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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Nov 17. 2023

궁금해서 움직이고 싶지만 몸은 편하고 싶어

파리에서 찾는 취미생활 


    취미에 대한 단상 

#1 

파리에 있는 자수학교에 갔다. 벌써 3번의 예약을 하고 2번의 노쇼 끝에 가는 날이었다. 3번이나 예약하는 걸로 봐서는 내가 관심이 있다는 증거였고 2번이나 노쇼를 했다는 것은 내게 이번의 기회마저 놓치면 면목이 없어 다시는 들이대지 못할 거 같았다. 마지막 남은 기회를, 스스로 버려왔던 기회를, 오늘은 놓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먼 곳에 학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30분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멀어봤자 30분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웬걸. 정확히 60분 거리에 있었다. 이사를 한 것 같았다. 새로운 건물을 지어 크게 확장이전 한 것으로 보였다. 거리를 알고나니 더 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거 진짜 가야만 하는 거야? 나는 나에게 물었다. 꼭 그래야만 겠니?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만약 안 간다고 해서 그 빈 시간을 뭘로 채울 건데 ? 나는 나의 반문에 입을 열지 못한 죄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도저히 지하철을 타러 갈 힘이 나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지하철을 타는 건, 파리 시내에 살던 나에게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또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려고 비싼 월세를 내가면서 파리 시내에서 사는 건데 말이다. 대학교 통학과 회사 통근을 떠올리게 하는 1시간의 이동거리는 금방이라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일으킬 것만 같아서 나는 곧장 택시를 불렀다. 우버가 볼트보다 10유로 더 비싸다. 그래서 볼트를 불러서 5분간 기다렸다. 마담 리? 라고 묻는 운전자에게 위, 그렇다고 대답하고 뒷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유난히 추워서 11월 중순에 일찍 꺼낸 두껍고 긴 모직코트를 입고 있었던 터라, 마담이란 단어와 함께 맞물려 갑자기 꽤나 우아하고 근사한 삶을 사는 여성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단순한 내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기력을 조금 회복한 것 같아 희망이 자랐다. 


60분 거리를 택시를 타니 30분 만에 갈 수 있었다. 기사님은 30분 후에 도착한다고 말하고 음악을 원하냐고 물었다. 평점 좋은 기사님의 노하우란 이런 것이구나. 그의 사려 깊은 마음씨에 웃음으로 답을 하고 헤드폰을 꼈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기 딱 좋은 컨디션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열어 글을 썼다. 내가 지금 자수학교에 가고 있으니까, 자수. 손으로 만드는 것. 그토록 싫고 외면하고 싶어했던 주제를 살짝 마주해보기로 한다. 공예. 그놈의 공예. 애증의 공예. 너를 저세상의 지하감옥에서 잠시 수면으로 꺼내준다. 


파리의 에꼴르사주 





#2 

온갖 공예란 공예를 해봤다. 손을 가만히 있지 못해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최대한 움직였다. 도자기도 만들고 도자기에 그림도 그리고 리본공예도 십자수도 비즈도 . 뜨개질도 . 하다못해 그림도. 그림 도구의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 가 . 붓. 연필. 색연필. 마카. 오일파스텔. 유화. 수채화. 각종 물감. 레진. 레진에 넣을 재료. 폰케이스 꾸미기. 가방 만들기. 천 염색. 옷 만들기. 재봉. 프랑스 자수. 동양 자수. 


너무 궁금해. 만들고 싶고 손에 넣고 싶다. 내 손에 뭐라도 주어지면 좋겠어. 그렇게 만들고 만드는데. 그 움직임이 주는 기쁨이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 큰 흠이었다. 


재료가 주는 기쁨과 설레임. 가능성. 뭐든 될 수 있을 거 같은 생각. 내가 배워야 할 기초들이 있어서 얼마정도의 시간동안은 정해진 것이 있어 따라가면 될 것이고. 그 이후에 활용을 해야할 때. 그때 나는 거의 그만둔다. 생각보다 내가 디자인적으로 내것을 욕심내는 것도 없거니와 내가 다른 것을 따라서 카피하는 건 의미가 있지만, 그 기술과 가까워 진다는 점으로 , 근데 내가 스스로 도안을 짤 때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 이상,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 의미가 무엇이길래. 의미를 그토록 찾고 찾는다. 이 선, 내가 여기에서 이 선을 굳이 이렇게 그려야 하는 이유. 곡선이 되는 이유. 강약을 조절하는 이유. 직선이 아닌 이유. 선 안의 면적의 넓이는 얼마나. 그 안은 무슨 색으로 채우는지. 그 색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의미는 감각을 이기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결과적으로 결과가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 그 덩어리 하나가 . 어떤 느낌을 조화롭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작업을 할 때. 내 감정은 낄 자리가 없다. 외면 당한다. 그건 글에나 녹여낼 것. 작업은 그림, 이미지는 그거 그대로 말을 하기 때문에. 내 감정이 어떤 요소로 치환이 되어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야 하는데 나는, 말로 언어로 단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 색을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색과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거다. 색은 나를 안개 속에 있는 내게 닦이지 않은 뿌연 안경을 끼우는 일. 나의 아픔을 키우는 일. 


