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직장의 의미

by 검둥새

"아, 출근 더럽게 하기 싫다."
사회 초년생 시절, 열정 버프가 끝난 시점부터는 매일같이 하던 생각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는 어떨까. 여전하다. 출근이 이미 자연법칙화되어 몸은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저런 생각이 돌아가고 있다. 나는 더럽게 하기 싫은 출근을 강산도 변할 시간 동안 꾸준히 하고 있다.

이상하다. 나는 그렇게도 하기 싫은 출근을 왜 이렇게 꾸준히 하고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돈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 통장에 꽂히는 돈을 보면 그래도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는 수준의 '하기 싫음' 정도이기 때문에 지겹고, 힘들고, 어려워도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나 자신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돈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보인다. 일을 할 때 굳이 열심히 하고, 엄청나게 몰입하고, 안 풀리면 분노하는 나 자신이 종종 보인다. 돈만 받으면 된다는 마인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직장에, 동료들에게, 내 업무에 알게 모르게 애증이 있다는 것 아닐까 싶다.

나를 힘들게 하고, 귀찮게 하고, 열받게 하는 그것들에게 증오만 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은연중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좀 힘들어지더라도 이 직장이 나아가야 할 비전이고, 매출을 올리는 길이라면 일단 납득하고 감수하려 한다. 동료들에게는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내 업무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무, 책임감, 사회성 등의 요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있으나, 이러한 요소 모두 어느 정도 애정이 있기 때문에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신입사원으로 첫 출근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출근하는 곳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왜 이걸 계속해야 하나 싶고, 도망치고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빨리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질 때가 있다.

어떤 업무는 나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며 묘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성취감, 예상치 못한 협업에서 오는 의외의 연대감, 그리고 내가 만든 무언가가 실제로 세상에 작게나마 영향을 준다는 감각. 이 모든 것이 직장을 단순한 '노동의 공간'으로 환원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애정도 있고, 증오도 있으며, 단순하지 않은 어떤 복잡한 공간. 이것을 뭐라 해야 할까.

우리는 보통 감정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좋거나 싫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마치 스위치처럼 켜지거나 꺼지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출근이 싫으면서도 일에 몰입하고, 동료가 짜증 나면서도 걱정이 되고, 회사 시스템이 답답하면서도 그 안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나 자신.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을 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감정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다면, 출근에 대한 애증 같은 건 있을 리 없다. 애초에 출근할 곳도 없고, 함께 일할 동료도 없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혼자 있으면 편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왜 계속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까. 가족, 친구, 동료... 때로는 갈등하고 상처 주고받으면서도 말이다. 그냥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자급자족하며 살면 이런 복잡한 감정들로 괴로워할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삶을 상상해 보면 뭔가 허전하다. 아무리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고 해도, 계속 혼자만 있으면 답답하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고,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어진다. 내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진다.

어쩌면 나에게는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라면 지금처럼 복잡하게 살 필요는 없을 텐데.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하고 조용히 살면 될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엮이고 얽히며 살아가는 걸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고민을 했던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인간을 '폴리스를 사는 존재'라고 했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말하는데,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공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공동체 바깥에 있는 자는 신이거나 짐승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좀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완전무결해서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반대로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복잡한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완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본능만으로 살 수도 없는 애매한 존재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것은 주로 위험을 알리거나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다르다. 우리는 "이것이 옳다", "저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판단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내가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정말로 옳은 것일까? 나 혼자만의 기준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른 관점을 들어보고, 때로는 격렬하게 토론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래, 이것이 우리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이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누구에게 어떤 업무를 맡길 것인가" 같은 판단들은 혼자서는 내릴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고, 때로는 의견이 충돌하면서도 결국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과정 자체가 인간다운 삶이라고 본 것이다. 갈등하고 토론하고 합의해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폴리스는 직장이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으며 이 작은 도시국가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말하고, 누군가를 듣고, 어떤 판단을 하고, 때로는 어떤 기준에 침묵한다. 이 공간은 단지 생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매일 실현되는 장소다.

직장은 돈을 버는 공간인 동시에, 내가 성장하고 관계 맺고 존재 방식을 다듬어가는 장소다. 단순히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곳’이다. 내가 말하고, 듣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일들이 매일 벌어진다. 그래서 이곳은 내가 ‘살아 있기만 한 존재’로 머물 수 없는 공간이다.

나는 직장에서 마주치는 일상의 순간들을 더 이상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회의에서의 침묵, 회식자리의 미묘한 시선, 후배에게 전해진 나의 말투, 팀장이 회의 끝에 남긴 한마디. 이런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 속에서 나는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내 정체성과 판단, 언어와 태도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이다. 나는 왜 이런 말투를 쓰는가? 나는 왜 어떤 말을 듣고 불편해지는가? 나는 왜 가끔 동료와의 대화에서 방향을 잃는가?

직장이란, 결국 내가 누구인지 자꾸 묻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순간들을 다시 꺼내어 살펴보고자 한다. 단순히 직장인의 고충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직장이라는 구조 속에서 마주하는 말과 정체성, 성장과 배움에 대해 말하려 한다.