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뮹뮹 Mar 26. 2017

여름의 냄새

나의 첫 대학생 때의 연애 

너와 같이 한 시간은 여름으로 기억된다. 갓 대학생이 된 허세 가득한 술 냄새, 처음으로 거닐었던 어두운 거리의 네온 사인들, 청계천의 물 냄새, 혜화동의 싸구려 짬뽕, 연세대학교 앞의 버스정류장 냄새, 농구공의 흙냄새, 땀냄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뜯어먹었던 스트링치즈, mp3에 들어있던 빨강의 노래들. 왜인지 너의 냄새와 너와 같이 보냈던 시간은 모두 다 여름의 냄새와 시간으로 기억되는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가시 돋힌 말들 뿐이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보살이라고 해도 좋을 너와 사소한 것으로도 다투고, 아직 확실하지 않은 미래와 우리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먼 교차점의 불안감으로 너를 괴롭히곤 했다. 나는 너에게 확신을 바랬고 우리는 확신을 바라기엔 어린 나이였다. 


너가 술에 진탕 취해 계속 토하는 인사불성의 나를 들쳐업고 집 앞까지 데려다준 날, 나는 우리가 꼭 결혼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계천에서 처음으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고 바로 다시 사귀게 되었던 그 날에도, 청계천의 물 냄새는 어쩐지 술 냄새가 났다. 너의 자전거 뒤에 매달려 한강의 습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열창하곤 했다. 농구골대 앞에서 손이 꺼멓게 될 때까지 농구공도 던졌다. 하염없이 걷기만 해도 좋았다. 우린 처음으로 여유로운 대학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아마 그 시기는 내가 제대로 연애라는걸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였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안다.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기에 내가 널 찬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에게 차였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니까. 재수가 끝나고 좋은 대학교에 합격한 후에, 너는 다른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라 라는 말과 함께 연락을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다. 너 앞에서 질질 끌고 싶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너가 왜 그랬는지 나는 알았기에 이해하고 싶었다. 너는 한국에서 앞길 창창한 대학생이었고 나는 미국에서 내 앞가림을 해야 하는 학생이었으니까. 그제서야 너는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신도 그러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질 몰랐다-" 하며 "친구로 지내자"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허무하게 연애를 끝냈다. 너에게는 그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났을지 모르지만 나는 달랐다. 


여름이 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왔다. 너와 헤어지고 일 주일 뒤, 나는 파티에 가서 너와 마신 이후 처음으로 다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보드카를 퍼마셨다. 토하다 쓰러지고 의식이 없는 나를 119에 신고해서 응급처치를 하고 방까지 데려다준 남자애와 나는 처음으로 원나잇이라는걸 해보았고, 섹스가 끝난 후 남자애가 쥐어준 담배 한 개비를 처음으로 콜록거리며 피워보았다. 매일매일 넋이 나갈 때까지 술을 마셔보는건 물론 너가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지르며 나 자신을 망가뜨려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샤워를 하며 랜덤으로 돌렸던 mp3의 노래에서 여름에 들었던 빨강의 노래가 나오자 펑펑 울고 이미 익숙해져버린 담배를 끊으려고 다시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나 우리는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뭐랄까, 이제는 감정을 다 추스리고 아무렇지도 않을 것만 같았는데, 멀리서도 네 뒷모습을 알아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죽은 친구의 함 옆에 촛불을 밝히고 돌아오니 국어 선생님이 옆에 앉으라 한 후에 소주 한 잔을 건네셨다. 나는 다른 독한 술은 다 마셔도 소주는 싫어했는데, 왜인지 그 날은 국어 선생님이 주신 잔을 한번에 다 넘겨버렸다. 그리고 목구멍에서부터 내려오는 찌릿찌릿한 따뜻함과 전신으로 퍼지는 노곤한 느낌. 그건 슬픔을 녹여버리는 것 같은 맛이었고 허세 가득히 내가 너 옆에서 진탕 마셨던 여름의 맛이었고 무언가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멀리 와 버린 청계천의 긴 물 내음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비로소 너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치카토를 두고 왔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