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어려운 <세키로>를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 알아보기
세상 어렵다는 게임,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 '사명'을 알기 위해 종을 치러 갔다가 말 그대로 인생 종 칠뻔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바로 '너는 죽었다'(You Died)라는 자조적인 밈(meme)의 대명사가 된 다크소울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게임 초반 사명을 알아보기 위해 '자각의 종'을 울리러 죽은 자들이 사는 도시로 떠났다가 잊지 못할 죽을 고생을 합니다.
(이름 모를 기사가 던진 낚시에 플레이하는 고통받는 플레이어에게 위로를...)
유다희'(YOU DIED)라고 불리는 이 게임의 밈(meme)은 전 세계적 코어 게이머들의 유행이 되기도 했고, 게임 스트리밍 방송을 시청하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는 재미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정작 당하는 입장은 당혹스럽고 난처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좌절감이 일상이다 보니 즐길 정도가 된 것이었죠.
여기 '세키로'라는 이름의 한 사내가 서있습니다. 달밤에 칼 한 자루를 굳게 쥐고 한 사나이를 응시하며 멋지게 말이죠.
과거 그는 잔혹한 전쟁터에서 어느 닌자가 주워온 아이였습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의 피에 굶주린 눈빛처럼 이름은 '늑대'로 불리며 칼을 다루는 닌자로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둘이 아닌 유일한 늑대라는 의미로 '세키로 (隻狼)'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전장에서 발견한 피로 굶주린 늑대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닌자로 성장했다니!. 정말로 강해 보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강한 인상의 주인공이라면 호쾌한 액션으로 적들을 휩쓸며 흥미진진한 게임일 것입니다. 반드시요...
하. 지. 만...
그에게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DEATH, 연속되는 게임오버
이 게임은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게임 오버되는 경우를 보는 것이 예사입니다. 이 게임은 <다크소울> 제작진이 선사하는 최신작 <세키로>라는 게임입니다.
지난 3월 전 세계 출시된 <세키로>는 다크소울을 클리어했던 하드코어 게이머들에게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 유명 웹진의 다크소울 시리즈 전문 필자들은 이렇게 이 게임에 대한 공식 코멘터리를 합니다.
"세키로의 일관된 전투 시스템은 '말도 안 돼!!'라며 모니터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일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so consistent) 어렵다 보니 반복되는 게임오버 이후 패드를 내팽개치고 싶을 만큼 '말도 안 되는'(bullshit)은 없었다.
또한, 다크소울 전문 필자로 활약하던 리뷰어는 자신이 세키로 게임 리뷰를 부탁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내용의
'나는 절대로 세키로를 끝까지 안 할 거야. 부제: 너무 어려울 때 괴롭지 않도록 보내는 송시' 글을 기고합니다.
(I am never going to finish Sekiro : An ode to not bothering when thing get too tough)
도대체 얼마나 어렵길래 불친절하고 어렵길로 정평이 난 <다크소울>을 압도하는지는 <세키로>의 다음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방어가 없다.
적의 공격을 보고 튕겨내야 한다.
적의 무게 중심이 무너질 때까지 접근전 필수
방어가 없다. 공격을 튕겨내야 한다. 접근전 필수
이쯤 되면 도대체 전투가 어떻길래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이 <세키로>의 특징을 잘 집약해놓은 보스 '사자 원숭이'의 전투 영상을 찍어보았습니다.
쉴 새 없이 튕겨내고 움직임 관찰하고 접근해서 때리는 전투. 1회 차 때보다 어려워진 3 회차라서 한두 대만 잘못 맞으면 바로 게임오버이다 보니 집중하다 보면 금방 기진맥진 해지는 건 덤입니다.
