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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un 13. 2022

전쟁의 흉터도 언젠가 아물까?

220613 국방일보 조명탄 기고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기념비적인 영화다. 그때까지 6·25전쟁을 그만큼 대대적으로 그린 블록버스터는 없었다. 2004년 개봉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극장에서 작품을 보는 내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진주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 따위를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참혹한 전쟁 장면에서 우리말이 들린다는 것부터 해외의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무게감이랄까.

 
더구나 이건 판타지도 아니었다. 영화 속 참상은 우리의 역사 아닌가. 100년, 200년 전도 아닌 불과 50년 전의 역사.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도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땐 막연히 먼 과거의 일로만 여겼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참전용사였음에도 6·25전쟁의 상처를 피부로 느끼기에 열세 살은 어린 나이였다. 무감했던 초등학생은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 크나큰 공포와 슬픔을 느끼며 민족의 비극을 조금이나마 체감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나란히 전쟁에 동원된 형제가 전장에서 생이별하고 50여 년이 지나 형 ‘진태’는 전장의 유골로, 동생 ‘진석’은 노쇠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마주한 순간.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뭐라고 말 좀 해요. 5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절규하는 진석의 울음에 극장은 그야말로 울음바다가 됐었다. 나 또한 눈물범벅이 돼 연신 눈물을 닦으며 훌쩍였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봤는데, 같은 장면에서 별수 없이 또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앞으로도 매번 참기 힘든 눈물일 테다.



영화를 보고 몇 년쯤 지났을까. 어느 여름 주말쯤이었다. 부모님께서 느닷없이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 현충원 근처에 사셨던 친할머니 댁에 오가며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그 앞을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께선 의아해하던 내게 이유를 설명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손위 형제, 어머니의 삼촌이 계시는데 전쟁 당시 전사 통보만 받고 유해를 인도받지 못해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껏 고향에 가묘를 두고 제사를 지내 왔는데, 그분께서 현충원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는 것이다. 사연을 들은 아버지께서 수소문해 찾은 결과였다.

가족이 현충원에 모였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형제들과 우리 식구까지 10명 남짓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미리 확인해 둔 묘역으로 이동해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외할머니와 형제들은 눈물을 터트렸다. 그 이름이 맞는다면서, 이제야 오빠를, 형을 찾았다며 애통한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도 눈물을 보였던 것 같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묘비 앞에 앉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침내 만난 형제를 기렸다. 외할머니께선 아버지께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1952년 7월 13일 전사해 1959년 10월 31일 현충원에 안장된 유동수 상병은 그렇게 50여 년의 시간이 지나 가족을 다시 만났다.

돌이켜 보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어렸다. 그 만남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미처 몰랐다. 외할머니께서 오빠를 다시 만나 좋으시겠다는 생각만 겨우 했다. 사실 지금도 그 마음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다. 반가움, 그리움, 원통함, 슬픔, 회한…. 그 모든 걸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매년 6월이 되면 문득 현충원에서의 일화가 생각난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은 이렇게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전해진다. 언젠가 이 땅에 전쟁이 남긴 흉터가 완전히 아무는 날도 올까. 그러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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