!”
“......왜 빠져나가시지 않았습니까? 아까 말한 대로 이제 이 곳은 영영 사라집니다. 더 늦지 않게 어서...”
“당신을 버리고 갈 순 없어요. 저와 함께 빠져 나가요!”
“저는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도적님이 사랑한 땅과 함께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그때 땅이 한 번 덜컥거리고 아래쪽을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흥, 이젠 늦어버렸군요.”
“늙은 도적.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당신은 정말 저안의 뭔가를 일깨우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보내준 것인가요?”
“글쎄요. 어떨지? 하하하. 이제 시간이니 뭐니 중요하지 않으니 아까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알려드리죠. 선생님의 추리는 멋졌지만 틀린 부분을 지적해드리고 싶군요. 우선 그녀는 청력이란 힘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나와 많은 이들이 이 땅에 맞서기 위해 상쇄되는 힘을 찾고 연구하고 있을 때,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스스로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왕이었으니까요. 이러한 힘을 특정 방식으로 다루는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 우리들과 다르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찾으려 했습니다. 결국 마침내 그녀와 저는 서로 각자의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그녀는 다른 대지에 있는 다른 왕에게 도움을 요청해 스스로를 희생해 그 힘을 근본적으로 봉인하려 했습니다. 힘이란 옮겨갈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녀가 어떠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것을 제대로 다 듣지도 않고 오해해서 납득하지도 않았지요. 사실 저는 그녀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나와 뜻을 달리하고 나와 생각을 공유하지 않고, 저와 다른 누군가와 이 것을 끝내려고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스스로 먼저 해결해서 제가 옳았다고, 그녀가 나의 편에서 돕는 게 맞았다고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그 날. 제가 아무도 모르게 그 힘을 사용하여 할 때 그녀가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저를 갑자기 덮쳐 말리더군요. 지금의 선생님처럼 이요. 한참을 겨루며 뒹굴다가 그녀에게 그것을 뺏겼습니다. 그녀는 그 힘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향해 그 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 후로는 선생님의 추측대로입니다. 밀어내는 힘을 한계를 넘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끌어낸 그녀는 결국 자시 자신마저 공간에서 묽어져 사라져 버릴 정도로 작게 흩어져 버렸죠. 제가 이 땅을 왜 떠나지 않냐 물었습니까? 보시다시피 이 땅에서는 제가 더 이상 지킬 무엇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땅도 모든 생명들도 전부 그렇게 시간과 함께 떠나버렸으니까요. 이 하늘 위 공간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심하고 비참한 저의 마지막 발악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 기대한 미래, 내 주위의 모든 자들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저와 허무함만 남겨둔 채로 다 떠나버렸으니까요. 이미 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린 그녀라도 더 이상 멀어지지 않도록, 흩어지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억지로 꼭 붙잡아 두지라도 않으면 정말 미쳐버려 죽을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토록 증오하던 이 저주받은 힘을 사용해서라도 말이지요!!........”
“저기... 늙은 도적의 선택은 잘못 됐던 건 아니에요. 그녀도 당신도 둘 다 이 땅과 그 전부를 사랑했어요. 다만 둘이 서로 엇갈려 다른 길을 걸어서 같이 가지 못했을 뿐. 서로가 최종적으로 생각한 바는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제 와서 그런 위로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저 절 비참하게 만들 뿐이니까요.”
“위로가 아니에요! 증거가 있어요.”
“네? 증거라고요? 하하하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웃기시는 군요. 무슨 증거를..”
“이것을 보세요. 도적님이 제게 주신 열매에요. 여기로 오는데 이것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어요. 혹시 이곳의 출입은 이 진짜 불모지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은 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밀어내도록 막은 것 아닌가요?”
“.......”
“도적이 한 땐 저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길잡이를 자처했지만 그 덕분에 저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똑바로 불모지로 올 수 있었어요. 덕분에 맬기스도 만나고 그 다음도 갈 수 있었죠. 솔직히 말해서 도적님과 떨어지게 된 후 굉장히 섭섭하고 허전했어요. 하지만 도적이 옆에 있지 않아도 당신에게서 받은 단서와 흔적들은 내게 또 다른 것을 연결하는 이음매로 되어 줬어요. 덕분에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고요! 마찬가지에요! 도적과 그 여왕님이 비록 다른 길을 걸어야 했지만, 서로 옆에서 격려하고 힘내라고 응원할 수 없었지만, 결코 둘의 우정은 끊어지지 못했어요. 갈라지고 찢겨지고 끊어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돌아섰을 뿐, 눈을 가리는 모든 장막이 걷히고 나면 드러나지 않았던 서로가 생각하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이음매가 되어 줄게요. 나를 믿고 이젠 내 손을 잡아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나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손을 내민다....
“바보야! 여태 내 말을 듣지도 않더니... 몇 대 맞더니 드디어 정신이 드냐? 그래도 네가 너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편했었단 말이야. 혹시라도 너마저 포기하고 떠나면 또 다시 혼자가 되는 가 아닌가 생각에 무서웠거든. 비록 우리가 제법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지만.. 자 이제는 내 손을 잡아. 일어나”
“...앞으로 선생님이 상대하실 운명은 지금보다 훨씬 차갑고 비정한 것일 겁니다. 저 말고도 훨씬 검고 어두운자들이 선생님을 노릴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이 믿어 왔던 것들이 송두리째 선생님께 등을 돌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선생님과 함께 길잡이로서의 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꼭 찾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입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런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와 손을 마주 잡았고 그 순간 사라져 버리는 땅 사이로 빠져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보는 감정을 담은 그의 표정.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지상으로 향해 말 그대로 멈출 수도 없이 곤두박질 하려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많은 감시자들과 젠이 보였다. 그리고 맬기스까지.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난 이제 이대로 죽는 건가? 그대로 땅으로 충돌하기 직전의 찰나 하늘에서 무언가 따뜻한 느낌의 무언가가 나를 끌어 당겼다. 덕분에 속도가 떨어져 땅에 천천히 내려올 수 있었다. 나를 보고 맬기스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감시자들 사이로 라윈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우리를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라윈이 이미 지상으로 내려와 대부분의 상황을 정리한 뒤였다.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얘기했다.
“이봐 늙은 도적. 그것이 궁금하구만. 자네가 남에게서 훔쳐 빼앗은 것 중에 가장 대단한 것은 무엇이었나? 모두의 염원을 송두리 째 가지고 달아난 것이었나? 아니면 허무함과 바꾼 자신의 영혼인가? 아니면 그저 단지 한 누군가의 행복이었나?”
불모지에 아주 오랜만에 따뜻하고 큰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던가』
그 후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그 사이에 북쪽 하늘 감시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하늘의 땅은 그렇게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앞으로 그들은 계곡의 근거지를 삼아 정착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젠은 동굴이 좁아 불편해했지만 트라올가는 꽤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맬기스와 트라올가의 최종승부는 결국 누구의 승리인지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다음 승부를 기약하고 나중으로 미룬 듯 하였다. 맬기스는 그 때 우리와 헤어진 뒤 결국 감시자들에게 둘러 쌓였지만 험하게 다뤄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격하게 반항하는 그를 젠이 뒷발질로 잠재웠다고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됐지만 순례자란 이름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의미로 변질 되어 꽤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있었다. 이 땅에서 대표적 주축이 사라진 후 불모지 중앙의 상단들은 대부분 다음 거점을 찾아서 와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부도 이전에 하는 첩자 활동을 더 이상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서 현장 활동으로 바꾸었다나 뭐라나. 그리고 다시 한 번 라윈의 등을 빌려 결국 푸른 별의 계산대를 넘어서 부글거리는 산이 있는 땅의 경계에 왔다. 오면서 다시 한 번 찾아 봤지만 나에게 특수한 의식을 치르려고 했던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봐 친구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아요. 어차피 맬기스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그리고 저도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닌 걸요.”
“자네는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리지는 않았네만. 그래도 그 사이에 더 나이를 먹은 것 같긴 하구만. 이번 일은 정말 잘 해내주었네. 정말 고마워. 저번에 나한테 화를 내면서 상식이네 뭐네 받아들일 수 없네 뭐네 해도 잘 할 수 있잖아!”
“그렇네. 인간친구. 나나 맬기스나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 언제나 도움이 필요할 땐 우리를 부르게 순식간에 다녀 올 테니. 물론 저 친구는 느림보가 같이 느려서 한 참 걸릴 테지만 말이야.
“또 나를 빼놓고 혼자 가겠다는 말인가? 내가 비록 자네보다는 느려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이 맬기스님 같은 멋진 경호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야”
“하하하. 맞아요 정말 믿음직스러워요. 맬기스가 용감하게 지켜줬던 그 순간들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에요. 그리고 바람같이 빨랐던 라윈도요. 모두 고마워요. 셋이 같이 했던 그 짧은 시간은 저에게 앞으로 큰 용기가 되어 줄 거에요.”
“그렇게 감동적으로 말해버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말인가”
“설마 자네 우는 건가?”
“이봐 용감한 깊은 바다 악어는 이럴 때에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아직도 나는 믿기지 않아서 그래. 자네가 정말 이렇게 가버린다니.”
고개를 살짝 젓고 가볍게 웃었다.
“그럼요. 저는 이름을 찾는 자니까요.”
(6장 새로운 이음매와 함께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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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난 알린이라고 해. 있잖아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이름 같은 건 없어. 그냥 흰 너구리일 뿐이야”
“그러니? 하여튼 사실 너를 만나게 돼서 나는 정말 행복해. 그 전까지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외로웠거든”
“내가 어째서 너의 친구야?”
“그럼 우리가 친구가 아니란 말이야?”
“우선 너와 나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아. 너는 모두한테 존경 받는 왕인데다가 불모지에서 제일가는 멋진 표범이라고”
“그게 다야? 우리는 그래도 서로 꽤 닮았어...음 그래. 우리는 희잖아?”
“그렇게 억지로 안 생각해내도 돼.... 근데 왜 나한테 말을 건 거야?”
“그야 너도 혼자 있었잖아. 그냥 외로워 보이 길래”
“난 혼자라도 외롭지 않아, 그리고 난..”
“있지. 있지. 요즘 이 땅엔 이런 말이 유행이래. ‘하늘과 땅의 사랑이 사이를 매워 어느 풀 한포기 틈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곳이 없네.’ 정말 멋지고도 달콤한 말 아니니?”
“칫, 내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는군. 흥 나도 알아. 정말 바보 같은 말이지. 보인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어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뭐...그렇긴 하지만 저런 것으로도 충분히 멋있잖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마음의 흔적과 이음매는 결국 남게 되는 걸. 마치 사랑처럼 말이야. 헤헤”
“뭐야 그 말은.... 요즘 유행이야?”
“흥 재미없긴. 자 이걸 받아 너한테 주는 거야. 별건 아니고 열매야.”
“응? 이게 열매인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걸 왜 주는 거야?”
“감시자 아저씨들이 챙겨주는 음식 중에서 먹기 싫은 것들을 몰래 숨기고 있거든. 근데 너희들은 이런 것을 먹는다며?”
“그러니깐 이걸 왜.. 하여튼 고마워...친..”
“뭐라고? 잘 못 들었어.”
“고맙다고 친..친구”
“하하하 그래 친구가 된 기념으로 너한테 선물을 하나 줄게”
“아까 열매는 선물이 아니야?”
“그건 그냥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야. 정작 너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게 같은 말 아닌가? 아니 다른가.....?”
“좋아 내가 네게 있어서 처음으로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앞으로 이것은 너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가 될 것이며 많은 자들이 너를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될 거야. 음... 그래! ‘늙은 도적’ 어때?”
“왜 하필 ‘늙은’이야? 난 이제 고작 3살이라고!”
“그냥 넌 수염도 달려 있고 왠지 늙었다는 표현이 느낌도 있고 멋있잖아. 도적이란 수식어도 재밌고 말이야. 혹시 별로야?”
“흥 별로야... 일단은 그걸로 하고 나중에 좀 더 마음에 드는 이름을 생각해볼게”
7장
변해버린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자고 한다면 그 차이는 꽤 신묘하지요.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면 이상합니다. 보인다고 하는 말이 실제로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어떻게 장담한단 말입니까.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게 내가 본 것인지도 확실치 않는 데 말입니다. 다 인지할 수도 없이 매우 빠르게 번뜩이는 그 섬광들 속에서, 차라리 나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속 편할지도 모릅니다. 말장난 같은 이 말들도 어쩌면 나의 진심이 아닌지도 모르지만요.
『겉보기엔 난 어때? 괜찮아 보여?』
여행을 시작한 뒤로 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새삼스러운 것과 낯선 것들이 함께하고 있다. 얼마 전의 큰 사건 후로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어떤 변화라고 설명해야 할지 어렵지만, 그것은 나에게 일전에는 없던 특별한 능력 같은 것이었다. 그 전의 나는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어쩌면 많은 것들이 누락되어져 있었다. 결핍됐다고 하는 표현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내부 또는 외부로 그 문제들과 싸우며 답을 찾아야 했다. 그럼으로써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스스로 눈에 비친 달라진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아직도 모르는 것들로 투성이지만 말이야. 그 것이 어떤 계기에서 일어난 것인지 짐작만 할 뿐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여튼 난 지금 예전보다 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 한참을 혼자서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지만, 내가 변한 것인지 나를 둘러싼 세계가 그렇게 된 것인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결국 나와 이 세계 사이의 접점에서 어떤 무언가가 발생해 일어난 일이라고... 그리 마무리 지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드디어 여행을 시작하면 들었던 그 산이구나.”
그저 겉으로 보이기로는 잘 알 수 없는 저 산에 대해서 라윈은 이 세계를 이루는 땅 중에서 이탈한 땅들 중 하나라고 얘기했다. 벽의 왕이 만나보길 권한 자가 어째서 저런 곳에 있는 곳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해 듣지 못했으니 다른 이의 말을 통해서 들어나 봐야겠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동행자가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그들이 있었다면 앞으로 나의 여행에 좀 더 편했을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 동안 많은 것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그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밖에.. 그리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실 이 땅에 온 뒤로 나도 모르게 벌써 몇 번째 이런 행동을 취했다. 뭔가 가슴이 뛰는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세계에 온 뒤로는 잘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게 맬기스가 말했던 덥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군. 내가 변했다고 하지만 이젠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흠...”
산머리 위로 빙빙 돌고 있는 새들의 무리가 보였다. 멀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새치고는 넓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산에 이르러서는 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오다가 곳곳에 여러 짐승들을 보긴 했지만 그들은 정작 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저기 높다랗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뿐 그 이상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나 같이 볼일이 있는 자가 아니면 그들에게 그런 반응을 기대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내가 그들에게서 느낀 위화감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야. 맬기스가 나를 환송하기 전 나에게 자신이 쓰는 것과 비슷한 지팡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가 쓰는 것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상대적으로 가벼워 쓰기 편하다. 그의 걱정과 달리 아직까진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해를 끼칠만하거나 위협적인 자들을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나도 맬기스처럼 단련해 두는 게 만약을 위해서라도 좋겠지. 그가 휘둘렀던 것을 떠올려 보며 나도 흉내내보았다. 음 이렇게 였던가? 그가 했던 것처럼 그어도 보고 찔러도 보고 막아도 보았다. 그가 휘두르는 동작은 부드러운 옷처럼 가볍고 유연한 듯 했지만 일순간의 힘은 커다란 바위처럼 묵직하고 강력했었다. 그처럼 흉내 내려면 이 것이 내 손에 익숙해지게 만들 시간이 필요하겠어. 음? 저기 저 쪽에 개 하나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잖아? 내가 연습하는 것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한참 그와 나는 정적을 유지한 체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그가 먼저 발을 때 내게로 다가왔다. 말없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오는 그를 향해 나도 잔뜩 긴장했다. 지팡이를 내 몸으로 당겨 바짝 붙여 잡고 발 하나를 뒤로 빼고 몸의 중심을 아래쪽으로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 앞에 섰다.
“저...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이 땅은 처음이라.”
“.......그러셨군요. 그런데 어쩌죠? 저도 마찬가지라..하하”
“아.. 그렇습니까? 실례했군요. 그럼 안녕히”
그는 다시 땅에 머리를 숙이고 킁킁 거리며 내게서 멀어졌다. 아차.. 혹시 푸른 별의 계산대를 가는 길이면 도와줄 수 있는데.. 어디 가는지 라도 물어볼 것을 그랬군. 누군가가 길을 물어보기는 처음이라 생각지 못했어. 그나저나 저 개... 아니야. 그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이 곳의 지형은 가운데의 큰 산을 중심으로 뛰엄뛰엄 언덕들이 불긋불긋 솟아 있었다. 곳곳에는 하얀 연기도 피어올라. 이따금 시야가 흐려져 지나기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몇 밤이 지나면 저 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벽의 왕을 기점으로 시작한 나의 여정은 여러 땅들과 많은 자들을 거쳐 왔고 그들은 내게 이 세계를 이해하는 보이지 않는 단서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내가 저 곳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고 말이야.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인 것들은 많아. 나는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고 있는데 그 간격과 경과가 불균일한 것 같단 말이야. 이 땅과 저 땅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고 말이야. 어째서 하늘을 지나는 달과 별들의 속도가 땅마다 다르며 심지어 해와 달이 각각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바보 같지만 나는 때로 내가 가야 할 여행의 목적보다 이런 주위의 다른 것들에 더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가야할 길은 누군가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그어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내가 한정한 것도 아니었다.
“저게 끓어오르는 산이라고 했던가. 멀리서 보기에도 울렁울렁 거리는 게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야. 그래 어쩌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 곳을 지나기 전에 만난 몇몇의 짐승들은 해가 지면 되도록 산 쪽으로 가는 것은 자제하는 것을 권했다. 밤이 되면 산이 잠에서 깨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날이 어두워져도 그 곳의 영향으로 주위가 밝아져 이동하기에는 한결 편하였다. 다만 계속 다가간다면 그 곳에서 흘러내리는 붉은색 물들과 노란 연기로 인해 위험하다고 하니 무슨 방법이 필요하긴 할 듯하다. 맬기스에게 듣자하니 산에서만 숨어 생활하는 짐승들만 아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윽고 해가 지고 산에서 좀 떨어져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리에서 전진하던 길을 멈췄다. 날이 밝으면 주위의 짐승들에게 길을 묻거나 같이 갈 수 있는 자들을 알아 봐야겠어. 다른 이들처럼 밤에 눈을 붙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다시 그를 만나 대화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음, 오늘은 은빛 제비가 밤하늘에 걸렸구나.
『너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길 기대해.』
그렇게 다음 해가 뜨길 기다리며 쪼그리며 앉아 밤을 보내고 있다. 요즘엔 쭉 혼자 있다 보니 덕분에 스스로 무얼 계속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앞으로 검증해볼 몇 가지 가정과 추측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만약 늙은 도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계의 땅들 위에 있는 하늘은 각기 다른 해와 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말이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지금 발로 밟고 서있는 천체가 동시에 여러 개라는 말이 되니까. 이 천체를 둘러싼 주위의 우주가 내가 다른 땅으로 밟고 넘어갈 때마다 달라진 다는 뜻이 아닌가. 비록 그가 내게 그런 거짓을 말 했다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머리로는 이런 현상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의 말을 받아들여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내가 지금 있는 이 세계는 각 땅별로 고유한 각기 다른 하나의 천체이며 다른 땅을 넘어 갈 때 마다 아주 멀리 있는 다른 우주의 천체로 이동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고작 그 사이를 내딛는 작은 한 발자국으로 말이지. 물론 그의 말이 틀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나를 놀리려고 만든 가벼운 장난일 수도 있지. 그의 말을 반박할 증거를 하나 찾아내고자 한다면, 땅과 땅 사이를 넘어 올 때 밤낮이 그대로 이거나 해와 달이 떠 있는 위치가 바뀌지 않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다만 그가 그냥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그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의미를 두고 싶었다. 두 번째로 각 땅별로 흘러가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육안으로 관측이 되는 정보다. 여기서 시간은 하늘의 해와 달의 순환이다. 만약 이 세계의 땅들이 하나의 천체를 이루고 그 천체 주위의 우주가 하나라면 그 순환의 속도가 차이가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곳은 그 흐름이 느린 편인가 하면 어떤 곳은 몹시 빨랐다. 이 천체가 하나의 전체로서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현상의 차이는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전의 첫 번째 가정처럼 각 땅별로 각기 다른 천체가 아닌 이상 내 머리로는 설명하려고 해봤자 그 이상은 모순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내 주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후우.”