지금까지 <다크소울>과 <세키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해봤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오늘의 주제 '벽'과 큰 관련이 있는 게임들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심리적으로 '벽'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괴리'(乖離, Gap)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실력과 원하는 목표 사이의 괴리가 크다고 느끼면 간극을 메꾸는 노력의 양이 얼마나 될지 몰라 지레짐작으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세키로>는 게임에서 요구하는 실력과 저의 적응력 간의 괴리가 심한 게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는 이 게임의 전 세계 1.2%만이 획득한 세키로 (隻狼)가 될 수 있었는지 괴리를 메꾸는 과정을 돌아보는 것이 오늘 나눌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시작 때만 해도 '과연 내가 이 게임을 한 번이라도 끝까지 깰 수는 있을까' 쉽던 터라 회차마다 더 어려워지는데도 불구하고 5회 차까지 기어이 왔고 모든 도전과제를 달성하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액션 게임을 원래 잘하는가?' →아닙니다. 해가 갈수록 오히려 순발력과 동체시력이 떨어져 갑니다.
'원래 게임을 잘했는가?'→아닙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잘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싶은 게임 꿈나무입니다.
'다크소울을 오래 하지 않았나?' →다크소울과 달리 레벨과 방어 개념이 없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이 글에서 다루려는 내용의 범위를 정리해봅니다.
<다크소울>과 <세키로> 차이를 통해 알아보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향 차이
<세키로>의 게임 미학으로 들여다보는 '몰입'의 과정
'몰입'의 과정을 통해 벽을 뛰어넘는 과정
그럼 하나하나씩 얘기를 시작해봅니다.
<다크소울>과 <세키로>는 공통적으로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게임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크소울 시리즈를 오랜 기간 플레이했던 해외 웹진의 유명 필자가 <세키로>와 <다크소울>의 차이에 대해 코멘트를 남긴 것으로 두 게임의 차이점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다크소울에서는 코어 한 스킬을 배우는 시간 대신 같은 지역을 반복적으로 돌면서 너의 공격력을 올리고 강한 보스 적들과 싸울 수 있다. "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공격력을 올리는 행위'를 '밭을 가는 것' (plough hours)으로 표현한 게 눈에 띕니다. 밭을 가는 것을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는 그라인딩(Grinding) ※1으로 부릅니다.
※1 : Grinding은 Reddit, Gamasutra 등 각 종 커뮤니티와 게임웹진, 게임 디자인 포럼에서 폭넓게 다뤄지는 용어입니다. 본 글에서는 어려운 난이도를 극복하기 위해 반복해서 파라미터를 올리는 행위에 한정합니다.
그라인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커피 원두 분쇄 그라인더 또는 평평하게 표면을 다지는 그라인더를 연상하신 분도 있겠네요. 현실 시간 자원을 '분쇄하다', 난이도를 '평평하게 하다'라는 의미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좀 더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는 아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 게이머가 반복적으로 시간을 갈아 넣으며 게임 속 환경에 분쇄시키고 있는 그라인딩(Grinding)의 특성을 재치 있게 드러낸 이미지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정도로 MMORPG (다중접속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인구가 많은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온라인 게임에서 소위 '레벨 막일'라고 부르며 흔하게 하는 플레이어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MMORPG PC 온라인 게임의 플레이 타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라인딩입니다. 레벨을 올리고 공격력을 포함한 파라미터를 상향시키고 더 강하고 좋은 보상을 주는 몬스터와 싸우는 과정이 게임의 중요한 내용을 차지합니다.
커뮤니티 안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승인 욕구(承認欲求)가 동기 부여의 큰 축인 온라인 게임에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혼자서 즐기는 스탠드얼론 (Standalone) 형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어려운 구간을 돌파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앞서 웹진 필자의 <다크소울> 코멘터리의 내용은 레벨과 캐릭터 능력치가 연동되어있는 롤플레잉 게임이고, 반복 레벨업 과정을 통해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도록 그라인딩이 허용된 게임이다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어려운 게임이라도 그라인딩이 만능 약은 아닙니다. '반복적', '계속해서 높여가는 일' 이기 때문에 지루하고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잠깐씩 즐기는 모바일 게임에서는 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 그라인딩을 자동으로 해주는 그라인더 개념의 '자동 전투'가 편의 기능으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마치 자동 주행(Autopilot)과 같이 미리 세팅을 해두면 알맞게 상황에 따라 반복적으로 자동 전투를 실행하고 결괏값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자동 전투'는 비디오 게임 파이널 판타지 XII 편 액션스크립트 자동화부터 2010년도 이후 등장한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까지 폭넓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게 그라인딩의 특징이다 보니 자동화까지 등장했는데요.
