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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가오니 Mar 24. 2021

나의 '정체성' 탐사기

Personal Identity 'HOPPERS'를 만들기까지 과정

정체성(Identity) 은 무엇일까?
[source = 이말년]

정체성(identity)을 구글링 하면 약 7억 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또한, 영어로 도배된 링크만 봐도 머리가 아파지는 교육 관련 사이트와 각 종 논문들이 가득하다. 대략 정신이 아득해진다. 알아보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source = Universal Pictures, 'THE BOURNE IDENTITY]

정체성을 갑자기 이야기하려고 하니... 갑자기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로 잠에서 깨어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계좌번호 하나만 가지고 스위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괴상한 생각도 든다.


(숨겨진 스위스 계좌도 없지만, 여행가보고 싶기는 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지난 20년간 온라인 상에서 나를 대변하던 '세가오니'라는 닉네임을 좀 더 확장해서 PI (Personal Identity)를 디자인하는 과정과 그 안에 담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작년  <20세기 비디오게임모임>을 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런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20년 넘게 쓰고 있는 닉네임이고 필명이며 취미생활을 대변하는 '세가오니'라는 온라인 정체성 덕분이었다.  

 

이 모임에 온 사람들은 나의 어떤 점을 믿고 산속에 위치한 우리 집까지 멀리서 (한분은 외국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아와 준 것일까?  


익명의 온라인상에서의 쓴 글이지만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

참여하고 싶은 내적 동기가 생길 만큼 정서적 공감을 느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가보고 싶어 졌다.


등등.. 참여하신 분들 저마다의 생각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임을 진행하면서 지난 20여 년간 비디오 게임 커뮤니티에서 '세가오니'란 이름으로 온라인 활동을 꾸준히 해왔고, 알게 모르게 서로 닉네임으로 게시글-덧글 소통을 하거나 게시글을 통해 기호와 취향에 대해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 공감하면서 간접적으로 쌓인 정서적 친밀감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source= 2000년대초중반 모 비디오게임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

수불석기(手不釋機:'손에서 게임 컨트롤러를 놓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조어)


아마도 게임과 관련한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던 나를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수불석기' (조어)가 아닐까.

여기서 나는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문화는 온통 비디오 게임이었다.



What am I?


그렇다면, '세가오니'라는 닉네임은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가를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

이 생각에 대해서는 생각의 답이 빠르게 나왔다.


세가오니(SEGAONI)는 나의 일부분이고, 온라인상에서의 게임 커뮤니티에서 쓰던 정체성이기도 했다.


지난 20년 동안 처음 만난 게이머분들과 취미활동을 교류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세가 귀신(ONI, 귀신의 일본어 발음)이시군요?"


정답은 아니다.


S방송국에서 취재했던 당시 영상도 첨부해본다.

[source=SBS Broadcasting]


세가 귀신이 아니라 그저 세가 게임을 하면서 자란 어린 시절 기억의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조어일 뿐이다. 그리고, 유년시절엔 세가 게임보다 애착이 많은 메이커가 많았다. LSI게임기 스크램블 (Konami,1985)과 8비트 퍼스널 컴퓨터 MSX였다. TV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인터랙션의 짜릿함을 처음 경험하고 푹 빠지게 된 시기가 1982년이었고, 세가의 게임에 푹 빠지게 만든 계기인 메가드라이브가 1988년에 나왔으니까 단순히 '세가'로만 나를 온전히 담을 수는 없었다.

[source = 'What am I, 2014, 정민기]

나를 구성하는 것(What)은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이 것 (The Thing)의 실타래를 풀어 단순화해보기로 했다. 게임 디자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할 때마다 늘 하던 습관이 있다. 생각을 함축해서 처음 듣는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한 용어 만들기이다.


이번에도 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우선 내가 살아온 길을 세줄 요약해보았다.


[7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게임과 함께 살아왔다]

나는 게임패드 버튼을 눌러 TV 화면 속 주인공을 움직이는데 흠뻑 빠졌다.

지금까지 생애 성장기 동안 변함없이 게임은 삶의 대부분이다.

게임회사에 취직을 했고,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 또한 '게임'이 주제였다.