붉은 기운이 솟았다. 이제 나와 마찬가지로 저 산을 오르려는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내가 비록 더위를 안탄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저 매서운 불길과 연기들에 대해서도 안전하리란 법은 없다. 이미 올라가본 적이 있거나 저 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필요해. 해가 뜨자마자 곧 바로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동물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전부 다 여기 오면서 만났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저 산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위험하니 가까이 가지 말라며 경고를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을 숨기려는 느낌도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그것을 기억해내려 할 때 무엇이 그들의 인지를 정지시킨 것처럼 딱 그대로 가만히 굳어버렸다. 그 뒤로도 한참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할 순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조그맣게 솟아오른 작은 언덕위로 산을 바라 본 채로 주저앉아 버렸다. 다들 정말 이상하군. 이 땅에 꽤 머무르는 것 같은 자들이 하나같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다니. 혹시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라면 산도 올라가지 못하고 며칠을 허비해 버리겠어. 그냥 무작정 일단 올라가볼까? 밤에만 활동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낮 동안은 비교적 안전할지도 모르지. 그때 갑자기 산허리 쪽에서 폭발과 함께 분출되는 파편들과 재가 날리고 붉은 용암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나저나 저 녀석 날 언제까지 따라 다닐 생각이지?”
며칠 전 밤부터 한 작은 짐승이 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을 눈치 챘다. 실제로 보면 내 종아리 언저리에나 올 정도이려나? 나를 몰래 지켜보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게서 숨어서 스스로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 동안 이미 나에게 몇 번이고 들켜 발각이 됐지만 그때마다 깜작 놀라 바위 뒤로 숨는 것이 귀여워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찾는 것도 지겨워 졌는데 저 녀석이나 놀래 켜 줄까나. 나는 녀석이 일부로 나와 거리를 유지한 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로 조금 이동하는 척하면서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겨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자세히 보니 조그만 얼룩 고양이였다. 녀석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내가 시야에서 사라져 놓친 마냥 펄쩍 펄쩍 뛰며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 바위에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난 일부러 바위 위까지 엉금엉금 올라가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그가 무방비한 틈을 타서 하나, 둘, 셋!
“이봐!”
이 녀석은 절대로 못 볼 것은 본 것 마냥 기겁하면서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좌우로 왔다 갔다 뛰다가 멀리 가지 못하고 결국 바로 앞의 바위 뒤로 숨었다.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이번에는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음...며칠 전부터?”
“그럼 내가 그 동안 허겁지겁 숨는 것을 다 봤겠네요..?”
“물론입니다.”
“...분명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그 중에 몇 번만 빼면요.”
“휴... 나는 정말 바보야.”
“이제는 말해주겠어요? 당신이 누구인지, 왜 나를 따라다녔는지.”
그는 한 발자국 옆으로 움직여 얼굴만을 바위 옆으로 조금 빼며 말을 했다.
“계속 몰래 쫓아 다녀서 미안해요. 정말로! 정말로! 나쁜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미안해요. 믿어주세요! 힝 바보.”
그렇게 말하곤 바로 다시 바위 뒤로 숨어 버렸다.
“괜찮으니까 얘기해보세요.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아요.”
그리곤 다시 얼굴을 바위 옆으로 빼고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위’라고 해요. 여기서 한 참 동쪽에 있는 땅에서 왔어요. 보시다시피 보잘 것 없는 그냥 작은 고양이에요.”
“당신은 보잘 것 없지 않아요. 보기에 그 얼룩무늬는 아주 멋진걸요?”
“하. 하. 하. 하. 정. 말..이요?”
“그럼요. 당연히 정말이지요. 반가워요 위. 난 서쪽에서 왔어요. 나는 그냥 ‘친구’라고 불러요.”
“친구요? 이름치고 특이하네요.”
“그건 이름이 아니에요. 사실 난 이름이 없거든요.”
고양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양쪽으로 까닥까닥 거리며 말을 했다.
“흠, 보기에도 나보다 훨씬 오래 사신 것 같은데 아직도 이름이 없다니. 이상하네. 이름이 없으면 남이 불러주기 힘들잖아요? 그냥 쉽게 하나 지으면 되지 않나요?”
“사실 나는 바로 그것을 찾기 위한 여행을 하는 중이에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알기 위해서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양이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눈이 달처럼 동그랗게 열렸다.
“오오!! 내가 제대로 따라왔어! 다시 반가워요. 저도 지금 혼자서 여행 중이거든요.”
“흠, 동쪽 멀리에서 왔다고 했죠? 거기는 어떤 곳인가요?”
“위쪽 불모지와 이곳 동쪽의 경계로 큰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서쪽에서 오셨다면 잘 모르실지도 그 바다는 주위로 7개의 대륙이 감싸고 있어요. 저는 그 동쪽 면에서도 좀 더 가면 나오는 노란 산맥에서 왔어요. 이 어둡고 시끌벅적한 대지에 비하면 아주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랍니다. 다음에 혹시 올 기회가 있으면 들러 주세요. 저희 할머니 요리 솜씨가 끝내주거든요.”
이 세계에 좋은 땅이 있다는 그런 말은 이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스스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고양이 예전의 나와 어딘가 비슷한 것 같군.
『이 세상은 나에게 같은 것도 다르게 보길 바라나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위. 다음에 그곳을 지나간다면 꼭 한 번 들릴게요.”
“음, 저는 저를 너무 꼬맹이로 봐주는 것을 싫어하지만, ‘친구’는 저한테 편히 말을 놓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딱딱한 말은 왠지 듣기 편하지 않네요.”
“음, 난 한 번도 말을 편하게 놓아 본적이 없어서 이미 그런 식의 말이 익숙해졌는데... 그럼 위. 어째서 나의 뒤를 따라왔던 거야?”
“며칠 전에 이 쪽으로 오기 전에 한 동물한테 저 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 걸 봤었어요. 사실 저도 저 산으로 가보고 싶은데 이 곳에 사는 어떤 동물도 그 답을 알려주지 않더군요. 다들 벙어리나 바보가 된 것처럼. 아이 참, 그렇다고 외부에서 온 우리들이 그것을 알리는 또 없잖아요? 저 같이 작은 동물이 자꾸 다른 동물들한테 기웃되는 것도 위험하고 그래서 친구를 따라가면 저 산 위를 오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럼 처음부터 내 앞에 나타났으면 되지 않았어?”
“그게 사실.....처음엔 친구도 좀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아니에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 항상 낯선 자와 날렵해 보이는 짐승을 경계하라고 했어요.”
“음 그러고 보니 위의 여행목적은 뭐야?”
“구체적인 여행의 목적은 없어요. 굳이 말한다면 이 세계의 멋진 곳과 여러 짐승들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죠. 그런 면에서 친구와 같지 않나요?”
“..나와 같다?”
“보아하니 친구의 여행은 목적을 가지고 단서를 쫓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을 확인하고 직접 맞부딪혀 겪어보아야 하죠. 사실 무엇을 찾는 여행과 어디로 가는 여행은 아주 작은 차이니까요.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을 얻는 것이 다를지는 모르지만 나를 무엇이 이끌고 나도 그 이끄는 힘에 반응해서 따라간다는 면에서 그 성격이 비슷한 것 같진 않나요?”
“흠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제가 여행을 시작하고 꽤 많은 짐승들을 보아 왔지만 친구처럼 인간은 거의 보지 못했네요. 제가 아는 한 적어도 이 세계에서의 인간은 무리나 군집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 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 같네요. 저하고 친구가 만난 것은 참 인연이에요. 히히”
“오. 인간을 만나 봤어? 얘기를 들려줘. 어떤 분이었어?”
“저도 한 명밖에 만나보지는 못했는데요. 저기 동쪽하고도 남쪽에 있는 밀림에서 봤었어요. 보아하니 거기서 사는 자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계속 무엇을 두리번 거리기만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자 말만하고, 이상한 자였어요.”
“음 나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좋겠군.”
“그나저나 우리 산은 어떻게 올라가죠? 보아하니 누군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기는 틀린 것 같은데.... 듣자하니 산에서만 생활하는 자들만이 다니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선 그 흔적을 찾아볼까요?”
“음, 누군가 저 산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나도 들어봤어. 다만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흔적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글쎄요. 저같이 작은 고양이라면 불가능할지라도 친구는 가능할지도요. 바로 그...”
“바로 그?”
“아무 것도 아니에요. 우리 한 번 같이 찾아볼까요?”
“혹시 저 산위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새들은 무언 가를 알지 않을까? 높은 곳에서 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우선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마 밤이 되면 산의 활동이 시작되고 나면 새들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거 에요. 일부는 내려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지켜볼까요?”
“좋은 생각이야. 곧 해가 질 듯하네. 그런데 저 새들은 저 산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저렇게 하늘에서 뱅뱅 돌고 있는 것일까?”
“아마 저 산위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그 ‘특별한 것’ 때문일 거에 요. 저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서 계속 산을 감시하고 있는 걸 지도요. 하하하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우리는 언덕에 하나 걸터앉아서 산 쪽을 응시하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수록 장관이군. 정말 산이 커다란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 있는 것 같아. 모든 생명이 잠들 시간에 홀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니. 아주 유별난 성격인 가봐.”
“밤에만 그의 심경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죠.”
산의 심경을 자극하는 무언가라...
“유별나다고 하지만 차라리 지금이 더 낫다고 하더군요.”
“그건 무슨 말이야?”
“옛날엔 지금보다 폭발이 더 크고 강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저 산도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은 탓이겠죠 뭐. 우리 할아버지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것처럼 이요.”
“재미있군. 산도 나이를 먹는다니. 그나저나 위. 이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 세계라니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시간이 이상하게 흐른다거나. 땅마다 보는 해와 달이 달라 보인다거나.”
“글쎄요. 옛날부터 그러려니 보던 것들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인상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세계에는 워낙 유별난 것이 많으니까 일일이 그런 것들까지 민감해지지 않는 건지도 모르고요.”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건가.,,”
“뭔가 속으로 끙끙대고 있는 것 같은데 얘기 해봐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게 말이지. 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조합해서 이 천체가 어떤 곳인지 구상을 해보면 들어맞지 않거든. 어딘가 설명일 빠진 것처럼 모순 상태야. 누군가 속 시원하게 답을 해준다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그냥 어느 한 왕이라도 만나 보지 그래요?”
“왕?”
“왕은 하늘 밖의 모든 운동에 관한 지식과 역사를 알고 있으니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지도 모르죠.”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고마워. 위가 아니면 그런 생각을 못했을 거야.”
“별말씀을.”
“이 땅에도 왕이 어딘가에 있겠지? 떠나기 전에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군.”
해가 완전히 지고 산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향하는 그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지구 어딘 가엔 석양이 지고 있겠지』
과연 산이 역동적으로 화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규칙적인 새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원으로 띠를 그리던 무리는 그 반경이 더 넓어지고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그곳에서 이탈해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땅으로 추락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 방향으로 불덩이가 튀거나 검은 연기가 솟은 방향이었다. 애초에 저런 지점만 다 확인하고 피해갈 수 있다면 고민을 덜 수 있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불규칙적이고 너무 위험요소가 많다. 절대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는 그런 조력자를 찾기 위해서 눈을 때지 않고 계속해서 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안 있어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있는 방향과 조금 옆쪽으로 날개를 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비틀거리고 균형을 못 잡는 낌새로는 곧 내려올 듯 도 했다.
“어서 따라가야 해.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몰라.”
우리는 하늘을 부유하는 그것의 동선을 쫓으며 언덕과 바위를 넘어 다니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저기 봐요! 새가 다시 균형을 찾았어요. 정신을 차린 건 가 봐요. 어떡하죠? 아직 저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소리를 질러볼까요?”
아주 짧은 순간. 새가 고개를 한두 번 내젓고, 날개로 몸을 완벽히 유지한 채로 눈으로 자신의 무리가 어디 있는지 가늠하고 몸을 틀려는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 것처럼, 발가락을 축으로 나를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고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혀 허리로부터 전달 된 힘으로 그대로 튕겨내 듯 앞으로 지팡이를 쏘아 올렸다. 날아간 그것은 의도대로 하늘의 새를 맞추지 않고 정확히 옆을 비껴갔다. 순간의 당황에 하늘을 부유한 새는 그대로 하늘을 가르지 못하고 날개를 이래저래 푸득거리다 힘을 잃고 이내 땅으로 추락했다.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곧장 그 지점을 향해 달렸다. 정신없이 뛰어 덮쳐서 잡은 새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나보다도....
“뭐야? 네 녀석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이거 놔! 갑자기 왜 이래? 아까 아래쪽에서 날아 온 것도 네 녀석들 짓이지?”
“잠깐만요. 학? 우리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얘기를 들어줘요.”
“흥 보아하니 인간 하나에 쪼그만 고양이 하나뿐인데 내가 뿌리치고 가도 어쩔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는데?”
“우리는 당신과 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까의 무례함은 사과드릴게요.”
“흠흠... 뭐 아까같이 위험한 도구는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일단 얘기는 들어주지.”
“저와 이 옆의 ‘친구’는 저 산으로 올라가는 게 목표에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산으로 진입하는 것은 밤에는 물론이고 낮에도 어려워요. 하늘에서 산을 내려다보고 있는 당신은 길을 알고 있나요?”
“낄낄낄. 고양이와 인간 친구의 조합이라, 그것 참 웃기군. 아니 웃어서 미안해 너무 뜬금없어서. 낄낄낄”
그렇게 한참을 웃어대다가 뒹굴 거리기도하고 숨을 고르기도 하고 다시 웃기도 하고 우리가 멍하니 지켜볼 때쯤에야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하늘에 있는 나는 아래에 어느 정도 안전한 길쯤은 알고 있기는 하지. 그런데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겠지? 너희들은 어째서 저 곳에 가려하는 거야?”
“저와 이 옆의 고양이는 각자 목적아래 여행 중입니다. 저는 저 산 위에서 만나봐야 할 자가 있어서 그 곳으로 가야 합니다.”
“...... 오호. 만나 봐야 할 자? 그게 누구지?”
“그는 ‘곱게 희어진 화석’입니다.”
“......으흠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내가 너를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원하는 그 곳으로 직접 안내해 줄 수 있다는 말이야.
“정말이요? 정말 그를 아세요?”
그는 우리를 쓱 흘깃 훑어보고 대답했다.
“그래. 그냥 길만 알려주기에는 너희들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내가 너희를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지.”
고양이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당신과 저 위에 많은 새들을 뭐 때문에 그렇게 빙빙 날고 있는 건가요?”
“흥. 쪼그만 고양이 따위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새는 우리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야. 그냥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을 산 어딘가에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찾는다고 저러는 것뿐이지. 그게 다야.”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저기 언저리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우러 뛰어갔다 왔고. 내가 돌아오자마자 그는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먼저 앞으로 갔다.
“뭐해 위. 우리도 따라가야지.”
“아무래도 저 자를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처음 만났는데 선뜩 알려주고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하겠다는 게 수상해요.”
“흠, 저자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내미는 손길을 잡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저 산을 올라갈 방법이 없어.”
“음, 그렇긴 하지만요. 칫. 뭔가 기분 나쁜 취급을 당한 것 같아 분해!”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지고 미심쩍을 때 누군가가 해준 얘기가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는 내게 모든 어지러움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혜는 주지는 못했다. 그는 나의 속마음과 생각까지 읽을 수 있었지만 그와 나의 예정된 미래를 전부를 볼 수 없었으며, 가장 가까이서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나는 내 앞의 많은 문들을 열고나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당시는 그게 현재 나의 지점이며 내가 있게 될 곳이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게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전부인 것처럼. 내가 닫지 않고 그저 지나온 문들이 언제까지나 내게 열려 있을 것처럼.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꿈속에서 만났고 서로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봐요 학. 그런데 밤보다 낮에 이동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난 그것을 기다려줄 정도로 시간이 넘치진 않는단 말이야. 그리고 걱정 말라고 나의 안내만 잘 받으면....”
그 순간 그의 발이 내딛은 땅의 조금 떨어진 오른쪽에서 갑작스럽게 연기가 치솟았다. 놀라며 달아나는 그를 따라 우리도 뒤쫓았다. 고양이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다 아는 척 잘난 체 하더니. 이러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르겠는 걸.”
“흥. 방금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고작 그 정도 일로 따지기는”
“그런데 학. 이 산에만 거주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들을 아나요?”
“없어.”
“네?”
“없다고. 내가 이 산을 내려다 본지 벌써 보름은 더 지났지만 어떤 생물이 돌아다니는 것은 본적이 없어. 짜증나는 산이야. 참나 그것 때문만 아니라도..........”
“....출발하기 전만해도 곱게 희어진 화석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했잖아요?”
“아..아..아참. 그랬지 내가 말을 잘 못했군. 정정할게. 내가 못 봤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산의 그대로에 한해서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보이는 산, 그대로?”
“흠, 뭐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참나 그것도 모르고 산을 오른다니 정말이지 답답하군. 내가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이 위험한 길을 두 발로 올라간다니”
“이봐 덩치만 큰 새.”
“덩치만 큰 새? 설마 나를 부르는 거냐?”
“그래. 너 말이야. 자꾸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진짜로 큰 코 다칠 줄 알아.”
“푸하하하하하. 최근에 짜증나는 일만 있다가 이렇게 다 웃기도 해보는구만. 이 봐 쪼그만 고양이. 네가 발톱을 세운다고 뭐가 될 줄 알아?”
“둘 다 그만해요. 위. 별 의미가 없이 던지는 말은 크게 지장이 없으면 무시하면 돼. 그리고 새. 당신네들의 무리에서는 그런 식으로 남을 공격하는 것이 예의인가요?”
“뭐라고? 감히 어디서! 산을 너희들끼리만 올라가고 싶은 거야?”
“당신도 어차피 우리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뭐. 뭐라고?”
“당신처럼 오만하고 앞뒤 안 가리고 말을 하는 자가 아무 이유 없이 선뜻 남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요?”
“.....흥 그런 게 뭐가 있다고..?”
“정말 우리가 이대로 돌아가 버려도 좋아요?”
“...칫. 그래 솔직히 말해주지. 너희들이 필요했던 것이 맞아. 정확히 말하면 인간 너 말이야. 네가 찾는 그 때문에 말이지.”
“그 분이 당신들이 찾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나요?”
“전부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는 말해주지. 어때 그래도 서로 이용하는 것은 똑같지 않나?”
“흥!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못된 새 같으니.”
“그래요 당신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서 이용하는 사이에요. 하지만 언제 필요하고 언제 그 사이를 끊을지는 본인의 선택이죠. 우리랑 좀 더 오래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좀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게 좋을 거 에요. 무슨 말인지 알죠?”
“칫. 알겠다고.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지.”
“그래서 당신이 이 산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는 부분이란?”
“흠. 이 산은 보이는 대로가 다가 아니란 말이지. 다시 말하자면 그 반대로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뜻이야. 이해했나?”
“..‘이탈한 땅’이군요.”
“그래. 이 세계를 원래 이루고 있던 17개의 땅 중 그 일부는 이탈해 자취를 감췄다고 하지. 그리고 여기가 그 전설로만 알려진 숨겨진 땅 중 하나이고 말이야.”
“당신들이 찾는 것도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에요?”
“흥. 눈치하나는 빠르긴. 그래도 그게 무엇인지는 알려줄 수 없지.”
“그렇다면 내가 찾는 그 분도 그 곳에 있다는 말인가요?”
“아무도 그것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직접 그곳으로 찾아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게 우리가 계속해서 이 위험한 산을 찾고 있는 이유지. 아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해.”
“이제야 솔직히 털어 놨군.”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겠다는 것은 거짓말이었군요?”
“그래.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내가 안전한 길은 아니깐 말이야. 다만 그렇다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전부 안다고는 안 했어.”