<다크소울>은 과연 지루한 그라인딩 만으로 깰 수 있을까요? <세키로>는 그라인딩 개념이 없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높은 난이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걸까요?
그 답에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해 학습곡선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어려운 게임을 극복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써 그라인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수단을 반복하는 것은 게임의 재미를 찾는 사람에게는 고난입니다. 또한,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는 '성취감'과 '달성 감'은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그라인딩만으론 채워질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다 보니, 간혹 어려운 적을 벽처럼 세워두고 벽을 뛰어넘는 수단인 그라인딩만을 강요하는 게임들이 있는데 이는 어려운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단조롭고 불합리하게 느끼는 게임일 뿐입니다.
그라인딩을 수단으로 내가 게임 내에서 발전해나가고, 결국 '내가 얼마나 이 게임에 개입하여 결과 획득에 참여했느냐'가 게임 속 성취감과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라는 것은 게임을 몰입해서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개입 과정과 정도를 나타내는 것을 게임 디자인 영역에서는 '학습곡선'(Learning Curve)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S-Curve형 학습곡선입니다. x축이 게임을 경험하는 시간, y축이 게임에 필요한 스킬이고 기울기를 통해서 어떤 성향의 게이머들에게 어울리는 게임인지 파악도 가능합니다. (예_하기 쉽지만 마스터가 어려움 등)
위 그래프에 대해 부연하자면, 녹색 구간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익숙해지는 구간이고 황색 구간은 게임에 적응하고 스킬이 올라가는 구간, 그리고 적색이 적응을 완료하고 점차 게임이 익숙해지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1회 차-2회 차 식으로 게임을 끝까지 하고 나서 저장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처음부터 더 어려워진 밸런스에서 재개되는 루프형 게임 - <다크소울>과 <세키로>도 여기 속합니다.- 의 경우, 다른 모습의 학습곡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좀 더 게임의 학습곡선에 담긴 구체적 의미를 찾아봅니다.
처음 기울기가 완만한 것 (Slow beginning)은 게임 초반 학습이 어려운 게임들, 이를테면 <다크소울> 같은 어려운 게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로 x축이 진행될수록 더 이상 세로 y축 게임스 킬로 뻗어 나지 못하고 땅을 향해 떨어지는 곡선은 게임 내의 실패와 포기 (Failure/Give up)를 의미하며, 이 구간을 자발적으로 벗어날 방법을 찾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설명한 그라인딩 개념도 여기에 속합니다.
<다크소울>의 학습곡선과 그라인딩 구간을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토대로 그려봅니다.
<다크소울>은 1회 차의 학습곡선 패턴입니다. 세로축으로 뻗는 '게임 스킬'을 늘리기 위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레벨과 능력치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중간중간 그라인딩 구간이 있습니다.
초반 학습 구간의 완만하고 느리다. (Slow beginning)
플레이어의 실력을 상회하는 실패(Failure) 반복 지점이 중반부 등장
이때는 얕은(Shallow) 수준 그라인딩으로 극복 가능
후반부로 가면 더 이상 효율 좋고 대미지 있는 특정 무기 의존 플레이가 불가능해진다.
이때 깊은(Deep) 수준의 그라인딩이 필수가 된다. 체력, 지구력, 근력, 기량 등 스탯 골고루 상향 필수
반면, 레벨 개념이 없는 <세키로>는 학습곡선은 좀 다릅니다.
<세키로>는 1회 차 전체가 튜토리얼입니다. 튜토리얼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2회 차부터는 적들의 공격력이 높아지는 반면, 나의 체력 능력치 상향이 없으니 1회 차 튜토리얼을 어떻게 거쳤는지에 따라서 2회 차 이상을 즐길 수 있을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회 차 구간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 후 새로운 패턴인지의 반복학습 필수로 곡선이 완만하다.
그라인딩 장치가 없고, 1회 차 처음부터 끝까지 위의 Miss-인지-반복-극복의 학습을 지속한다.