이 세 가지 문장이 함축된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도록 치환할만한 단어는 무엇일까. 다락방 서재에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을 찰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의 동반자', 스푸트니크호


[source =나의 다락방.  '스푸트니크의 연인', 서재 속에서 아직도 적당한 빈도로 읽는 책]

바로 군 복무가 거의 끝나갈 때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구매한 이후 닳도록 읽었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다. 내 온라인 커뮤니티 정체성을 담은 '세가오니'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쯤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처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던 순간 시원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나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떼의 불쌍한 호랑이들을 포함한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뭐든 삼켜먹을 것 같은 강렬한 문구 하나하나 마음을 집어삼켰다. 비디오 게임을 처음했던 1982년 게임에 빠진 사랑의 감정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책의 내용이 미지의 우주 속을 하염없이 표류하는 스푸트니크호라는 쇳덩이에 빗댄 고독한 삶의 서사시 같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 하나의 키워드를 남겼다. '스푸트니크호'. 러시아가 쏘아 올린 세계 최초의 위성이자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을 지닌 고독한 쇳덩이. 20여 년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상상 속에 있던 '스푸트니크호'는 고독한 우주 속 미지의 공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그것이었다. 마치 무수히 많은 비디오 게임 속을 헤쳐가며 살아온 인생에서 함께해온 동반자였던 게임 컨트롤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푸트니크호를 도트로 만들어 보았다.


[Created by Hoppers]


그렇다. 평생 함께해온 '게임'과 접점이었던 '게임 컨트롤러'라는 키워드야말로 고독하고 미지의 우주 공간 속을 헤매지만 변함없이 나와 함께하는 동반자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그래 이것으로 정했다.



Private Identity의 완성


지금까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봤다.


게임은 내가 인지하고 생각하던 시기부터 늘 내 곁에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게임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게임은 나의 인생이란 여행의 '동반자'같다.


여행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나는 그저 '인생의 서사(Narrative)' 과정 중 하나라고 말한다. 살다 보면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의 사건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 삶은 무미건조함의 반복됨인가라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이럴 때 혼자서 가깝게는  평소 안 가던 골목부터 시작해서 멀게는 밟아본 적 없는 낯선 땅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의 서사란 각자에게 평범하면서도 새로운 순간들임을 다시금 자각하곤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인생의 서사'를 경험하는 과정이라면, 게임은 내가 모르는 다른 삶의 서사를 일깨워주는 미지의 세상으로의 여행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게임에 대한 내 생각을 문구로 정리해봤다. '끊임없는 호기심 위로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플레이하다'라는 내용으로 생각이 자연스레 귀결되었다.


Beyond curiosity... and play


그래 이 문구로 하자.


이걸 토대로 작년 <20세기 비디오 게임 모임>에 앞서 개인 정체성을 담은 Personal Identity와 정체성을 함축한 문장을 만들었다.


스푸트니크호가 미지의 우주로 여행 가는 느낌을 담아 '늘 호기심을 가지고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게임들을 즐기고 만들고 싶은 나의 의지'를 담은 포스터 이미지를 <20세기 비디오게임 모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만들었다.

[20세기 비디오 모임을 개최하기 전, 완성된 포스터 시안]


우측 하단의 PI LOGO. 시선의 흐름이 느껴지는 사다리꼴 구도를 채용하고,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쭉 이어져온 나의 게임에 대한 세기를 뛰어넘어온 여행자라는 의미로 'HOPPERS' (Hop through 하는 사람)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만든 PI로고와 나를 표현하는 단어]
[ Source=Edward Hopper ‘Night hawks’ (1942)]




이 사다리꼴 구도 어딘가 익숙하지 않을까 싶은 사람도 있겠다 싶다. 감상할 때마다 늘 영감을 크게 얻고 좋아하는 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자주 쓰던 사다리꼴 구도이다. 나는 그의 작품이 주는 정지된 그림 안에서의 역동적인 서사를 정말 좋아한다.




여기까지 기록해보기로 했다.


나를 정의해보는 과정은 즐거운 여행이었다. 이 과정 속에는 에릭 에릭슨 교수의 책에서 읽었던 '정체성'이란 이란 단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보고 곱씹어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또한,나를 구성하는 욕구와 태도, 행동양식 등이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느낌인 '자기 정체감'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는 점은 꽤 의미있게 느껴졌다.


삶을 이해할 때는 뒤를 돌아보며 이해해야 하지만, 삶을 살 때는 앞을 보며 살아야 한다.
- 철학자 키에르키코르


 
[다가올 시간을 호기심어리게 바라본다]
[Made by HOPPERS]


개인 PI 「HOPPERS」는 인간의 수명을 고려할 때 22세기까지 이어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날까지 20세기를 거쳐 21세기 현재 진행형 호기심을 잊지않고 다가오는 순간들을 살아봐야지.


세가오니 (HO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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