“이봐요.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갈 생각인데요?”
“글쎄. 이제부터는 네가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고 그것을 단서 삼아 찾아야지.”
“내가 뭐 하러요?”
“하게 될 걸?”
순간 새는 날개를 크게 옆으로 펴 요란하게 내젓고 매우 시끄러운 소리로 울어댔다.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저것은...그래 동료를 부르는 소리다. 잠시 후 하늘에서 많은 수의 새들이 내려와 우리를 둘러쌓고 나머지는 하늘에서 돌면서 내려다보았다. 하... 왠지 익숙한 상황인데..
『수면 위에 떨어지는 찬 물방울처럼, 너는 그렇게』
“무슨 일이야 비룸? 이 인간은 뭐고? 그리고 새끼 고양이까지?”
“난 새끼가 아니야! 이건 다 자란 몸이라고!”
“흥. 이제 말해보시지? 누가 큰 코 다칠 거라고? 어디 도망칠 수 있으면 해봐.”
“위. 내 뒤에 있어. 난 무섭지 않아요. 할 테면 해보세요.”
“저 인간 녀석이 이 산의 왕을 알고 있다. 어서 저 녀석을 잡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먼저 가장 앞에서 나설려는 자의 부리를 내가 먼저 지팡이로 휘둘러 세게 쳤다. 생각보다 위력이 있었던 것인지. 그 자는 비틀거리다 의식을 잃었고 주위의 다른 자들도 기세가 눌린 탓인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순간 내가 누구라도 된 듯 자신감 넘치고 신이 났지만 이내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무슨 소란이냐.”
하늘의 폭풍을 머금은 듯한 그의 등장은 나도 넋을 놓고 보기에 충분했다. 곧 바로 뒤 따라 셋이 더 내려왔다.
“이 인간이 그 늙은 고목 녀석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오호. 며칠을 헛고생하며 보냈는데 드디어 복덩이 굴러들어 왔군. 이리 오렴. 무서워 할 것 없단다. 나에 발톱으로 너를 순식간에 몇 조각으로 찢어발길 수 있지만, 나는 아무에게나 공격을 하는 막돼먹은 자는 아냐. 왜냐하면 고상하고 자비로운 자니까.”
“흥, 무리 중 일부가 하는 말만 들어도 그 전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 그 우두머리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뭐? 거기 고양이 방금 뭐라고 했지?”
“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대장. 저 쪼그만 고양이 녀석이 얼마나 건방지던지....”
“너보고 끼어들라고 한 적은 없는데...?”
겉은 온화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웃는 겉 얼굴 아래 감춰진 진짜 표정은 감출 수 없는 모양이군. 그를 두려워하는 주위의 같은 무리들의 표정으로 봐도 그가 얼마나 잔인하고 위압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어.
“저 건방진 새가 처음 보는 우리에게 무례하게 말하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다고요! 겉으로 보는 바로 함부로 평가하고 으스대다니 그 우두머리 수준을 알만해요!”
“으흠, 그랬단 말이지. 이봐요 고양이 이름이 뭐죠?”
“나..난 ‘위’라고 해요.”
“그래 위. 아무래도 너의 말대로 저 비룸이라는 자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군........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발톱을 이용해 무언가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비룸이라는 자는 기겁을 하며 날개를 펴 하늘로 날아올랐고, 우두머리와 함께 내려온 셋이 순식간에 같이 치 솟아 그를 감싸고 순서대로, 발톱으로 그의 날개를 찢고 그의 목을 물며, 날개로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처댔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잃고 추락한 그가 끌려 나가는 것까지 멍하니 처다 봤다.
“자 잠시 동안 끊어졌던 얘기를 계속해볼까 하는데 말이야. 거기 인간. 자네가 ‘곱게 희어진 화석’을 안다지?”
“그는 다른 누군가의 소개로 만나 보려고 하는 자일뿐. 그 이상은 자세히 알지 못해요. 따라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들도 나에게서 얻을 수 없을 거 에요.”
상대를 밀어내는 말이었지만 표정하나 안 바뀌고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는 내게 있어 더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음 으흥. 흥흥흥흥. 으흠. 음.”
“기분 나쁜 콧노래에요.”
태양을 가려버린 거대한 몸. 용솟음치는 이 산의 거친 운동조차도 일순간 들리지 않게 만들 정도로 강한 정적을 만들어내는 차가운 기운.
“이봐. 이봐. 어떤 존재가 남을 밀어낼 때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기운을 뿜어내는 것을 알고 있나? 그것은 우리 몸의 미세한 진동, 움직임의 변화, 안구의 이동, 심지어 호흡의 세기나 빠르기로도 전해져오지. 하지만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상대로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냐에 따라 다르지. 가령.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부정을 하는 것과 강한 거부를 하는 것은 다르다네. 또는 내가 스스로 의식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지나치게 나를 괴롭힌 나머지 그를 영영 내게서 밀어내고 싶을 때도 있고 말이야.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과연 나는, 자네에게 어떤 상태일 것 같나?”
“당신은 네게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없어요.”
“... 그건?”
“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당신은 아직 내게 무언가를 얻을 가능성을 접지 않고 있어요. 그 뿐이에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곳을 에워싼 긴장감으로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위만 조용히 돌아서 내 뒤로 와 숨었다.
“이거. 이거. 좀 놀려보다가 내가 거꾸로 당했군. 뭐 좋아.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야. 자네가 모른다고 하면 이 산에 있는 그 누군가가 그것을 알 수 있겠나? 내가? 아니면 주위의 이 멍청한 녀석들이? 그 고양이가? 아니지. 아니지. 모든 열쇠는 자네가 쥐고 있어. 당연한 이치 아니겠나?”
“오히려 저는 당신의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없군요. 제가 단순히 그를 만나는 것이 목적일 뿐,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모른다. 모른다. 그 말을 아주 쉽게 하는군. 어째서 자신이 모른다는 것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생각보다 오만한 자로군.”
“어떻게 모른다니... 내가 그것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고 생각나게 할 만한 단서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들이 없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하나요??”
“하. 하. 하. 자네는 정말 순진무구하군.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자네를 나무라는 말이 아니니. 그저 조금 참견하는 것뿐이랄까?”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빈정거림. 하지만 그의 말은 분명 나의 깊은 곳을 끄집어내는 위화감이 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감싼 보이지 않는 그것에 의문을 던지고』
“나의 말을 들어보게. 세상 많은 이들이 자신이 알게 된 것과 알아야 할 것에 흥미를 두지만 잊혀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지. 이상하다고 하지 않나? 모두 자신이 담을 수 있는 한계를 지닌 그릇을 가지고 있지. 즉 자신에게 과분한 것을 욕심내거나 그러한 행동을 했을 때는 해가 닥치는 거야. 바로 아까 전에 저 뒤로 사라진 얼간이처럼 말이야. 누구나 자신의 그릇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담지 못하는 것은 버리거나 아니면 뱉어내지. 여기서 문제. 스스로의 그릇을 정말 자기 자신이 다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비록 나를 채운 것이 나일지라도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고 달라져 온 수많은 집합체요. 나라는 온전한 형태와 크기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걸요.”
“그렇다면 다음 문제. 스스로의 그릇을 채우는 방법을 전부 알고 있나?”
“아니요. 대부분 그것은 매순간의 나와 함께 삼켜져 내부로 가져가지기도 하고, 인지할 수도 없는 많은 부분들이 내게로 들어와 이미 나의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제. 스스로가 어떻게 비워지는지 알고 있나?”
“아니요. 내게서 떠나는 것들은 내게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떠난다는 말도 없이 아무 눈치 챌 낌새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나의 세 번의 질문에 자네가 모두 ‘아니요’만 썼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보게 재밌는 친구. 무엇을 어떠하다고 말을 했을 때는 그 자체를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야. 모순이지 않나? 하하 자네는 모른다고 말을 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과거에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더라
“이봐요 덩치 큰 새. 옆의 인간 친구의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알 수 없는 걸 어떻게 직접 얘기한다는 말이에요. 세상에 그렇게 편리한 건 반칙이라고요.”
“흐음 고양이. 너의 말도 꽤 그럴 듯 하군. 단순하지만 명쾌한 대답이야. 허나, 만물의 소통이 그러하듯, 무언가로 통하는 물리적 통로에도 어느 연결점이 필요한 법이지. 반대로 말하자면 그 연결점을 찾으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그 시작점이고. 나를 이용해서 원하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이제야 이해를 좀 하는군. 이 산에 어떤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찾아 왔다는 것만으로 너는 이 쓸데없이 수만 채우고 있는 쓸모없는 새들 보다 훨씬 낫다는 말이지”
“당신도 그 새 중 일부가 아닌가요?”
나의 말로 주위의 다른 학들이 크게 분노하며 푸드득 되거나 울어 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두려운 존재의 화를 사게 될까봐 아무도 그 이상은 나서지 못했다.
“이봐. 이 쪽에서 점잖게 말해준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야. 그 여유가 언제 끝날지 기다린다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음, 어차피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협력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좋아요. 당신이 내 깊숙이 무의식으로부터 숨겨진 길을 여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 테고, 일단 함께 얘기를 하면서 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좋아. 나와 너희 셋을 제외하고 모두는 하늘에서 계속해서 찾던 작업을 계속해라.”
자기 주위의 최측근 셋을 두고 나머지는 하늘로 올려 보냈다. 그들은 우두머리의 신호에 자기 동족까지 서슴없이 처단했던 자들이다.
“흐응, 저들은 내 심복이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좋아요. 이때까지 새를 여럿 보기는 했지만 하늘을 나는 새와는 처음 얘기를 나눠 보는 군요. 하늘을 난다는 것은 무슨 기분이죠?”
“하늘을 난다는 것은 마치 스스로 나의 몸을 전부 잊어버리듯이 자유롭고 황홀한 경지지. 지상에서 두 발로 내딛고만 사는 자들은 결코 이 기분을 누리지 못할 것이야. 여행 중이라고 했나? 어떤 새들을 만나 보았나?”
“글쎄요. 그렇게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음, 하늘을 나는 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통곡의 불모지에서 감시자들을 만났고, 얘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부리가 금색에 위쪽으로 휘어진 독수리를 만났어요.”
“흠, 그렇다면 너는 필시 서쪽에서 왔겠군. 그들은 특별히 무슨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접점이 닿기 쉽지 않는 자들인데... 내가 너를 제대로 본 것 같군. 역시 재미있는 친구야. 이 세계에서 인간은 희귀한 만큼 별난 자들이라니까. 음, 이 쪽만 너무 관심을 주면 그 쪼이 서운해 할라나? 고양이께서는 이 위험한 산까지 무슨 볼일이시지?”
“난 혼자 여행 중이에요. 그저 이 산은 내게 있어서 작은 목표 중 하나일 뿐이에요.”
“뭐... 내게 있어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힘내보라고.”
“새의 대장. 당신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군요. 당신들은 이 산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는데 통하는 통로로 추측되는 곳이 있나요?”
“우리는 이 산을 이 잡듯이 뒤졌지. 작은 틈새나 동굴, 쥐가 다니는 길까지 말이야. 아마 지도를 그리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어딘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을 거라고 추측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예상되는 곳은 한 곳 뿐이야. 가장 위험한 곳. 그래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곳이지.”
“그건 어디죠?”
“분화구의 안 쪽. 밤에는 불규칙 적으로 폭발을 하기 때문에 절대로 접근할 수는 없고 그나마 낮에도 유독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사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 거라고 가능성을 두고 있지는 않아. 친구는 어떻게 생각을 하지?”
“나도 내가 찾는 그가 동굴에 있다고 들었어요. 만약 그런 동굴이 있다면 당신들이 이미 발견했겠죠. 먼저 수색을 토대로 추측을 하고 대상이 어디 있는지 가정을 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이 했던 말처럼 당신의 가능성을 당신이 아는 것에만 한정하는 것만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흠 아까 말한 것을 바로 응용하다니 제법 똘똘하군. 이제 저기 분화구가 보이나. 아직 제법 거리가 남았지만 이 이상 근접하는 것은 무리다. 너희도 나는 것이 좋겠군.”
“네?”
“이봐. 너희 중 하나가 이 친구들 좀 태워봐.”
“제가 하겠습니다. 이 봐 너희들. 멍하니 있지 말고 내 등에 올라타.”
정말 나를 태운 채로 날 수 있을지 의문 이었지만 날개를 펼친 새는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확실히 크긴 컸다. 사실 나는 건 상관없는데 떨어트리지 않게 신경만 썼으면.. 혼자 다닌 뒤로 조심한다고 하긴 했는데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돼 버린 건지 모르겠다. 나를 태우고 날기 시작한 새는 하늘의 띠를 이루는 무리와 합류했다. 위에서 보니 산의 전체적인 모습과 가운데의 분화구는 꽤 압도적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힘,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불꽃들, 폭발은 어딘가 춤을 추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봐.”
이번의 경우에는 저번의 경우와는 다르다. 어디로 사라진 것을 찾는 게 아니라 그곳 그 자리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하니까.
“이봐. 안 들려?”
응?
“너희가 타고 있는 것도 모르나? 참나. 누구는 무거운 것을 태워서 죽어라 날개 짓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미안해요. 딴 생각을 한다고 당신이 말을 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나 봐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당황스럽겠지만 나는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하늘의 새들과는 같은 종이긴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무리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어느 임무를 위해서 여기에 같은 무리인 척 섞여서 잠입해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설마?”
“그래. 얼마 전의 큰 사건 얘기는 전해 들었다. 잘 부탁해.”
(7장 변해버린 것 마침)....................
8장
하여야 했던 일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벌들과 새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떠 고개를 돌려봤습니다. 그러다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단순히 소리의 간섭이 아니라 내게서 들리게 하는 것과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요. 내가 무엇을 듣는다고 한다면 내게서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더 잘 듣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반대로 내가 듣지 못한다고 한다면 듣는 것은 무엇을 합니까? 듣지 못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건가요?
『가끔 내가 어지러워 보이지 않나요?』
“저기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 에요?”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네, 뫄웅은 자네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저 안으로 들어가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거야.”
“뫄웅이라면 저 우두머리 새 말인가요? 하지만 그도 말했듯이 실제적으로 밤이나 낮이나 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서요?”
“겉으로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네.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으름장을 하고 여기로 왔지만, 그렇다 할 아무런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가 찾겠다고 했다고요? 누구에게요?”
“많이 설명할 시간은 없어.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일단 그러겠다고 해. 쉿. 그가 오고 있어.”
“이봐 친구.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떠한가? 눈이 핑핑 돈다거나 다리가 떨리지는 않나? 뒤에 자네 친구처럼 말이야.”
아까부터 조용하더니. 위는 깃털을 부여잡고 얼굴을 보이지도 않게 파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요. 비록 뒤의 그는 좀 힘들어 보이지만요. 자. 계속 ‘아니요’만 했던 나를 데리고 이곳 하늘까지 왔으니 이제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시죠.”
“계획은 아주 간단하네. 자네가 저 곳으로 내려가서 과연 저 안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지만 확인해주면 되네. 자네가 딱 보고 있으면 ‘예’ 없다하면 ‘아니’ 어때, 생각보다 간단하지?”
“글쎄요. 분명 생각만큼은 확실히 단순하군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당신들이 이때까지 시도 해보지 못했던 이유는?”
“오! 물론 왜 해보지 않았겠나? 우리도 몹시 시도했었지. 쓸모없이 날개만 휘젓는 놈들보다는 직접 불구덩이에 빠져서라도 확인을 시켜보는 게 훨씬 쓸모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자네 그걸 알고 있나? 우리 두루미 종족은 특히 열에 약해. 주로 북쪽에서 서식을 하기 때문에 더위에는 잘 견디지 못하지. 고상한 나도 가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이 곳은 무척이나 덥지. 그런 우리 두루미들은 저 분화구 옆으로만 스쳐 지나가도 우리를 녹여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픽. 하고 잃는단 말이야. 우리가 그러한데 무슨 수가 있었겠나?”
“과연 더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래서 날 저 불구덩이로 내 던지겠다? 나라고 저 속에서 녹아사라지지 않거나 기절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오오.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우리가 그냥 잔뜩 배고픈 산에 밥 챙겨 주듯 쓱 던져 줄 순 없는 거지 않겠나. 여기서는 뿌옇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밑으로 가면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것이 있지. 자네를 태우고 있는 자가 물론 자네들을 저 곳으로 안내 해 줄 것이고 말이야.”
계속 입 다물고 있던 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친 짓이에요. 이건 그냥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내려가서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찾으리란 법도 없어요.”
“하하. 편한 것은 반칙이라고 주장하던 친구. 자네의 말처럼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길만 갈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하진 않지. 비록 자네에게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말이야. 자네들에게 입을 함부로 놀린 어리석은 자처럼 넝마가 될 수도 있고, 뜨거운 물속에 잠겨 피로를 풀며 이번 생애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지. 어떤 것이 좋겠나?”
“가끔 길을 잃었을 때는 현명한 자의 말을 듣는 것도 도움이 돼요. 하하하하.”
“거기 고양이. 넌 이 인간이 돌아올 때 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줘야겠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지...볼모? 아니 보증이라고 하지. 하하하. 어차피 가지도 못한 곳에 덥게 있느니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나? 하하하”
방금 스스로 입으로 볼모라고 말한 거지?
“그럼 뫄웅. 혹시 모를 상황을 가정해서 신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언제 돌아와야 할지에 대한 그런 것이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네가 알려주었나?”
그가 어디를 노려볼지를 알고 위가 잽싸게 받아쳤다.
“아까 비룸이라는 자한테 들었어요. 당신의 이름말이에요.”
“흠... 뭐 아무래도 좋아. 하여튼 저 산이 비록 변덕쟁이이긴 하지만 낮 동안은 비교적 잠잠하다가 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둥 커다란 한 번의 신호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지. 곧 있으면 날이 밝을 거야. 즉 자네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바로 그 사이가 된다는 거야. 어때 자신은 있나?”
“......한 가지만 묻죠. 하나, 어째서 우리가 이 일을 잘 해낼 거라고 믿는 거죠? 일반 짐승들은 이 산의 근처에 가기도 두려워한다고요. 하물며 이 산의 가장 위험한 곳으로 그냥 우리를 밀어 넣는다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들군요.”
“질문은 하나지만 두 가지로 답해주지. 첫째, 자네의 말처럼 일반 짐승들은 이 산에 웬만해선 얼씬도 하지 않지. 둘째, 나의 생각이 맞다고 한다면 너는 그냥 인간이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생물이 아니지. 그렇지 않나?”
“그게 무슨....?”
“내가 처음 너를 봤을 때 폭염으로 이글거리는 이 산 중턱에서도 한 방울의 땀조차 흘리고 있지 않았지. 처음엔 그냥 이 정도 더위에 적응 된 동물이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모든 생물은 스스로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기온이나 습도가 바뀐 것만으로 호흡은 달라지고 움직임에도 미세한 변화가 오지. 난 너를 지켜봤어. 하지만 너는 어떠한 그런 것도 눈치 챌 수 없었지. 마치 그 공간에서 없는 존재처럼 말이야! 아무 영향을 받지도 않는 것처럼!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내 짐작이 맞다면 넌 확실히 나에게 복덩어리가 될 거야. 네가 이곳에서 어떤 열쇠가 될 지는 이제 확인하면 될 것이고, 네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는 차차 확인해 보도록 하지.”
“이봐. 이봐. 어떤 존재가 남을 밀어낼 때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기운을 뿜어내는 것을 알고 있나? 그것은 우리 몸의 미세한 진동, 움직임의 변화, 안구의 이동, 심지어 호흡의 세기나 빠르기로도 전해져오지.”
“오호. 며칠을 헛고생하며 보냈는데 드디어 복덩이 굴러들어 왔군. 이리 오렴.”
“고개를 들고 말하고 싶은데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무서워서 그러지는 못하겠어요. 아버지가 아신다면 나를 혼내실 거야. 친구. 방금 저 학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에요?”
“글쎄... 이런 방식은 불편하지만 이젠 누군가가라도 나에게 알려줬으면 좋겠군.”