2회 차 이후는 학습곡선과 망각곡선이 차이가 사라져 체득 속도가 빨라진다. → ★표 구간
학습과 망각의 괴리가 좁은 배경에는 보스몹 배치도 영향이 크다. (1회 차 전체를 튜토리얼이라 부르는 이유)
첫 보스가 마지막 보스로, 중간보스가 중반 이후 일반몹으로 등장하며 학습 - 망각의 괴리가 적다.
따라서, 2회 차 이후 ★표 구간 이후 학습효율의 정점 (Plateau)에서 상향된 게임 스킬은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라인딩, 그리고 플레이어가 게임에 숙달되어가는 과정인 학습곡선 두 가지 개념을 적용해 <다크소울>과 <세키로>를 훑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생각을 정리하며 훑어보다 몇 가지 의문이 생겨 자문자답해봤습니다.
<다크소울>과 <세키로>는 다른 장르가 아닌가? → 네 맞습니다. 전자는 액션 롤플레잉이고, 후자는 액션 게임입니다.
액션 롤플레잉과 액션 게임을 나누는 기준은? → <다크소울>은 다양한 직업의 캐릭터를 선택해서 본인 선택으로 능력치를 성장시키는 롤플레잉 게임 문법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두 게임의 학습곡선의 비교는 어떤 의미인가? → 두 게임 모두 수단의 차이(그라인딩 유무)는 있지만 액션성 기반 전투 운용이 학습곡선의 핵심입니다. 또한, 우상향 그래프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결국 <세키로>는 <다크소울>과 달리 벽을 뛰어넘기 위해 플레이어 본인의 스킬을 늘려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에 귀결됩니다.
이게 끝?!
물론 아닙니다. <세키로>의 높은 난이도를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라인딩을 통한 인위적인 게임 데이터 강화는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학습곡선을 그려보면 결국 플레이어 스킬의 향상밖에 벽을 넘는 방법은 없습니다.
결국 큰 벽을 넘을 수 있는 건 플레이어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세키로>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고 게임 월드 탐색의 비중이 큰 <다크소울>과 비교해 보면 명확한 목표와 과정이 존재합니다. 바로 '특정한 상대의 암살', '전투'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벽은 오로지 전투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특정한 상대와 1:1 상황의 반복입니다. 따라서, 게임의 룰과 규칙이 적용되는 것은 1:1의 전투입니다.
(낙사가 있는 다크소울과 달리 월드 탐색이 목적이 아닌 세키로는 낙사가 없습니다. 이 점은 때때로 다크소울 시리즈보다 세키로가 쉽다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키로>와 일대일 싸움을 다룬 대전 격투 게임 장르와 나란히 놓아도 큰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대전 격투 게임은 어떤 게임일까요? 세키로와 닮아있을지 장르가 가진 특징과 규칙을 나열해보겠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 상대방과 나의 에너지 중 먼저 없어지는 쪽이 진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패한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일어난다.
특정한 기술이 존재한다.
<세키로>의 전투에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 하나,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일정 거리 벗어나면 전투 초기화된다는 점에서 맥락이 비슷함). 이 중에서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과 적재적소에 기술을 사용하는 전략이 전투의 핵심입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대전 격투 게임의 공방과 전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왼쪽 사진은 공격과 방어의 기본 로직인 프레임과 상황을 나타낸 게임 화면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공격했을 때 상대방이 막거나 맞을 때 플레이어는 어떤 기술을 하는 것이 유리한지 설명을 해주는 튜토리얼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세계적인 대표적 대전 격투 게임 버쳐 파이터의 기술 프레임 표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레임, 즉 게임 캐릭터의 공격과 방어 시 발동하는 프레임과 불리한 프레임을 파악하는 표입니다.