그림, 작업을 할 때의 기쁨은 머리를 비울 수 있다는 것. 뇌를 거치지 않는다. 자동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상, 정보를 읽고 그것을 반영해 따라하면 된다. 그렇게 반복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시간을 채우고 나는 그 시간동안 안 슬프고 안 아프고. 글은 쓰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작업은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다. 다만 창작의 영역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걸 대학원까지 마치고 나서 깨닫는다 내가. 이제야. 


대학원을 중간에 그만뒀을 때. 아니 그만 둔 것도 아니지. 논문을 안 썼기에 수료한 것인데. 그게 실패한 것이 아닌데. 망망대해 같은 곳에서 굳이 애써가면서 머리를 쥐어짜 내것을 만들 필요가 없는데. 남이 만든 예쁜 것이 마음에 든다면 얼마도 따라해도 되는 건데. 그게 기쁨이지. 기쁨은 내가 내 손으로 아름다운 것의 창조해내는 과정에 한 몫한다는 것인데. 그게 다인데 말이다. 창조성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이느라 그토록 무력했다. 사실 그럴 필요 없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전부. 다. 


재료상에 갔다. 주인이 묻지도 않았지만 한국에서 종종 자수를 혼자 뒀고 모든 재료가 집에 있지만 프랑스에 가져오지 않아서 다시 사는 것이라고 굳이굳이 설명해댔다. 힘을 빼서 말했다. 힘이 없어서. 그랬더니 발음이 좋아보였나보다. 나는 자수 얘기를 했는데 그녀는 내가 프랑스어를 잘 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재료를 사기 위해서 둘러봤다. 동대문 부자재 상가를 떠올리게 하는 곳. 수많은 가게 중의 한 가게만한 장소의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잘게 잘려 소분된 원단들과 소담하게 쌓여있는 부자재들. 자리값으로 동대문보다 3배 이상 받는 파리의 가게에서 굳이 이걸 사야만 하는 이유를 되묻는다. 나는 분명 대학원을 나올 때 두번 다시 손으로 만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말이다. 한국에 가서 족히 300만원 어치 이상 샀을 재료를 단 돈 15만원에 전부 처분해버리고 오면서 전혀 씁쓸하지도 않고 지겹고 나를 괴롭힌 과거와 드디어 이별했다고 기뻐했던 내가. 결국에 여기에 와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재료를 사고 있는 꼴이라니. 그런 내가 안쓰럽고 기특했다. 절대 지지 않을 사람이다. 나는. 나는 나한테 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나의 투쟁이 이토록 괴로운 거다. 끝을 아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난동을 부리는 통제되지 않는 반항아를 꿈꾸는 작은 나. 




자수상점에서

#3 

아무것도 안 할 때 , 우울하고 무조건적으로 슬플 때 나는 주로 동영상을 보고 색을 본다. 색연필. 오일파스텔. 물감. 한데 모여있는 색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재료의 물성은 달라도 된다. 그냥 그 다른 텍스쳐의 질감을 바탕으로한 무성하게 많은 색이 좋다. 색들은 나의 속을 간질이고 눈가에 매달려 억지로 웃을 수 밖에 없도록 온 무게를 싣는다. 사과가 떠올라. 복숭아도. 복숭아하면 아기 엉덩이가 생각나고. 뽀송해. 그러면 갓 세탁해서 나온 면 100의 흰 손수건에서 나는 섬유유연제가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상상하고. 내 머리 속에서 색과 색은 섞이고 새로운 형상을 낳아 사물이 된다. 그 사물 안에 파묻혀서  나는 상상한다. 그렇게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상력의 총체인 색상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팔레트가 좋다. 색이 일렬로 짜여있다. 붓에 물을 살짝 묻혀서 세번정도 물감 위에서 문지르면 색이 녹아 붓 사이로 스며든다. 그래서 흰 종이 위에 톡하고 얹히면 힘의 강도에 따라 명도 차이를 보이는 점이 놓인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면적이 되고 그것이 형태를 형성한다. 그렇게 그 속에서 언어가 숨어버린 이야기가 재잘댄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어떤 도안으로 어떤 자수를 놓을 것인지, 어떤 형태의 장신구를 만들 것인지 따위의 겉형태는 일절 중요하지 않다. 형태를 이루기 위해 바탕이 되는 색을 흔적과 축적. 그것을 낳는 가능성을 간직한 팔레트. 자수실들의 샘플러. 오일파스텔 박스. 그래서 도구. 나는 그래서 내가 화구상이 될까 싶다. 재료상을 만들고 싶다. 재료상. 재료상을 운영하면 나는 기쁠까? 가능성으로 점철된 공간 안에서 그 가능성을 손에 넣자고 눈을 반짝이며 들어오는 이들을 거울삼아 나는 마구잡이로 색이 섞여 결국 탁해져버린 검은색이 되어버릴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오늘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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