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둥새 Jul 20. 2023

자세히, 오래 보기

책 [책은 도끼다, 저자 박웅현] -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퇴근길. 축 쳐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지하철에 탑승했다. 역시나 앉지는 못했다. 멀뚱멀뚱 서있기는 싫고,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어서 그냥 스마트폰을 뒤적뒤적거렸다. 안 읽은 메시지 하나 없는 모바일 메신저를 굳이 켰다. 역시나 메시지는 없었고, 켠 김에 친구들 목록이나 쓱 훑었다. 스크롤을 내리는데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회사 김 부장 님의 프로필이었다. 상태 메시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글이 적혀있었는데,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워낙 유명한 시고, 여기저기서 많이 본 시인지라 그냥 지나칠법했다. 평소의 나였으면 좋은 시 적어두셨네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과거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책을 읽고 충격받았던 당시의 내 감정이 떠올랐다.

책을 소개하는 책이었다. 책을 소개하고, 작가의 느낌을 말해주고, 작가의 통찰을 공유하는 책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 작가가 책을 읽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아,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구나. 이래서 내가 책을 백날 읽어도 별로 쓸모가 없었구나.



책 [책은 도끼다, 저자 박웅현] -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책 [자전거 여행, 저자 김훈] - "꽃 피는 해안선"



과거에 나는 자기 계발서를 주로 읽었다. 자기 계발을 통해 빨리,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책을 빨리 읽어서 나를 계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 어떤 책이든 빨리빨리 읽었다.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고 현타가 찾아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조급함을 벗어버린 시점에 읽은 책이 '책은 도끼다'였다.

박웅현 작가는 말한다.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라고. 한 문장 한 문장 깊이 있게 읽어줘야 한다고. 그러면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추천한다. '자전거 여행'의 목차에서 프롤로그 바로 다음에 오는 가장 앞장 '꽃 피는 해안선'. 그중에서도 가장 앞부분 꽃들에 대한 묘사 얘기를 해준다. 그 몇 페이지 되지 않는 분량만 가지고도 김훈이라는 작가에 대해 끊임없이 감탄한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안개꽃이나 많은 꽃들이 군집으로서 아름다움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동백꽃은 전부 다 개별자들로 존재하죠. 이 생각을 저는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걸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봤더니 진짜 진달래나 개나리 같은 꽃들은 개별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단체로 있죠. 하지만 김훈의 말처럼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 있으면서도 군집으로의 현란함을 이루지 않아요. 


박웅현 작가는 동백꽃을 이토록 자세히 들여다보고 군집과 개별자라는 표현을 생각해 낸 김훈 작가에게 감탄한다. 나는 문장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 문장을 만들어낸 작가에게 감탄하는 작가에게 감탄했다. 아,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야 하는구나.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정말 매화나 벚꽃 떨어질 때 보면 꽃눈이 내리는 것 같습니다. 다 떨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가슴이 아플 정도지요. 그래서 김훈은 꽃잎이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화의 죽음을 풍장風葬으로 표현합니다. 바람 속에서 죽어간다는 거죠. 


구름처럼 보이던 매화가 꽃눈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처럼 김훈 작가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박웅현 작가 역시 이 김훈 작가의 표현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려 한다. 바쁜 삶을 미뤄두고 천천히 보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 자체가 특징 없이 산에 피는 꽃이라 각인되지 않은 것도 이유일 겁니다. 산수유는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원색적이고 강렬한 색감이 아니라, 흐릿하고 약한 느낌입니다. 물론 김훈의 산수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이 정도의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
빛깔 자체가 흐릿한 산수유는 그냥 지나치면 모르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정말 빛이 그림자 속에 모여 들끓는 것 같아요. 책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봄에는 산수유를 꼭 한번 들여다보고 빛이 들끓는 모습을 발견해보세요. 
...
이 구절을 읽고 어떻게 산수유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책을 왜 읽느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집니다. 그전에는 산수유를 보고도 뭐 저렇게 특징 없는 꽃이 다 있어 했는데 이제는 나무가 꾸는 아련한 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박웅현 작가는 김훈 작가의 글을 읽은 후부터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면 달라진다고 한다.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 당시의 나는 책을 읽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마 김훈 작가의 글을 읽었다 해도 나는 나무가 꾸는 아련한 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급함에 휩싸인 나는 자세히, 오래 들여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목련은 등불 켜듯 피어나고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떨어집니다. 


김훈 작가의 글은 박웅현 작가의 말대로 목련이 그야말로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떨어지는 장면의 표현이다. 박웅현 작가는 김훈 작가의 글에 담긴 밀도 때문에 천천히 두 번을 읽었고,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문장을 음미하며 깊이 읽었음에도 놓친 것이 있어 잡아내겠다고 한다.


'책은 도끼다'를 읽고 한동안 글을 꼼꼼히 읽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한동안' 노력을 했던 것이고, 그렇게 노력으로 이어져 온 지금 스타일 역시 책 한 권을 꼼꼼히 읽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박웅현 작가는 다독보다 좋은 책 한 권을 깊이 읽는 것을 추천했지만, 어찌 되었든 책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으면 잘된 게 아닐까 싶다. 
개권유익(開卷有益), 반부논어(半部論語)라 하지 않나.

중국 송나라 제2대 황제 태종은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황제의 건강을 염려한 신하들이 책 읽는 것을 만류하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가? 책을 펼치면 유익한 점이 많다. 나는 전혀 피로하지 않다." - 개권유익(開卷有益)

송나라 개국의 주역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조보를 시기하던 신하가 독서광인 태종에게 고했다. "조보는 여태껏 읽어본 책이 논어 한 편뿐입니다. 이런 자에게 중책을 맡기기에는 불안함이 큽니다."
놀란 태종이 조보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조보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과거 논어 반 권으로 태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시는 것을 보필했습니다. 지금은 논어의 나머지 반 권으로 폐하를 도와 천하의 태평을 일구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 반부논어(半部論語)

책을 많이 읽어도 유익하고, 좋은 책 한 권을 정독하는 것도 유익하다. 다만 그 목적이 다를 뿐이다. 정보 획득이 목적인 독서를 주로 하는 나는 다독이 도움이 되었고, 울림을 얻기 위한 독서를 원했던 박웅현 작가는 좋은 책을 깊이 읽어야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목적이 다르다 해도 깊이 읽는 독서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어려울 뿐이다. 자세히, 오래 보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마음속 여유가 별로 없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모처럼 여유를 한껏 품고 좋은 책 한 권을 골라 자세히, 오래 볼 시간을 한 번 마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훈은 말합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그 가지런한 사실을 통해 감동을 전하는 김훈의 문장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김훈이 발견해낸 것들을 여러분도 발견하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으십니까? 제가 소개하는 김훈은 여기까지입니다. 모쪼록 김훈을 통해서 혹은 삶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어 새로운 것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사를 남긴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