프레임은 1초를 60 프레임으로 나눈 액션의 발동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 펀치 공격은 30 프레임이라고 하면 기술이 발동되는데 반드시 0.5초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대전 격투 게임을 할 때 프레임이란 단어를 몰라도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가위바위보 싸움으로 치열하게 공격과 방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것이 게임의 재미요소이기 때문에 알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럼 대전할 때 가위바위보 싸움의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왼쪽 그림에서 A의 발동 프레임이 10 프레임인 기술을 상대인 B에게 사용했고, B는 방어를 하여 경직되어 12 프레임이 불리해진 상황이라면 A가 상대방을 잡는 12 프레임에 발동하는 잡기 공격을 쓰면 반드시 잡힙니다.
반대로 오른쪽 그림을 보시죠. 똑같이 B가 방어를 했는데 ③A가 발동 12 프레임인 잡기 공격을 시도할 때에 맞춰 발동 프레임이 11로 잡기 공격보다 1 프레임 유리한 펀치를 사용한다면 B가 역습을 할 수 있습니다.
세키로는 위와 같은 대전 격투 게임의 공방 룰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내자 마자 상황에 맞게 오른손 칼을 휘두르는 공격과 왼손 의수 공격 중 변해가는 상황에 맞게 빠른 입력이 자연스레 요구됩니다..※2
※2 대전 격투 게임과 달리 <세키로>는 액션 어드벤처 장르로서 3D 공간(X, Y, Z축의 자유이동) 활용성이 다르기 때문에 프레임은 입력 및 입력 캔슬 전후에 걸쳐 여유 있게 조정되어 있습니다.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들어가 보면 '상황에 맞게'는 'Feedback Design' , '빠른 입력'은 'Input Interaction Design'과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빠른 입력'과 연관된 Input Interaction Design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버튼 입력은 게임을 디자인할 때 중요한 요소입니다. 컨트롤러의 버튼을 어떻게 할당 (Assign)하고 각 버튼에 따라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정리하는 것을 Input and Interaction Design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키로>의 Input and Interaction Design 은 제가 즐긴 액션 게임 중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간결하고 최적화되어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비디오 게임의 대표적인 입력 디자인을 예로 들겠습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사용빈도가 높고 우선도가 높은 조작 'Primary Control'이라고 부르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할당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습니다. 사용빈도가 잦지 않은 조작을 'Secondary Control'이라고 하며 주로 중지 손가락에 할당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Primary Control 은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키는 Trigger (RT/LT) 또는 아날로그 스틱 옆 버튼에 배치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습니다.
Secondary Control 은 필요한 상황에 긴급히 누르기 위해 Button (RB/LB) 또는 보조 개념으로 아날로그 스틱에서 떨어진 버튼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세키로>는 위의 입력 디자인의 상식을 엎어버렸습니다.
<세키로>의 사용빈도로 볼 때, 오른손 칼을 휘두르는 공격은 Primary Control에 해당하고, 왼손 의수 조작은 Secondary Control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꿨는지 정리해봤습니다.
조작 빈도가 많은 Primary Control, 즉 칼을 휘두르고 방어하는 쪽은 컨트롤러 상단의 (원래는 보조 공격 버튼 할당했어야 할) RB/LB로 Secondary Control 의수 조작은 RT/LT (원래는 메인 액션 버튼 할당)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도대체 왜 바꿨을까요? 힌트를 얻기 위해 타임머쉰을 타고 1987년의 비디오 게임 시장으로 돌아가 봤습니다.