『혹시 외로울 때에 어두운 것을 찾지 않나?』
동이 트기 시작하자. 산의 기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누그러졌다. 마치 밤새 울고 보채다 막 잠이 든 아기처럼 말이야. 그리고 뫄웅으로부터 그가 찾고 있는 목걸이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었다. 의외로 별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그것도 본인의 입으로 말이다. 위는 먼저 나를 위에서 먼저 인사를 나눴다.
“고양이는 나와 함께 이 친구를 기다릴 거지?”
“나도 따라가고는 싶은데... 분하지만 이 이상이 한계인 건 인정해야겠죠. 미안해요. 산에 있을 동안은 쭉 함께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저는 평범한 고양이 일뿐이네요.”
“위. 다시 말하지만 너는 대단하고 멋진 고양이야. 혼자서 여행을 다니면서 목표를 달성하고 이렇게 위험한 산에 도전할 생각을 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 생각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친구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기도하며 기다릴게요.”
그리고 우리를 태우고 있는 자는 몇 바퀴 빙둘러가며 천천히 하강했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결국 잡히고 말거야. 모처럼 친구의 아는 자를 만나서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는데 면목이 없군. 그나저나 자네 정말로 열에 면역이라는 게 사실인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건 뫄웅이 말했듯이 저는 다른 이들과 좀 다르다는 거 에요. 모든 깨어있는 생명체들처럼 음식을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더위와 추위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심지어 잠을 자지도 않아요. 그렇게 이상한 건가요?”
“......음 맬기스가 처음 얘기해줬을 때는 믿기 어려웠는데, 정말로 내 눈앞에 그것이 나타나다니.. 그것도 인격을 가진 채로 말이야. 하여튼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자네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서 천만 다행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왜긴 왜겠나? 웃기게도 말이지. 저 바보들의 짐작대로, 정말로 그들이 찾는 건 저 안에 있기 때문이지. 이런 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나? 아니 그러지는 못하겠군. 이 산에서 저 곳보다 밝은 곳은 없으니까 말이야. 하하하하하. 별로 안 웃긴가? 어흠. 하여튼 잘된 일이란 뜻이야. 어흠..”
“네? 정말이요? 그걸 알고 있다면 어째서 저들보다 서둘러 안으로 갈 생각을 하지 못했죠? 더 빨리 저들의 계획을 막을 수 있잖아요?”
“그게....문제가 있었어. 이들이 이 산을 순식간에 미리 점령해 버렸다는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 채기 위해 미리 잠입해 있지만 정말 이번에는 아무런 낌새가 없었어. 마치 뫄웅이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귀뜸을 들은 것 마냥, 아무런 조짐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 정말 이랬던 적은 처음인데 말이야.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가 잠시 시간을 벌 동안 맬기스나 그런 다른 터프한 자를 투입했겠지. 휴. 이제 믿을 건 자네 밖에 없네.”
“당황스러워요.... 당신들은 정말로 저 안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 챘죠?”
“사실 이건 자네도 알지 모르겠네만....... 라윈이 저번에 조사를 나갔을 때 자연에서 발견되기 아주 힘든 희귀한 결정을 발견했네. 그것은 그 고유하면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 그리고 그것은 같은 그것에 이끌려 반응을 한다네. 덕분에 우리는 그 동안의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그것과 같은 물질을 찾을 수 있게 가리켜 주는 도구를 개발했지. 바로 이 사건이 터지기 직후에 말이야.... 시기가 참 나쁘지 않나...하하”
“하하... 일이란 것은 어떤 순서로 다가올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요. 기분에 따라 그것을 기적 또는 재앙이라 불러도 별 수 없고요. 이번 같은 경우에는....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걸로 하죠, 하하하.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되죠?”
“그건 아무도 모르네. 저 안에서 해야 될 일은 스스로 발을 들일 수 있고, 자기 앞에 일어날 일을 직면할 수 있으며,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을 테지. 그 전에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게 될 지는 오직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자만이 알고 있을 테고 말이야.”
“아쉽게도 그런 자는 당신들의 조직에 없는 모양이군요.”
“있었다네. 그것도 자네와 같은 인간이.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 노인네.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몰라”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산에서 일단 그를 만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나와 같은 인간을 만나보아야 했다. 하지만 다른데 정신을 쏟아 붓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었는데 그는 또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생각도 못했다. 뭐 그래도 당장은 급한 게 아니니까.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나도 자네가 다시 안녕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군. 내 이름은 드로브라고 하네. 자네가 돌아오면 그때는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그때가 되면 내 친구들도 다 같이 불러놓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어도 자네가 해내리라 믿네.”
“혹시, 그 이상한 음료 말인가요? 하하.. 그래야죠.”
예전에 나를 향한 다른 누군가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 세계에 있는 존재로서의 내가 불만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스스로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까? 그 당시의 나를 돌이켜 보건데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 이해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온전한 나였을 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디까지나 내게 열려있는 가능성 중의 나였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아닌 나 같은 것이었으니까. 나의 다른 정신이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의 나를 덮친 마냥 완전히 내가 빼돌려진 것 같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 생각난 김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저번에 맬기스가 이 산에만 생활하는 짐승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알아요?”
“푸하하하, 그거 거짓말이야”
“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에게 했던 거짓말이지, 맬기스가 하도 산으로 들어가는 특정한 길만 있으면 그깟 산쯤이야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길래 다음에 놀려주려고 내가 미리 준비해둔 거짓말이지. 근데 그것을 자네에게 그대로 얘기해 줄 줄이야. 흠흠, 이래서 짐승들은 정직해야 돼”
어, 그렇다면 그건 뭐지?
“이 쯤 내려주겠네. 그럼 무운을 빌겠네.”
다시 하늘로 향해 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그저 말없이 손만 흔들어 주었다. 잠깐 동안 내가 정상인 마냥 더위를 타고 있다고 느꼈던 게 바보 같군. 그건 그렇고 다들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그런 적은 없지만 나도 다칠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이 땅에 왔을 때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던 답답함이 어느새 내게 통증으로 뒤바뀌어 나를 압박했다. 생각해보니 내게 이런 증상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혼자 애써 감추고 있던 먹먹한 가슴을 움켜쥔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그래, 내게 그런 일은 없으리라 믿어야지.
『내 그림자 속에서 다른 이의 그림자를 봐.』
길이라기보다는 어디든 디딜 수 있는 곳이란 느낌으로 돌아 내려오면서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역시 나는 나의 이질적임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내가 마음 한 구석에 의문을 품고 답답했던 무언가는 내 안의 나와 바깥의 나, 그리고 세상과의 마찰과 충돌이었다. 그것들과 닮기를 바랐든지 그저 가까워지기를 바랐든지, 결국 내 안의 목마름은 풀리지 않았다. 더불어 밖의 내가 느낄 답답함도 말이다.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하고 힘찬 힘. 난 저 힘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가. 난 저 힘에 의해서 밀어지고 있을까, 당겨지고 있을까. 알고 싶어. 그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큰 눈동자를 가져야 해.
“저기요.”
그저 걸으며 잠시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깜짝 놀라지 않았지만 눈을 두 어 번 꿈뻑이며 뒤돌아보았다. 이미 아는 목소리였다.
“잠시 길을 물어도 될까요.”
산 밑에서 이미 마주친 적이 있는 개였다.
“당신.....이 어떻게?.... 하지만 저도 이 곳의 길을 모르는데... 아니 그것보다 여기로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에이 젠장. 어디를 가도 길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없군.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당신도 여기 있는 것을 보면 알 것 아니요?”
“대체 언제부터 들어온 겁니까? 저와 저번에 마주친 그 후일 텐데. 들어오기 전의 새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보았지. 그들이 무슨 신호를 듣고 산 아래쪽으로 다 함께 날아가는 것도 보았어.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게 어쨌단 말이요?”
“음.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우선 지금, 당신은 괜찮은 겁니까?”
“귀찮은 질문에 시간은 잡히고 싶지 않은데. 당신의 질문은 어떻게 내가 괜찮은 지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 아니요? 그게 어째서 당신한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굳이 설명하자면, 내게는 이 산에서 뿜어내는 강한 열의 힘을 내게로 오지 못하게 반대로 밀어낼 수 있는 힘이 조금 있소. 바로 그 덕이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미 숯덩이가 돼 있을 테니까 말이야.”
“산 아래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알려 주신다면 혹시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흥 그냥 머리 복잡한 얼간이인 줄 알았는데 완전 고집불통에 큰 착각에 빠져 사는 오만한 자로군. 이 봐 인간.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나?”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해가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체로 내게 할 대답을 골랐소. 그리고 방금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 체로 알 수 있다고 말을 꺼냈지. 지금은 스스로를 찾고 있는 무한한 고통의 길에서 여행 중인가? 이 봐 나는 의외로 싶게 당신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자나 그 자나. 전부 나를 꿰뚫어 본다는 듯이. 나의 길이 틀리다는 듯이.......
“그러는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참 아는 게 많은 개로군요. 나도 참 궁금했는데 잘 됐어. 어디 들어 봅시다. 나에 대해서 대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그러는 겁니까?”
“흥 나도 몰라. 다른 어딘가에서 이 우주로 흘러들어온 재수 없는 찌꺼기가 우연히 이 세계에 구현되어서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지 등의 의미 없는 질문을 되풀이하며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중이겠지.”
그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쌩하니 가버렸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내가 그를 향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답답하다. 아까보다 더 아파와.... 정신은 혼미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지팡이에 의지한 체로 한 발자국씩 때며 나아갔다. 설명의 불친절함인지 소통의 부재인지 이 세계에는 참 불편한 게 많아. 저 뫄웅이라는 자만 봐도, 어떻게 이 산에 있는지 알게 된 것인지, 그게 어떤 물건인지 등등 설명해주면 훨씬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뭘 그리 얘기해주는 게 많은지, 굳이 말이 아니라도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친절하게 얘기해주면 좀 좋아?
“이봐요 친구!!”
어지러워.. 위..?
“최초의 하루는 밤인가 낮인가”
“위? 여긴 어떻게?... 아아. 이 질문을 한 번 더 할 줄은 몰랐는데.. 짜증나는군.”
“친구 괜찮아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안 좋아요? 역시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미안해요.”
“괜찮아 위. 그런데 혹시 밖의 상황이 어떻게 바뀐 거야?”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친구가 걱정되고 혼자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몰래 무작정 뛰어들어 왔어요. 그 새 친구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거에요. 저들이 하늘에서 쭉 감시하고 있으니 그렇게 무리에서 의심을 받거나 문책을 받지는 않을 거 에요. 그리고 혹시 내가 걱정되는 것이라면 괜찮아요. 나도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꽤 더위에 강하거든요. 헤헤헤헤”
“........저기 위. 혹시 너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네? 뭔데 그래요?”
“그래.... 위. 한 가지만 물어 봐도 될까?”
“혹시 그게 이 더위를 식혀 줄 시원한 농담이면 더 좋구요. 하하”
“하하하...저기 있잖아. 이건 그냥 산 밑에서 나눴던 이야긴데, 너 저 학들이 찾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거야?”
“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나요? 하하하. 아마 새들이 계속해서 산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을 당연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나 봐요.”
“아니 너는 산이 저 산에서 새들이 무엇을 찾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저 산에는 새들이 찾는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말 했어.”
“좋은 생각이야. 곧 해가 질 듯하네. 그런데 저 새들은 저 산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저렇게 하늘에서 뱅뱅 돌고 있는 것일까?”
“아마 저 산위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그 ‘특별한 것’ 때문일 거에 요. 저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서 계속 산을 감시하고 있는 걸 지도요. 하하하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끄끄.......끄.끄.끄.끄 낄낄낄낄낄낄낄낄낄. 그게 그 말 아닌가?”
“그리고 이 산에만 사는 짐승들과 다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안 거야?”
“아 그거요. 친구를 만나기 이전에 산에 대해서 묻고 다니던 중에 어떤 짐승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누구였더라? 뭐 그게 누구면 어때요? 하하하”
계속 다가간다면 그 곳에서 흘러내리는 붉은색 물들과 노란 연기로 인해 위험하다고 하니 무슨 방법이 필요하긴 할 듯하다. 맬기스에게 듣자하니 산에서만 숨어 생활하는 짐승들만 아는 안전한 길이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나저나 우리 산은 어떻게 올라가죠? 보아하니 누군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기는 틀린 것 같은데.... 듣자하니 산에서만 생활하는 자들만이 다니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선 그 흔적을 찾아볼까요?”
“저기......낄낄낄낄 나를 설마 의심해요? ...친구?”
“소름끼쳐. 나를 그렇게 부르지마....... 어제부터 나를 따라 온 거야?”
“........”
“그것보다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 진짜 이유가 뭐야?”
“........”
“넌 이 산에 대해서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나에게 접근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이 곳에 다른 동물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올 필요가 있었던 거지.”
“........”
“저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서둘러 이 곳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미 이 분화구의 온도는 일반 짐승들이 견딜 수 없다는 수준인 것은 나도 알아. 이 더위를 싹 날려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네가 더위를 잘 견딘다는 농담은 들어 줄만하더라. 그래. 너는.....”
“지금 상황에서 이런 식의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만나서 반가워요. 구면이군요”
“네, 솔직히 그리 반갑지 않지만요... 농부.”
“뭐 우리가 친하게 오랜 만에 만나서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니죠.”
“그래서 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디 농부가 해야 할 일이야 바뀔 리가 있습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씨를 기름진 땅에 뿌리고, 그것에 애정을 담아내 오랜 시간 동안 길러내며, 마침내 절정의 순간에 그 과정의 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쓱, 수확을 하는 거죠. 하지만 말입니다. 훌륭한 농부는 씨를 고르는 것부터 소홀히 하지 않죠. 만약 그게 쭉정이라면 괜한 시간과 고생을 쏟아 붇게 될 뿐이니까.”
“그래서, 쭉정이일 때와 비교해서 지금은 나는 어떻지?”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입맛을 다시듯 날름거리는 혀와 함께 다가왔다.
“그야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 내가 열매를 익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공을 들였는데... 그 때 그 악어새끼만 아니었어도 말이야.”
“황송하게도 이런 나를 위해서 공을 들여 주신 분은 당신이 처음이 아니라서 말이지. 내게 있어서 당신은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어.”
“그는 멍청하게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아니면 더럽고 추잡한 정에 이끌려서 너를 놓아주었던 건가? 결국 어리석었던 그가 후에 어떻게 됐나 궁금하군.”
“그는 자신이 사랑한 땅으로 돌아갔다.”
“뭐, 그다운 최후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 이상 관련 없는 쓸데없는 감상에 젖고 싶지 않군. 다행이 여기에는 나를 방해할 너희 친구들도 없고 말이야.”
“미안하지만 나도 예전이랑 같지 않거든. 쉽게 당해 줄 것 같아?”
발 하나를 뒤로 빼고 지팡이를 가볍게 당겨 잡아 몸의 균형을 잡았다.
“글쎄, 그 때는 네가 어떻게 나의 주술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가능하지 않을 거다.”
“흥, 넌 전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내가 왜 굳이 이 분화구를 이번 무대로 정했는지 혹시 아나?”
“음.. 장엄한 환경을 통해서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어서?”
“방금 농담은 정말 별로인데?”
“나도 별로인 거 알아. 좀 넘어가.”
“넌 이 세계에 온 뒤로 이미 여러 땅을 건너 지나오고, 각각의 고유한 환경과 다른 땅들과 비교할 수 있는 차이점을 보아 왔겠지. 하지만 그러한 변화되어가는 세계 속에서도 과연 넌 온전할 수 있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잘 생각해봐. 각각의 땅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일을 하였는지 말이야. 지금의 네가 있기 까지 중에 너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변화의 지점은 과연 어디였지?”
“가장 큰 변화는 너와 만난 뒤로 찾아 왔어. 그 동안 내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 덕분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내게 있어서는 기존의 세계가 변해버렸다고 할 수 있고 말이야.”
“하하 영광이긴 한데, 하지만 내가 도와준 부분은 여기서 핵심이 아니야.”
이전과 달리, 내게 생긴 변화를 감각으로 눈치 챌 수 있었던 땅........ 그러한 차이에 의문을 품었던 곳.. 그리고 지금에 내 몸에 일어나는 증상이 심해진 곳...
“....그건 통곡의 불모지야”
“그 이유는?”
“그전까지의 사막이나 눈 덮인 구릉지를 지날 때는 내가 지나 올 때 설사 내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스쳐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어. 하지만 통곡의 불모지, 정확히 말하면 늙은 도적을 따라 중앙의 호수에 왔을 때 난생 처음으로 많은 수의 무리를 볼 수 있었어. 비록 그들이 하는 소리는 전부다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실체는 없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하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지. 그 후엔 감시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나의 동행자를 제외하고도 많은 수의 무리들과도 접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어째서, 하필 통곡의 불모지에서 그런 것들이 가능하게 됐다고 생각하지? 네가 특별한 존재라 그러한 사건이나 무리들의 운명에 관련지어 선택을 받았기 때문인가?”
“네가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 내 몸에 지금 일어나는 증상으로 추측컨대, 그 당시 내가 무엇에 이끌려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그렇다면 통곡의 불모지에는 다른 땅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그것이 지금 이 산과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고 말이야.”
“그래. 확실히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는 확실히 영민하군요. 이 장소를 내가 선택한 것은, 검은 물질일 불균일하게 분포 돼 있는 이 천체 중에서 여기가 특히나 강한 몇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 그래. 특수한 장소에 따라 지금처럼 너를 압박하는 질량과 힘이 강해질수록 네가 느끼는 그 ‘답답함’ ‘갈증’ ‘목마름’은 강해지면서 함께 너의 영감도 강해 질 거야. 그 덕에 너는 평상시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겠지. 그러나 그 힘이 특히나 강한 이 곳은 오히려 너에게 역효과일 거야. 저번에 반 정도의 각성을 거친 너라면 지금 이 장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의 머리를 흔들어 놓을 테지. 덕분에 나는 일이 수월해져서 좋지만 말이야..”
큰일이야. 강한 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저 녀석의 말처럼 지금 내 상태는 눈을 뜨고 제자리에 두 발로 지탱하는 것 이외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정신적으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어.
“으흥흥흥. 이 산이 다시 날뛰기 전에 얼른 처리하고 나가 볼까나. 나는야 하늘의 밭에 씨를 뿌리는 자요. 그 곳에서 자란 싹에 물을 주어 지상의 바닥으로 뿌리내리게 돕는 자요. 그 생명은 이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하늘 밖의 전언을 전할 테니. 오! 온 우주여 나의 말을 귀담아 들으소서.”
『삶에서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선물은 과연 축복인가?』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원래 아주 작은 물들이 한 군데로 뭉쳐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 물방은 바위에 부딪혀 다시 몇 개의 작은 다른 방울들로 나뉘어 흩어진다. 물방울이라는 작은 세계, 나의 눈은 그것을 통해서 굴절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난 비로서 굴절되지 않는 원래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더 작아지지 못하는 나는, 더 많은 세계를 볼 수 없이 그대로 머무르게 되는 것일까...
“이제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군.”
“다행이야. 다 자네가 늦지 않게 구해낸 덕분이지.”
“딱히 저 인간을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단지 그 겉을 바꾸기 좋아하는 속이 시커먼 놈을 손봐줘야 했을 뿐이지.”
내가 어떻게 된 거지...
“홍. 홍. 홍. 그렇게 말해도 결국 내게로 데려온 것은 자네지 않나?”
“곧 산이 끓어 넘칠 것 같아 할 수 없이 끌고 온 것뿐이야. 갑자기 이상한 것이라도 들어와서 삼키기라도 하면 이 산이 노한다고. 더군다나 저 자는...”
“이상한데? 산이 제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고.”
“어허 이 나무가 진짜. 밖에 있지 않고 자욱한 분화구 안에만 있으면 시간 구분이 잘 안 된다고, 이게 다 자네가 이 땅 전체에 이상한 주술을 걸어놔서 그렇잖아.”
“갑자기 남 탓하기 있나? 어쨌든 저 인간이 자네에게 목숨을 빚 진거야.”
