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by 보니

2023년 12월 16일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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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나는 프랑스어가 꽤 귀에 익어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파리에 있으니, 파리에 있는 동안 파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해보고자 하는 욕심과 적극성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꼴르사주에서 자수 수업을 들었다. 꽤 즐거웠다.


실은 20대 초반에 패션을 하겠다고 하면서, 에스모드 파리의 서울 지부에서 진행하던 여름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자유롭다기 보다는 꽤나 강압적인 수업 분위기에 어쩐지 불편함을 느껴, 학기 막판에는, 아빠가 신사에 있는 학원 앞에 내려주고 나면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혼자 죽치고 있기도 했다. 참으로, 나도 나다. 부모를 향한 마음에 빚이 많다.





2025년 12월 16일

룩셈부르크에서


아!

나는 내가 가끔 너무 좋고 대체로는 괴롭다. 누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주는 고(苦)를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용서가 중요하다. 용서를 해야, 과거의 그것들이 당시에는 나름 최선이었으며 그럴 이유가 있었고, 비로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체념인가, 이것은 정신승리인가를 오가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긍정한다. 이것이 나를 살린다!

지난 일요일에는 이곳에서 친하게 지내는 작가 선생님의 공연에 다녀왔다. 저녁 5시 이후로 웬만해서 집 밖에 안 나가는 나이기에 , 즐거움을 위한 외출이라고 해도 꽤 힘을 내야만 했다. 가는 길에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는 맛이 있었다. 굳이 무엇을 사지는 않더라도. 공연은 프랑스어로, 2시간 진행됐다. 중간에 짧은 쉬는 시간도 있었다. 작가 선생님은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일부분, 지금 보니 전체를 1시간 내에 짧게 요약한 듯한, 낭독자의 호흡에 맞춰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도 좋았고 낭독도 좋았고 극장의 분위기도 좋았다. 제일 좋은 것은 작가님의 표정이었다. 행복함이 깃든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행복하구나! 보는 사람도 덩달아 기뻐지게 만드는, 그런 행복함이 깃든 얼굴이었다. 행복하구나. 나는 기뻤고 큰 위로를 받았다.

이틀 간 다시 과거의 기억이 올라왔다. 내가 대학원에 다녔었지. 미술을 한다고 했었지. 금속 공예를 했었지. 수료만 했지. 작업실을 헀었지. 작업을 했었지. 전시를 했었지.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싶은가? 서슴없이 아니라고 답한다. 왜? 더는 믿지 않아서? 아니, 사실은 여전히 믿기는 하는데. 그럼?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왜 마음이 가지 않지? 나는 그때의 내가 싫다. 왜? 내 인생에서 잘못된, 낭비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 아니, 그때 선택하지 않았으면 지금이라도 했을 것이다. 나는 내 성격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그때의 나를 혐오하는 지도 모르지. 진짜 모르나? 알텐데? 결국에는 약했고 어렸다는 핑계. 강단있게 주체로 서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게 지금의 나를 여전히 찌른다는 못마땅한 사실이, 몹시도 못마땅한 현재. 어쩌면 테라피가 필요할 지도. 이 부분은 정말 짚고 넘어가야 할 지도. 아니, 사실은 별 것 없을 지도. 놓아버리면 그만인데. 놓아버린 줄 알았는데, 사소한 트리거에도 반응을 하는 것을 보니 여전히 갈 길이 멀었구나. 한숨. 그런데 그래도 조금 나아졌구나. 잠시 미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에 나는 반감을 갖는다. 때? 그 말을 하는 너에게서의 때와 나에게서의 때가 다른데? 일차원적인 시간 오차에서 오는 긴장감을 넘어서, '때'라는 시간에 매달려본다. 아마 진짜 필요한 것은 연구이든, 치료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갖는 '시간'에 대한, '돈'에 대한, '성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내려놓는 일일지도. 잠시 악순환에 브레이크를! 어쩄든, 그 때. 지겨운 때. 시간이 주는 공포. 공포가 낳는 후회. 이것들이 낳는 결여된 자기 배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또 다른 자신.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 내가, 이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놓고 존재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용서. 놓아버리면 될 것을 놓지 못하는 아집. 놓은 것 같다가도 다시 쥐고 있는 그 아집. 잠시 외치고 가겠습니다. 썅.