복싱이라는 긴장감 높은 스포츠 장르를 아케이드적 재미로 잘 풀어내 남녀노소 할 것 없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닌텐도 Punch Out!! 화면입니다. 무엇이 보이시나요? 권투의 기본인 왼손 오른손 블로우 공격을 번갈아 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PUNCH OUT! 게임은 왼손과 오른손을 왼쪽 버튼과 오른쪽 버튼에 할당함으로써 입력에 따른 상호작용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입력을 한두 번만 해보면 누구나 게임에 적응할 수 있었고 이런 조작은 복싱을 해본 적 없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심리적 거리를 없애는 역할을 했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손쉽게 즐길 수 있어 패미콤 게임의 더블 밀리언 히트를 달성하는데 숨은 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심리적 거리에 대해 저는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 익숙해지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교섭의 심리학에 등장하는 '심리적 거리'는 가까울수록 구체적인 대안과 실행방안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키로>는 '오른손에 든 칼을 휘두르기'와 '왼손으로 칼을 받쳐 들고 방어하다' 이 두 가지 동작을 이동 버튼과 가깝고, 오른쪽 검지와 왼쪽 검지로 트리거형 RT/LT와 달리 반응이 빨라 즉시 입력 가능한 RB와 LB 버튼으로 할당함으로써 '심리적 거리'를 단축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공격과 방어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사이 계속 집중하고 대안을 생각하고 다음 액션을 행하는 데 있어의 몰입에 뿌리 깊게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몰입'이라는 감정과 이 조작 체계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몰입은 특정한 달성 상태라기보다는 그래프의 노란색 음영과 녹색 음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자신의 실력 또는 능력치(x축)와 난이도(y축)를 오고 가며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가 도저히 어려움의 영역인 녹색 음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좌절과 분노를(Anxiety), 그 반대라면 지루하고 단조로움을 느낄 겁니다(Boredom).
이 어려움을 느끼는 그래프의 녹색 음영 구간은 <세키로>의 벽이라고 앞서 정의했던 '전투’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필수적인 액션 '막고 베다'를 원버튼 액션(강베기/약 베기 구분 없음)으로 통합시키고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입력체계를 도입해서 몰입에 다가가도록 만드는 것이 <세키로>의 Input and Interaction Design 핵심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어렵다'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렵다'라고 느끼는 감정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와 '할 수 있지만 노력을 더 해야겠다'로 나눠질 때가 많습니다.
전자는 피드백이 없는 경우입니다. 어렵다고 느끼지만 뭘 해도 반응이 없으니 내가 뭘 더 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후자의 경우는 능력 중 어떤 부분을 키우면 될지 피드백을 토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게임에서도 피드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게임을 더하고 싶도록 만드는데 피드백이 없다면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막막하고 더 이상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게임일수록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에게 주는 피드백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사적인 게임에서는 스토리 설명, 세밀한 그래픽 묘사, 동작과 액션, 음향, 플레이를 통해 그림과 같이 플레이어에게 피드백을 전달하죠.
<세키로>에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대전 격투 게임의 속성을 가진 전투 부분이 벽이자 이 게임을 계속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이기 때문에 전투 중 일어나는 상황에 피드백 초점을 맞추고 직관적이고 간결하게 전달되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찌르고 막는 동작에서 즉시 피드백합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Sound)와 불꽃 효과(Effect) 만으로도 내가 다음 공격이 가능한지 막아야 하는지를 함께 피드백을 합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생각할 수 있도록 입력과 피드백이 간결하고 명확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하나하나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세키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몰입'에 대한 여정의 내용을 이쯤에서 한번 정리해봅니다.
<세키로>는 대전 격투 게임에 가깝고, 각 대전에 맞춰 게임 규칙이 적용된다.
상황에 따른 빠른 조작과 기술 사용이 규칙에 맞춰 이길 수 있는 키이다.
직관적이고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조작 및 명확한 피드백 체계는 몰입하기에 최적이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서도 아직 저의 의문은 남아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 순발력과 동체시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세키로>의 마지막 관문인 세키로까지 달성할 수 있었을까.
<세키로> 모든 게임 도전과제를 달성했지만 전 여전히 <세키로>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재밌습니다. 반복적으로 지는 전투도 다시 도전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어려운 벽을 넘게 만드는 것은 자발적으로 반복적인 도전을 하는 과정에 그 열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 답을 구해보기 전에 앞서 정리한 '상황에 따른 심리적으로 가까운 조작' 그리고 '명확한 피드백 체계'로 이뤄진 <세키로>만의 전투가 어떤 느낌인지 게임을 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플레이를 촬영해보았습니다.
칼 한 자루만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으며 싸우는 모습.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튕겨질 때마다 공기를 뒤흔드는 소리.
어느새 컨트롤러와 화면 속 세키로의 움직임은 저의 움직임이 되고, 공기를 가르는 칼날이 부딪히는 순간 속에서 묘한 리듬이 만들어지고 상황에 몰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리듬 이란 무엇일까요.