“모르지. 혹시 불구덩이에서 내버려뒀어도 살았을지 알아? 신기한 게 처음 봤을 때는 이미 반 정도 각성상태로 진행 중인데도 멀쩡히 인격을 유지하고 있더라고.”
“오호. 그건 자네가 말한 그 속이 시커먼 놈이 손을 본 건가?”
“그런 것 같아. 아마 이 산에서 완전히 마무리할 생각이었겠지. 어쩌다 하필 그런 놈하고 엮여가지고 말이야. 이것도 팔자지.”
무슨 소리지 이게?
“음 영혼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떠나지 못하게 부여잡았다는 말인데... 아무나 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인가 보군.”
“혹시 잿빛 사막의 벽. 그 자 아니야? 그의 능력이 이런 계통이잖아. 애초에 이 인간은 여기로 보낸 것도 그라면서?”
“에이 설마. 아무리 살만큼 살았다고 설마 제 명을 던지는 짓을 할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런 인간에게 걸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건 그렇군. 그런데 그가 이 인간을 굳이 이 먼 땅으로 왜 보낸 거래?”
“황금 주전자부리 독수리가 와서 얘기해주길 스스로의 이름을 찾고 싶어 한다고 하더군. 그 전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을 잃은 모양이야.”
“......이해 할 수 없군. 그도 알 텐데 말이야. 대체 무슨 꿍꿍이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스스로 의지를 지닌 자가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까짓 거 확인하듯 도와주면 되는 것이지.”
“뭐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난 저 산이 잠잠해지면 가 볼 테니. 이 봐 인간. 진작 정신을 차린 거 아니까 그만 자고 일어나.”
그 말에 눈을 떴다. 아까 소리를 들었던 물방울이 천장에 맺힐 만큼 축축한 동굴 안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노란색, 푸른색, 보라색 등의 형형색색 반딧불이가 동굴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으로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하얀 나무, 아까 내게 막말을 멈추지 않았던 그 개도 있었다.
“오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잠시 멈칫했지만 개가 옆으로 나와 주자. 나무가 다시 말했다.
“겁먹을 것 없소. 당신이 쭉 찾아왔던 상대. 그것이 바로 나이니까 말이요. 보시다시피 나는 아쉽게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소. 그러니 당신이 가까이 와주시오.”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 나무 앞에 멈춰 섰다가 한 번 손을 쓱 대어 보았다.
“그래요 그래. 날 전혀 경계할 필요는 없소. 난 누군가와 엮이며 서로 피곤하게 일을 만들고 다투는 것을 싫어하니까.”
이상해. 분명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얼굴의 윤곽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내게는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이게 내가 그토록 찾던 그인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미 누워서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얘기해주지요.”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려는 자로부터, 바로 저기 서 있는 멋있는 개가 구해준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구해준 것이 아니야. 내 손으로 그 녀석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 너를 그 분화구로부터 구해준 것도 네 안의 잠재력을 모르기 때문에 혹시 땅에 살고 있는 다른 자에게도 피해가 튈까봐 억지로 끌고 온 것이다.”
“하여튼 저는 당신께 은혜를 입은 것이로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당신을 싫어해요. 말이 듣기에 정말로 거칠었거든요.”
“흥 편할 대로 생각하라지. 그건 너의 자유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제가 있는 이 곳은 어디인가요? 보아하니 지금 무사한 것으로 보아, 아까까지 있던 산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 말대로 분명 지금이 산은 맞기는 한데 자네가 있던 그 산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 천체에서 자네가 있던 그 산 속에 있는 다른 어떤 산이라고 할 수 있지.”
“네?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산? 무슨 말이죠. 여기선 그 육중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아까와는 별개의 산 같은데요?”
“전혀 이해를 못하는군.”
“그리 놀리지 말게. 어쩌면 이 친구한테는 그게 당연한 것일 수 있어. 음, 다시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하자면 자네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 보아왔던 산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네. 요컨대 숨겨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정확히는 분리되었다고 봐야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겠나?”
“뭐... 제가 당연히 이 산을 다 알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까까지 보아왔던 그 상식선과의 괴리 때문에 제가 받아들이지 못하나보네요. 요컨대 이 공간만 산에서 무언가 특수한 힘으로 분리돼 있다 그런 말이죠?”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구만. 하지만 핵심을 이해하지 못해.”
“내가 뭐랬어. 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다가가지 못한다니까? 꽝 막혀서 답답하긴. 차라리 각성할 때까지 내버려두고 구해주지 말 걸 그랬어.”
“어허 이 친구 위험한 소리를 하네. 거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그러니까 저 인간친구의 반응도 이해가 돼. 자네는 가끔 지나쳐.”
“뭐 어때, 내 말이 완전히 틀린 거도 아니잖아.”
“두 분 다 진정하고 알아듣기 쉽게 다시 얘기 해주세요. 정말 도통 뭔 말인지..”
“내가 짐작하기를 자네는 ‘거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점점 새로운 것을 깨우친 눈은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기존에 자네가 가졌던 생각 입장은 이젠 그저 하나로 뭉뚱그려 보게 됐을 거야. 그 말은 더 이상 자네가 이전과 일치하는 시야를 가질 수 없게 됐다는 말이야. 즉 치명적인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 자네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들을수록 그와 동시에 점점 다른 것들도 잃게 될 거야.”
“그게 제가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지 지금 자네가 디디고 있는 땅을 하나의 천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저도 한 때는 각 땅마다 고유한 우주 공간에 있는 개별적인 천체라고 가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게 모순이며 오류라고 알게 되었죠. 각 땅이 물리적으로 결합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가시적으로 바로 연결 돼 있고 곧 모든 땅이 하나의 큰 형태로 있다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어째서 그게 당연한가?”
“그게 응당 눈에 보이는 느낄 수 있는 그대로이니까요.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확실하고 위화감을 찾을 수 없어요. 오히려 방금 설명한 방식대로 묘사하는 게 더 이해하는데 문제가 되고 이상하지 않나요?”
“어째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지금 말한 건 온전히 자네 눈에 비친 우주이지 않나? 아까 말했듯이 바로 거인의 눈이지. 그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네. 내가 자네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각자의 고유한 문제지. 답을 찾으려고 조급할 필요는 없네.”
『양 쪽에서 다리를 만들어 연결하려고 해.』
“아마 제가 지금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겠군요. 고맙습니다.”
“별 거 아닌 것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얘기를 하죠. 저는 벽의 왕의 소개로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과거와 함께 이름을 알기위해 필요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요.”
“이미 알고 있네. 전령을 통해 전해 들었지. 내가 자네에게 도움일 될지는 확실할 수는 없지만 일부 나의 능력을 통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네. 혹, 산 아래 있던 다른 짐승들을 만나 보았나? 그들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수 없었나?”
“네, 그들은 공통점으로 이 산에 대해서 묻는 것만으로 입을 다 물었어요. 마치 모두 다 ‘끓어오르는 산이 떠오르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사고를 정지시켜라’라는 주문에 걸린 것처럼 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 제대로 이해했네. 그것이 바로 나의 능력이지. 물론 특별하게도 면역인 자들도 있었지만 말이야.”
“아마도 저 힘과 관련된 사고나 이끌림이 있을 때에 생각을 덧씌우거나 기억이나 사고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나 보군요.”
“그래. 하지만 새들이란 선천적으로 무언가에 얽매인 사고에 바탕을 두는 본질이 아닌 자들이나 나의 능력이 듣지를 않더군. 이따금 찾아오는 이 친구도 바보같이 걸려드는 데 말이야.”
“그 얘기는 빼지. 어차피 결국 제대로 찾아오게 되잖아.”
“자신이 가진 힘을 통해 저항하는 자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 이제는 왕만이 고유한 능력을 지니는 시대는 지났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자네에게도 통하지 않았던 건... 뭐 이 얘기는 하지 말지. 하여튼 나는 벽의 왕의 부탁대로 자내의 안으로 아주 깊이 가지를 내려 무엇이 있는 지 들여다 볼 생각이야. 혹시 자네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것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기 위해서는 주제가 명확해야 하네. 다시 한 번 묻겠네. 자네가 진정으로 찾고 싶은 건 무엇이지?”
“나는...”
“한결 조용해진 것을 보니 산의 활동이 잦아들었나 보군. 나는 잠시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나 보고 오겠네.”
“다녀오면서 잘 확인해주게. 이 친구도 곧 끝나는 대로 자네를 따라 나갈 테니까 말이야. 허허허허”
“귀찮게....”
인정하기 싫지만 하얀 고목과 저 인간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이례적 변덕이었던 것은 맞다. 오래전 그의 부탁대로 이 산으로 들어온 자들이 함부로 자신을 찾을 수 없게, 겉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게 위장을 해놓았으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나의 능력은 이렇게라도 밖에 쓰일 곳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몰려온다. 내려온 곳으로부터 다시 올라가며 옛날 생각에 빠졌다. 그 시절은 누구나 함께 힘을 모았고 어찌 보면 순수했다. 누구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하면 기대하고 응원을 했었으니까. 이건 그 벽이란 놈도 정확히 말해 왕이라고 불리기 전의 일이였으니까 굉장히 오래된 일은 분명하다. 모두 함께 하늘 밖과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공감하며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나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쉴 새 없이 계산을 하며 하늘에 수를 놓는 게 일상이었는데....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은 뭐 이변과 함께 생태계도 크게 변해 숲은 나그네도 정상적으로 드나들 수 없게 방해를 하는 판국이니까 말이야... 다 지난 일이야... 다 지난 일이야....
“퉤.”
아까 그 망할 놈의 사기꾼의 목을 물어 던져버린 곳에다가 침을 뱉었다. 오랫동안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녀석이 있다 길래 정체가 궁금했는데 시답잖은 과거에 잡혀 사는 놈이었다. 마치 과거의 내가 했었던 일처럼... 그 때의 나의 모습처럼... 헌데 아까 인간을 옮기다 분명히 보았다. 오른손 위의 낙인. 그것은 분명히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어째서 저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 아무래도 곧 랄시프를 만나 봐야겠어. 저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벽의 왕.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야?
“정말로 그것이 당신이 찾고 싶은 것이요?”
“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곱게 희어진 화석님이 하신 얘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가 자신에게 던지려는 질문의 주제는 그것으로 할 게요.”
“좋습니다. 허나 시작하기 전에 이것은 명심하시지요. 듣게 될 답과 함께 당신에게 찾아올 변화도 되돌리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각오는 됐습니다. 시작해주세요!”
(8장 하여야 했던 일 마침).....................
9장
가질 수 없는 순간
상징적이다. 비유적이다. 은유적이다. 이러한 표현방식만 봐도 말을 전달한다는 것과 소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광활하고 신비로운 세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주처럼 이요. 나라는 우주에서 떠나간 말은, 나의 생명과 영혼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떠나버렸습니다. 나조차 알 수 없고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 아주 먼 우주로요. 내가 아직은 붙잡고 싶은데 이미 인지할 수도 없이 넓고 무한한 시간을 여행할 것이라는 게 믿기 힘듭니다.
『이제 제 신발의 먼지를 털 준비가 됐어요.』
“후아...”
“음..... 그러니까 방금 제가 본 것이 무엇이죠?”
“무언가 이상해. 원래대로라면 나의 가지가 자네 안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어 쉴 새 없이 뻗어 다니고 있어야 했어. 자네가 원하는 그것을 찾을 때까지 말이야.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무수히 많은 잎사귀를 이용해서 각각의 방에 자네라는 틀에 맞춰 보던 중 문제가 생겼어. 세상에!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진정하고 얘기 해봐요. 나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만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한 마디로 하자면 자네의 안은 마치 부서지기 쉬운 구름의 조각 같았지. 길을 찾는다고 이 곳, 저 곳을 열어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내가 안을 전부다 파괴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아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아니야. 아니야. 진짜 문제는 내가 아니야. 자네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거야?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원래 태생이 그러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해! 어찌 이런 일이... 아무래도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미안하네. 내가 너무 당황하고 놀랬어.”
“아니에요.... 나무도 자라며 가지를 어디로 뻗을지 모르듯이 다 알 수는 없지요.”
“자네의 말이 맞아.”
“그래서...이제 어떡하면 되죠? 저는 당신만을 보러 이 곳으로 왔어요. 당신을 만나면 적어도 나의 존재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막상 내 안을 들여다보니.. 오히려 전보다 혼란스러워요. 당신의 도움으로 내부와 직면할 수 있었는데 진짜로 내가 아닌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런 마음도 무리는 아니지. 미안하네. 다 나의 잘 못이야. 잘 될 거라고 멋지게 말해놓고 자네를 실망시키고 그런 생각까지 들게 했네. 나이만 들고 동굴에만 갇혀 사는 주제를 깨닫게 되는구만. 나도 참 밖을 나간 지 오래가 되었군.”
뭐야. 움직일 수 있었던 건가?
“이 어두운 곳에 어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혼자 지내셨습니까?”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걸세. 아주 오래된 얘기니까.”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요.”
“절친한 친구였던 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몹쓸 짓을 했지.”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반딧불을 보며 얘기를 이어갔다.
“얘기 해 보세요. 저도 당분간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탓에 조금은 방황할 예정이니까 말이에요. 하하. 당신 기준의 옛날이라면 몇 백 년 전의 이야기 겠군요.”
“그렇네. 이것은 저 밖에 나간 개와도 관련이 있는 얘기지. 자네 이곳으로 오면서 얼마나 많은 왕을 만나 보았나?”
“음, 왕들에 관한 얘기는 여럿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흰 고목, 당신을 포함해서 단 둘이네요.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그들을 만나보지 못했군요.”
“그것이 왜인지 아나? 실제로 이제는 제대로 왕의 역할을 하는 것을 고사하고 구실로라도 남아 있는 자들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야. 진짜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자들도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아.”
“제가 들은 것과 다르군요. 각 땅에는 왕이 하나씩 있다고 하던데요? 정상대로라면..”
“한 땐 그랬지. 하지만 그것은 왕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나 하는 소리야. 특별하다고 해봤자 왕도 결국 불사는 아니니까.”
“대체 왕이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고, 언제부터 그렇게 살아 왔던 겁니까?”
“최초의 힘의 근원은 어디서 왔느냐에 답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최초의 왕도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네. 다만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늘 밖에서 끌려온 힘이라고 말을 하겠네.”
“하늘 밖이라면 우주 말입니까?”
“딱히 하늘 밖이 우주는 아니야. 자네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전부 우주의 일부분일 뿐이지. 왕이란 특정시기에 이 세계에 나타난 뒤로 그 수가 늘어나지는 않네. 다시 말해서 태초에 이 세계로 내려온 순수한 자원과 자연은 한정되어 있었다는 말이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기존에 이 천체에 있었던 순수한 힘을 제외하고도 새로 가공되거나 변질된 새로운 물질이나 힘이 나타났다는 말이군요?”
“그래, 그저 ‘왕’이란 것은 이 세계의 ‘가공자’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었네, 자네의 말처럼 기존의 순수를 뒤바꾼 새로운 혁신들이 있어왔고 그들은 곧 이 세계의 새로운 왕으로 떠올랐지. 그 과정에서 기존의 왕들이 떠나갔을 뿐이고 만이야.”
“꽤 담담하시군요. 그 중에는 흰 고목, 당신의 벗들도 있었을 텐데요?”
“누군가는 나를 천년을 산 현자라고도 부르네만, 지금 내 마음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스스로를 동굴에 가둬놓은 외롭고 속박된 영혼일 뿐이지.”
“최초의 왕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한다면 당신도 이 세계의 최초의 순수는 아닌 모양이군요. 천 년을 넘게 살았다고 한다면 대이변을 겪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흥,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 천체에서 그게 무슨 특별한 일 중 하나란 말인가.”
“대이변과 그 후에 찾아온 크고 작은 이변들로 인해 이 별의 생명체들의 균형이 큰 변화를 겪었고 자연과 생태가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곳도 여러 곳인 것 같은데 대수가 아닙니까?”
“뭐, 사실 나도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짐승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그것을 두려워했고 또 대부분의 역사는 그것을 기점으로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지. 웃기지 않나? 그렇게 친다면 나는 그 역사의 맨 꼭대기에 있는 셈인 것이니. 허허허허허.”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고 왕이란 것은....”
“그래,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은 자들은 전부 천 년 전 그 대이변과 함께 찾아왔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우주에서 끌려온 최초의 순수가 아닙니까?”
“내가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거야. 바로 자네 같은 자들이 착각을 해. 마치 대이변을 기점으로 과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천 년이란 이 천체 그리고 우주를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시간인데 큰 변혁이 어찌 하나 뿐이었겠는가? 아무도 천 년 전에 찾아온 그것이 이전에 수 백 만 번 더 반복되어져 온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일세.... 끌끌”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건 추가적인 수고스러움이지』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면서도 당혹스럽네요. 저 밖에서 왔다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고요.”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일수록 외부와 차단단 순수한 결정체가 가장 고귀한 존재인 것 마냥 착각을 하지. 이 우주가 탄생한 후로 하늘 밖의 소리는 물론이고 다른 우주의 전언을 한 번도 듣지 않은 자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다른 우주라고 했습니까?”
“왜? 보이지 않는 물리의 법칙이 언제까지나 자네의 존재 고민처럼 언제나 별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만약 그렇다면 환상에서 깨어나게. 허허허허”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것은 당신도 있기 전의 일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세대의 전에 있던 이들은요?”
“어떠한 생명체들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천체의 땅만은 그 기억을 담고 있지. 바로 대지의 언어로 기억을 저장하면서 말이야.”
“저기, 여기는 어떤 곳인가요?”
“아까 말했던 데로 도서관이다. 하늘 밖과 이 세계의 땅에게서 온 기록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고이지. 또 나에게 있어서는 집이기도 하고.”
“아까 책을 몇 권 꺼내봤을 때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던데 혹시 그것은 아직 기록을 하지 않은 것인가요?”
“벌써 몇 권을 뒤져본 모양이군. 책은 제자리에 꼽아 놨겠지? 여기 있는 책들 중에는 단언컨대 단 한 권도 정보를 담지 않은 책은 없어. 태초에 이 천체의 탄생부터 일어난 모든 특정 사건이나 분위기를 기록한 체 책장마다 분류 돼있지.”
“랄시프의 도서관....”
“그 이전은 우리와 같거나, 아니면 우리 세대와는 다른 또 다른 순수들이 있었겠지. 흔히 말하는 대이변이라는 것은 다음 대이변이 오기까지 항상 진행형이야. 혹시 이변의 끝이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인가?”
“아니요... 끝을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전까지의 제게 있어서 왕이란 것은 이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그것은 재앙으로부터 많은 이들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고귀한 존재인 줄 알았어요.”
“글쎄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과연 누가 정한 것이란 말인가.. 끌끌끌. 왕이란 어떤 존재이기에 더 이상 순수한 자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들의 도래와 함께 우주와의 소통이 단절된 것과는 어떤 연관이 있겠는가? 비순수가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어째서인가? 바로 내가, 바로 우리가 이 세계로 들어오는 마지막 순수의 문을 닫고 들어왔기 때문이야. 다음 대이변까지 열리지 않게 굳게 닫힌 그 문을 말이야!”
“모르...겠어요. 이 천체의 기준으로, 대이변을 기준으로 최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만으로 과연 당신들이 순수한 것인지 말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누군가는 나를 검은 물질이라고 했어요. 또 누군가는 나를 붉은 곰의 그림자라고 했지요. 사실 나는 그게 정확한 명칭인지, 그 단어가 나를 정확히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많은 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인간이었어요. 맞아요. 혹시 그건 내 스스로의 본질을 잊어버린 추악한 많은 가면 뒤에 저를 숨기고 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연기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래요. 그저 단순하고 쉽게 나를 나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자신의 기준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요. 이 천체인 것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속한 우주인지, 아니면 당신이 말한 다른 여러 우주 중에 하나인지 그것은 알 수 없지 않나요? 혹시 아직도 우리의 존재는 떠다니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더 이상 나는 무엇이니, 너는 무엇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내가 의도치 않게 자네의 기분을 상하게 했군. 미안하게 생각하네. 후우, 그래 현재 자네와 같은 생각의 지닌 많은 자들의 기대에 반하게도 왕이란 것은 어쩌면 이 천체에 내려진 재앙 중 일부일 뿐이네.”