나는 재야의 고수 같은 삶을 살다 가고 싶다. 존재감이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 알려지려 하지 않되, 나 자신을 정확히 아는, 그래서 고수가 되어버리는. 자신을 아는 자는 고수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알고, 자신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은 숨겨지지가 않는다. 산 속이든, 동굴이든, 어디든 간에, 그를 찾는 단 한 사람쯤은 있을 테니. (가족?) 그 한사람으로 외로움을 잊고, 외로움을 느끼기 전에도 자신과의 합일로 충만한 채 숨 쉬다가, 마지막에는 '나는 후회가 없네!'를 외치고 떠나는 그런 개고수!!! 그래, 그런 고수가 되기 위해 나는 나를 알아야 하고, 아마 죽기 전까지 노력해도 모를 나 자신을 수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존재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읽고 싶어지는..)

다시 대학원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쩌다 보니, 정말 어쩌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살며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다양하게 고, 그래서 또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잘하는 일을 발견해 (매 순간 그만두고 싶지만) 꾸역꾸역 이어오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로운 취향과 문제의식이 떠올라,이를 계기로 이 나라 혹은 저 나라에서 다시 석박사를 할까 고민하던 즈음, 어쩌다 또 알게된 교수들을 만나 "당신은 우리가 찾던 프로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첫째, 그토록 바라던 때!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떄, 그때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라는 사실. 누구를 탓할 수도, 나를 탓할 수도 없는 채로, 그냥 발생된 불상사에 한탄과 분노를 거쳐 이제야 조금 잠잠해진 지금에서야, 듣는 이 반가운 소리가 역으로 다시금 분노를 낳는다는 사실. 둘째, 아이고 씨발, 이 나이 먹어서, 내 나이 써티쓰리에 다시 학교에? 그럴 일인가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학교 주변을 맴돌아야 하나요,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그러면서도 솔깃해 일과 병행하려면 어찌 해야 하지? 하고 시간표를 짜보는 나 자신이 또 우습다.

그러다가는 문득. 그만두고 싶다! 안 해도 되는 것은 안 하면서 살자!

그러다가는 문득. '때'가 왔나보지. 운명인가 보지. 아모르파티!

외부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믿던, 환상이 깨지는 '때'에 들어섰다.

주변에 아는 누군가는 거대한 문학상을 받고, 주변에 아는 누군가는 정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주변에 아는 누군가는이 넷플릭스의 한 시리즈를 론칭하고, 주변에 아는 누군가가 ..또.. 주변에.. 이것을.. 저것을... 비현실로 보이던, 한 때는 범접할 수 없는 먼 우주의 일로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이라는 사실. 그들이 혹은 그것들로 구축된 현실 안에서 다시금 그것을 소비하고, 듣고, 보고, 읽고, 말하고 하는 이 세계가 어쩐지 나는 어린이들의 소꿉장난처럼 느껴진다. 장난스러운 가장 무도회라거나, 물론 나보다 어떠한 면에서 뛰어나 두각을 드러냈겠으나 실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 결국 어떤 이가 만들어낸 퍼포먼스에 영향을 받아 굴러가는 이 세계 안에서, 그 놀이판의 말이 되어 살아가는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판에서 빠지는 일이다. 판의 형식과 속도에 끼워 맞추기를 원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이 잘하는 것은 탈주하는 것이니, 다만, 그 탈주가 과연 판 밖으로 나가야만 이뤄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판 안에 머무는 것이 탈주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탈주 이후에 나는 무엇이 달라지는가. 어쩌면 나는 이미 매일을, 탈주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선 모든 내용을, 없는 셈 치고서, 간단하게!

나는 80% 정도는 충실하게 행복하다. 번뇌에도 웃을 수 있을 만큼 강단이 생겼고 마음이 유순해졌다. (진짜?)

위에서 언급된 고민과 어쩌면 괴로움은 100% 충만하게 행복하려는 아집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안다. 20%가 부족해, 그 원인은 과거의 나를 용서치 못한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 낸다.

그래서 나는 용서한다! (진짜인지는 글쎼)

나는 용서한다.

나의 과오를, 잘못된 선택을, 무지와 아집을, 낭비된 젊음을, 적대감을, 서운함과 실망을, 나의 행동을, 부모를 힘들게 한 나를, 부모의 돈을 허투로 쓴 나를, 나를 못살게 구는 나를, 나라는 존재에 빠져 사는 나를, 나의 집착을, 나의 모든 것을.

아!

나는 또 다시 집착한다.

용서하는 사람이라는, 용서라는 정체성에.

오케이. 마지막으로. 다시금 차분하게, 한마디를 하자면,

어제는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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