<세키로>의 전투 속 리듬과 제가 몇 년째 질려하지 않고 즐겨하는 리듬 액션 게임은 닮아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같은 음악을 몇 번이나 플레이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결국 퍼펙트(No Miss) 플레이를 달성하는 순간의 감정 폭은 감동적인 영화를 몰입해서 보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긴 여운을 주는 엔딩으로 마무리할 때 느껴지는 공명(Resonance)과 흡사한 느낌입니다.
몇 번이고 스스로 '자발적인 개입'※3을 통해 자체적 '몰입'(Flow)을 하는 과정이라고 명명해두죠. 저는 이것을 그루브(Groove)※4라고 부릅니다.
멀리 돌아왔지만 <세키로>의 어려운 난이도를 뛰어넘는 '힘'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결론에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3 '자발적 개입'(spontaneously intervention)이란 단어의 의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간접적인 제어를 통해 자발적으로 어떤 현상을 위해 개입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게임에서의 간접적인 제어 '규칙'을 통해 자발적으로 게임 안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플레이어의 개입을 말합니다.
※4 Groove는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사전적 의미로는 특정할 수 없는 리듬의 연속을 의미하고, 제 글에서는 게임 콘텐츠를 즐기는 동안 생기는 플레이어의 몰입의 리듬감을 뜻합니다.
'자발적 개입'을 통해 '몰입'(Flow)하게 되는 'Groove'라는 개념이 <세키로>의 높은 벽을 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라인딩부터 학습곡선과 조작체계, 게임의 피드백까지 애초 게임을 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들을 간단하게 써보겠다는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생각이 깊어지고 많은 부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모든 파편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세키로>의 어려운 이유는 그라인딩없이 오로지 플레이어의 스킬 향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스킬 향상을 위해서 게임을 어렵게 만드는 '대전'에만 집중하여 플레이할 수 있도록 조작 및 게임 피드백 체계와 시스템을 공들여 만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반영하여 게임 안에 구현된 것을 함께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연결 (Spiritual Connection) : 심리적 거리가 짧은 조작체계와 직관적 피드백
위험 감수 (Risk Taking) : 대전 게임과 같은 접근전 필수, 방어가 없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
즉시성 (Promptness) : 실패의 부담을 줄이는 '부활'기능의 기본 탑재
그리고, 위의 세 가지 부분은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게임 안에 개입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반복적인 몰입의 리듬감을 형성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됩니다.
저는 이 몰입의 리듬감을 'Groove'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세키로>가 가진 세 가지 구성요소는 게임의 긴 여정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다음과 같은 ‘Groove’로 변화해가면서 몰입을 극대화시켜주었습니다.
정신적 연결 (Spiritual Connection) → 일체감 (Oneness)
위험 감수 (Risk Taking) → 달성 감의 극대화 (Maximize Achievement)
즉시성 (Promptness) → 도전의 자극 (Stimulation for Trying)
그리고, 저의 ‘Groove’를 통해 <세키로>의 숨겨진 보스 올빼미 의부 보스 (1회 차 때는 100번이 넘는 도전 끝에 포기)를 한층 더 어려워진 다 회차에 비로소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오로지 화면 속 칼이 튕겨지는 소리의 피드백 외에는 누구 하나 제게 '잘하고 있다'던지, '조금만 힘을 내'라는 말은 없었지만 스스로 큰 벽을 넘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의 달성감은 실로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세키로>는 어렵기로 소문난 게임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삶의 신선한 활력소였고, 어렵고 높은 벽이라도 넘을 수 있다는 에너지를 회복시켜준 게임입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해내야 하는 일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운 벽을 만나 괴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 자신만의 그루브(Groove)와 성공했던 경험이 있으면 벽을 대하는 느낌은 사뭇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농구와 일체화되어 몸을 사리지 않고 재도전하는 강백호가 어려운 순간 발휘한 그만의 그루브처럼 말이죠.
쓰다 보니 길어진 글을 이만 마치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 비춰 언제든지 글에 대한 의견 환영합니다 !
2019년 5월 13일
세가오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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