“그렇다면 대이변을 통해 우주로 가는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각 땅이 맞붙어 있다는 것은 각기 다른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어째서 각각의 땅에서는 우주로 가는 길이 닫힌 겁니까? 대이변이 대체 뭐 이길래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가 아니고 하늘 밖이라고 해야겠네요.”
“고작 최근의 대이변으로 하늘 밖과의 소통이 차단되었던 것은 아니지. 하늘의 문은 주기라고 불리기에는 불규칙적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순환적인 열림이 있네. 그 탓에 우리는 우리의 힘과 천체가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지. 하지만 별개로 소통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확했지. 바로 진정한 자유. 우주라는 무한하고 광활한 굴레조차 자신들을 가두길 원하지 않았던 거야.”
“중간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그렇다면 대이변을 포함해서 이변이라는 것들은 결국 검은 물질이 가지는 질량과, 검은 힘의 밀고 당기는 힘의 순환이잖아요. 그 순환은 결국 인접한 다른 땅들도 포함해서, 즉 다른 우주와도 연결이 된다는 뜻인가요?”
“자네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흰 고목이 말해준 것을 토대로 제가 기존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의 심상을 바꾸고 생각해봤어요. 이 천체에 검은 물질이 불균일하게 분포 돼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주라는 상호간섭을 생각할 때 맞아 떨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곳의 땅과 땅은 보기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이어지니까요.”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네. 각 천체에도 그러하듯이 우주 간에도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은 것이로군. 그렇지 않으면 한 쪽 우주가 작게 삼켜지거나 크게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런가요...? 단지 저는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누군가에게 있어서 주고 싶은 한 쪽 마음과 받고 싶은 다른 쪽 마음이 어째서 그 크기가 다른지요. 어찌 보면 반대라 할 수 있는 이 두마음은 본래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근데 한 쪽으로만 강하다면 균형이 맞지 않아 결국 무너져 버리게 될 거에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부의 그 마음과 별도로 ‘외부의 힘’, 즉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의 두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힘들은 일정하지 않아요. 어느 곳은 더 강하고 어디는 그렇지 않아요. 또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들이 존재하고요. 게다가 이 논리만으로는 제가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백이 존재해요. 그리고 그건...”
“말했듯이 자네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네.”
“네 맞아요... 당신의 표현대로 거인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저는 제가 있는 곳을 단 하나의 우주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다른 우주를 보지는 못해요. 저와 당신이 대화하고 있는 이 공간에 대해서도요. 그럼 아까 제가 끊은 부분부터 다시 얘기를 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죠?”
“모두는 원했네, 자신들을 가둬 두는 우주와는 반대로 모든 세상에 있는 힘의 비밀을 풀고 닫힌 하늘과도 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 무한한 자유를 선사해줄 궁극의 소통, 바로 꿈의 키월드(KeyWorld)를 말이야!”
『내 어머니는 나를 다독이고 다독이셨지.』
“다시 말해서 키월드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모든 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순환과 소통에서, 물리법칙의 경계를 풀고 새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개방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네. 모두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 바라는 궁극의 열쇠는 말 그대로 닫히고 끊어졌던 세계의 문을 열고 동시에 이 천체에 영원한 수수께끼인 검은 힘과 물질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 가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다고 하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게 뭐라고?... 개방자?
“정말 많은 이들이 그것을 찾아 나섰지. 자네도 알고 있는 그 똑똑한 랄시프도 말이야. 비록 왕도 아니고 타고난 힘도 없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였어. 하지만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지......”
“들려주세요.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저와 함께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봐요.”
“대대로 이 세계의 기록을 맡았던 그녀의 집안은 보수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중요시했지. 반대로 그것에 맞서거나 어떻게든 변형해보려고 하는 다른 비순수들을 멀리했다네. 물론 그녀도 많은 미움을 피할 수 없었지.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지적 욕심과 탐구에 관한 열망은 꺾을 수는 없었다네. 문제는 그녀가 너무나도 똑똑했다는 것이었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그리고 많이 힘의 비밀과 그 운용에 대해서 이해했고 다른 이들과도 이 것을 공유하려고 했어. 그 결과 집안에서도 심한 지탄을 받았지만 그녀의 친구이자 왕이었던 오완과 같은 혈족이었던 젠이 끝까지 그녀를 감싸고 응원한 탓에 다행히 쫓겨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오완은 맞은 편 땅의 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식을 들었네. 자기네 땅이 이변과 함께 찾아온 강력한 인력으로 생명들과 자연이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지. 그 당시 옆의 나라의 왕이었던 흰 표범은 아주 어린 존재였지. 그녀도 선조의 피를 이어 받아 선천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재능은 너무 미약해 스스로의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없었던 거였어. 자기 땅도 지킬 수 없었던 왕은 스스로의 무력함과 자기의 절친한 친구와도 돌아선 아픔으로 황폐해졌지만 그녀는 강했어.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나섰고 오완에게 해결을 위한 대책을 상의했던 것이었지.”
“하지만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죠.”
“그렇다네. 그녀의 생각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희생적인 것이었어. 모든 위험을 스스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녀의 생각에 그는 처음엔 완곡히 거절을 했지. 하지만 그런 그의 완강함도 그녀의 숭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된 결의 앞에 두 손을 들고 말았네. 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닥친 큰 문제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다른 앙금을 보지 못했지. 첫째로 그녀에게 충성하던 감시자들이 하나 둘 씩 그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떠나버린 것이었고 둘째는 그녀의 어릴 적 친구가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것이었어. 그 커다란 사건의 종지부는 아직도 전설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부분이지.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알았더라면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왕이라고 해도 미래까지 볼 수 있는 힘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네.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불모지의 최후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돕지 못한 오완과 그녀의 마지막 부탁으로 간신히 감시자들만 간신히 데리고 탈출한 젠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네.”
바깥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아마도 개가 들어오지는 않고 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는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 오완의 마음과 생각에도 큰 변화가 있었네. 그러고 시간이 좀 지나던 차였지. 아까 여기 있었던 그 개 말이네. 이름은 ‘가하’라고 하지. 오래전 ‘푸른 별의 계산대’의 왕이었네. 그는 노력하고 인정받는 왕이었지. 하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많은 자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네. 하지만 그의 특권조차 오래가지 않았어. 오래 지나지 않아 하늘의 문이 완전히 차단되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거야. 덕분에 대중의 지지를 잃어갔던 것은 당연하지. 마침 그는 조금 떨어진 땅의 뛰어난 학자인 랄시프의 소문을 듣게 되었어. 든든한 조력자였지만 예전과 달리 냉담해진 오완의 모습에 그녀도 쉽게 연구를 진전할 수 없던 중이었어. 그런 그녀에게 또 그는 뜻이 맞는 협력자가 될 수 있었던 거지. 그 동안의 연구의 성과로 그녀가 가하에게 제시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다한 것이었네. 하늘에선 외부로부터 오는 소식을 밀어내서 튕겨내고 있고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말은 당겨지는 힘에 의해 멀리까지 닫지 못했어. 그렇다면 이 두 가지 힘의 위치와 방향을 바꾸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네. 문제는 시기와 수단이었어. 힘의 순환이 비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시기 일반적 논리와 이치를 깨트릴 수 있는 시간, 즉 이 천체의 윤년에 일어나는 붉은 곰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달의 그림자라는 것은 검은 물질의 순환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거군요. 어째서 그런 것이 달에 비치는지 모르겠지만요.”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감각과 측정으로는 완벽히 계산해낼 수 없는 불확정 값이 어찌 달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가는 왕들이 스스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풀어야 했던 가장 큰 수수께끼였지.”
“그래서 가하와 랄시프는 어떻게 됐습니까?”
“곧 닥칠 시기에 맞춰서 자연의 흐름에 배반한 힘의 유동에 조작을 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동력원이 필요했지. 다행히 그것의 반은 오완이 가지고 있었고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오완은 그녀를 돕지 않았어. 옆 땅의 사건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큰 위험요소를 동반하고 큰 위기를 초래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결국 그녀는 자신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왕의 힘을 빌리는 것을 포기하고 순수하지 못한 불완전 힘을 이용하기로 했네. 한편 오완은 자기 나름대로 그녀를 어떻게든 만류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자 내게 상담을 청했네. 잘 못된 선택이었어. 막고 싶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억지로 힘으로 제지했어야 했지. 그 당시 어리석었던 나는 그를 통해 그녀의 생각과 계획을 듣고 오히려 그녀를 지지했네. 그것은 우주로 내딛는 아주 위대한 시도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내게서 답을 들을 줄 알았던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되돌아갔네. 아직도 그의 마지막 말이 잊혀지지가 않아.”
“........알겠소.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지...”
“랄시프의 계획은 그날까지 문제없이 준비되었지.”
“하필 그 날, 무엇이 더 있었던 거군요.”
“천재인 그녀도 계산할 수 없는 변수가 딱 하나 있었지. 그것은 붉은 곰의 출몰과 함께 찾아올 이변에서 무엇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어. 그게 오완이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기도 했지.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지. 의식의 그날 밤, 서로 협력을 통해 하늘의 장애물을 정리하던 가하와 랄시프의 머리 위로 커다란 유성이 가로질러 가기 시작 한 거야. 그 순간 그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지.”
“대이변 후 925년”
‘본래 17개의 땅들로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그 동안 각 땅들에 작용하는 힘의 차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해왔고, 마침내 이날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로 인한 큰 폭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6개의 땅들이 독립적으로 탈락해 이공간으로 떨어져 나갔다.’
“계산의 방해를 받고 서로 뒤엉켜 버린 힘들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계산대를 닥치는 대로 파괴했지. 오완이 나타나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전부 삼켜버리기 전까지 말이야. 바로 그 전에 흰 표범이 생각해낸 그 해결책대로 말이야! 누군가의 기억과 사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결국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온자가 얼마나 절박하고 부서지기 쉬운 마음인지 몰랐네. 결국 반복된 비극이었어. 불운하게도 끊임없이 팽창하던 그의 육체는 준비해두었던 딱 그 힘만큼 커지고 공기처럼 사라지기 전에 멈추었네, 다만 닫히고 일그러진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아주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서 말이야.
『돌아서고 다시 앞으로 볼 세상이 변해져 있을까봐』
“아마 젠은 이 사건으로 랄시프까지 죽은 줄 알았을 거야.”
“걱정 마세요. 젠의 안부는 제가 확실히 랄시프에게 전달할 테니까요.”
“고맙네. 그 후로 랄시프는 나처럼 상처받은 마음의 문을 닫고 언젠가 그를 되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지”
“그 때문에 오완이 당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죄책감과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두려움이고요.”
“당연하지 않나. 중요한 시기에 나는 그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니 그가 나를 증오하는 것은 마땅하지.”
“나는 그를 만나보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어요. 보이지도 않았지만 소리도 들을 수 없었거든요. 결국 일방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 보고 넌지시 그의 생각을 짐작할 뿐이었죠. 지금 다시 만난다면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도 내게 전달하고 하는 의지가 무엇인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바로 랄시프를 만나고 나서죠. 그녀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저 투명한 미로가 오완이며, 그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인지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 때 알았어요. 나와 그 사이의 소통의 문제 중에는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한 부분을 차지 한다는 것을요. 흰 고목도 이곳에만 갇혀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괴롭히지 말고 나가서 그를 만나 봐요. 그에게 말을 하고 생각을 들어봐요. 그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요.”
“고맙네. 자네의 말이 내 마음의 한 켠에 있는 큰 부담을 덜어주었어. 자네말대로 이제는 내가 드디어 나갈 때가 된 것 같네.”
순간 동굴에서는 무너질듯한 소리가 났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가지 부러지는 소리, 잎사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큰 나무가 들썩거렸다.
“저 늙은 나무의 무거운 뿌리를 뽑아내다니,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몰라도 너의 말솜씨는 하나는 인정해주지.”
“밖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 길래 안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건 바로 내가 냄새를 맡았거든.”
“홍. 홍. 홍. 홍. 자네가 때 맞춰 돌아 왔군. 인간과 함께 이 산을 나가자고!”
“네? 하지만 밖에는 많은 새들이 지키고 있다고요. 그들의 눈을 피해서 무작정 나간다는 것은 너무 무모해요.”
“이봐 인간. 널 속였던 그 고양이 말이야. 그게 누구의 능력을 모방했다 생각하나?”
“음, 글쎄요 냄새를 잘 맡는 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렵고 위장을 잘 하는 카멜레온을 따라하지 않았을까요. 아참 그 동물은 당신과는 종이 엄연히 다르지?”
“이보게 인간이여, 저 녀석을 놀리는 건 그만 둬. 후회할 거야.”
“저도 한 방씩은 먹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응? 뭐야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는데? 흰 고목, 혹시 보지 못했어요?”
그저 한숨을 쉬었을 찰나에 난 앞에 있는 누군가를 시야에서 놓쳤다. 그러곤 바로 발이 위로 끌어당겨져 넘어졌다.
“어때? 큰 소리 쳐놓고 네가 한 방 먹은 기분이? 분하지?”
“으으아아!!! 후우. 그만두겠어요.”
“왜 더 덤벼 보지 그래? 아까까지의 기세는 어디에 갔나?”
“당신의 능력은 잘 봤어요. 그리고 아까 제가 당신을 놀린 건 사과하겠어요. 하나 더 당신이 그렇게 나를 도발해도 난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럴 기운도 없고요.”
“뭐야. 고작 내가 그거 한 대 때렸다고 그래? 아니면 분화구에 있을 때처럼 어지럼병이 도졌나?”
“그건 아니고, 제가 쭉 찾아오던 것이 갑자기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는 것 같아 조금 실망했을 뿐이에요.”
“왜 이래? 제대로 안 된 거야?”
“그게 그렇게 되었네.”
“흥, 재밌어지려 했는데 싱겁게 끝났잖아.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반딧불이를 따라와. 그리고 이 봐 자네는 이 산을 내려가면 그 때부터는 어디로 갈 건데?”
“아까 밖에 서서 다 들은 것 아니었어요?”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야? 난 계속 생각할 게 있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잖아.”
“난 이대로 구릉지로 갈 거야. 드디어 오완을 만날 준비가 되었네.”
“잘 되었군. 나도 마침 랄시프에게 볼 일이 있었는데. 그럼 같이 가지.”
“자네는 랄시프와 왜?”
“아... 그건”
갑자기 날 왜 또 째려보는 건데?
“별건 아니고.. 그냥 간만에 잘 지내나 보고 싶고... 하려는 얘기도 있고..”
“자네는 랄시프와 별로 안 친하잖나? 별일이구만.”
“근데 가하. 진짜 그 농부를 밀었어요?”
“농부? 그게 누군데?”
“나와 함께 있었던 그 고양이요.”
“그 녀석, 이름이 또 왜 그래? 확실히 목 뒤를 물어 분화구 안으로 던져 버렸지. 왜 그 동안 정이라도 들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뭔가 영영 사라졌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안 믿기기도 하고.”
“방금 말투 설마 나를 따라 한 거야?”
“에이 설마요. 하하하. 곧 분화구 입구네요. 어떻게 할 거죠?”
“어떻게 할 것도 없어. 그냥 나만 믿고 그냥 가면 돼. 너희들 모습은 저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게 싹 감춰질 테니까 말이야. 안 믿기면 혼자 뛰쳐나가서 새 밥이 되던 가”
“방금은 못 들을 걸로 하겠습니다.”
『그는 지금쯤 어디든 헤엄을 치고 있을 거야.』
우리는 분화구 입구 부분의 바닥을 디디며 찬찬히 올라왔다. 뫄웅을 포함해서 새들은 내가 들어갔을 때처럼 그냥 분화구 쪽만 지켜볼 뿐이다. 정말로 우리가 바위나 흙의 일부라도 된 듯,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왕의 능력이라는 건 꽤 편리한데? 다른 자들이 탐낼 만도 하겠어.
“자네 덕에 이대로 무사히는 지나갈 수 있을 듯 하지만 인간의 말처럼 조심하는 게 좋아. 그러면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누가 뭐래. 설마 네 발 짐승인 내가 넘어지기라도 하겠나.”
흠... 산 밑까지 간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벽의 왕을 만나 보아야 하나? 아무 것도 건진 것 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맥 빠지는 군. 아차! 그러고 보니 드로브가 있었잖아. 어떡하지.... 아직도 내가 저 안에 있다고 믿고 있을 텐데... 내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는 평생 나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져 살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자니 우리가 들킬 수 있고.. 어떡하면 좋지.
“이봐 조심해!”
에고... 생각만 많다가 흰 고목의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순간 뼈가 시릴 정도로 강한 오한을 느꼈다. 찬찬히 고개를 돌려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뫄웅이 방금 소리를 듣고 무언 갈 알아 챈 거야.... 그가 조금씩 날개를 접고 천천히 내려올 준비를 하였다. 큰일이야. 가까이 다가온다면 그는 우리의 숨소리만으로 가뿐히 우리의 존재를 알아 챌 거야.
“대장, 갑자기 무슨 일이요? 뭔 가를 발견했습니까?”
“.....아니다. 그저 저 곳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이지. 흠”
“예? 으흠, 저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요? 혹시 쥐 녀석이 들썩 거리는 걸 잘 못 들은 것 아닙니까? 하하.....”
째려보는 그 눈빛에 순식간에 부하는 부리를 감췄다
“흠.... 그럴 수도 있지. 며칠을 불구덩이 위에서 계속 쉬지 못하고 지켜봤더니 나도 감각이 둔해졌나 보군.”
“아무리 대장이 그 인간 녀석이 특별하다고 해도 어제 솟아오르는 용암 속에서는 살지 못했을 거요. 바위도 녹여버리는 데 그라도 별 수 있겠습니까?”
“....좋아. 돌아가서 그 놈들에게 얘기할 걸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지만, 오늘 밤까지만 지켜보고 우리는 이대로 돌아간다. 모두한테 그렇게 전해.”
휴....십 년 감수했군.
“거 봐. 내가 뭐랬나.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 해봤자. 누가 알아주겠나. 더군다나 이름도 없는 자네를 말이지.”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
“산 아래로 안전히 내려갈 때 까지 말을 아끼도록 하지.”
휴, 어찌 됐건 이 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지. 옳지! 이 다음에는 흰 고목에게 물어봐 이 세계에 나와 같은 인간이 어디에 있는 지 물어봐야겠어. 어차피 이 다음에 그를 찾으려 했으니까 말이야. 음, 그런데 흰 고목이 보여준 나의 내면에서 그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본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그의 가지가 이리저리 자라고 나의 방을 사방으로 휘젓고 다니는 동안에 확실히 내가 이전과 느꼈던 느낌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음 뜬금없지만 나는 하얀 자들과 인연이 깊군. 흰 너구리, 흰 표범, 흰 나무... 아. 흰 표범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니구나.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 조심성이 좋지 못한 것 같아. 방금도 걸려 넘어져서 들킬 뻔하고, 농부한테도 끈질기게 쫓겼던 걸 생각하면 그리 운도 좋지 못한 것 같고 말이야. 나는 남들만큼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가? 아오! 사실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답답해. 언제쯤 다 내려가는 거야!!
칫, 하필 이 인간이 그 상황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돼버려서 그냥 떠들며 내려 가자고도 못하겠잖아. 덕분에 내 입에도 거미줄이 다 쳐질 지경이라고!! 그나저나 분명이 흰 고목이 인간의 내면을 열어보는 데 실패했다고 했어. 이자가 아무리 반 각성 상태이지만 진행이 중간에 중단 된 것을 보면 일단 인격의 방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의미 일 텐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마치 누군가 안에 대신 들어 차 버린 것 같잖아. 정말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건가? 껍데기는 있고 속은 따로 있다? 아니야 그런 건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야. 만약 그랬다면 흰 고목이 알아챘겠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양쪽을 오갈 수 있게 돕고 있다는 뜻인데.... 뭐 하러 그런 부담을...
