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가오니 Sep 24. 2019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시간이 일깨워주는 삶의 순간들


창밖으로 지나가는 날씨를 보니 며칠간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쏟아지고 먹구름 가득했던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쾌청했습니다.

월요일 정체로 인해 꽉 막힌 도로 위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어렵게 잡은 진료 예약 시간이 늦을까 조바심 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도 평온했습니다.




같은 서울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2시간 여 만에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형이 입원하고 어려운 수술을 하느라 6년 전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낸 그곳입니다. 건물을 보자마자 옛 기억이 살아났습니다. ‘아 저곳에 트리가 있었지..’ 같은 사소한 기억들만 떠올랐고 괴롭고 힘든 그때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치 뇌가 괴로웠던 기억을 일부러 비활성화시켜둔 느낌처럼 말이죠

지난주 건강검진 결과 통보를 받고 한두 시간 정독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검진 병원에 전화해서 검진 검사 정보들이 담긴 CD를 송부받는 그 기간과 오늘 특진 예약을 잡은 것까지 지나왔던 지난 열흘간.


지옥과 덜 지옥을 오고 가면서 머릿속이 온통 '도대체 왜?'라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영상의학과에서 CD에 담긴 검사 데이터를 업로드하는 짧은 시간에도 계속해서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남았습니다.

특진 접수처로 가서 수속을 마치기 전 통로 안을 비추는 따사로운 햇살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진료카드를 발급받고 나서야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잠을 설치며 악몽을 꾸다 말다 새벽녘에서야 형이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었던 게 진료카드를 받자마자 묘하게 또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검사가 끝나고 면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병원 뒤쪽 골목과 이어진 어느 대학교 캠퍼스를 걸었습니다.

공기도 맑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로소 안심이 됩니다. 물론, 아직 완벽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마음이 놓일 정도로 직접 확인을 하고 나니 다시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돌아왔습니다.

특진 날에 맞춰 휴가를 쓰고 오전 일찍 병원에 온 탓에 검사가 끝나고 걸어 다니는 오피스가 모인 도심지는 한산합니다. 새삼 직장인들의 걸어 다니는 모습, 바삐 움직이는 차들이 내는 소음과 산들거리는 바람 소리 모든 게 마음속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지난주 타들어가던 마음과는 정반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완전히 같은데도 말이죠. 문득 내가 보낸 시간을 돌이켜봤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들 속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과거 건강 검진에서 큰 결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방치했습니다. 그러다가 1년 만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몇 군데의 이상이 보였고, 한 군데는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와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애써 외면해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선 그럼에도 바뀌는 게 없다는 절망감, 그리고 아픈 가족의 지난하고 힘든 수술과 회복 과정을 긴 시간 동안 지켜보며 괴롭고 힘들었던 지난 경험으로 인해 마음 안에 겹겹이 쌓여있는 '나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생각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묘하게도 그런 것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저절로 망각된 것 같이 느껴진 것입니다.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서 인왕산이 올려 보이는 거리에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구름은 느릿느릿 움직이고 바람은 상쾌하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걷던 이 거리가 완전히 다르게 인식되는 순간입니다. 아 이곳이 이렇게 좋았나 새삼 드는 생각입니다. 인왕산의 모습이 변형되거나 거리의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한 예술 극장에 들러 충동적으로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1990년대 서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한 중학생의 보편적이지만 강렬한 인생의 서사를 통해 흘러가는 시간과 그 안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마치 오늘의 하루의 흐름이 모두 들어가 있는 듯한 영화였습니다.


'시간은 비가역적이고, 흐르는 시간 동안 다가온 것들,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인생 그 자체가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후회와 회한을 남겨두지만, 실재하는 지금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는 장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받아들이고 안 좋은 일들이 생긴다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적절한 망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앞으로 '나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보다는 '나를 아끼고 한 발짝 지금의 순간 안에서 흘러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결코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느슨한 관계 속 행복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