아아, 간만에 움직이려니 되게 힘들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그렇다고 나이 든 불쌍한 모습을 보이기는 부끄러우니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오 맙소사! 방금 뿌리 중 하나가 금이 간 것 같아. 욱신욱신 아려오는군. 이런 젠장, 이 상태로는 절대로 그 먼 곳까지 제대로 갈 수 없어. 햇볕 안 드는 동굴에서만 있었더니 제대로 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이런 모양이군. 아무래도 질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조금만 쉬었다 가야겠어. 생각해보니 다들 이름이 있는데 나만 곱게 희어진 화석이나 흰 고목으로 불리다니 난 너무 불쌍한 것 같아. 뭐가 좋으려나? 오우워스? 안 돼 너무 촌스럽잖아. 휴 그래도 다행히 화산이 옆에 있는 염기성 토양은 식물에 있어서는 아주 영양 만점이란 말이야. 푸하하하. 나 방금 소리 내서 웃은 건 아니겠지?
“저기요....”
“이보게 자네들..”
“이 봐 인간 너 말이야 혹시.”
“응? 괜찮아요. 먼저 말하세요.”
“나도 괜찮네. 자네들 먼저 얘기하게.”
“나도 상관없어. 그러는 인간 너 먼저 얘기하지 그래.”
“음... 아직 다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거의 다 내려왔으니 이제 슬슬 말을 해도 되지 않겠나 해서요. 하하..”
“그래 맞아! 나도 들키지 않게 너희들을 숨기려고 하는데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더 못하겠다고!!!”
“이보게 자네들 말이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좀 쉬었다 가지 않겠나?”
“이런, 이런, 이런, 이게 누구신가?”
“방금 가하가 말했어요?”
“좋았어! 나의 새로운 이름을 정했네. 웰포우가 어떨까?”
“이봐... 그거 좀 별론데?”
순간 신호를 맞춘 것 마냥 하나 둘 셋 하고 다 깜짝 놀라 각자 흩어졌다.
“으아아아!! 뫄웅이야!!”
“어디들 그리 가나.”
“그러고 보니 도망갈 필요 없어! 저 놈은 하나지만 우리는 셋이라고!”
그리고 하늘에서 드로브가 나머지 둘과 함께 뫄웅을 지키는 최측근 삼인방의 모습을 뽐냈다. 드로브는 애서 놀란 표정을 지우며 눈신호를 보냈다.
“이젠 어쩌지? 우리 수가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지팡이 든 나약한 인간하나에, 인상 나쁜 개, 그리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목하나... 조합이 아주 가관이로군.”
“뭣이 어째! 네 표정은 어떻고 자식아!”
“어린 녀석이 말버릇이 고약하구만! 뭐 금방 죽어? 으엇!!! 방금 오른쪽 가지가....”
서로 눈빛 교환을 하고 나와 드로브는 방심한 양쪽의 하나씩을 쳐서 쓰러트렸다.
“이제는 4:1 인가? 뫄웅 넌 끝났어!”
“드로브 네놈이 나를 배신을 해!!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아껴줬건만”
“앞에서 냄새나는 네 녀석의 입을 한 대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참는다고 힘들었지. 다음부턴 썩은 쥐 말고 향기 나는 음식들을 먹으라고”
“흥, 너희들이 이래봤자 내가 저기서 내 부하들을 데리고 오면 끝이 난다. 기억해둬! 방금 너희들이 한 행동을 후회하게 될 테니!”
그가 바람을 일으키고 날아오르려는 그 순간. 빡. 정확히 그 소리였다.
“우우....나의 가지가 하나 더 부러졌어... 혹시 이거 땅에 심으면 자라나?”
『나를 연료에 비유한다면 무엇을 태울 수 있지?』
“이 녀석을 그냥 여기에 묶어 놓고 가도 괜찮을까요?”
“충분히 세게 때렸으니 괜찮을 거야. 이것 보라고 내가지가 이렇게나 심하게 부러졌다고! 흐헝헝헝”
“다 자란 나무가 꼴사납게 울지 마. 이 녀석의 말은 혹시 나중에 보복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말이잖아.”
“여러분들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이 녀석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소감으로는 필히 그러고도 남을 자에요. 분명 후환이 될 겁니다.”
“이봐. 드로브라고 했나?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가? 자네가 해치우려고?”
“아니요. 제 동료들을 불러서 구금할 계획입니다. 아직은 이 자에게서 들어야 할 정보가 많으니까요. 두 분은 이제 어떻게?”
“우리 둘은 이미 갈 방향을 정했어. 거기 있는 인간 빼고 말이지.”
“나도 정했어요. 나와 같은 인간을 만날 거 에요. 흰 고목. 혹시 그런 자에 대해서 들은 정보가 있다면 내게 알려주세요.”
“흐음 묻고 싶은 게 있네만 무슨 생각이 있어서 만나려는 건가?”
“아니요. 벽의 왕이 예전에 제가 이 길을 떠나기 전에 말하길, 흰 고목과 나와 같은 인간을 만나보아야 한다고 했어요. 딱히 그 이상의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에요. 사실 벽의 왕을 다시 찾아가 만나 볼 생각도 하긴 했어요. 근데 뭔가 성과 없이 그냥 돌아가기 허탈하기도 하고..... 사실 정말 다시 돌아갈 때는 그에게 내 진짜 이름을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자네의 뜻이 그러하다면 여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겠군. 그럼 하나 충고해주겠네.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그 끝에 내가 원하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 전 중간에 이미 달성을 했을 수도 있고 지나쳐 왔을 수도 있지. 그럴 때는 바로 돌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앞으로 가는 것이 돌아갈 길이 멀어진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때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시 정하는 것도 중요해. 짧은 인연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네. 자네와 같은 인간이라면 떠돌이 방랑자라 기거하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들었네만. 굳이 그가 아니라도 저 바다를 건너면 또 다른 이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야.”
“좋은 조언 고마워요. 저도 당신이 오랜 앙금을 마저 내려놓기를 바라요. 두 분을 만나서 정말 행운이었어요.”
그렇게 둘은 먼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와 드로브 사이에도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어떻게 해야 될 지는 정해져있다.
“저기 다음에 술 한 잔 하자는 약속. 아직 유효하죠?”
“그럼! 물론이지. 이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곧 자네가 다시 긴 여행을 하게 될 텐데.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안전하길 바라며 기다리겠네. 아참. 자네와 같이 왔던 그 고양이 말이야.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아... 그는 다음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났어요. 더 이상 저 산에 볼일이 없다는 군요.”
“음 그런가? 그도 특이한 자로군. 뒷담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그 고양이 살 좀 빼라고 충고해주게.”
“하하하. 왜요?”
“생긴 건 그저 새끼 고양이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등에 태워보니 자네만큼이나 무거운 거야! 겉보기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지. 어휴. 얼마나 날개짓 하는 게 힘들었던지.. 그 사이에 등에 있는 깃털이 우수수 다 빠졌네.”
“그렇죠..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죠.. 전 이만 가볼게요. 혹시 바다 건너편에도. 당신들의 동료들이 있을까요?”
“물론이네. 이 세계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으니 어느 땅을 가도 잠입 중이거나 조사 같은 것을 하려고 활동 중일 거야.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나서 반가웠어요. 드로브 안녕.”
“안녕.”
어라? 그러고 보니 새들이 찾는 거 어떻게 됐더라? 뭐 아무렴 어때, 드로브가 잘 마무리하겠지. 바다를 직접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외로 그 자가 했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군. 이 세계의 바다가 땅들로 둘러 싸여 있다고도 했었나? 그럼 굳이 바다를 건너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는 거네. 그럼 또 길이 이상해지나?
“이봐 흰 고목. 솔직히 말 해봐.
“난데없이 솔직히라니 뭘 말인가? 난 자네한테 숨기는 것 없어. 혹시 내가 걷기 힘든데 참고 있는 것이라면...”
“아니 그런 것 말고, 저 인간을 들여다봤으면 알 것 아니야. 솔직히 보았지?”
“보다니?”
“시치미 때지마. 정상적인 영혼이 그렇게 존재하긴 힘들어. 누군가의 간섭이 없다면 말이지. 직접 본 자네가 제일 잘 알 것 아니야?”
“흐음, 이봐 가하. 내가 왜 아까 인간이 다시 벽의 왕을 찾으러 가려는 마음이 있다고 했을 때 별로 두둔하지 않았는지 아나?”
“그거? 그건 인간이 개인적인 목표 때문에 아직은 돌아갈 수 없다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잖아”
“물론 그렇기도 했지. 하지만 말이야. 사실 거기에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있기도 했네. 아마 그 자가 다시 잿빛 사막으로 돌아가 다시 그를 만나도 ‘우리가 짐작하는 그’가 아닐 것이야. 아마 오랫동안 떠나보낸 친구가 돌아 온 마냥 그런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겠지. 인간이 찾아야 할 자와 곧 마주하게 될 그는 적어도 그 자리에 없네.”
“그렇다면 자네 생각도 역시!”
“비록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네.”
“흥 나는 랄시프를 만나서 따지고 들겠어.”
“마음대로 하게. 그나저나 정말 이건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 휴..”
“안 돼...”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조금만 쉬다 가면 안 되겠나?”
(9장 가질 수 없는 순간 마침)....................
10장
마지막 꿈
어릴 때 달을 보고 정말로 내가 크다면 내가 있는 이 넓은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내가 아주 크다면 나를 포함하는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작다면 어떨 까라는 생각은 거의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그럴게 나의 눈이 작아진 만큼 담을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도 나보다 큰 것들에 의해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데 작으면 오죽하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내 생각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죠. 난 그게 전부 다 ‘같은 눈’이라고 가정을 했던 거였어요. 단순히 내 머릿속의 물리적 시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부터였어요. 모든 이들의 눈에는 각자의 우주를 담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요.
『적재적소가 필요하다는 것』
며칠 전 산에서 좀처럼 생각해보기 힘든 조합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친구인 개와 나무를 만났다. 그들과 나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달랐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졌다. 정확히 그들은 북쪽으로 향했으며 나는 동쪽으로 이동 중이다. 그들로 인해 나는 영향력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에 효과나 작용이 미치는 힘. 단지 저 산으로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많은 힘들을 실감해 볼 수 있었다. 누구는 견디기도 힘든 열에 섣불리 다가가기도 어렵지만 어떤 누구에게는 그 마저도 충분히 밀어낼 수 있는 힘이었다. 나에게 꽤 두통과 정신적 고통을 선사해준 곳이었지만 한 나무의 작은 보살핌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것만큼 속이기 쉬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준 개도 있었지. 비록 소리로 들켜버렸지만 말이야. 말과 그것에 담긴 의미처럼 이 세계에는 다른 존재에 미칠 수 있는 무수한 영향력들이 있어. 지금 당장으로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이 땅에 있는 짐승들이 저 산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 모두가 말하길 원래 저 산은 예부터 사나운 곳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살만한 곳도 아니며 그런 자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더군. 이건 그들이 지금 쯤 이미 이 땅을 벗어나 다른 곳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영향력이라는 것이 모두에게나 항상 작용하는 것이 아닌 만큼 예외도 있는 것 같았어. 당연한 얘기지만 말이야. 내가 아직 연결되지 못한 것과의 계기나 이음매를 다 이해하지 못했듯이 어째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는 나도 알 듯 말 듯 할 뿐이야.
“킁킁”
저쪽에서 이 땅과는 다른 냄새를 가진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시원하고 비릿한 냄새. 아마 곧 바다에 도착한다는 뜻이겠지. 나의 여행은 많은 인연과 함께 했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지만 가는 방법과 방향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지. 그럴 때의 나는 그저 무슨 신호를 기다리듯 무슨 이정표나 길잡이가 나타나길 기다렸어. 나를 실어다 줄 배처럼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배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것은 나의 배가 아니었지. 그 배에 의지하면서 나는 그 위에서 보여 지는 무수히 많은 시야를 간섭받았어. 나의 세계와 시간이 그 흐름의 물살을 같이 타기 시작했던 거지. 처음에는 배가 가는 방향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비교했을 때 다르다는 것을 알은 것만으로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어. 사실 내가 만든 굴레와 세계에 잡혀 스스로의 닻을 잃어버린 탓도 있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재밌는 일이 일어났지. 그 배에는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자들이 같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전에는 보이지 않았다가 차차 하나씩 나타 난거지. 웃기게도 기존의 나로서는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 난거야. 배, 바람, 나,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지. 그래.... 난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했어. 아아 오늘은 흰 꽃이 핀 아름다운 밤이로군.
“이 곳의 나무들은 다들 왜 이래? 다들 성질머리하고는... 쯧쯧”
“자네가 나무이니 한 번 따져보지 그래?”
“남에게 따지고 드는 것은 자네의 특기이지 않나? 어찌 보면 눈앞을 속이려고 하는 짓도 자네랑 비슷하고 말이야.”
“어이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내 섬세한 코는 이런 곳에 매우 취약하단 말이야. 젠장! 그래서 여기만은 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별 수 없지 않나. 다른 곳은 우회할 수 있어도 여기는 이어지는 길이 이쪽을 통해서 말고는 없으니 말이야. 아니면 인간을 따라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나?”
“흥 됐어. 그 무시무시한 긴 시간을 하염없는 것을 보는 건 오랜 세월 살아온 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 차라리 이 곳이 낫다 하겠어.”
“허허 자네의 성깔도 이 곳 나무들한테 지지 않는 구만. 엉? 저거 혹시 오리 아냐?”
“흐음, 맞아. 아무래도 인근에 살고 있는 북쪽 하늘 감시자들인 거겠지. 잘 됐어. 저들에게 길을 찾게 도와주는 목걸이라도 빌려보자고.”
마지막 작은 언덕을 하나 넘고. 드디어 저기 보이는 것이 바다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잿빛 사막을 건널 때 높은 봉우리에서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푸른 것이 강이나 바다가 아닐까 생각했었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내가 헤엄을 칠 수 있었나? 아니지. 나라면 물에 빠져도 죽지 않을지도 몰라. 오오!! 그렇다면 배 따위는 구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것 참 편한데?...... 아니야. 잠시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군. 주위에 있는 다른 동물들한테 혹시 있는지 물어보고 빌려 보는 것이 좋겠어.
“에이! 젠장 단순히 부탁 좀 하려는 건데 소리 지르고 달려 나가기는...”
“내 생각에는 우리 때문이 아닌 것 같네만? 분명 우리 앞을 쏜살같이 달려 나가기 전에 뭐라고 하긴 했는데 말이야.”
“몰라! ‘그가 돌아 왔다’ 였나? 허참. 오래전 지네들 왕이 되살아 온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호들갑은... 으어!! 뭐야! 지진이라도 났나.?”
“아니. 저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큰 짐승이 뛰어오고 있나 보군.”
“참나, 어디 정신 나간 짐승이 이 숲속에서 길을 잃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모양이구만. 한 번 보자 어디...... 자네는 보이나?”
“음... 동물들이 오고 있기는 한데 이상한 조합이군.”
“아니 우리 말고, 소리가 나는 쪽 말이야.”
“내가 말했잖나. 동물들이 오고 있다고. 난생 듣지도 보지도 못했단 말이야... 덩치 큰 악어를 태운 거대한 말이라니.. 그리고 옆에 다른 말도 있구만.”
그나저나 바다는 정말 평평하구나. 다른 땅들처럼 굴곡이 별로 없고 게다가 넓어. 하지만 바다에서도 물이 흐른다는 것은 계속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과정인거겠지. 이 바다에서도 지금 이 순간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겠구나. 그 때 옆쪽에서 첨벙첨벙하는 소리를 들었다. 커다란 갈색 짐승이 물에 완전 빠져 잠수를 반복하며 손으로 마구 휘젓고 있었다. 무언가를 잡고 있는 곰이었다.
“저기요.”
“푸후푸후. 여기가 아닌가.”
“저기요.”
“푸화. 또 놓쳐버렸네.”
“저기요.”
“켁켁켁켁. 뭔 놈의 고기가 이렇게 빨라.”
“저기요!!!!”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설마 댁이 날 부른 거요?”
“이 자리에 짐승이 나랑 당신 말고 누가 있겠어요?”
“...... 물고기는 짐승이 아니요?”
“...... 흠흠. 여튼 하나만 물읍시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배가 고파서 하나를 건져 올릴 때 까지는 도저히 못 참겠으니”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쪼그려 앉아 한참을 지켜봤다. 저 곰은 그냥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면 안 되는 걸까... 이크. 그런 말을 했다가 혹시 나한테 시선을 돌리면 곤란하지. 에고 며칠 째 잡을 생각인건지.. 그냥 수영을 하려는 게 아닐까?
『내가 왜 그때 그곳에 있어야 했는가』
“깜짝이야. 방금 지나간 게 무엇이야?”
“내가 뭐랬나? 이상한 조합이라고 했잖아.”
“별꼴이군. 말이 하다못해 다 큰 악어를 업고 달리다니 말이야. 쯧쯧.”
“그런데 방금 저들이 가는 방향이 우리가 왔던 방향이 아냐?”
“흥, 저들이 그 드로브인가 뭔가 하는 놈과 동료이든, 아니면 정말로 이 숲의 나무들에게 한 껏 취해서 미친 짓을 하고 있든 우리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어서 가자고.”
“우리 저기 햇볕 잘 드는 언덕에서 잠시 쉬어.....”
“시끄러!”
“하이고 내 신세야... 동굴에서 몇 년 만 관절 운동을 하다 나올걸...”
결국 작은 물고기 하나를 간신히 잡은 물고기를, 정확히 말하자면 수면위로 튀어 오른 것을 손바닥으로 쳐서 날려 보낸 거지만, 불까지 피워놓고 익히고 있다. 정말이지 별난 곰이야...
“그런데 아까 댁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소? 이제 해보시오.”
“내가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데 혹시 타고 갈 만한 배가 있나 물어보려 했습니다.”
“뭐.. 이 해안가의 어디나 뒤지면 하나쯤은 있을 거요. 정 못 찾으면 아까 고기를 잡다 봤는데 저기 저 앞바다에 해초에 묶여 가라 앉아 있는 채로 잠들어 있는 배도 있고.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 그러쇼?”
“이 바다 건너편에 나와 같은 인간이 있다고 해서 그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허허허. 나도 들어보기는 했다만 굳이 그런 이유로 뭐 하러 그 먼 곳까지... 그가 뭐 맛있는 게 갖고 있다오?”
“오~ 그래? 보자.. 다 익었나..... 아 뜨.뜨.뜨.뜨 거워!”
결국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내가 잡아 그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자네는 이 물고기의 생명의 은인이야. 자넨 정말 좋은 친구로군.”
물고기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맞는 말인가....
“곰, 당신은 원래 여기에 살았어요?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면 아직 서툰 것 같은데?”
“난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라 어디에 정박하지는 않아. 어디 맛있는 게 있다고 하면 어슬렁 어슬렁거리고 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곧 여기를 떠날지도 몰라. 아 혹시 떠나도 바다는 건너지 않을 거야. 이 곳에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맛있는 물고기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
그냥 먹을 생각만...
“같이 가달라고도 안 했어요. 그런데 그 덩치에 그 정도만 먹고도 배고프진 않아요? 좀 부족해 보이는데요?”
“글쎄 내가 이래봬도 꽤 소식을 한 단 말이야. 한 번에 많이 먹으면 탈나니까. 나도 나이를 먹고 나서 뭐든 무식하면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 하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이게 안 믿긴다는 건 아니까.”
저 튀어나온 배로는 사는 동안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
“좋아 다 먹었으니 배를 찾아 주도록 하지. 보자 저번에 여기 어딘가에서 봤는데... 음 어디였더라. 이보 게 인간 잠시만 기다리라고.”
그렇게 물에 풍덩. 다시 들어가 버렸다. 슬슬 나오지 않아 불안해하던 찰나 수면위로 돛까지 밧줄로 묵인체로 있는 배가 떠올랐다. 그냥 가라 앉아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멀쩡한 형태라 생각되는데.. 그리고 그 뒤로 곰이 물에서 나와 모래사장까지 배를 밀어다 주었다. 그러더니 다시 물에 들어가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배에서 물을 퍼내려면 이것이 있어야지.”
“그렇게 까지 배려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저 당신을 먹을 것만 밝히는 뚱뚱한 곰이라고 오해했어요.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좋은 곰이에요.”
“에이 뭘. 당신이 내 물고기를 살려줬으니 내가 그 은혜를 갚는 거요. 혹시 이 다음에 맛있는 것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면 좋고.”
“죄송한데 저는 음식과는 거리가 멀어서 잘... ”
“그것참. 산 입에 넘어가는 게 없다니. 재미없게 사시는구만”
“휴 드디어 불모지 남쪽 경계까지 왔네. 지금 쯤 인간은 벌써 바다로 나갔을까?”
“아닐 수도 있지. 특히 바다로 갈 수로 시간 지연이 커서 다른 곳과 시간 차이가 많이 나니까 말이야. 아직도 배를 찾지 못해 쩔짜ᅠ갈 매고 있을지 모르지. 푸하하하하”
“자네는 가끔 정말 이상한 구석이 있어. 그게 뭐가 그리 즐겁다고.. 쯧쯧. 그럼 이대로 젠을 만났다가 그 곳을 갈 건가?”
“그럴 필요는 없겠지. 불모지를 통해 돌아서 가기 보다는 그냥 남쪽으로 쭉 돌아서 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만나면 굳이 귀찮게 또 이야기를 늘어놓을 테고 말이야.”
“그게 아니라 그냥 젠이랑 관계가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고?”
“흥, 얼른 가기나 하자고!”
“솔직하지 못한 개 같으니.... 어째 나이를 먹어도 예나 지금이나... 이 봐 하가.”
“왜 부르나?”
“자네는 정말 오완을 만나도 아무 거리낌이 없나?”
“나는 오래 전에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었어. 거리낌이 없다는 건 아니야. 단지 내게 있어서는 그 뿐인 거지. 그리고 빨리 안 따라오면 버리고 가겠네.”
“이 봐 같이 가자고!! 하이고... 그냥 따로 가겠다고 할 걸...”
『난 그대에게 뒤돌아 손을 흔들었소.』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곰.”
“허허 인간 친구도 바다길 조심하게. 정 심심하면 달을 외워보는 것도 좋을 거야.”
“내키지 않지만.. 뭐 해 볼게요.”
“어? 잠깐만. 댁의 목 뒤에 뭔가가 붙었는데? 기다려봐 내가 때 주지.”
“정말이요? 고마워요. 언제 그런 게 붙었지?”
“됐어. 가보게.”
“고마워요. 그럼, 흡!!”
배를 물에 띄우고 돛에 걸려있는 밧줄을 다시 조정했다. 순간 돛이 펼쳐지고 배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오오 간다. 가. 그러고 보니 이 배는 나중에 정박하려면 어떡해야 하죠?!”
“......닻이 없는 배를 세우고 싶다면 노를 젓는 법을 배우던 가 아니면 바람을 이용하는 이치를 깨달아야지. 도중에 가라앉거나 표류하기 싫다면 말이야. 껄껄껄.”
그는 고개를 돌려 돌아가고 있고 배는 점점 멀어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에설까 부르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돛도 제대로 고정이 돼 있지 않고 뭐가 엉성한데요?! 무서운데 그냥 내릴까?! 이 봐요 혹시 이거 물이 새진 않겠죠?!”
“그럴 리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여기로 타고 온 배니까 말이야.”
“뭐라고요?! 멀어져서 목소리가 잘 안 들리네요?”
“껄껄껄 안녕히.”
흠... 괜찮아. 괜찮아...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에취! 괜찮을 리가 없지 않나! 왜 그렇게 태평 한 건데?”
“그러는 자네는, 왜 그렇게 걱정이 나서 안달인가?”
“벌써 이번에 새로운 윤년이 찾아오고 있어. 그 말인 즉,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붉은 곰이 떠오른 다는 것이고 따라서 시기가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거야.”
“그런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도 우리의 몫 아니었나? 히유!! 어이고 여기는 여전히 춥구만... 여전히 나무들이 살 만한 곳이 못 돼..... 아무리 자네가 그렇게 말해도 말이네, 대충 계산해도 이미 그 인간은 이미 바다로 떠난 지 어연 한 주는 넘었을 거야. 이제 와서 자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무엇이 일어나든 그냥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아!! 설마 자네가 말하는 시기라는 것이!!”
“이해가 한 참 느리군... 그래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어... 생태계의 격변, 자연을 송두리 째 바뀌어 버릴 큰 변동, 다시 한 번 이 천체에 큰 혼돈을 초래할 큰 순환이 찾아 올 거야! 바로 다음 번째 대이변이!!”
“...... 나는 이미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네. 자네는 잘 다녀와.”
“... 그래 간만이니. 앞에서 실수하지 말고. 이따 봐. 흐음 이쪽인가, 이봐 천천히 좀 밀라고 굳이 그렇게 안 해도 갈 것이니.”
“..........”
“....음,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 동안 잘 지냈는가? 오완.”
무엇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곳은 그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니... 정말로 그 동안 내게 고작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그리고 고요하다. 아마도 이곳은 아주 커다랗고 아주 느린 물로 채워진 천체인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 떠 있다. 무뎌지는 걸까. 아주 느린 시간 동안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 따위에는 둔감해진 걸까. 이상하게 요즘 따라 나도 모르게 조금씩 눈이 감기네...... 특히 오늘따라 더..........
“...이 봐. 노인. 그 동안 아무 소식 없이 지내다가 여기서 나를 찾아 불러낸 다는 것은 좀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허허허 왕이여, 그새 7년이 훌쩍 지났네. 나의 말대로 누군가 자네를 찾아 왔던가?”
“그래. 이번에도 당신의 예언이 맞았어. 7년 전 나와 당신이 얘기를 나누었던 날, 그 바로 며칠 뒤 붉은 곰을 타고 한 인간이 이 세계로 건너왔었지. 항상 궁금했네만, 당신 같은 자들은 대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지?”
“내가 다른 차원을 얘기한다고 고귀한 왕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겠나?”
“날 비꼬는 군. 참견꾼. 이번에는 무슨 헛소리를 들려주러 오셨나?”
“왕의 말씀처럼 나는 참견을 하러 왔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때까지 해오던 참견의 드디어 종지부를 찍으려고 말이야.”
『자네의 발조차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걸 어찌 알았겠나.』
“뭣이?”
“그 전에 하나만, 왕을 통해서 직접 답을 듣고 싶은 게 있소. 7년 전 처음 어린 인간을 만났을 때 말이오. 어째서 흰 고목뿐만 아니라 나까지 만나 보라 얘기를 했던 건지 말해줄 수 있겠소?”
“.......”
“설마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거요? 아니면 내가 진정으로 그를 돕기를 바랐던 거요? 답을 해주시오 왕. 그대는 나의 참견을 줄곧 싫어 해 오지 않았소?”
“........”
“대답을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난 오래전부터 왕이 꿈 꿔오던 오랜 열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네. 그리고 그것을 곧 이룰 순간이 눈앞까지 왔다는 것도 말일세.”
“지금까지 나 몰래 무슨 참견을 해 왔는지 몰라도 그 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군. 아니. 참견을 해왔다면 알 텐데? 지금 이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말 했지 않나 왕이여. 내 참견의 종지부를 찍으려 왔다고.”
“도저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군. 죽 지켜봤다면 알 터이다. 내가..”
“그래, 왕의 몸은 지금도 잿빛 사막 가운데 조용히 모래바람을 맞고 계실 테니 알 수 없을 테지만 난 그 소년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지.”
“보아하니 나의 계획의 중간에 무언 가에 손을 댄 모양인데...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앞으로의 결과에 변화는 없어. 예정대로 진행 될 것이야.”
“오오. 왕께서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계시지 바로 그 위대한 능력에 말이야.”
“...뭘 비꼬려는 거냐?”
“왕께서는 매개자요. 무엇과 무엇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양쪽을 볼 수는 없소. 자신의 인격을 나눠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틀 수 있어 무엇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어디에도 갈 수가 있지. 하지만 치명적 단점이 있지. 그건 바로 입구와 출구를 한 번에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오. 주는 자와 받는 자, 미는 자와 당기는 자.. 왕께서는 이 경우 중에서 어떤 것에도 동시에 양쪽이 될 수는 없소. 스스로를 나누어 어디로든 이었지만 자신의 반대편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 지에 대해서 전부 알 수 없었던 거요. 그저 변화된 상황을 확인하고서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겠지.”
“으흠 글쎄.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나는 뒤에서 내 몸을 뚫는 소리를 들었노라.”
“제가 그대의 몸을 부쉈습니까?”
“글쎄, 그게 ‘너’였을지? 그러곤 지금 너와 나는 함께 있지.”
“저희가 혹시 얼마 전에 보지 않았습니까?”
“글쎄, 설사 나를 만났어도 그게 ‘나’였을지?”
“으으음....그래서 그 때...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나? 지금 노인이 보기에도 이 곳의 모습은 나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왕의 계획은 실로 아주 먼 곳까지 내다 본 것이었고 많은 것이 그대의 예측대로 되었소.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이 세계의 힘과 현상과 확인하고 그 다음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지. 마침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되었고 말이요. 결국 인간도 이 세계에 숨겨진 힘과 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지. 그것은 왕이 의도했던 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지....그리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보험도 생각해 두었고 말이야.”
“.......그게 어쨌다는 것이야...나에 대해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결국 그 과정을 늘어놓을 뿐, 내가 옳았다는 것만 증명할 뿐이지 아니냐?”
“내가 얘기했듯이 왕은 변화된 상황의 결과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그 전말과 과정을 알지 못하오. 덕분에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이 있었지. 허허허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치로군. 왕의 계획은 대담하고 날카로웠소. 인간이 곱게 희어진 화석을 찾아가게 해 그가 인간이 바라는 무엇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내면의 방을 열고 그것에 맞는 틀을 찍게 만들었으니 말이요. 이렇게까지 왔으니 당신이 예상했던 보험까지 완벽히 적중했다고 믿는 건 당연했을 것이요...”
“......네 놈 설마.. 그 것을 대신 했던 것이!”
“그러하오. 당신의 예상과 달리 각성을 시도했던 건 어린 소년의 잠재력을 욕심내 자신에게 필요했던 동력원을 뽑고자 했던 ‘늙은 도적’이 아니었지. 껄껄껄껄. 그는 순수하게도 그냥 인간을 보내주기로 했어. 그간 정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소년을 통해서 과거의 어떤 모습을 지켜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소년의 각성상태에만 눈이 멀었던 왕께서는 설마 그 주술을 할 다른 자가 더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하셨겠지. 설마 갖가지 모습을 바꾸어서 연기를 하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다른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그렇지 않았소? 허허허허.”
“그럴 리 없다...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어...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단 말이다...”
“왕. 마지막으로 그대가 해야 되는 일이 있겠지. 인간과 잘 얘기를 나눠보시오.”
“어째서 네가 그런 짓을?! 네게는 나에게서 그것을 막을 명분이 없다!!!!!”
“미래를 내다보는 자에게 행동의 명분이 있다 한들 그것을 이해하실 수 있겠소?”
“닥쳐라 이놈!! 이 이상 참견하지마라 참견꾼!”
“역설이로군. 이미 나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마쳤소.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
“으아아아아아아!!!!”
“오, 그대 아름다운 눈꺼풀이여 시간을 제발 멈추지 말아주오.”
왜 자꾸 눈이 감기는 걸까.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게 나도 다른 짐승들처럼 잠이 온다는 신호일까? 재미있군. 과연 이것을 내게 있어서 정상인 신호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신호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하하하. 아니면 하루도 이렇게 무료하게 가만히 있는 날이 없었는데 요새는 가만히 앉아 끝없는 수평선을 보는 일 말고는 하는 게 없으니 몸이 이게 꿈이 아닌지 잠에 드시려 하는 건지도 모르지. 낄낄끼.........ㄹ... 후아. 이번엔 정말로 정신을 잃을 뻔 했잖아... 요새는 자꾸 가물가물 한 게 정말 제정신은 아닌 건 확실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목에 목걸이까지 달고 있고 말이야.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람. 휴. 안 되겠어. 오늘도 달의 순서 외우기를 해봐야지. 처음은 밤색 나방, 황금 연꽃, 파란 재규어, 보라 부엉이, 초록 잠자리, 그 다음은 뭐였더라... 그래! 회색 호랑이 그리고 오늘은.... 오늘은...어?
“이봐 어디에 있어?! 여기 있는 거 다 안다고!”
“난 또 개가 자기 새끼에 새끼까지 데리고 총 출동을 한 줄 알았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내가 조용한 성격인 거 몰라? 이걸 확 걷어 차 버릴까..”
“어딜 아직 대도 못 이은 개를 송장 만들려고...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뭐야 백년은 넘게 안 보이고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벽의 왕이 꾸미는 일에 대해서 알아? 몰라?”
“왜 그에 관한 걸 나에게 묻지? 직접 찾아가서 묻지 그래?”
“숨기려 하지 마! 네가 그 인간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당연히 그가 어떤 존재인지 눈치 챘겠지?”
“흠.. 보아하니 뭔 가를 알고 왔나 본데, 안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게 저 인간에 대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도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말도 나오지 않는군. 그 날, 나와 했던 약속을 잊었나?”
“그 말의 의도, 내게 몹시 불편하게 들리는 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지마!!”
“너야말로 잘 알고 있다면 그가 할 일을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봐. 이 봐. 자네 둘 다 진정하게.”
“당신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네를 다시 보니 목 뒤에 물린 부분이 아리는 구만...”
“노인? 당신이 왜 여기에?”
“이제부턴 내가 전부 설명해 주겠네.”
정신이 아늑해. 마치 그 때처럼... 아니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야. 마치 내면의 벽은 물결은 밀어 큰 파도를 일으켜 보려고 요동치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무엇이 그것을 막아주고 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도와주는 무언가.... 아 이 목걸이 덕분인가? 어째서 이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행이 예전처럼 나를 잃어버릴 것 같지는 않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암흑의 공간에서 사고가 없이, 의지도 없이, 끌림도 없이 그렇게 한참동안 부유했다. 저 멀리 벌어진 작은 틈을 발견하기까지.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바로 앞에 직면했을 때의 그것은 형태는 알 수 없이 일그러져 있는 문 같았다. 무엇이라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내가 그것을 어떠하다고 단정내리기 힘들었고 쉽게 통과시켜줄 것 같지 않은 자물쇠가 ‘걸려있는 듯했다.’ 지금..... 지금이라면 열 수 있다. 그런 확신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없이 작게 이어지는 길로 끝없이 빨려들어 갔다. 마치 입구부터 점점 가늘어지는 이상한 통로로 떨어지는 것처럼....
“지금... 방금 한 그 말을 그대로 내게 믿으라는 겁니까?”
“하지만 전부 사실이야.”
“당신이 그 동안 긴 시간을 들여 벽의 왕의 계획에 간섭을 했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참견한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인데요? 당신이 바라는 생각의 결과가 있을 것 아니에요? 당신은 미래를 볼 수 있잖아요. 말 해봐요!”
“말 그대로‘미래를 만들기 위해서’이네.”
“뭐라고요?”
“곧 있으면 커다란 과거의 닫힌 문이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며 또 그 새로운 문은 이내 닫혀 버리겠지. 우리는 너무나 그 반복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 이상을 갖지 못하고 구속당해 있었네.”
“당신 말은....그가 해낼 것이라고 믿는 다는 겁니까? 아무도 그것을 생각만 했지, 해내지 못했어요. 더군다나 그 녀석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속한 우주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녀석이었다고요.”
“그랬겠지. 허나 과거보다는 이제 그의 눈에 어떤 우주가 그려지기 시작했는지가 중요하다네.”
『나를 깨우지 말라고 나에게 말해줘.』
내가 어디까지 내려온 것일까. 아니 어디까지 작아졌냐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너무나도 많은 수수께끼를 볼 수 있었다.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목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는 속도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그것은 찰나의 순간으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어디선가 들리는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에 스스로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어디에서 들리는 것이지? 누가 울고 있는 거야? 이 곳에 있는 수많은 잠긴 문중에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있다. 살며시, 살며시 다가가 조용히 기대어 엿들었다. 비록 그 목소리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조금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망설이고 그 문을 열었다. 그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는 작은 방안. 벽이란 벽은 죄다 부서져 버려 벽이란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이곳이 어떤 공간이든 무엇을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이미 틀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어째서 이 안으로 들어왔지? 너를 계속 속여 왔던 나를 한껏 비웃어 주려고 찾아왔느냐? 결국의 너의 승리라고 외치기 위해서?”
“난 그저 밖에서 그대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왕이여 무엇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그리 서럽게 울고 계십니까?”
“...나는 너를 처음만나는 날 전까지 같은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기분 좋은 꿈이었지. 나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 저 하늘 밖의 오만한 자들과 자유롭고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는 꿈을 말이야. 난 흰 고목처럼 태초의 순수가 아니었지. 즉 그 이후의 가공자라는 말이야. 하지만 비순수의 가공자는 태초의 순수와 달리 하늘 밖에 관한 기억이 없다고? 그렇지 않아. 나의 아주 작은 티끌도 저 밖에서 온 것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꿈꿨네. 태초의 그 곳으로 돌아가는 그곳으로 가는 꿈 말이야. 거기에는 나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있었어. 난 그저 그 태초의 기원을 꿈꿨던 것뿐이었다고..... 왜 나를 막은 것이야...?”
“저는 당신을 막지 않았어요.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혹시 당신의 꿈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 저였습니까?”
“난 매개자로서 양쪽을 연결 할 수 있지만 양쪽과 동시에 소통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소통은 내가 이어주는 양자의 몫이었지... 내게 필요했던 것은 모든 우주의 비밀을 풀어줄 만능열쇠가 아니었어. 단지 나에게 맞는 그것, 단 하나면 족했지. 그것을 위해 시시각각 변해 가는 너에게 정확히 맞춰 다듬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비록 흰 고목의 힘을 빌렸어도 말이지. 결국 주위를 봐라.! 결국은 다 부서진 채로 처참한 꼴로 끝나지 않았는가... 아 허무하구나”
“...다.. 다..부서지지는 않았어요........”
“내가 계획했던 것과 같은 원리로, 이것은 오고 나가는 것, 청력와 인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궁극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랄시프가 해내지 못한 꿈이지. 하지만 그 대단한 그녀도 결국 도중에 포기했지. 하지만 난 다른 방법을 잡아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어! 즉 내가 열쇠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열쇠에 맞는 자물쇠의 구멍이라도 되기라도 결심을 한 거다! 비록 그것이 내 몸을 부수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꼴이 될지언정!”
“이봐요 노인. 벌써 지금쯤 밖에는 붉은 곰이 떴을 텐데 지금까지 아무런 징후도 없잖아. 솔직히 정말로 그것이 일어난다니 믿기지 않는다고... 하. 하. 하.... 허풍 아냐?”
“허허허. 자네도 지금 나처럼 벅차있나? 하지만 이젠 그저 꿈이 아니야. 곧 우리 앞에 닥칠 그것은 반드시 찾아 올 걸세.!”
“다.. 부서지지 않았어요.”
“뭐라고?”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당신의 말대로 모두가 하나 되는 완벽한 소통이란 것은 없어요. 있다고 해도 찾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요. 아무리 당신이 나를 이용하여 그 본을 뜨고 나를 끼워 맞출 수 있다고 해도 과연 능사일까요? 자신과 통하는 어떤 길도 문제없이 지나가는 것이 과연 답인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엇이? 그 이상의 경지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감히 이 세계로 들어 온지 갓 몇 년밖에 안 된 네 놈 따위가 뭘 안다고?”
“맞아요.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하지만 전 가능성을 지나쳐 왔어요. 여기로 오기 전에 한없이 내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다른 우주들을요. 그 곳에는 내가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자물쇠와 매듭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어요.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것들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죠. 한없이 큰 눈으로 오만했던 저가 숙이고 숙여서 들어올 수 있었어요.’‘
“......”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공허한건 고통이 아니에요. 받아들일 순 없지만 나지막이 느끼고 흘러가게 두는 것. 긴 시간 속에 얼어붙듯 아름답지 않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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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Knock. Knock)
(10장 마지막 꿈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